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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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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등산(登山)은 을 오르거나 산의 경로를 탐험하는 활동으로, 신체적인 체력 소모와 자연을 즐기는 활동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산의 정상이나 특정 지점을 목표로 하는 하이킹이나 트레킹을 포함하며,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힐링을 추구할 수 있는 운동이다

개요[편집]

등산(登山, mountaineering, mountain climbing, alpinism)은 운동이나 탐험, 여가 활용 등의 목적으로 에 오르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고 자연을 이용하고 대처하면서 주어진 장애를 극복하는 것으로, 정복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레저 스포츠이다. 1786년 프랑스인이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을 등정한 이후부터 조직적인 등산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산은 체력 단련과 정신 수양에 좋지만 위험이 따르는 운동이므로 협동심, 인내력, 희생 정신, 대담성, 침착성 등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와 달리 등산에는 널리 적용되는 공식 규칙, 규정 및 거버넌스가 없다. 등산가들은 산을 오를 때 다양한 기술철학(등급 지정 및 가이드북 포함)을 고수한다. 수많은 지역 알파인 클럽이 자원과 사회 활동을 주최하여 산악인을 지원한다. 알파인 클럽 연맹인 국제등산및등산연맹(UIAA)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인정한 등산 및 등반 분야의 세계 조직이다. 자연 환경에 대한 등산의 결과는 환경의 개별 구성요소(토지 기복, 토양, 식생, 동물군 및 경관)와 등산 활동의 위치 / 구역(하이킹, 트레킹 또는 등반 구역)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등산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수준에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종종 세계화, 특히 외국 문화와 생활 방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온다.[1]

역사[편집]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에 오르는 모든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적 목적이나, 동식물 · 지질 · 지리조사 같은 학술목적의 등산도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등산은 등산 그 자체에 순수한 목적을 둔 행위로, 산에 오르는 것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즐거움을 찾는 행위와 자연미에 대한 심미적 정서 등을 함양하는 문화적 행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적 측면보다 스포츠의 측면이 강하게 작용해서, 높은 산을 정복하고 그 과정에서의 인간 한계를 극복하는 산악운동과 일반 등산을 구별한다.

옛사람들은 등산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 내로 국한하였고, 생존수단을 위한 수렵행위가 고작이었다. 산은 생활의 터가 아니었으며, 미신이나 고대종교의 영향으로 산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국은 고대로부터 숭천숭산사상(崇天崇山思想)을 지녀왔으며, 여기에서 등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강림은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또 한국 산에는 어디를 가든지 사찰이 있다. 이는 산이 심신의 수련장임을 뜻한다. 삼국시대 화랑도의 '유오산수무원부지(遊娛山水無遠不至)'는 산을 악마나 공룡의 주거지로 경원하던 유럽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며,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산과 가까이 하고 산을 문화의 무대로 인식하였다는 자랑스런 기록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조에는 기원전 30년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沸流)가 부아악(負兒嶽:지금의 북한산 仁壽峰, 또는 용인의 負兒嶽이라는 설도 있음)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택리적(擇里的)인 목적일지라도 2,000여 년 전의 기록으로서 유럽과 비교할 때 선각적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32년, 백제의 개루왕 때 산성을 쌓았고, 156 ∼ 158년 신라 아달라왕대에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을 뚫어 개발과 이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에 벌써 생활영역으로 산을 가까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숭천숭산사상을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백제 고이왕 10년(243)에 제단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팔관회(八關會)라든가 삼신산(三神山) · 오악(五嶽)을 비롯해서 산천은 초복제액(招福除厄)의 근원으로 받들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와서 진산(鎭山)의 개념은 도참의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숭산의 구체적인 발로였다. 최남선(崔南善)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백(白)'자와 연유한 민족신앙으로서 산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자연관이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토착신앙 외에도 민속신앙으로도 볼 수 있는 기우(祈雨) · 기자(祈子) · 초복(招福)을 산신령에 기원하였으니 어쩌면 산이 애니미즘(animism)의 구체적 상징일 수도 있었다.

또한 심미의 대상으로서의 산은 유럽의 경우보다 빨라 조선 초 안견(安堅)을 비롯해서 강희안(姜希顔) · 정선(鄭敾) · 심사정(沈師正) · 강세황(姜世晃)에 이르는 산수화에서 산을 도원경(桃源境)으로 구현하였다. 한편, 삼국시대로부터 산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의 유불선(儒佛仙)의 특출한 행각의 장소도 산이었고, 아울러 은신처로서도 널리 이용되었다.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하여 맹사성(孟思誠) · 정철(鄭澈) · 윤선도(尹善道) · 김병연(金炳淵) 등이 이룬 해학과 자연구송(自然口誦)과 은둔송(隱遁誦)은 산을 심미적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좋은 예가 된다.

근대 이전의 등산[편집]

순수한 등산의 효시는 화랑도의 유산에서 비롯되나 그들의 유산처가 신라 전역에 걸쳐 모든 산천이었으므로 어느 산, 어느 봉으로 국한할 수는 없다. 이보다 앞선 723년(성덕왕 22)부터 727년까지 혜초(慧超)가 중앙아시아, 즉 오늘날의 파미르고원 · 힌두쿠시 ·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구도 여행한 것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상세히 기록, 발표되어 해외등산의 효시로 삼을 수 있다. 이 무렵 승려 무상(無相)의 티베트 고산의 구도순례도 또한 특기할 일이다. 그리고 745년 비록 군사목적이었으나 고선지(高仙芝)가 당나라 장군으로 곤륜산맥을 거쳐 빙설의 힌두쿠시 달코트(4,572m)를 넘은 진군은 한국인이라는 뜻에서 또한 등산사에 기록될 만하다. 고려 말에는 정도전(鄭道傳)이 백두산을 등산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이성계(李成桂)가 덕유산 남봉에 제단을 쌓고 기원한 기록과 무학(無學)이 무악(母岳)과 삼각산(북한산)을 오른 것은 도읍선정을 위한 등산이었다. 유람적 등산으로는 세종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보현봉(북한산) 등산이 있다. 1463년(세조 9)의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 편찬, 1481년(성종 12)부터 7년간에 걸친 『동국여지승람』 편찬, 그리고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등에는 능히 지지(地誌)를 위한 학술등산이 있었을 것이 예상되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1480년 김일손(金馹孫)의 두류산(지리산, 1,915m) 기행, 1560년(명종 15) 이이(李珥)의 금강산과, 1569년(선조 2) 청학동 소금강 기행, 1640년(인조 18) 이명한(李明漢) · 정곤수(鄭崐壽) 등의 청학동 소금강 등행, 1671년(현종 12)의 김창협(金昌協)의 금강산 · 설악산 등의 기행록인 『동유기(東遊記)』, 또한 1686년(숙종 12)의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나 1730년(영조 6) 송진명(宋眞明)의 『백두산지도』 제작 등은 하나의 등산사적인 기록이 된다.

그리고 최근에 알려진 1731년 남하정(南夏正)의 계룡산 등산 등은 기록에 있는 유산 등산이다. 연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백두산일기』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1740년대의 백두산등산은 어쩌면 최초의 선구적인 집단적 고산등산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에 있는 등산은 본격적인 백두산 집단등산이었고, 유지(油紙)를 천막으로 사용하고 하산할 때 불태워 없애는 등 극지법(極地法) 등반의 효시로도 생각된다.

