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
택견은 한국의 고유의 전통 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유연한 동작을 취하며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손질 ㆍ 발질을 하여 그 탄력으로 상대편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한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76호이다.[1]
개요[편집]
택견 또는 태껸은 한국의 전통의 민속놀이, 무술이다. 독특한 리듬으로 스텝을 밟으며 다리걸기, 발차기, 던지기 등으로 공격한다. 대한민국의 국가무형유산 제76호 택견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 지정을 받았기 때문에 체육관을 도장이 아니라 「전수관(傳修館)」이라고 부른다.
택견 협회에서 택견이란 발을 위주로 사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손보다는 발을 위주로 사용하는 전통 무술로 볼 수 있다.
근현대 들어 택견은 유도, 가라테 등 일본계 무술의 유입에 의해 쇠퇴했다. 한국 해방 이후에는 현대 태권도에 택견의 기술이 전승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택견은 전통을 되살리려는 많은 노력을 통하여, 2011년 11월 28일, 택견은 세계 무술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1998년 '국민생활체육전국택견연합회'의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 생활체육을 총괄하는 국민생활체육회에 정식 가맹되며 생활체육으로서 시민들에게 다가갔다. 2001년에는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이자 엘리트체육을 총괄하는 대한체육회 인정단체로 가입되었고, 용인대학교에 동양무예학과 택견전공이 신설되며 본격적인 엘리트체육으로서의 활성화가 시작됐다. 이후 2007년 대한체육회 정회원으로 승격되었으며, 2020년에는 한국 국내 최대규모의 스포츠축제인 '전국체육대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15년 대한민국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총괄하는 두 기관(대한체육회, 국민생활체육회)이 통합을 추진하며 '국민생활체육전국택견연합회'와 '대한택견연맹'이 통합한 '대한택견회'가 출범하여 전통스포츠로서 택견의 활성화 및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2]
역사[편집]
조선 정조 22년(1798) 이만영(李晩永)이 집필한 《재물보(才物譜)》에 있는"수박(手搏)은 변(卞)이라고 하고 각력(角力)은 무(武)라고 하는데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하는 구절이 택견이 최초로 언급된 사료이다. 19세기 민속화에 씨름하는 옆에서 택견하는 민초들의 모습이 나오고 20세기 초 탁견희라는 한시가 존재하는 등 한국의 기록물에서 '택견' 관련 기록이 꾸준히 나온다. 한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 '덕견이' 라는 무술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조선상고사》 외에는 덕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 '덕견이'가 구한말 택견을 가리키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고려사부터 시작해 국내 역사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수박'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무술계 단체별로 여러 의견이 있다. 문화재 지정 보유자가 소속된 한국택견협회 측에서는 위의 《재물보》를 인용해 수박이 택견으로 변했다는 입장이다. 실제 택견을 나타내는 탁견희 이전에 가장 비슷한 기록상의 예시로 수박을 유희용으로 사용했다는 수박희가 있다. 하지만 《재물보》 이외에 교차검증이 가능한 추가 사료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아직까진 직접적인 관계성을 단정할 수 없으며, 대한수박협회의 송준호 회장은 이런 주장에 반발하면서 많은 토론과 성명문을 배포한 바 있다. 다만 송준호의 수박은 항목에도 있듯 그 실체가 불분명한 무술을 자기들이 직접 수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이쪽 역시 확실한 신뢰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송덕기의 언급과 기술의 형태로 보면 서울 사대문안의 마을들에서 주로 행해진 민속 스포츠 겸 한량들의 무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현대의 우리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택견은 구한말에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근대의 윗대 택견 뿐이다. 구한말 택견계는 경복궁 근방의 우대 계열과 청계천 이남의 아래대로 패가 나뉘었는데, 송덕기는 윗대(우대)에 속한 택견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아래대 택견을 표방하는 충주택견의 경우 송덕기에게 사사하고 기타 몇몇 택견꾼에게도 지도받았다는 신한승의 택견을 다루기 때문에 결련택견협회 같은 곳에선 송덕기의 원형이 아니라고 까기도 한다. 다만 이는 매우 엄격하게 표현했을 때의 이야기로, 당시 윗대나 아랫대나 택견꾼들 개인의 성향차, 좋아하는 기술 차이 정도는 있었을지 몰라도, 기술체계나 원리가 크게 달랐다는 증언이나 자료는 없기 때문에 현재로선 윗대와 아랫대를 통틀어 (비록 협회별로 모습은 다르더라도) 택견 자체는 끊기지 않고 전승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랫대와 윗대는 순전히 각 택견꾼들의 거주 지역과 그들의 모임 장소에 따라 구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 왕십리의 까기, 평양의 날파람, 경상도의 잽이, 전라도의 채비, 제주도의 발찰락 등 택견과 비슷하게 발로 까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거나 때리고 넘어뜨리는 무술 혹은 유희들이 전국 각지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택견이 최소한 18세기부터 확인되며 서울이라는 지역이 인적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향 정도는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를 확인하긴 어렵다.
