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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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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구로(九老)란 서울특별시의 하위 행정구역 구로구 지역을 말한다.[1] 국가산업단지인 구로디지털단지가 있고, 직장인들의 출퇴근을 위해 서울시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설치되어 있다.

개요[편집]

구로 지형은 안양천과 도림천에 의해 형성된 범람원의 저평한 지역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50m 이하의 낮은 고도를 이루는 충적층이다. 서부는 김포 준평원(金浦準平原)이 전개되어 150m 미만의 낮은 파랑상 구릉이 나타난다. 구로구와 양천구 및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와룡산(臥龍山, 114m), 항동과 천왕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굴봉산(窟峰山, 145.6m), 오류동과 개봉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개웅산(開雄山, 125m)이 있다. 굴봉산의 오류동 방면에는 천왕공원을, 개웅산의 오류동 일대에는 오류공원을, 굴봉산의 항동 일대에는 항동공원을 각각 지정하여 산책로와 함께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 되었다.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의 630고지 서쪽 계곡에서 발원한 목감천이 구로구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흘러 안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오류동에서 흘러나오는 오류천이 목감천에 합류되나 현재는 복개되어 있다.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0.4°C, 8월 평균기온은 26.5°C이며, 연 강수량은 1,212.3㎜ 내외이다.[2]

역사[편집]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 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잉벌노현(仍伐奴縣)주), 율목군(栗木郡)주), 주부토군(主夫吐郡)주)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 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신문 왕대에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과 장구현(獐口縣)으로, 주부토군은 장제군(長堤郡)으로 바뀌어 구로구의 안양천 동쪽 지역인 곡양현은 율진군(栗津郡)에, 서쪽 지역은 장제군에 각각 소속되었다. 후삼국시대 ‘구로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 강씨(衿州 姜氏 혹은 衿川 姜氏) 세력과 풍덕 유씨(豊德 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 강씨는 금천구와 구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 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고려 건국 후 구로구 지역은 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바뀌었다.

995년(성종) 고려의 행정구역을 5도로 나누면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고, 금주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경기도의 수주현(樹州縣)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도를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옮기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1394년(태조) 먼저 경기도를 좌·우도로,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 교주도를 강원도로, 서해도를 풍해도로 바꾸었는데 이때 구로구는 경기좌도 과천군(果川郡)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에는 금주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명하고 현감(縣監)이 두어졌다. 이후 1795년(정조)에는 금천현 지명을 시흥현(始興縣)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안양천 서쪽 지역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소속되어 있는 수탄 면(水呑面)이었다. 그 뒤 1895년(고종)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수탄면 일대는 부평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1914년 지방제도를 12부 317군에서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혹은 통합하였다. 이때 경기도 시흥군 북면과 동면, 그리고 계남면으로 불렸으며, 1936년 시흥군 북면의 일부 지역은 경성부로 편입해 영등포 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당시 북면 지역은 도림리와 구로리, 동면은 독산리·가리봉리·시흥리, 계남면은 고착리·오류리·개봉리·궁리·온수리·천왕리·항리 일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시흥군과 부천군에서 분할, 소속되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이때 서울시의 영역을 대규모로 확대하면서 10개 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구로구의 동부 지역인 가산과 시흥리 일대는 영등포구 관악 출장소 관할에 속하였고, 서부 지역은 오류 출장소 관할에 들어갔다. 관악 출장소에서는 독산동·시흥동·가리봉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고, 오류출장소에서는 고척동·개봉동·오류동·궁동·온수동·천왕동·항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80년 4월 1일 구로동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전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등 남부지역을 나누어 구로구를 신설하였다. 당시 구로구에 편입된 지역은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궁동, 천왕동, 항동과 신도림동 일부 지역이었다. 1995년에는 금천구가 분구되어 독산동, 시흥동, 가리봉동 일부 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구로구에는 10개의 법정동을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은 풍부한 노동력과 물줄기, 그리고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1970년대 말 공업단지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많은 공장이 유치되었으나 인구가 밀집되고 공해가 발생됨에 따라 공업단지를 이전하게 되었고, 현재는 기계 공구상가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산업구조 재편으로 최대의 첨단 벤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2]

