뤼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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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량시(중국어: 吕梁市 lǚ liáng shì)는 중국 산시성 (산서성)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 [1][2][3][4]
목차
개요
뤼량시의 면적은 21,143㎢이며 인구는 3,398,431명(2020년)이다. 동쪽으로 타이위안시(太原市, 태원시), 진중시(晋中市)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린펀시(临汾市, 임분시), 서쪽은 황하(黃河)를 경계로 산시성 (섬서성)과 마주하고 있다. 뤼량(吕梁, 여양)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로 춘추(春秋)시에는 진(晋), 전국시기에는 조(赵)에 속하였고 한대에는 서하군(西河郡)이 설치되었다. 여황제 무측천(武则天)이 이 지역 출신이다. 뤼량시 자오청현은 화국봉의 고향이다.
시인민정부는 리스구(离石区, 리석구)에 소재하며 행정구획은 리스구(离石区, 리석구)의 1개 시할구, 샤오이시(孝义市, 효의시), 펀양시(汾阳市, 분양시)의 2개 현급시와 원수이현(文水县, 문수현), 중양현(中阳县), 싱현(兴县, 흥현), 린현(临县, 임현), 팡산현(方山县, 방산현), 류린현(柳林县, 유림현), 란현(岚县, 람현), 자오커우현(交口县, 교구현), 자오청현(交城县, 교성현), 스러우현(石楼县, 석루현)의 10개 현(县)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70% 이상이 구릉과 계곡 지역이다.[5] [6]
자연환경
뤼량시는 성도인 타이위안시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도심인 리스구는 동촨강과 바이청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하며, 폭이 2km가 되지 않은 협곡을 따라 길게 동/북/서 방향으로 시가지가 늘어서있다. 서쪽의 위린시와 함께 메마른 황토고원 지역을 이룬다.
뤼량산과 황토고원이 있어 계곡과 산이 많은 지형이다. 기후는 반건조성 대륙성 계절풍 기후이며, 4계절이 뚜렷하다. 비가 적고 바람이 많다. 연평균 강수량은 502.5mm이다. 주요 민족은 한족이다.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대표적인 곳으로 베이우당산[北武當山]이 있다. 이 산의 최고봉은 1,983m이며, 산 곳곳에 절벽이 있는데, 1,400개가 넘는 돌계단을 이용하여 산에 오를 수 있다.
역사
춘추시대에 뤼량을 지배한 진은 이곳에 굴읍, 평릉읍, 중양읍, 과연현 등을 설치하고 있던 것이 가장 오래된 행정 구역의 기록이다. 전국시대, 진이 한, 조, 위로 분열하면서 뤼량은 조나라의 영역이 되었고 태원군이 설치되어 대릉, 자씨 등의 현이 설치되었다.
태원군의 교정 구분은 한대까지 사용되었지만 기원전 125년에 서하군이 분할되면서 뤼량도 이곳의 관할이 되었다. 수나라 때 이석군, 서하군, 태원군, 누번군, 용천군으로 분할된 뤼량은 당대에 주가 설치되면서 석주, 분주, 습주, 남주, 병주 (나중에 태원부로 개칭)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역대 왕조의 행정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뤼량이 주변의 행정 구역에 포함되는 상황은 중화민국 때까지 이어졌다.
뤼량이 단일 행정 구역을 이룬 것은 1971년 뤼량 지구의 설치가 최초이다. 2004년 7월에 지급시로 승격해 뤼량 시가 성립되었다.
산업
산시성 석탄 전체 매장량의 15.26%인 404억 톤이 매장되어있는 상당히 거대한 석탄산지이다. 그래서 석탄이 시의 경제를 휘어잡는데 대표적 예로, 2010년 석탄 가격의 상승으로 21%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2014년에는 가격 하락으로 역성장하였으며, 2015년에는 시장이 부패 혐의로 해임되었다. 도시 동북쪽의 북무당산이 주요 관광지이고, 시내에는 한화 상석 박물관이 있다.
교통
인촨-타이위안간 철도가 지나며, 시가지 서북쪽 외곽에 뤼량 다우 공항(吕梁大武机场)이 2014년 개항하였다. 2021년 가을의 홍수로 수해를 입어 중국의 석탄 공급이 차질을 빚고 있다.