이 밖에도 서명응(徐命膺)의 연도 미상의 백두산기록인 『보만재집(保晩齋集)』이 있으며, 1770년 박제가(朴齊家)도 묘향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백두산만 따진다면 이보다 앞서 1677년 중국 쪽에서의 등산과 1683년에 재차 등산한 기록이 있으나 중국인의 기록이고, 유명한 정계비(定界碑) 설정에 따른 1712년의 등정과, 1753년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편찬에 따른 전국 산천기행도 등산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김정호(金正浩)의 1860년대의 『대동여지도』 제작을 위한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 산천답사는 학술목적의 등산으로 평가된다.

1886년(고종 23) 만주 쪽에서 백두산을 올라간 영국인 하즈반드 일행을 비롯, 1905년 을사조약까지 미국 · 일본 · 러시아 · 영국인 등 7건의 학술목적의 백두산 답사와 등정기록이 있다. 이와는 달리 1850년(철종 1) 이상수(李象秀)의 「금강산등정기」가 『동국산수기』에 발표되어 있다. 민족항일기에 들어와서는 서구적 등산기술을 익힌 일본인들이 전국의 산을 오르고 그 중에서도 백두산 · 관모봉(冠帽峰) · 금강산 등을 종주등산 방식에 의해 여러 번 등정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등산[편집]

근대 등산의 역사는 1818년 제랄드형제가 히말라야의 파르기알봉(6,791m)을 등정한 것을 최초로 삼고 있으나, 이때는 측량과 탐사활동이 목적이었다. 순수한 등산은 1833년 영국의 그레함이 두나기봉(7,066m)을 정복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민화를 통해 조선 중엽 이후 밧줄을 타고 암벽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고전적 암벽등반인지는 확증되고 있지 않다.

근대등산의 표본이랄 수 있는 암벽등반은 1926년 5월 영국인 아처(Archur)와 임무(林茂)가 북한산 인수봉을 첫 등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선 기록으로 영국인 아처와 일본에 있던 영국인 매크리(Macrae) 두 사람에 의한 도봉산 만장봉 남벽 초등(初登)이 최초의 암벽등반이라는 이설이 있으나, 초등 기록 발표연도가 『영국산악회보』에 1931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30년 4월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25년 5월 일본인 이야마(飯山達雄)와 임무 두 사람의 북한산 보현봉과 비봉, 그리고 백운대 암벽초 등반을 우리 나라 근대등산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으나, 난이도로 보아 1926년 임무와 아처의 인수봉 초등을 근대등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쨌든 1925년 또는 1926년에 걸친 근대적 등반의 시작은 임무 · 이야마 · 아처 · 매크리 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서울 근교 암벽을 차례로 초등등반하면서 1930년대부터는 국내 알피니즘이 광역화하고 금강산 암벽 · 백두산 · 관모산 등과 북한산의 적설기 초등으로 이행되어갔다. 즉, 새로운 초등등반 대상을 찾아 미등(未登)의 산을 찾았고 암벽등반과 아울러 겨울등산의 초등등반이 시작되었다.

또한 1927년 박석윤(朴錫胤)의 알프스 몽블랑 등산기가 발표되었고, 1920년대에는 한국여성산악부가 설립되었다. 민족항일기에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1931년 '조선산악회'가 창설되었고, 1935년까지 일본인에 의한 근교 암벽 초등이 성행하였으나, 1934년 도봉산 만장봉 등벽을 김정태 · 엄흥섭이 초등함으로써 새로운 코스에 의한 한국인의 독자적인 초등등반이 시작되었다.

특히 1938년 말부터 태동한 '산악인금요회'가 '백령회'(회장 엄흥섭)로 결성되면서 양두철(梁斗喆) · 주형렬(朱亨烈) · 김정태(金鼎泰) · 이재수 · 방현(方炫) · 채숙 등이 서울 근교 암벽에서 새로운 코스에 의한 초등에 성공하였고, 적설기등반에서는 1941년 12월에서 1942년 1월에 걸쳐 31일간 마천령산맥을 전산종주(全山縱走)함으로써 한국산악인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이 기산중에 비록 일본인이 동행한 기록이 적지 않았으나 한국인에 의한 근대등산의 실천과 선구적인 업적은 광복 후 산악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한편, 일본인들은 금강산암벽이나 함경북도의 산에서 기록을 남겨놓았으나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등산은 군사목적을 위한 훈련연습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현대의 등반[편집]