세 개 협회에서는 '전쟁시 살상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돌팔매질을 장려했듯, 옛날 택견도 신체 격투기술을 갖추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장려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상기한 재물보 기록의 수박과 각력을 계승했다는 식의 기록을 신뢰할 경우 해당되는 말로 사실 18세기 이전 문헌엔 택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때문에 교차검증이 현재로선 불가능하고, 지금도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수박은 '오늘날의 택견과는 별개의 원시적 맨손 박투였다.' 혹은 '택견이 아니라 모든 맨손 격투기의 총칭이다.'는 식으로 다른 주장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어 여러 논쟁이 있는 상황이다.
20세기 초중반 들어 택견은 쇠퇴일로에 접어드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공식적으로 택견판을 금지한 이유도 크다. 이에 대해선 '한민족의 전통무술을 말살시키려 했다.'라는 학설과 '단순히 조선인들의 집회를 막으려는 이유였을 원인이 더 크다.'는 학설로 의견이 나뉜다.
전자는 당시 일제의 편집증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택견판에 대한 금지와 택견꾼들에 대한 탄압을 근거로 든다. 문화재 보호법 제 961호로 지정된 사료 중 송덕기의 구술자료에 따르면 어찌나 일제가 지독하게 굴었던지 자신에게도 일제가 순사들을 붙여 한동안 밀착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또한 김명곤의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이라는 기사 인터뷰에서 김홍식은 당시 일본놈들이 태껸한다는 말만 들어도 모조리 때려잡았다며 이 때문에 택견을 배우기가 힘들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택견을 배우는 것을 극구 말렸다고 구술하였다.
한편, 후자측은 일제 치하 동안 택견판이 죽은건 맞지만 택견꾼 자체에 대한 내용은 신문에 종종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택견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단 택견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모이니 조선인 집회를 막으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무단통치와 문화 통치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시기에 따른 탄압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므로 두 주장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 단언하기엔 무리가 있으며, 의도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택견판이 일제강점기 시절 음지로 숨어버린건 사실이므로 택견의 쇠퇴에 일제의 식민통치가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각에선 택견은 민속놀이지 무술로 보긴 어렵다는 경우도 있는데 20세기 초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오히려 택견을 확실하게 무술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 1950년대에 일부 무술인들이 택견에 관심을 가져서 송덕기와 만나기도 했으나 진지하게 배우지는 않았고 주요 제자들은 한참 이후부터 등장한다. 같은 동네에 살던 고용우가 1969년부터 송덕기에게 택견을 오랫동안 배우다가 198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90년대부터 그곳에서 택견을 가르쳤으며 2010년대부터 한국에도 전수가 되기 시작했고 이게 윗대태껸협회다. 신한승도 송덕기에게 1970년대 초부터 수년간 택견을 배웠는데 그는 특히 택견의 무형문화재 등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청에서 송덕기의 택견이 기술의 갯수가 얼마 되지 않으며[22] '형'이 없이 낱기술들로만 이루어져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힘들다는 답장을 보내자 자신이 몇 가지 기술을 창안, 추가하고 본때뵈기, 동과 째라는 다른 무술들에 흔히 있는 투로와 수련 체계를 만들어 1980년대 무형문화재 선정에 성공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신한승식 택견의 느낌이 송덕기의 그것과 상당히 달라져버렸기 때문에 택견 원형 논쟁이 생기고 택견 협회들의 분파가 생기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이 신한승에게서 택견을 배운 정경화와 박만엽이 만든게 오늘날 한국택견협회이며, 마찬가지로 신한승에게서 택견을 배운 이용복이 만든 것이 대한택견회다. 