출신 인물
무측천
당(唐) 고종(高宗)의 측천순성황후(则天顺圣皇后)로 무후(武后), 무황(武皇), 천후(天后), 측천후(则天后), 측천제(则天帝), 측천여제(则天女帝), 측천여황(则天女皇) 등으로 칭해지며 성모신황(圣母神皇), 성신황제(圣神皇帝), 측천대성황제(则天大圣皇帝) 등의 폐지된 존호(尊号)가 있다. 측천(则天)은 고종 이치(李治)의 황후(皇后, 655~683)였으며, 당(唐) 제1위 황태후(唐朝第一位皇太后 : 683~690)가 되었고 무주황제(武周皇帝 : 690~705)로 제위에 오른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및 여성 태상황(太上皇 : 705)이다.
무측천의 이름은 미상(未詳)이며 14세 재인(才人)으로 입궁하여 당태종(唐太宗)이 미모를 보고 미(媚)라는 이름을 내렸기 때문에 무미낭(武媚娘)으로 불렸으며 황제로 즉위 후 자신의 이름을 조(曌, Zhào)로 개명하였다. 측천은 당(唐)의 개국공신이며 진상(晋商)으로 거부인 무사확(武士彟)과 모친 양씨(杨氏) 사이의 차녀로 어릴 때부터 대담하였고, 말 타기와 글 읽기를 좋아하는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태종(太宗) 사후에 감업사(感业寺)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궁중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환속 후 재 입궁하여 당 고종 이치(李治)의 후궁인 소의(昭仪)가 되었다.
655년 31세에 고종의 황후로 책봉되고 이후 천후(天后)로 봉해졌으며 고종과 함께 조정(朝政)에 참여하여 이성(二聖)으로 불리며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측천은 고종의 외숙부이며 승상인 장손무기(长孙无忌)를 자살하게 하고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으나 이홍이 총명하고 겸손하며 신료들 사이에 신임이 두텁자 위기감을 느끼고 675년 독약을 내려 죽였고,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이현(李賢) 총명하자 이현(李賢)에게 여색을 밝힌다고 모함을 하여 680년에 폐출시키고, 684년에 파주(巴州)에 자객을 보내 살해하였다.
이어 유약하고 순종형인 셋째 아들 이현(李显)을 황태자로 삼아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显)을 황제로 옹립하여 중종(中宗)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의 처인 위후(韦后)와 그 부친 위현정(韦玄貞)이 정사를 농단한다고 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시키고 막내아들인 이단(李旦)을 황제로 옹립하여 예종(睿宗)으로 즉위시켰다. 690년 측천은 예종을 폐위하고 690년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칭하며 뤄양(洛阳)을 신도(神都), 국호를 주(周)로 개명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으며 역사에서는 이를 무주(武周)라고 칭하고 있다.
측천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종친과 구 대신들을 축출하고 국법을 강화하였으며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여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등용시켰으며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하여 그녀의 치세가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렸으며 이후 현종(玄宗) 이융기의 개원의 치(开元之治)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측천은 조카 무승사(武承嗣, ?~698)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狄仁傑) 등의 여러 재상과 신료들의 반감이 크자 699년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李显)을 다시 태자에 봉했고 6년 뒤인 705년 재상 장간지(张柬之, 625~706)가 군사들을 이끌고 측천이 와병 중인 전각으로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자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고 중종 이현(李显)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며 측천은 최초의 여성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그 해 11월 측천은 중종(中宗)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李旦),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 무씨 일가를 부탁하며 사후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去帝号, 称则天大聖皇后)을 남기고 705년 11월 2일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长安)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고종과 함께 지금의 산시성(陕西省, 섬서성) 셴양시(咸阳市, 함양시) 건현(乾县)의 양산(梁山) 건릉(乾陵)에 합장되었다.[7]
화국봉
화궈펑(중국어 간체자: 华国锋, 정체자: 華國鋒, 병음: Huà Guófēng, 한자음: 화국봉, 1921년 2월 16일 ~ 2008년 8월 20일)은 산시성(山西省) 뤼량시 자오청현 출신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원래 본명은 쑤주(중국어 간체자: 苏铸, 정체자: 蘇鑄, 병음: Sū Zhù, 한자음: 소주)이나 항일 운동 시절에 중화구국선봉대(中華救國先鋒隊)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976년 2월 2일부터 1980년 9월 10일까지 국무원 총리를 지낸 그는 1976년 10월 7일부터 1981년 6월 28일까지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을 잠시 겸직하였으며 후임 중공 국무원 총리 직은 중공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12월 22일까지 2년간 수행하였다.[8]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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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뤼량시〉, 《위키백과》
- 〈뤼량시〉, 《나무위키》
- 〈산시성(산서성)〉, 《위키백과》
- 〈산시성(산서성)〉, 《나무위키》
- 〈두산백과: 뤼량〉,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뤼량시〉,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무측천〉, 《네이버 지식백과》
- 〈화궈펑〉, 《위키백과》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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