  • 광복 ∼ 1960년:광복과 더불어 한국산악회(초대 회장 宋錫夏)는 재빨리 한국인만으로 설립되었으나 국토분단으로 이북에 있는 산으로 갈 수는 없었다. 또한 남한의 산도 치안이 불안해서 등산은 산지를 중심으로 한 국토규명사업의 학술답사로 변모하였다. 순수산악인들인 백령회원이 기반이 되었으나 학술조사목적의 등산이 성행하였고, 산이 아닌 인근 도서(島嶼)가 주무대가 되었다. 서해 · 다도해 · 독도 · 울릉도를 비롯해서 해도상의 파랑도(波浪島)를 찾는 것이 산악회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6 · 25전쟁 후 대학산악부가 재건 창설되고, 설악산이 수복되면서 등산 대상은 서울 근교 암벽에서 설악산 울산암 암벽과 미답의 설악산 초등으로 옮겨갔다. 그 당시 유일한 전국적인 대표단체인 한국산악회는 6 · 25전쟁 전후에 회장 홍종인(洪鍾仁) 주도의 학술등반과 1955년의 수복 후 최초의 설악산답사등반, 그리고 1956년과 1957년 동계에 한라산 적설기등반을 하였는데, 이러한 등반은 6 · 25전쟁 후 우리 나라 등산운동의 새로운 지침과 방향설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학생산악운동으로는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산악회(회장 柳洪烈)의 추계 설악산 천불동 초등반(대장 孫慶錫)과 1956년 겨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회장 박희선, 대장 김형실)의 적설기 지리산 전산종주, 같은 시기의 슈타인멘클럽(대장 田湛)의 동계 설악산 천불동 직등초등반이 환도 후의 새로운 초등 풍조를 산악계에 던졌다. 아울러 지방에도 각급 산악단체가 창설되었다.
  • 1960∼1980년:1960년부터 한양공과대학 산악부(대장 鮮于 仲玉) 등이 도봉산 선인봉과 북한산 인수봉에서 새로운 코스를 개척, 초등하면서 암벽등반이 성행하였고, 등산이 일반인의 레저화가 되면서 각종 산악단체가 속출하였다. 특히 각종 등산단체를 규합한 연맹체로서 대한산악연맹이 1962년에 창설되었다(회장 李崇寧). 1960년대부터는 종래까지 사용하던 군용장비가 퇴색하고 국산장비가 개량되고 볼트하켄과 안전벨트의 사용으로 직벽등반과 인공등반으로 새로운 코스가 개척되었고, 광복 전의 초등 코스는 고전화되었다.
미국인 취너드와 선우 중옥 등의 북한산 인수봉 취너드코스(1963년)를 비롯하여 산비둘기산우회 · 에코 · 우정산악회 · 크로니 · 마운틴빌라 · MSR 등이 인수봉 · 선인봉 · 숨은벽 · 울산암에서 각각 새로운 등로를 개척하였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 기술서인 『등산백과』의 출간과 1969년부터 월간지 『산』과 『산수』가 창간되어 산악도서의 간행이 시작되었다.
해외원정에 있어서는 1962년 경희대학교의 히말라야 다울라기리Ⅱ봉(7,751m, 대장 박철암) 시등(試登)에 이어, 1970년 추렌히말(대장 김정섭) 원정과, 1971년의 제1차 마나슬루원정과 대한산악연맹의 로체살원정이 있었다. 1972년 제2차 마나슬루원정에서는 5명의 대원과 10명의 현지 셰르파 등 15명이 조난하는 대량 조난이 있었다. 1964년부터 시작한 일본 북알프스나 대만의 옥산등산도 거듭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산악운동이 수적으로 확산되어 1971년에 ‘대학산악연맹’이, 1972년에는 '고교산악연맹'이 결성되었고, '직장산악인협회'도 창설되면서 각종 산악행사가 성행하였다. 1975년 대한산악연맹의 제1차 에베레스트정찰(대장 崔秀南)과 한국산악회의 제1차 안나푸르나Ⅰ봉정찰(대장 孫慶錫)은 대표적 산악단체의 본격적인 해외원정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7년 1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 金永棹)는 9월 15일 고상돈(高相敦)과 셰르파 펨바노루부에 의해 등정에 성공했다. 1978년에는 한국산악회(대장 全炳九)의 유동옥(兪東玉)과 셰르파 파상놀브가 안나푸르나4봉을 등정하였다.
1979년에는 북미 알래스카의 매킨리에 한국일보대 · 고령산악회대 · 고려대학교산악회 등 3개 대가 몰려 모두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한국일보대에 참가한 고상돈과 이일교가 추락, 조난하였다. 이 밖에도 1970년대에는 국내외의 산악운동의 충실화와 전국적인 확산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국등산학교(교장 權孝燮)가 상설기구로서 개설을 보았고, 악우회(岳友會)에 의한 암벽코스의 등급정리가 있었다. 1969년에 한국산악회가 국제산악연맹에 가맹하였고, 1972년에는 대한산악연맹도 여기에 가맹해서 국제적 산악운동의 대열에 끼었다.
  • 1980년 이후: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 알프스에서는 동계 알프스등반과 직등, 단독등반이 정통화되었다. 한편, 히말라야에서는 8,000m급 거봉 14좌가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차례로 초등정되어 그 뒤에는 새로운 코스의 초등정과 7,000m급의 도전이 있었다. 1970년부터는 히말라야에서도 직등과 벽등반시대로 접어들었다. 1979년부터는 중공의 등산해금(登山解禁)에 따른 초등반과 히말라야 동계등반 · 무산소등반 · 단독등반이 현대등산의 특징으로 부상해서 알파인스타일등반이 히말라야 고산등반의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의 배경에서 1980년대의 한국 등산계는 해외원정이 수적으로 급증하고 한국 국내에서는 동계 빙벽등반이 새로운 한계도전의 등산운동으로 등장하였다. 1980년 유럽 알프스에서만도 악우회를 비롯한 4개 대가 도전해서 아이거 등 3대 북벽에서 개가를 올렸고, 동국대학교산악회는 히말라야 마나슬루(대장 이인정)를 무산소로 등정하였다. 또한, 남미 안데스 아콩카구아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산악회(대장 김용환)가 등정하였고, 청화산악회는 미국 휘트니봉을 등정하였다.
이렇듯 폭발적인 추세는 히말라야지역에 도전한 한국대가 1962년 이래 1985년 10월까지 총 81대로(히말라야지역만), 이 중 1980년부터 1985년까지 6년 동안에만 68개 대가 해외원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타 인접국인 일본 · 대만을 제외한 남북미 · 알프스 · 남북극 지역 등에도 39개 대가 도전했다. 그 중에는 1981년 에코와 은벽 합동의 알프스 드류서벽등정, 성균관대학교산악회의 안나푸르나 1봉 남봉등정도 있었다.
1982년에는 닐기리중앙봉 · 람중히말(여성대) · 마카루Ⅰ봉(한국산악회) · 가네슈4봉(부산학생산악연맹) 등의 등정이 있었으며, 대전 자일클럽의 고준바캉 초등정(대장 김영환 외 11명)은 세계적인 초등기록이 되었다. 또한 남선우(南善佑)의 동계 푸모리초등반은 한국 산악인이 이룩한 히말라야 동기 초등으로 최초의 기록이다. 1983년에는 숙원의 바인터브락Ⅱ봉을 윤대표(尹大杓) 외 6명이 세계 초등정을 이룩하였고, 포항의 향로산악회의 눈봉 등정과 영남대학교의 안나프르나2봉 등정에 이어 허영호(許永浩)의 마나슬루 무산소단독초등이 있었는가 하면, 남선우는 거듭 아마다브람에 동기 무산소 단독초등반의 위업을 이룩했다.
1983년의 눈부신 기록에 이어 1984년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한국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몰려 절정을 이루었다. 총 41개 대 가운데 한국등반대만 17개 대가 도전한 것이다. 푸타 히운추리 · 바른체 히말의 북봉과 중앙봉 · 캉구루 · 샤르체 · 탐세르크 · 캉구루서벽 · 타르케 캉을 각각 등정하였고, 특히 쟈누에서는 김기혁 등이 동계 초등반을 성공시켰으며, 여성에 의한 8,000m 동계등정(김영자)이 안나푸르나1봉에서 있었다.
1985년에도 전년의 여세로 1월의 동기 투크체봉등정을 비롯해서 출루서봉 · 투크체, 1986년 1월 동기의 캉테가 등에 등정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울산대산련의 이규진 등이 히말츄리 북봉에 세계초등반을 이룩하였고 홍석하 등의 남극대가 최고봉 빈슨에 올랐다. 1986년 8월에는 대한산악연맹의 김병준 외 16명의 대원이 세계 제2위의 고봉인 K-2봉에 전통적인 정공법 방식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강가푸르나에 여성대원도 낀 등정이 있었다.
등정은 하지 못했으나 1985년에서 1986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만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한국의 3개 등반대가 각각 다른 코스로 시도해서 기개를 높인 바 있다. 1986 ∼ 1987년 겨울에도 2개의 한국대가 최고봉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1987 ∼ 1988년 겨울 허영호(M.S. 대, 단장 김일권)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동계등정하는가 하면 세계 제3위의 칸첸중가(8,586m)에서는 부산대륙산악회(대장 정상무)의 이재춘대원이 동계 2등하였으며 또한 광운공업고등학교 OB팀(대장 전진양)은 10대 2명의 대원이 고줌바탕을 동기등정하였다.
한편, 한국 국내에서는 1977년 겨울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크로니산악회의 박영배 등 7명이 완등하였고 같은 시기에 마운틴빌라가 동계에 울산암 리지를 완등하여 초등반하였다. 그 밖에도 빙폭 초등은 설악산을 비롯해서 각처의 빙폭을 초등하는 기록이 속출했다. 1984년 2월에는 무학산악회의 이태식 · 박내경 등이 토왕성 빙폭과 좌우암벽까지 단독초등하는 초인적 기록을 세웠다. 이어 1985년 1월에는 대승폭포 빙폭을 윤대표 · 정호진 등이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초등정하였다. 이러한 추세에서 세계적으로도 능력을 인정 받은 암벽등반기술에 의해 난이도가 높은 볼더링과 하드프리등반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2]