결련택견협회는 1980년대에 송덕기에게 다년간 택견을 배운 도기현이 만들었다. 결련택견협회는 한국택견협회와 대한택견회의 택견이 송덕기의 원형 택견이 아니라는 비판 의식에서 형성된게 크다. 그리고 2010년대 이후 상술된 고용우의 윗대태껸협회가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전수를 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어느 단체건 '우리 단체가 킹왕짱이니 여기 와서 배우세요'가 된 것. 다만 택견계에서도 이들 사이를 조정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는건 아니다.[3]
어원[편집]
어원에 대해서는 협회별로 의견이 나뉜다. 대한택견회의 이용복 前 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탁견(托肩)이 서울 사투리의 영향을 받아 택견으로 변형되어 발음되는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대한택견회 측의 주장에 대해서 탁견이 이두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대사전'에는 '택견'이라 했고 '한쪽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 각희'로 풀이 되어 있다. 한편, 예용해 문화재위원에 따르면 송덕기가 "태껸도 아니고 택견도 아니며 탁견이요, 한자로는 卓見이라고 쓰며 탁견을 하는 사람을 말할때 택견꾼이라 했다"고 한다.# 다만 송덕기는 평상시 자신의 기예를 태껸으로 지칭했는데, 문서 기록으로도 신한승과 왕래하던 서편에서 송덕기는 태껸이라고만 적었다. 윗대태껸협회에서도 본래 송덕기는 '태껸'이 맞으며, 윗대태껸 전승자에게 '윗대태껸'이라고 가르치라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복잡하다
이에 기존에는 표준어 규정 제5항에 근거하여 태껸을 표준어로 삼았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011년 8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주관하는 국어심의회에서 국민들 다수가 태껸이 아닌 택견을 사용하는 점(사회성 부문)을 들어 택견 또한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또한 택견계를 이끌고 있는 핵심 조직인 3대 협회에서도 '택견'을 정식 명칭으로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국민들 다수가 택견을 사용한다는 점, 택견을 취급하는 주류 단체에서 택견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둘 모두에 명칭이 택견으로 등록되어있다는 행정상의 이유 등으로 어원이나 문화재로서의 탁견, 태껸을 언급할 때 외에는 택견으로 통일하고 있다.[3]
대표 기술[편집]
택견의 특징은 첫째, 손발과 몸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유연하며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무술이다. 둘째, 택견은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갖고 있어 예술성 짙은 무예이다. 셋째,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발을 많이 움직인다.
- 품밟기: 택견의 가장 기본인 발놀림. 혹은 원활한 발놀림을 위한 연습. 品자 형태로 발을 밟는 것이 특징이다.
- 낚시걸이 (안낚걸이, 밭낚걸이): 발목이나 다리로 상대방 발이나 다리를 안팎으로 걸어 넘어뜨리는 것을 말한다. 발목을 낚시처럼 구부려 상대 다리나 발을 걸어 당겨 넘어뜨리거나, 다리를 상대편 다리 사이나 바깥쪽에서 걸어 당기는 것을 말하며 다리 사이로 걸어 당기는 것을 "안낚걸이", 바깥쪽으로 걸어 당기는 것을 "밭낚걸이"라고 한다.
- 곁치기 (곁차기, 째차기): 원래는 골반 언저리를 차는 것을 의미했으나, 현재 결련택견협회에서는 발등으로 안에서 밖으로 얼굴을 차는 기술을 의미한다. 전통택견협회에서는 같은 기술을 째차기라고 부른다.
- 날치기 (쌍발치기):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물구나무 서 듯, 혹은 몸을 휘돌리며 찬다.
- 내지르기: 발을 앞으로 들어 가슴팍이나 얼굴을 밀어 찬다.