유물 유적[편집]

이 지역은 예부터 농사를 짓던 지역으로 남아 있는 문화재는 많지 않다. 고척동에 있는 여계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과 오류동에 있는 류순정·류홍부자 묘역(서울특별시 기념물, 2004년 지정)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궁동에 위치한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과 천왕골과 항동의 경계에 있는 노숭(盧崇)의 묘 등이 있다. 건물로는 오류 2동의 주막거리 객사, 궁동에 있는 현민 유진오(兪鎭午) 별장 등이 있으며, 관방유적으로는 개웅산의 봉수대 터 등이 있다. 또한 고척동 오류중학교 뒤에 있는 고인돌 등도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이다.[2]

류홍부자 묘역  
정선옹주묘역  

민속[편집]

지역만의 특별한 세시풍속은 없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세시풍속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 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정월대보름에는 노인정과 아파트 등을 중심으로 척사대회와 지신밟기, 농악놀이 등이 벌어지며 쥐불놀이 등은 도심지라는 점 때문에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 지역은 서울시의 다른 곳과 달리 예부터 시골이었기 때문에 마을 도당제(都堂祭)가 성행하였다. 구로 1동 도당제, 수궁골 도당제, 항골 산신제, 오류동 도당제, 개봉동 도당제, 천왕골 도당굿, 고척동 도당제 등이 있었다. 특히 수궁골 도당제는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를 올리고 농악과 풍물패들은 온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와 안택굿을 벌였다. 항골 산신제도 정월 대보름에 동신제를 올려 안녕과 축복을 구하고 10월 상달에는 지난 1년간의 농사와 함께 정월에 빌었던 것을 성취했음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농공제와 성주제 두 가지로 나누어 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동신제는 하지 않고 10월의 감사제만 지내며 마을 사람 모두의 축제로 치러지고 있다.[2]

산업[편집]

토지의 15.7%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5.5%이다. 대지 40.1%, 공장 용지 2.9%, 도로 13.7%, 철도용지 4.6%로 전체 토지에서 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18.3%, 건설업 7.2%, 도소매업이 20.2%, 숙박 및 음식업이 7.8%, 운수업 6.6%, 금융 및 보험업 2.5%, 부동산 및 임대업 3.0%, 사업서비스업 14.8%, 교육서비스업이 5.3%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전체 사업체 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3%라는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3개 업체이다.[2]

관련 기사[편집]

가산 지구단위계획구역(가산동 140-1일대)은 남부 순환로와 금천구 국가산업단지인 G밸리 1, 2단지와 인접한 지역이다. 이번 심의는 개정된 법 제도 및 구로 고가차도 철거(’19.4.), 국가산업단지 지구단위계획 지정(’21.11.) 등 지역 여건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추진됐다. 주요 내용으로는 먼저 가리봉 재정비촉진지구에서 해제된 제2종 일반주거지역을 가산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편입함으로써 계획적 관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 건축 한계선을 기존보다 0.5~2m만큼 확장, 도로 폭을 확대해 구로 고가차도 철거로 인해 늘어난 교통량에 대응, 이면 도로(골목길 등)의 열악한 보행환경 개선을 도모했다. 이와 함께 G밸리를 지원하는 도시서비스 기능이 강화될 수 있도록 상업지역에 대한 과도한 불허 용도를 완화, 권장용도 인센티브를 개선했다. 업무시설, 도서관, 병원 등 주민시설을 권장 용도로 지정하고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저층부에는 음식점, 서점 등을 권장 용도로 지정해 생활 가로 활성화를 유도했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구로〉, 《위키백과》
  2. 2.0 2.1 2.2 2.3 2.4 구로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박종일 기자, 〈금천구, 가산 지구단위계획 재정비 지역 활성화와 주거환경 개선〉, 《아시아경제》, 2022-11-29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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