등산의 분류[편집]

등산은 유람이나 행락적인 요소가 많은 일반 등산과 심미적 목적의 정적(靜的) 등산과 모험을 수반하는 한계 도전의 동적(動的)인 스포츠등산으로 크게 나뉜다. 또한, 등산의 본래 목적 이외의 뜻이 있는 탐험등산도 있다. 인원 수를 중심으로 한 분류로는 혼자서 올라가는 단독등산과 2인 이상으로 대를 짜서 올라가는 집단등산이 있다. 단독등산은 행락적 요소와 관광적 요소의 여행등산이 아니고, 개인의 능력 한계에 도전하는 보다 어려운 등산을 감행해야 되는 등산본질의 등산이며 가장 위험하고 기술적 수련을 필요로 한다. 집단등산에서는 대장 · 부대장 · 총무 · 장비 · 식량 · 기록 · 의료 · 수송 등의 전담 부서를 정해서 등산목적에 따른 안전한 운행이 필요하다.

행동에 따른 분류로는 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등산하는 종주방식과 각각 출발점을 달리하는 개인 또는 등산대가 일정한 정상으로 올라가는 집중방식, 그리고 출발점과 하산지점이 각각 다른 방사상방식의 등산이 있다. 또 구조작업이나 학술답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파상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출발시간에 간격을 두고 정상에 올라가는 방식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코스를 약간 달리할 수도 있다.

고산등산 방식으로는 흔히 극지법으로도 불리는 포위정공법이 있다. 이것은 대규모의 등산대가 캠프를 점차적으로 점진시켜 정상에 서는 정통적인 등산전술이다. 이에 반해서 돌격방식 또는 돌진전법은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최대한의 소요시간을 단축시켜 정상에 오르는 속공전술이다. 현대등산에서는 등산 인부(셰르파)나 고정자일 등을 전혀 쓰지 않고 대원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알파인 방식이 있고, 최근에는 고산에서의 동기무산소, 단독등반 방식도 대두되고 있다. 여러 방식에 따라 장단점이 있으나 대상과 능력 등에 따라 사용된다.[2]

등산기술[편집]

등산은 그 기술적인 분류에 따라 일반등산 또는 하이킹 · 암벽등산 · 빙벽등산 · 스키등산 등이 있고, 계절에 따라 특징 있는 등산을 할 수 있다. 또한 일수에 따라 당일등산 · 장기등산과 외국의 산을 향한 원정등산이 있다. 일반등산은 모든 등산에 기본이 되는 보행법,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걸음걸이, 숲길 · 낙엽길 · 계곡길 가기, 계곡 건너기, 능선길 가기, 돌풍 피하기, 비나 눈 속의 등산, 낙석 때의 등산 등이 있으며, 모든 경우 일정한 보행속도의 조절과 등산로 선택법, 길을 잃었을 때의 안전등산법이 요구된다. 모든 등산에서 캠핑 또는 산장생활은 산생활의 기본기술로 익혀야 되고 천막을 이용한 캠핑과 산장이나 사찰을 이용할 때는 공중도덕이 수반된다. 이러한 산생활의 기본기술은 취사법 · 노영법 · 자연보호 · 오물처리 등의 기본윤리와 교양이 필요하다.

암벽등반

암벽등반은 그 자체로서도 등산장르가 설정되지만 일반적으로 산을 형성하는 한 부분의 기술일 수도 있다. 암벽의 지형과 지질에 따라 여러 기술이 있으나 기본원칙은 유연한 밸런스와 리듬, 그리고 3지점 지지기술이 원칙이다. 암벽등반은 크게 자유등반과 인공등반으로 구분하고, 암벽의 종류와 형태에 따라 외면등반과 내면등반으로 구분한다. 암벽등반은 자유등반인 경우에는 홀드를 이용한 3점 지지에 의한 중심이동, 자일(로프)사용법과 확보기술 등이 요구된다.

인공등반에서는 이 밖에도 볼트 · 하켄의 사용, 테이프 슬링에 의한 러닝 빌레이(확보지점을 점차적으로 이동, 고정시켜 자일운동을 용이하게 하고 실족, 추락했을 경우 확보를 안전하게 하는 법)를 하고 안전벨트 · 헬멧, 각종 잼너트 등을 사용하여 지점으로 쓴다. 또한 인공적인 지점기구(너트 · 후렌드 등)를 사용하기도 하고, 등강기(登降器)로서는 유마르 · 8자고리 · 브레이크바 · 데상드르퍼머와 같은 인공기구를 사용한다. 자유등반은 가능한 한 인공적 등반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 등의 신체로 반대방향의 힘을 이용하는 레이백기술과 잼기술 등을 써서 올라간다. 종래까지 암벽등반에서는 완력등반과 로프로 달아올리는 기술 등을 쓰기도 하였다.

확보기술은 확보하는 사람이 암벽을 향하여 서서 확보해 주는 폐쇄자세확보법과 암벽을 등에 지고 확보하는 개방자세확보법으로 구분한다. 기술로서는 정적(靜的) 확보와 추락하는 사람을 따라 자일운동을 흘려주다가 정지시키는 동적(動的) 확보가 있다. 방식으로는 확보자의 몸으로 하는 방식과 기구를 겸용하는 방식이 있다. 이때의 안전원칙은 낙하충격을 흡수하는 데 있다. 이 밖에 암벽등반의 별도 방식으로 볼더링과 하드프리 등의 현대적 자유등반 방식이 있다.

빙설등반

겨울등산의 기술은 설상기술과 빙상기술로 구분되고 설상기술은 경우에 따라 설피 · 아이젠 · 피켈 기술이 요구된다. 설상보행은 발디딤과 사면, 적설량에 따라 좌우된다. 빙상기술은 흔히 빙벽기술로 통칭되는데, 고도의 아이젠과 피켈기술이 필요하다. 또한 빙벽기술로서 앞발톱이 있는 아이젠과 아이스바일 또는 아이스피켈을 양손으로 사용하여 올라서는 앞포인트(front point) 기술이 있다. 설중노영(雪中露營)은 언제든지 눈사태에 조심해야 하고 풍속 · 풍압 · 극한에 견디는 이중천막사용법과 설동 · 이글루(눈블록으로 만든 집) 등의 건설법, 그리고 극한 속에서의 비상비박법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동계등산의 한 형태로 스키등산은 깊은 적설에서 효과적인 등산방식이다.[2]

등산장비[편집]