- 덧걸이: 다리로 상대방 다리의 오금부분을 걸어 넘어뜨린다. 대개 손을 보조 수단으로 삼는다.
- 발따귀: 발바닥으로 상대의 따귀를 때린다.
- 엎어치기 (장대걸이): 발등이나 발목 정강이로 상대방의 다리를 가격하거나 걸어 넘어뜨린다.
- 내차기: 권투의 잽과 같다. 곁치기를 낮춰 상대방의 다리를 가격한다.
- 솟구쳐차기 (두발낭상): 공중으로 솟구쳐 상대방의 얼굴이나 몸통을 가격한다. 차는 형태는 발따귀, 내지르기, 후려차기 등 여러가지가 있다.
- 깎음다리: 밟아차기의 일종이다. 상대방의 정강이를 깎아 내려 밟는다.[2]
택견 대회[편집]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금지되었던 택견은 해방과 건국 이후 송덕기옹과 신한승옹의 노력으로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등재되었다. 이후 대한택견회가 명문화된 최초의 택견경기규칙을 제정하고 개최한 첫 택견대회가 1985년 6월 30일 부산구덕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택견경기대회이다. 당시 대회에는 초대 인간문화재인 송덕기, 신한승 선생님이 모두 참석했을 뿐 아니라 93세의 송덕기 선생님은 막뵈기를, 58세의 신한승 선생님은 본때뵈기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이어진 대회에서는 신한승 선생님이 주심을 맡았으며, 93세의 송덕기 선생님이 직접 서울팀의 뒷배(코치)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1985년 역사적인 첫 택견대회가 개최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송덕기, 신한승 선생님이 건강이 악하됨에 따라, 이 대회는 초대 인간문화재 두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택견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에는 송덕기, 신한승 뿐 아니라 현대 택견을 대표하는 이용복, 정경화, 도기현 세 사람이 모두 참석했다.
이후 최초로 택견경기규칙을 명문화 시킨 대한택견회가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인 대한체육회 정회원 종목으로 승격됨에 따라, 현재 택견은 대한민국 최대스포츠 축제인 전국체육대회(엘리트), 전국생활체육대축전(생활체육)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있으며, 한국 국내 최고권위의 스포츠대회인 대통령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택견대회도 개최되고 있다. 이 대회는 대한택견회에 등록된 선수, 지도자, 심판에게만 참가 권한이 주어진다.[3]
실전성[편집]
현 시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불가능하다. 조선 말에 행해진 택견의 본모습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이 택견과 같이 집단적으로 향유된 무형 문화에 대해 당대의 모든 면모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상식선에서나, 결련택견에 대한 회고를 비롯해, 송덕기가 전승한 형태 외에 다른 방식의 택견이 존재했음을 직 ·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각종 증언, 기록물들에 의해서나, 조선 말의 택견을 균질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다양성이 어느 정도 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현재로선 알기 힘들다.
- 민속놀이일 뿐 무술이 아니라는 주장
일단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택견은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견부터 무술이 맞다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단순 놀이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1983년에 나온 박종관의 책에서 송덕기가 "그 당시에는 택견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가를 이용해서 운동하기 좋은 장소에 모여서 실시하던 일종의 민속놀이였다"라고 한 증언을 근거로 든다.
