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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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현(중국어: 彰化縣 zhāng huà xiàn)은 대만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현이다. [1][2]
개요
장화현의 면적은 1,074.3960㎢이며 인구는 1,277,176명(2015년)이다. 서쪽으로는 대만해협, 남쪽으로는 윈린현, 북쪽으로는 타이중시와 맞닿아 있다. 현 정부 소재지는 장화시이다. 원래 명칭은 반셴으로 고산족(高山族)의 집단 거주지이다. 대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현인 동시에 4번째로 면적이 작은 현이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다.
연 평균기온 22.7℃, 연강우량 1,500∼2,000㎜이다. 명승지로 타이완 12명승지 중의 하나인 바과산이 있다. 특히 이곳의 바과산 대불은 세계 제일의 불상이라 불린다. 그밖에 공자묘·싱셴서원·바오장사·구산사·톈호우궁 등이 유명하다.
원래는 대만 원주민인 바부자족이 살았으며 장화의 경우 원주민 언어 '뽀아소아'에서 나온 옛 이름인 반선(半線)이라 불렸다. 이후 청나라 때 현창황화(顯彰皇化)를 줄인 창화(彰化)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이 현에 마지린사(馬芝遴社) 혹은 루강(鹿港)[3]이란 이름의 진(鎭)이 있는데 원래 양항으로서 빠제(Pazeh) 족이 거주했던 지역이었고, 이 이남을 샤강(下港)이라 부르고 이 이북을 샹강(上港)이라 불렀다. 또한 인구 10만 명으로 청나라 시절에는 대만 제 2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일본 통치 시절 건설된 철도가 도시를 비껴가는 바람에 발전이 지체되어 지금은 현에서도 2등을 못하고 인구 10만 명이 채 안 된다.
대만에서 CHB 彰化銀行 이라는 간판을 단 은행을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는데 1905년 루강 지역 자본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다. 이름만 보면 지방은행 같지만 전통적인 3대 상업은행 중 한 곳이다. 1909년 대만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화청이 타이중청으로 합병되면서 1910년 타이중으로 본점을 옮긴 이래로 1990년대까지는 타이중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전국에 퍼져 있는 장화 은행은 과거 루강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몇 안 남은 흔적 중 하나다.
한국에도 진출해 있는 샌드위치 브랜드인 홍루이젠 본점이 이 곳에 있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팔리는 라면인 캉스푸 창업주의 고향이자 회사를 창립한 곳도 장화현이다.
한때는 인구가 130만 명을 넘어 직할시 승격 기준인 125만 명을 넘겼으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125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2021년에 신주시-신주현과 함께 직할시 승격을 노렸으나, 2022년에 내정부에서 직할시 승격을 반려했다.[3]
산업
연간 쌀 생산량이 가장 많아 '타이완의 쌀창고'라 불린다. 유채씨와 아마 생산량 역시 타이완에서 1위이며 파인애플 생산량은 2위이다. 주요 산업은 제당업·유가공업·제약·금속가공업이고 공예품·돗자리·장식물·깃털제품·완구 등을 만들어 수출한다.
행정구역
- 장화시(彰化市) - 장화시는 옛날에는 대만 원주민 평포족 바브사족의 취락인 '포아소아'가 있었고 대만어음으로 '半線'로 나타냈다. 제라현에 속하고 있었다. 후에 청조 정부가 현창황화(顕彰皇化)라는 의미를 담은 창화(彰化)로 개칭했다. 1684년, 복건 연해 거주민이 이곳으로 이주를 시작해, 1723년에는 제라현의 중부 100여리의 땅에 현을 설치할 때에 '창화현'으로 명명되었고 이것이 장화라는 지명의 첫 등장이 된다. 장화는 대륙에 가깝고 또 록항이 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현의 정치 문화, 상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차지했다. 1895년에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 후, 장화는 다이추 현 쇼카 청으로 개편되었고 그 후 다이추 청과 합병해 다이추 지청이 설치되었다. 1920년에는 쇼카 군이 설치되어 다시 장화가 행정구역명으로서 부활했다. 1933년에 쇼카 가·난카쿠 장·오타케 장의 합병에 의해 쇼카 시가 탄생했다. 