등산장비는 등산인원 · 능력 · 일수 · 계절 등에 따라 적절한 양이 필요하다. 모든 장비는 개인장비 · 공동장비 · 취사생활장비로 구분할 수 있다. 장비부족에서 오는 위험도 있지만 과다한 장비 지참도 좋은 일은 아니다. 특히 겨울등산이나 고산등산에서 방한장비의 선택은 준비장비의 경량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장비는 항상 손질해야 하고 완전한 사용법을 숙지해야 한다. 장비 구분은 경기능(輕技能) 장비와 중기능(重技能) 장비(이중방한등산화 · 플라스틱등산화 · 이중천막)를 대상과 계절에 따라 마련해야 하고, 성능과 사용법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장비 구분은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2]

등산식량[편집]

등산식량은 계절과 등산방식에 따라 필요한 영양가와 열량이 요구되며, 구미에 맞는 식품이어야 한다. 또한 구미는 전대원의 최대 공약수로 그 기호를 선택한다. 겨울철을 제외한 계절에는 1인당 2,500㎈, 겨울에는 3,500 ∼ 4,000㎈가 요구되며, 영양가가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 식량선택의 기본원칙은 값이 싸고 영양가가 높은 것, 각종 영양소가 충분히 들어 있는 것, 요리하기 쉬운 것, 변질되지 않은 것,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포장이 잘 되어 수송이나 휴대에 편리한 것, 버리는 부분이 적은 것, 어떠한 상태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구미가 당기는 인스턴트식품)이다. 그리고 극한 상태나 비상시에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별도 식품의 준비가 요구된다.[2]

조난[편집]

등산은 출발지인 집에서 나와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는 전 과정을 말하기 때문에 조난은 실질적인 등산 과정에서의 조난과 기타의 조난, 즉 하산 후의 문제까지도 다루게 된다. 조난은 기상돌변 · 낙뢰 · 눈사태 · 낙석 같은 타주적(他主的)인 것과 등산자 스스로에 원인이 있는 실족, 장비부족, 기술미숙, 정신적 · 육체적 결함, 판단착오 등의 자주적(自主的)인 것으로 구분한다. 타주적인 것은 절대적 위험이고 자주적인 것은 조건 있는 위험이다. 이 절대적 위험 중에는 불가항력의 위험도 있으나 이것을 잘 판단하고 예방하며 또는 극복할 때 조난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암벽조난은 1939년 4월 도봉산 주봉(主峰)에서 일어난 양정중학교 산악부원의 추락조난이다. 이에 앞선 1936년 1월 당시의 경성제국대학 산악부의 한라산 적설기등반시의 조난은 일본인의 본격적 겨울등산 조난의 1호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1948년 1월에 있었던 전택대장의 적설기 한라산 조난이 있다. 광복 후의 암벽조난은 인수봉에서 1946년에 있었으나, 그 뒤 1954년 도봉산 만장봉에서의 경기중학교 산악부원 조난이 충격적이었다.

등산활동이 왕성해지면 그 반작용으로 조난 건수도 비례해서 늘어, 1960년대 이전에는 경험자의 조난이 한두 건에 불과하다가 1960년대부터는 일반 등산자를 포함해서 10건이 넘는 조난이 발생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는 매년 20건 전후의 조난이 속출하였고 대형화되어 지역도 전국으로 확산되고 해외조난도 발생하였다. 해외에서의 대형조난은 1972년 4월 제2차 마나슬루원정대가 등반대장을 포함한 5명의 대원과 셰르파 10명 등 15명이 눈사태로 조난사하는 세계 히말라야등산 사상 두번째의 대량 조난이 있었다.

한국 대형조난으로는 1971년 11월에 강풍과 한파의 기상돌변으로 북한산 인수봉 남측면에서의 7명 조난사가 첫 암벽 대형조난이었다. 그 뒤 같은 유형으로 1983년 4월에 인수봉 취너드 코스에서 대량조난이 있었다. 1969년 2월에 한국산악회 해외원정훈련대가 설악산에서 눈사태로 인해 대장 이희성(李熙成) 등 10명이 조난 압사한 것이 적설기로서는 대형 기록이 된다. 이와 비슷한 조난사건으로는 1976년 2월의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훈련등반대가 설악산에서 훈련중 최수남 등 3명이 조난하였다. 1970년대 후반의 조난은 대체로 실족 추락사 조난으로 등산의 광역화와 더불어 전국적인 양상이 되었고, 해외조난도 예외없이 원정대 수에 비례해서 발생했다.

조난방지의 기본 7원칙

  1. 등산기술은 도약이 있을 수 없고 지도체계에 따라 책임있는 수련지도를 쌓아야 한다.
  2. 등산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3. 한 번만의 승부가 아닌 반드시 판단에 따른 후퇴결심도 과감해야 한다.
  4. 자기체력, 대원의 능력에 따른 등산코스를 택한다.
  5. 산에서의 만용과 저돌적인 용맹은 금물이다.
  6. 지략보다 침착한 행동, 장비의 적절함과 점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7. 다변성 · 다양성의 자연, 즉 기상변화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상이 조난방지의 기본이고, 조난대책으로는 리더의 자격, 능력문제, 사고 후의 구출 등의 판단과 작업요령이 적절해야 하고 이중조난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또한 사망판단은 의학적인 진단이 필요하고, 조난자의 운반은 생존자와 같이 취급하는 신중성이 요구된다.[2]

등산을 하는 이유[편집]

산에 오르는 이유 역시 가지각색인데, 그냥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다이어트나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즐기는 것, 하산의 상쾌함을 즐기는 것, 체력을 소모한 뒤 산에서 먹는 식사의 참맛을 즐기는 것, 산악회 등에서 단체 등산을 함으로써 친목을 다지는 것 등 수많은 이유가 있다.

직업적인 이유로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군인, 구조대원, 산림청 공무원, 농업 종사자, 임업 종사자 등이 있으며, 동물학, 식물학, 균류학 등의 생물학자, 지질학자 등의 일부 과학자나 고고학자 중에도 웬만한 고수급 이상의 등산 전문가들이 많다. 한 때는 사냥꾼도 이에 포함되었으나 대다수의 나라에서 밀렵을 금지함으로써 이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생활 체육으로서의 등산이 활성화된 나라이다. 수도 서울부터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외에 전국 어디를 가도 뒷산이 널려있는 지리적 특성, 산이 대부분 낮은데다 완만한 노년기 지형의 특성을 띠는 편이라 위험도는 낮은 점,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점, 외진 산길이라도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는 점, 맹수가 거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레저 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요건, 국민 소득 수준 증가에 따른 여가 욕구, 저렴한 비용 등이 주 이유라고 한다. 특히 중년층은 건강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나이이고, 외국처럼 저렴하게 골프를 즐길 수 없으니 젊은 층이 PC방이나 노래방 등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등산을 하는 것이다. 등산의 경우 한 생활권 내에 적당히 갈 만한 산이 있다면 왕복 시내 버스비와 어차피 집에 있어도 먹어야 할 밥값 정도만 챙겨가면(혹을 도시락을 싸가면) 몇 시간이고 즐길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취미이다. 물론, 등산도 장비질을 시작하고 다른 산을 찾아서 점점 멀리 가기 시작하면 저렴하진 않다.