- 무술이 맞다는 주장
무술이 맞다고 보는 사람들은 놀이나 여흥으로서의 택견 경기와 택견 자체는 구분된다고 본다. 그 근거가 송덕기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손으로 상대 목을 때린다거나 주먹질, 손바닥 아래 단단한 부분으로 상대의 턱을 때리는 기술(낙함)같은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술들은 옛법이라며 놀이나 경기에서 사용되는 기술과 구분지어 알려주었다는 점이다. 즉 실제 싸움판에서 쓰는 택견의 기술 중 놀이에 알맞지 않은 것들을 빼고 다치지 않게 즐기는 것이 놀이로서의 택견 경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박종관 책에 나오는 송덕기의 말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의 송덕기는 '무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해온 것이 무술인지도 몰랐을 뿐 "택견은 무술이 아니다"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같은 책에 "그 당시에는 나도 택견을 전통무술로 계승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별로 못하였고, 우리의 고유 무술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지 못하여 큰 관심을 두지도 못했다"고 나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송덕기는 전근대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실제로 전근대에는 무술과 놀이의 경계가 매우 모호했으며 이는 서양의 복싱이나 씨름, 스모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송덕기 입장에서 이게 특별히 무술이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뿐이며,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택견이 무술로 취급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1928년에 인천에서 열린 무도대회에 대한 기사에서 "각종 무도의 시합은 만장관중에 대하여 무도에 대한 자극을 여한바이 다대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최종 권충일군의 택견과 나주연군의 권투는 과연장쾌를 극하여 만장갈판을 박하고 오후 다섯시에 성황리에 폐회하였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택견이 권투 등과 함께 무술로 취급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의 유도를 소개하는 1929년 기사에서 "이 세계에 어떠한 나라 어떠한 민족에게든 무기를 가지지 아니하고 빈 손으로 적을 대항하는 법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야 조선에도 택견이니 날파람이니 씨름이니 돌단이니 압단이니 하는 이름들이 있어서 우리도 옛날에는 나로라하든 면영을 남긴 것들이라 하겠다. 일본 유술이라는 것도 역시 맨손 혹은 단소한 무기로 적을 대항하는 무적기술인데 (후략)"라며 택견을 무술로 얘기하고 있다.
1937년의 한 기고문에서도 "조선에서 고래로 전해왔고 다른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무술로 택견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라고 택견을 무술로 얘기하고 있다.
또한 결련택견에 대한 구술 등을 비롯해 택견의 무술성을 강조하는 송덕기의 다른 증언, 송덕기가 직접 시연자로 참여한 《태견》 책에 수록된 택견 기술의 다양성, 고용우 · 이병한 등의 수련 회고,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 말에 과격한 격투기가 유행했다는 외국 기록들도 있다.
- 택견과 MMA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의 종합격투기와 견주었을 때 실전성 면에서 당연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택견 뿐만 아니라 어떠한 기존 무술도 그 단일 무술만으로는 MMA에 견주지 못한다. 현대의 종합격투기는 권투, 주짓수, 레슬링, 무에타이 같은 기존의 무술들이 전승 지식의 집대성, 대중적 보급, 경쟁 대회 개최, 타 무술 / 스포츠와 교류 등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기술 체계와 훈련법을 효율화,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개량되고 종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중요한 점은 '택견 vs MMA' 같은 게 아니라도 과연 택견 베이스의 선수가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먹힐 것이냐인데, 문제는 현재 택견 경기에서는 금지되는 기술들이 많고 풀컨택트 형식의 겨루기도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걸쳐 무술 간의 대결이 종합격투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격투 / 무술가들이 얻은 교훈은 무척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꼽자면 다음 단연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서로의 얼굴에 주먹질을 주고받는 무술은 그렇지 않은 무술에 대해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라운드 공방을 위한 각종 기술이 발달된 무술은 그렇지 않은 무술에 대해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안면 펀치와 그라운드 테크닉이라는 MMA의 양대 필수 영역은, 공교롭게도 현대 택견의 실전성을 논할 때 항상 부재를 지적받는 지점과 일치한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기 전의 각지의 전통 무술이 1단계라면, 스포츠화 · 상업화 · 과학화를 통해 발전한 현대 무술이 2단계인데, MMA는 그 현대 무술에서 가장 유용한 기술만을 집대성한 무술 진화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택견이 2단계의 위치라도 제대로 확보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전통적인 택견(1단계)보다 실전성에서 퇴보한 면모가 적지 않기까지 하다. 일례로 택견에는 원래 유도의 배대뒤치기와 같은 유술기가 있었으며, 이는 택견의 기본 기예였으나 현재는 사실상 실전 상태다. 다른 주요 두 단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택견의 무술성을 강조하는 결련택견협회조차 그러하다. 수련 프로그램에 들어있건 아니건 시합에서 쓸 수 없으니 적어도 '경기 스포츠로서 택견'의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택견에는 아래발질로 본래 무릎이나 정강이를 발바닥으로 깎아 차는 '깎음다리'[10]라는 발차기 기술이 있다. 이와 같은 발차기를 오늘날의 격투기 용어로 '오블리크킥(oblique kick)'이라고 하는데, 그 유용성은 근래 앤더슨 실바 등의 발차기 달인들이 실전에서 충분히 입증한 상태다. 그러나 현재 대한택견회와 한국택견협회의 경기 기술에는 깎음다리는커녕 아예 하단 차기가 허용되지 않는다. '걸이'라는 하는, 상대의 발목이나 종아리나 오금을 걸어 넘어뜨리기 위한 아래발질이 허용될 뿐이다.