전후, 장화 시는 성할시로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위안린시(員林市) - 위안린시은 장화 평원의 동부에 위치하고 난터우현과의 현 경계에 있는 바과 대지를 제외하고는 평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균 해발은 25m이다. 기후는 아열대 기후구에 속해 연평균 기온은 23℃이다. 위안린 지구의 개발은 청대의 강희 중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683년(강희 22년), 수사제독 시랑, 육군제독 만정이 대만을 공격, 정씨정권을 항복시키면서 위안린은 복건성 분순대하도 대만부 제라현에 속했다. 강희 연간에 복건성 장주부 평화현의 조아자, 광동성 가응주 진평현의 첨지도, 류연괴, 오삼림, 광동성 조주부 요평현의 황하구, 황실현, 노강직, 장응화, 장문창, 장강직, 광동성 혜주부 육풍현의 양문개, 양문거 형제 등이 이곳의 개척을 이끌었다. 1740년(건륭 5년), 연무보(燕霧保)가 설치되어 해대, 수수, 가석, 원림자, 진평, 내만, 백사갱의 7장을 관할하게 되었다. 연무보의 가(街)구가 원림자가(員林仔街)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에 의한 통치가 시작된 대만에서는 행정구의 개편이 계속되어, 1920년에는 다이추 주 인린 군 인린 가로 개편되었다. 전후에는 타이중 현 위안린 구 위안린 진이 되었고 1950년에 장화 현 위안린 진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베이더우진(北斗鎮) - 베이더우진은 장화 평원의 남단, 루강시(鹿港渓)의 남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톈중 진과 서쪽은 피터우 향과 남쪽은 시저우 향과 북쪽은 톈웨이 향과 접하고 있다. 베이터우 진의 옛 이름은 보두(寶斗)이고 독수계(濁水溪) 지류의 하항이 설치되어 대륙과 선박이 왕래하는 장화 지방 남부의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창하였다. 청대 말에 취락 주위를 죽책으로 둘러쌌고 책내에 염색공방이나 제당 공방이 설치되어 상징의 중심지로서도 발달해 '일부, 이록, 삼맹갑, 사보두(一府、二鹿、三艋舺、四寶斗)'라는 속담이 있듯이 해운 화물의 집산지로서 대만을 대표하는 번영을 자랑했다. 1806년, 장주계와 천주계 주민간의 격렬한 쟁의가 발생하면서 옛 시가지의 건축물 및 논밭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 때문에 1821년, 보두장에 가구가 재건되어 '보두'로 개칭되었다. 그 후 남부의 윈린 현애 두육문(斗六門)이 있던 것에서 '남두육성, 북두칠성(南斗六星、北斗七星)'과 연관되어 다시 '북두'로 개칭하였다.
- 얼린진(二林鎮) - 장화현의 진이다.
- 허메이진(和美鎮) - 장화현의 진이다.
- 루강진(鹿港鎮) - 루강진은 창화 평원 북서부의 루강시(鹿港渓)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타이완 해협에 접하고 동쪽은 슈수이 향과 남쪽은 루강시를 사이에 두고 푸싱 향과 북쪽은 판야거우(番雅溝)를 사이에 두고 셴시 향 및 허메이 진과 접하고 있다.
- 톈중진(田中鎮) - 톈중진은 주위가 논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전중앙(田中央)으로 불렸고 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식 지명인 다나카(田中)로 개칭되었다. 청대에는 대만부 창화현 태무동보 및 동라동보의 일부분에 속했고 건륭 말년부터 가경 연간에 걸쳐 복건성 장주부 및 천주부터 삼괴조사자륜 일대에 이주가 진행되어 소가곽(현재의 사룬 리)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도광 30년에 탁수계의 반란으로 옛 거리는 괴멸했고 주민은 전중앙으로 이주해 개척에 종사했다. 일본 통치 시대에는 다이추 현 쇼카 지청의 관할이 되었고 1900년에 11월에 이어 쇼카 다나카 지청, 1914년 다이추노 호쿠토 지청, 1920년에는 다이추 주 인린 군 다나카 장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에 가(街)로 승격했다. 전후에 톈중은 당초에 타이중 현의 귀속이 되었지만, 1950년에 장화 현에 귀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시후진(溪湖鎮) - 장화현의 중심에 위치하고 북쪽으로 푸옌 향, 서쪽으로 얼린 진, 남쪽으로 피터우 향, 톈웨이 향, 융징 향, 동쪽으로 푸신 향과 접한다.
- 다청향(大城鄉) - 장화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동쪽은 주탕 향, 서쪽은 타이완 해협, 남쪽은 줘수이시(濁水溪)의 하구로 윈린 현, 북쪽은 팡위안 향, 얼린 진과 접한다.
- 다춘향(大村鄉) - 장화현의 향이다.