의외로 상기의 이유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 가벼운 하이킹 수준의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특유의 군용배낭을 메고 찾는 주한미군도 많다. 특히 서울 등 대도시 주변의 산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다양한 산행이 가능하고, 자연의 경관과 도시의 전경을 한번에 즐길 수 있으면서도 여러 식당의 존재나 등산용품점 등이 즐비해 편의성이 높고, 무엇보다 접근성이 매우 높은게 장점이며, 유튜브 등에도 외국인 관광객 또는 유학생 등의 주재 외국인이 산행을 하는 영상이 상당히 많이 올라와 있는 편이다. 그리고, 대체로 편한 차림으로 오르는 외국인이 해발 4 ~ 500m 이하의 낮은 산에서도 전문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산행하는 한국사람을 목격하며 문화적 충격을 느끼는 사례가 흔하다.

회사 생활의 일환으로, 회식 하듯이 단체로 등산하기도 한다. 주말 산행, 등산이라는 이름의 워크샵 등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으로서의 효율은 빨리 달리기, 자전거, 수영과 더불어 가장 효율 좋은 유산소 운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운동선수들이 애용하는 체력 단련법이기도 하다. 때문에 운동으로써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등산으로 다이어트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험하지 않고, 높지 않으며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산부터 도전하라. 한국내 대도시의 가장 높은 산(서울 북한산, 부산 금정산, 대구광역시 팔공산, 광주광역시 무등산 등)은 해발 800 ~ 1,200m 정도인데, 이 산은 평소에 등산이나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완주 가능성이 낮다.

한국에서 등산의 난이도는 전반적으로 쉬운 편이다. 해발 2,000m가 넘는 산이 없는데다, 몇몇 산세가 험준한 곳을 빼면 대부분 노년기 지형의 완만한 산이라 등산로만 준수하면 크게 문제가 없다. 특히 등산 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특별시 근교에는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산장에서 숙박을 해야할 정도로 높은 산이 없고, 대부분의 산에서 안전 및 환경보호의 이유로 취사 금지, 야영 금지다. 일부 산은 환경 보호를 위해 정해진 등산로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울타리 같은 것을 설치해 놓기도 한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산이 간편한 차림으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는 뜻이다. 등산하기가 어려운 산이라고 해 봐야 지리산이나 설악산, 북한산 정도가 꼽힌다. 그래서 무리를 한다거나, 을 마신다거나, 어둡거나 추울 때 충분한 장비 없이 오른다거나, 정해진 등산로를 이탈하지 않는 이상 산악사고를 겪을 가능성이 아주 낮다. 초보자라면 산 깊숙한 곳에서 곰이나 뱀, 장수말벌 등의 위협을 겪을 일도 거의 없다.

또한 한국에서 유명한 산은 산자락이나 산중턱 정도에 절이 있는 경우가 많다. 절에서 식사를 제공해 준다거나, 작은 매점이 딸려 있는 경우가 있어서 산악 사고의 발생 가능성을 낮춰 준다.

비슷하게 산이 많은 옆나라 일본은 3,000m가 넘는 산이 널려있고 산세 자체도 젊은 산이라 매우 험준하며 반달곰이나 불곰이 서식하는 등 산악환경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그렇게 생활등산이 활성화된 편이 아니라서 후지산 등 일부 유명한 산을 제외하면 의외로 한국처럼 시설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입산통제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을 생각하고 아무 대비없이 일본에 등산하러 갔다가 조난당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

맑은 공기와 경치 못지않게 등산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먹는 것인데, 산 위에서 먹는 점심은 꿀맛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당일치기로 다녀온다면 주로 도시락을 싸오거나 간단한 먹거리를 입구 근처에서 사서 먹는 편인데, 한국에서는 김밥, 서양에서는 샌드위치를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막간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으로는 초코바, 오이 등이 인기가 있다. 때로는 먹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는 사람도 볼 수 있으며, 일부 산장에서는 제한된 장소에서 취사가 허용되어 고기를 구워먹기도 한다.[3]

주의사항 및 팁[편집]

무엇보다 중요한건 등산객 본인의 안전이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자. 이것만 지켜도 취미삼아 하는 등산 중 발생하는 사고는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 일단,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에 낮은 산을 정해진 탐방로로 천천히 다니면 간편한 차림에 등산화만으로도 무난하며, 대부분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다.