사실 택견의 실전성에 무엇보다도 악영향을 끼친 현대적 요소는 주요 3단체가 공히 채택하고 있는 '얼굴 차면 승리'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송덕기의 직계 제자들 상당수는 1985년 첫 택견 대회를 열기 전까지 그런 규칙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해당 규칙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무도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도 원형에 없는 요소를 현대 택견인이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는데, 2010년대에 들어서 "얼굴 차면 이긴다"는 것을 규칙으로 학습했다는 송덕기 직계 제자 도기현 · 양창곡의 증언이 확보되었다. 사실 저 박상혁 논문이 인용한 관련 증언들도 송덕기가 단정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식은 아니고 자신들이 배울 때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송덕기로부터 그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 정도면 "손을 땅에 짚으면 진다"에 비해서는 그렇게 확고한 규정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대회를 준비하던 이들이 빠르고 깔끔한 승부를 선호했던 것인지 이를 승패를 가리는 제2의 규정으로 채택해 버린 것이다.
이 규정으로 인해 현대 택견 경기의 상단 차기는 강한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상대 얼굴을 스치기라도 해서 승리를 따내기 위한 용도로만 구사되고 있는 실정이다. 발차기 중에서도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헤드킥임을 감안하면 이는 실전성 면에서 후퇴임이 분명하다. 발차기의 다채로움을 자랑하는 택견이 정작 가장 강력한 발차기는 갖고 있지 못한 셈이다. 이미 전근대에 스포츠화를 겪으며 실전 무술로서 면모가 상당히 누그러진 택견이 20세기 후반에 다시 한 번 스포츠화를 겪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파괴력 있는 기술들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꼭 그런건 아니고 택견꾼들이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 후려차기라고 부르는 돌려차기가 있고, 현대 종합격투기의 기본 테이크다운 방식인 레슬링의 원레그 / 투레그 태클과 매우 비슷해서 레슬러 출신 신한승이 들여온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 '마구잽이'는 대한택견회에서는 금지 기술이지만 허용하고 있는 한국택견협회나 결련택견협회 주최의 대회에서는 그것 때문에 시합 재미없어진다는 말이 나올 만큼 자주 나오는 기술이다.
이 외에도 3대 주요 단체 경기에서 허용되는 기술의 합집합을 구하면 실용적인 발차기와 잡아넘기는 기술들이 꽤 나온다.
그리고 택견의 특징적인 킥이라고 할 수 있는 곁차기는 타 무술에서 보기 힘든 예상치 못한 각도로 올라오기 때문에 충분히 효용성이 있다. 로드 FC에서도 이 곁차기로 상대의 턱을 가격해 KO가 나온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처음에 제기한 문제점 두 가지는 여전하다. 특히 명색이 입식 계열의 무술이면서, 발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손 / 주먹을 이용한 타격이 기술이 경기에서 죄다 금지 기술인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태권체조', '발 펜싱'으로 조롱받는 WTF 태권도조차 주먹으로 몸통을 가격하는 정도는 허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택견이 실전성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보호장구를 착용하는 방식을 써서라도 평소 경기 규칙 자체를 옛법들을 사용가능하게 하고 안면타격과 주먹 타격도 가능하게 바꿔야 한다.