- 얼수이향(二水鄉) - 장화현의 향이다.
- 펀위안향(芬園鄉) - 장화현의 향이다.
- 팡위안향(芳苑鄉) - 장화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서쪽은 대만해협에 접하며 줘수이시(濁水溪)의 선상지 상단에 위치해 지세는 낮고 평평하다.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하며 연 강수량은 1000~1200mm이다. 예전에는 번알(番挖)이라고 했고 1920년에 지세에 연관되어 일본어 지명인 스나야마(沙山庄)로 고쳐졌지만 전후에 번알과 음이 가까운 팡위안으로 개칭 되었다.
- 푸싱향(福興鄉) - 장화현의 서부에 위치하고 서쪽은 대만해협이다.
- 화탄향(花壇鄉) - 장화현의 향이다.
- 피터우향(埤頭鄉) - 장화현의 향이다.
- 푸신향(埔心鄉) - 장화현의 중부에 위치하고 지세는 평탄하며 장화 평원의 일부이다.
- 푸옌향(埔鹽鄉) - 장화현의 향이다.
- 선강향(伸港鄉) - 장화현의 북서단에 위치하고 서쪽은 대만해협, 남쪽은 셴시향이다.
- 서터우향(社頭鄉) - 장화현의 향이다.
- 톈웨이향(田尾鄉) - 장화현의 남부에 위치한 농촌으로 북쪽으로 융징 향, 남쪽으로 베이더우 진과 접한다.
- 셴시향(線西鄉) - 장화현 북서부에 위치하고 서쪽은 대만해협이며 장화 현의 향진 중 최소의 면적을 가진다.
- 슈수이향(秀水鄉) - 장화현의 중부에 위치하고 지세는 평탄하다.
- 시저우향(溪州鄉) - 장화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남쪽은 줘수이시(濁水溪)를 경계로 윈린 현과 접한다.
- 융징향(永靖鄉) - 장화현의 중부에 위치하고 지세는 평탄하다. 북쪽은 위안린 진, 푸신 향, 동쪽은 서터우 향, 서쪽은 시후 진, 남쪽은 톈웨이 향과 접한다.
- 주탕향(竹塘鄉) - 장화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줘수이시(濁水溪)를 경계로 윈린 현과 접하며 지세는 낮고 평탄하다.
대만해협
대만해협은 중국 대륙과 타이완섬 사이에 있는 해협. 폭은 180km 정도이며 가장 짧은 곳은 131km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 해협의 역사는 타이완섬의 역사와 함께 하기 마련이다. 타이완섬이 별개의 정치체인 시기에는 해협이 국경과 같은 역할로 주목을 받았고, 그렇지 않고 해협 건너편 중국 대륙과 같은 정치체인 경우에는 평범한 국내 해협일 뿐이었다. 근대에 타이완섬의 개괄적인 역사를 소개하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 동녕국으로 별개 역사를 지녔다가 청나라 시기에 중국에 포함되었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일본령이 되었다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화민국 소속이 되었다.
대만해협이 오늘날의 지정학을 지니게 된 것은 1949년 국부천대 이후부터이다. 중화민국(대만)이 타이완섬으로 정부를 옮기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들어서면서 양측을 가르는 실질적인 국경이 되었다. 그간의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밀려난 쪽은 머지 않아 흡수되곤 했지만, 세계적인 양대 대립 구도였던 냉전의 영향으로 거대한 대륙 vs 서방의 지원을 받는 작은 섬의 구도가 약 80년째 유지되고 있다.
분단 이후에도 중화민국 국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에 위치한 여러 섬들을 두고 산발적인 교전을 펼쳤으며(대만 해협 위기), 현재는 대부분의 섬을 중국이 실효지배 중이지만 인민해방군의 침공을 받지 않은 펑후 제도를 비롯해서 진먼현, 롄장현 등 대만이 영유하고 있는 섬들도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양안 간의 경제적,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곤 하지만, 여전히 제3차 세계 대전이 터질 주요 후보지들 중 하나로 긴장이 높다. 대만에서 민주진보당 등 대만 독립운동 세력이 집권할 때마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군함을 운항하거나 군사훈련을 벌이는 등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반대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항모 전단이나 전함을 대만해협으로 보내기도 하는 등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곳이다.[4]
지도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장화현〉, 《위키백과》
- 〈장화현〉, 《나무위키》
- 〈두산백과 : 장화현〉, 《네이버 지식백과》
- 〈대만해협〉, 《나무위키》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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