  • 겨울 산행은 가급적 피하자
눈, 얼음의 존재와 상관 없이, 겨울 산행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장비를 갖추면 다행인데, 대충 아무 옷이나 입고 등산화도 안 신고 올라가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늘 있다. 날씨가 나쁘다고 기상청에서 말해줘도 강행하거나 심지어 눈이 온다고 해도 무시하고 등산을 하다가 119를 부르는데 그마저도 위치파악이 어려운 일이 잦다.이에 언급된 자연파괴 문제와 함께 겨울에 자연이 회복할 시간(휴식년제)이라고 특정 구역이나 전체를 아예 못 들어오게 하기도 한다.(입산통제)
  • 굳이 가야겠다면 아이젠, 스패츠 등 방한장비를 챙기자
스패츠는 둘째치고 꼭 아이젠은 구입하자. 등산로는 여러 사람이 왕복하면 순식간에 빙판길이 된다. 경사 있는 빙판길은 어떻게 올라가기도 힘들뿐더러 내려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이젠은 여러개의 징을 체인으로 연결한 형태(체인젠)이 일반적인데 이 징이 빙판에 박혀서 하체를 안정시켜 준다. 단순히 빙판길이나 눈이 쌓인 곳만 아니라 진흙탕에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가지고 다니면 좋다. 스패츠는 신발속으로 물이 들이오는 것을 막아준다. 여러사람이 다져서 빙판길이 된 곳에서는 스패츠가 필요 없을지 몰라도 발목 깊이 이상으로 눈이 쌓인 곳에서 스패츠를 사용하지 않았다가는 신발에 물이 들어와 잘못하면 동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등산화 착용
등산화의 바닥 구조는 흙과 암반에 대한 적당한 접지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제동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보통 아웃솔(창)의 패턴이 유지만 되면 상관이 없으나 오래된 등산화의 경우 창의 패턴이 거의 지워져 있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암반에 대한 접지력은 그럭저럭 괜챦을지 몰라도 흙에 대한 접지력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고 제동력이나 추진력도 약해진다. 특히 미끄러짐이 발생했을 경우 거의 제동이 되지 않아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창이 완전히 닳기전에 새 제품을 구입하거나 창갈이 서비스를 받을 것을 권장한다.
  • 올바른 복장 착용
어두운 색이나 위장색은 되도록이면 피하자. 이건 만에 하나 조난 당했을 경우 위장색이나 어두운 색을 입었다면 구조대원 입장에선 진짜로 안보이기 때문에 구조가 늦어지고, 늦어지면 생명도 위험해진다. 등산복들이 눈에 잘 띄는 형광색 위주의 옷이 많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색이 너무 튀어서 꼴보기 싫은 것 보단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고, 정 어두운 계열밖에 없다면 형광띠나 손전등처럼 자기 위치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을 구비하는 게 좋다. 또한 산이라는 지형은 평지보다 고도가 높고 산림이 우거진 지형이라 산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온이나 습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때문에 여름철이어도 굉장히 추울 수 있기 때문에 바람막이라도 챙겨야하고, 겨울철이면 대단히 추워짐과 동시에 등산활동 때문에 체온 유지도 잘 신경을 써야해서 두꺼운 옷 한벌보단 적당한 두께의 옷을 여러벌 입어서 때에 따라 벗고 입고 하는 행동이 중요하다.
  • 정해진 등산로를 지키며 등산하기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등산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정말로 눈감고도 갈 정도로 훤한 상황이 아니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GPS 장비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아서 길을 잃는 경우가 좀 줄기는 했지만 GPS가 터지지 않거나 오류가 날 경우에는 일이 커지기 쉽다. 따라서 정해진 등로로만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 단순히 길을 잃는 정도로 끝나면 오히려 다행인데,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초목이 우거지거나 낙엽이 쌓여 있어 구덩이나 돌, 지상으로 튀어나온 나무 뿌리 등이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아 낙상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혹시 등산을 하다 길을 잃게 된다면 발 아래를 잘 살피고 다닐 것. 까딱 비등산로를 가다가 추락해서 부상이라도 당하면 오도가도 못하고 조난신고를 해도 구조대가 바로 찾지도 못하고 체온이 떨어지고 하다가 죽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농담이 아니고 가 빨리 떨어지고(금방 어둑해지고) 평지보다 기온도 낮다. 한 군데 다친 상태로 체온과 기력이 떨어지고 심리적 패닉이 오는 게 반복되면 채 몇백미터 안 되는 동네뒷산에서도 조난당해 죽을 수 있다. 실제로 크레용 신짱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우스이 요시토 역시 2009년 9월 등산하다 추락해서 사망했다.
국립공원의 경우 탐방로 지정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비법정 탐방로의 경우 자연 보호를 위해서 막아놓은 곳도 많지만 대체로는 위험해서 막아둔 곳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곳이 설악산의 용아장성 코스와 지리산의 칠선계곡 코스이다. 칠선계곡의 경우 제한적으로 탐방이 가능하지만 용아장성의 경우 탐방이 불가하다. 그러나 이 곳을 불법적으로 출입하는 산객이나 산악회가 적지 않은 실정이다. 문제는 워낙에 위험한 코스이다 보니 조난사고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조난을 당해 산악 구조대나 119를 부르는 것도 민폐지만 일단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산지에서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하게 되면 당황해서 하산하기보다는 정상이나 산등성이 방향으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구조대에게 발견되기도 쉽고, 무리한 하산에 뒤따르는 추락의 위험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함을 명심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반대로 대부분의 산악 조난 사망사고는 산 정상보다는 산줄기나 산 아래 계곡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다.
  • 국가지점번호, 지형지물 등 위치 파악하기
최근 각종 오지에 위치파악을 위해 통일된 국가지점번호를 설치하고 있다. 이것만 불러주면 위급시 구조대가 위치파악을 바로 하므로 가는길의 번호를 찍어두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한편 특정한 표시리본, 말뚝 등도 기억해서 길잃고 헤메지 말아야 한다.
  • 한파, 집중호우 등 악천후 시 절대 입산하지 말 것
눈, 비는 체온을 떨어뜨리고, 길은 미끄럽거나 진흙이 신에 붙어 무거워지거나 해서 걷기 어려워지므로 체력고갈은 기본이고 죽을 수도 있다. 눈, 비가 오면 절대 등산을 하면 안되고, 너무 재수없게 산에서 비를 만났다면 절대 많이 움직이지 말고, 상황을 봐서 빨리 하산하거나, 금방 지나갈 것 같다면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 쉬는 게 좋다. 그러나 천둥 소리가 들린다면 무조건 하산해야한다. 낙뢰 칠때 나무 밑에 있는건 평지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이며, 산속에서 낙뢰는 등산로가 있는 능선과 정상에 집중되고, 돌산일 경우 전기가 돌을 타고 이동해서 낙뢰에서 멀리있던 등산객이 감전된 사례도 있다. 등산 중 천둥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하산한다.
만약 하산하지 않을 경우, 필히 움푹 패인 지형이나 계곡을 확인하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비가 내릴 경우 그런 곳에는 금세 물이 차오르곤 한다. 이런 지형의 경우 침식에 의해 돌이 튀어나와 있는 경우도 많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에 미끄러져 낙상할 경우 어디 하나 부러지기 딱 좋다. 그 이후에는 체온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한다. 얇은 것 여러 겹이 좋으므로 어찌되었건 덮을 수 있는 건 다 덮어야한다. 우의, 돗자리, 수건 등 덮을 수 있는 것은 다 덮고 지면과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여 열손실을 줄이자. 특히 머리는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비중의 60%를 차지하므로 무조건 감싸야한다.
만약 비가 내려서 하산마저 위험해지면 비가 그칠 때까지 주변 산장 등 비를 피할만한 장소에 들어가있어야 한다.
  • 적당한 페이스 조절하기
일반적으로 본인의 체력을 10으로 놓으면 올라가는데 4, 내려오는데 3, 비상용 3 정도로 배분하는 것을 권한다. 간단히 말해 오르는데만 체력의 절반 이상을 썼다면 위험하다. 특히 혈기왕성한 20 ~ 30대 남성이나 초보자는 초반부에 별로 안 힘들다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침없이 올라가다가 탈진하여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잦으므로 자신의 체력과 체격을 고려하여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여 체력을 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죽하면 소방방재청에서 산악사고의 가장 큰 원인을 사고는 자신의 체력에 맞지 않는 무리한 산행과 부주의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할 정도다.
  • 야간이나 너무 이른 새벽은 피하기