2010년대 들어 떠오른 비주류 단체인 윗대태껸협회의 경우는, 손을 이용한 타격을 발차기 버금가는 택견의 기본 공격 기술로 여겨 집중 수련하고 있으며 "옛법은 경기에서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택견계의 통념부터 부정하고 있으므로, 기존 단체에 비해 그와 같은 부분에서 유리한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론적인 면은 차치하더라도, 아직까지 정식 대회를 개최해서 자신들이 보유한 기술들의 완성도를 검증받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 MMA에서 먹히는 택견의 가능성
이것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떤 무술이건 현대 무술의 이론 및 기술 체계를 빌려 와서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며 택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원본 무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가능한가가 관건이며, 그렇게 결점을 개선한 결과물을 원본과 같은 무술로 볼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된다.
태국의 낙무아이들은 자신들의 무술을 실전적으로 뜯어고쳐서 오늘날의 무에타이를 만들었으며, 일본의 가라테카들은 자신들의 무술을 실전적으로 뜯어고쳐서 풀컨택트인 극진공수도를 만들고 그것을 한 번 더 뜯어고쳐서 킥복싱과 대도숙 공도를 만든 바 있고, 중국의 권사들조차 현대 무술의 발전 방향과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던 자신들의 무술을 실전적으로 뜯어고쳐서 산타를 만들었는데, 한국의 택견꾼들이라고 그런 일을 못 해내리란 법은 없다.
택견은 기본적으로 입식 무술이므로 BJJ같은 와식 그래플링 기술들은 제외하더라도 경기 택견의 발차기, 잡아넘기기에 현대적으로 가다듬은 옛법을 섞은 다음, 권투로부터 잽, 훅, 어퍼컷을, 무에타이로부터 니, 엘보우 등을 차용하여 강력한 입식타격기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무술의 부족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가 해당 무술에서 그런 부분을 보완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또 이건 그 무술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긴 하지만 택견은 한국 정부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이므로 내부인들에게 '고유의 정체성 보존' 또한 하나의 임무인 것도 생각해야한다.
다른 무술과 구분되는 택견의 특징이라면 단연 품밟기다. 현대 택견의 개조(開祖)라고 할 수 있는 송덕기는 생전에 품밟기가 택견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이를 강조했고, 송덕기에게 가장 오랜기간 택견을 배운 위대태껸의 고용우도 "품밟기가 전부다"라고 할 정도였다.
대한택견회 측은 송덕기의 그러한 진술과 "발을 品字로 놓는다는 約束이 있"다는 초기 자료등을 근거로, (지속적인) 품밟기를 일종의 경기 규칙으로 해석해서 자신들이 개최하는 경기에는 반드시 품밟기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택견협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품밟기가 택견의 핵심인 것은 맞는데 품밟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단체마다 해석이 엇갈린다. 대한택견회는 품밟기가 목적발생적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면 결련택견협회는 품밟기가 자연발생적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대한택견회에서는 품밟기의 요소 중 하나로 자신들이 '능청'이라고 부르는 허리를 과하게 흔드는 몸짓을 넣고 있고 품밟기의 형태도 역품을 밟는데, 결련택견협회에서는 이것에 대해 송덕기가 언급한 적도 없는 개념이며 직계 제자들도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라고 부정한다. 윗대태껸협회에서도 대한택견회 식의 품밟기는 품밟기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다. 흔히 대중들이 택견하면 떠올리는 춤추듯 허리를 흔들면서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것이 바로 대한택견회 스타일의 품밟기이다.
실무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이 있다. 바로 인재 풀의 문제다. 택견계에서 옛법을 현대적으로 개량하는 연구는 주요 단체 중에서 규모가 작은 편인 결련택견협회에서 주도하고 있다. 거기서도 해당 사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태권도는 전세계 8000만 명의 수련 인구를 자랑함에도,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단자쯤이면 일반인과 싸움이 붙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기 · 수련 방식을 개발 · 보급하거나 그러한 유파를 창출하는 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보건대, 택견인들이 과연 자체적인 연구만으로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오늘날의 격투기 동호인들이 흡족해 할 만한 수준의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아니면 기존의 택견은 그 택견대로 두고 새로운 유파를 만드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실전 무도를 추구하기 위해 전통 가라테에서 갈라져 나온 극진공수도처럼 기존의 방식은 그 방식대로 보존하되 현대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새로운 유파를 창출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련택견협회의 황인무가 시도하고 있는 '옛법택견'이 그런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