야간산행은 너무나 어둡기에 실족해서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밤에 산에서 만나는 사람이 간첩이나 탈주범, 해외에서는 총기강도일 경우, 또는 곰이나 멧돼지, 들개 같은 야생동물을 만난다면 등산객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기에 야간산행은 피해야 한다. 다만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산행시간이 오래 걸리는 산은 당일치기로 오르려면 어쩔 수 없이 야간산행을 해야할 때도 있다. 이럴 땐 꼭 헤드랜턴이나 손전등을 가져가자. 또한, 야간 산행은 웬만하면 여러 번 다녀서 잘 알고 있는 길인 경우에만 시도하는 것이 권장된다. 잘 모르는 길인 경우, 국립공원처럼 돌, 울타리, 계단 등으로 길을 분간하기 쉽게 정비되지 않은 경우라면 헤드랜턴으로 시야를 확보하고 있어도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고, 이럴 경우 지도 앱이 등산로 안내를 제공하지 않는 산인 경우 GPS를 켜고 있다고 해도 길을 찾지 못해 그대로 조난 당첨이다. 한라산처럼 이른 새벽에 등산해야 하는 산도 있긴 하다.
늦은 오후엔 출발을 삼가며, 일몰 시각을 미리 확인하여 그전에 내려오도록 계획을 세운다.
  • 단독 산행은 절대 금물
산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이 도사릴 지 모르는 위험한 장소이며, 으슥한 곳에서 살인, 강도, 납치 등 흉악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함께 산행을 할 경우 조난을 당하더라도 같이 등산하는 일행이 신속하게 신고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구조할 여지가 있겠지만, 혼자 산행을 하던 중 특히 자기가 직접 신고를 하지 못할 정도로 다치거나, 의식을 잃게 될 경우 꼼짝 없이 죽을 수 있다. 게다가 법정등산로 중에도 숙련된 산악인이라던가 운동신경이 굉장히 좋은 경우가 아니면 오르기 어려운 코스도 간혹 존재하는데, 초보자가 혼자 이런 데에 잘못 들어갔다가 길을 잃거나, 오도가도 못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혼자서 산에 가는 건 대낮이더라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절대로 추천하지 않으며, 가족·친구 등 지인을 대동하여 등산해야 안전하다.
  • 만일에 대비한 비상 물품, 식량 준비
해발 4 ~ 500m급의 비교적 낮은 산을 등산한다 해도 물과 간단한 초코바 등의 비상식량은 필수로 요구된다. 갈증은 대단히 빠르게 찾아오며,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행위는 체력을 빠르게 소모한다.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요즘은 구조대에 알리기 위해 일정 거리마다 신고에 쓸 수 있는 좌표를 표시해 두는 산이 많아졌긴 하나, 산악구조대 관련 방송을 보면 아무리 지척에 있는 산이라도 구조대가 헬기를 띄우지 않는 이상, 근처에 헬기장이 없다면, 직접 등산해서 구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빨라야 1시간 이상 걸린다. 하산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구조되어 병원에 가는 데는 2시간이 넘게 소요된다. 단 김밥, 만두 같은 수분이 많은 음식은 비추한다. 가급적이면 샌드위치나 같은 건조 식품으로 가져간다.
  • 고산 등반 자제
한국의 산은 해외에 비해 고도가 낮아 상관없지만, 이보다 훨씬 고도가 높고 산소도 적은 고산(히말라야, 안데스, 알프스 등)을 등반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고산병에 시달리게 되고 산소 부족으로 인해 뇌세포에 손상을 일으켜 장기적으로 뇌 건강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 주류 소지 및 음주 금지
지극히 하면 안 되는 상식이다. 일반 길에서 '틱'하고 걸리면 넘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양옆이 산비탈에 온갖 날카로운 돌이랑 나뭇가지가 있는 길을 술 취해서 걸어가다가 '틱'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 도 있다.
  • 안전한 등산을 위한 준비 운동과 자세
등산하기 전 발목을 풀어 주고 발꿈치를 땅에 떨어지게 걷는 대신 발바닥부터 발가락까지 전부 사용해서 걷는다. 이렇게 걸으면 미끄러지고 넘어질 확률이 줄어든다. 미끄러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이유는 의 구조상 발바닥이 발뒤꿈치에 비에 넓기 때문이다. 의 무게 중심은 당연이 앞쪽으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 비유하자면 산을 타는 염소를 따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방법은 남자보다 대다수의 여자가 익숙해지기 쉬운데 이유는 평소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이힐이 높을 수록 발가락으로 걸어다니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산이나 오르막길을 걸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평지에서 했다간 남들 500미터 걸을 때 250미터도 다리가 아파 못 걷게 되니 조심한다. 굳이 연습하자면 울퉁불퉁한 돌멩이 위에서 발가락과 발바닥으로 서있는 걸 연습해 본다. 아니면 공원에 있는 여러 모양의 돌이 박혀 있는 지압용으로 만든 길을 돌만 밟으면서 지나가면 된다.
  • 짐 최소화
어깨를 가볍게 하는 것이 좋다. 배낭에는 필요한 물과 약간의 식량 이외에는 손전등, 휴대폰, 간단한 응급도구 등의 비상시를 대비한 필수물품만 구비한다. 불필요한 짐이 많아서 등이 무거우면 부상의 위험이 커지며 체력 소모도 더 많아진다. 만일 넘어질 것 같으면 몸을 최대한 옆으로 돌려 팔 부분으로 해서 옆으로 넘어져야 크게 다칠 위험이 줄어든다.
  • 맹수 및 독충, 독버섯 등의 야생 동식물
멧돼지고라니 등이 인가에도 버젓이 출몰하고 야산에 많은 개체가 서식 중이니 주의 해야한다. 심지어 해외 등산일 경우, 멧돼지보다 차원이 다른 맹수도 얼마든지 출몰할 수 있다. 그리고 늦은 봄철부터 시작하여 가을까지 주로 번성하는 곤충과 일부 식물, 버섯 등은 위험한 독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벌집을 잘못 건드리거나 가까이 접근해서 벌에게 쏘이거나, 한국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독사인 까치살무사, 쇠살무사 등의 을 실수로 밟거나 해서 물리는 사고가 매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독에 반응하는 알레르기가 있다면 매우 치명적일 수 있으며,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으므로 벌이 둥지를 트는 인적 드문 야산이나 뱀이 살기 좋은 환경인 계곡이 흐르는 산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버섯 또한 관련 지식이 없다면 절대로 함부로 만지거나 먹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화려한 색깔을 가진 버섯이 독버섯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상당수의 독버섯은 식용 버섯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평범한 외관을 하고 있어 식용 버섯과 구분이 매우 어렵다. 식용 버섯으로 오인하여 섭취하였다가 일가족이 몰살당했다든가, 심지어는 식당에서 독버섯을 요리에 썼다가 손님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심지어 일부 독버섯은 만지는것조차도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섯 채집가나 균류학을 전공한 전문가조차 독버섯을 오동정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므로, 일반인이 독버섯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보면 좋다. 가장 좋은 예방법은 야산에서 나는 버섯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다. 설령 식용 버섯을 알아보고 산에서 나는 송이버섯 같은 값비싼 버섯을 덥썩덥썩 채취했다가 그 지역이 개인 사유지였을 때에는 다른 의미로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냥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 전자기기 사용 자제
등산 중에 전자기기, 특히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걷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삼가야 할 행동이다. 잘 정비된 인도에서도 조심해야 하는 행동인데, 하물며 길이 이리저리 꺾이고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까딱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져 심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 전자기기를 사용하려면 통행에 방해가 안되는 선에서 멈추고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3]

산악인[편집]

고산 등반가[편집]

  • 고상돈
  • 박영석
  • 엄홍길
  • 오은선
  • 고미영
  • 지현옥
  • 라인홀트 메스너
  • 조지 말로리
  • 예지 쿠쿠츠카
  • 율리스텍
  • 에드먼드 힐러리
  • 전길남
  • 한왕용
  • 스티브 하우스
  • 데니스 우룹코
  • 크지슈토프 비엘리키
  • 보이텍 쿠르티카
  • 반다 루트키에비치
  • 시모네 모로
  • 헤르만 불
  • 김창호
  • 허영호
  • 김홍빈
  • 니르말 님스 푸르자[3]

스포츠 클라이머[편집]

  • 고미영
  • 김자인
  • 손상원
  • 박희용
  • 크리스 샤마
  • 아담 온드라[3]

등산 유튜버[편집]

  • 산 속에 백만송희
  • 이시영(배우)
  • 산타는 JSun[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등산〉, 《위키백과》
  2. 2.0 2.1 2.2 2.3 2.4 2.5 등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3.0 3.1 3.2 3.3 3.4 등산〉,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등산〉, 《위키백과》
  • 등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등산〉,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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