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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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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시의 불국사
양산 통도사

(寺)은 승려와 재가신도가 모여 수행과 의례 등을 통해 불교의 교법을 구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사원·사찰·가람·정사·승원이라고도 한다.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은 승려들은 원래 거주지가 없었으나 석가모니가 우기에 바깥 출입을 삼가는 규율을 정해 안거라는 공동생활을 하게 하면서 안거 장소로 절이 생겨났다.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 수행을 위한 도량, 교육·포교를 위한 전당으로 정착되었다. 한국의 절은 조선시대 이후 주로 산지에 건립되었으며, 가람배치에서는 불전과 탑을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배치법이 골격을 이루었다.

개요[편집]

절은 불교건축물로, 승려가 상주하며 불상을 모시고 불자들이 종교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곳을 말한다. 사찰(寺刹), 사원(寺院)이라고도 하며, 드물게 정사(精舍)라고 하기도 한다.

절이란 말은 순우리말이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 최초의 불교 신도였던 모례(毛禮)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있다. 모(毛)를 고대 신라어의 관례대로 뜻인 털로 읽어 털례→털→절로 바뀌었다는 것. 한잣말로 절을 가리켜 사찰(寺刹), 도량(道場)이라고도 한다. 도량은 한자 그대로는 '도장'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절을 가리킬 때에는 도량이라고 읽는다. 다르게 읽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원음인 '댱'이 '쟝(장)'으로 구개음화될 때 오히려 /ㄷ>ㄹ/ 교체를 겪은 듯싶다. 중국 오나라 발음이 들어왔다는 카더라도 있다. 가람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 단어는 범어(산스크리트어) 상가라마(Sangharama)를 번역한 승가라의 준말로 승려들이 살면서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찰 건축물들의 배치를 가람배치라고 하며, 사찰의 시대와 성격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보통 탑과 금당의 배치에 따라 가람배치를 구분하는데, 시대별로 따져보면 탑과 금당 중 어느 쪽을 더 중요시하는가 등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절은 산속에 자리 잡고 그 곳에 은둔하며 불경을 공부하는 수도원의 성향이 짙은데, 이는 역사적인 이유로 도심 사찰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심 내부나 평지의 절들은 대다수가 향교로 용도가 변경되거나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일부는 산으로 이전했다. 서울만 해도 사대문 안쪽에는 절을 만들 수 없었고 이런 숭유억불 철폐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사찰이 조계사다. 강남봉은사처럼 원래 옛날에는 산사였다가 도시가 확장하면서 시가지와 붙어버린 경우도 전국에 몇 있다. 반면 불교가 국교였던 조선 이전 삼국시대와 남북국, 고려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수도와 주요 도심 내부에 대규모 국찰이 여러 곳 있었고, 중요한 교통의 요지에는 역원을 겸하거나 운영하는 사찰이 설치되었다. 이런 사찰들은 맹수나 도적을 막기 위해 요새화하기도 하였다. 당장 옛 수도였던 경주시나 부여군에 가 보면 황룡사나 사천왕사, 정림사 같은 대규모 절들의 터가 산중턱이 아니라 옛 도시 중심지에서 가까운 평지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절은 대부분 도심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런 산사는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불교 문화권과 구분되는 특징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물론 절들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있다는 점은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찾아가기 힘들다는 의미다. 조선왕조가 절을 산으로 몰아낸 것 자체가 직접 불교를 때리지 않고, 신도들이 찾아가기 힘들면 점차 안 가게 될 테니 이렇게 저절로 불교 교세를 축소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반 현대식 건물 형태로도 많이 만드는 교회성당 건축에 비해서, 절은 전통 한옥의 형태나, 적어도 한옥 흉내는 내서 만드는 곳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기독교에 비해 한국에서 존재했던 역사가 길다 보니 유명하고 중요한 절들은 보통 신라의 원효, 자장, 의상 등까지 거슬러 올라가 1천년이 넘는 기원을 가지고 있고, 현대에 새로 만드는 절이나 기존 절에서 새 건물을 만들 때도 한옥 형태로 만드는 등, 한국인들 사이에서 절 건축에는 한옥이 어울린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절을 구성하는 건축물들을 다 갖추지 못한 작은 절이나 개인/소수의 승려가 개인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은 작은 절은 암자, 혹은 토굴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무교의 신당을 암자라 부르기도 해서 현재 도심에 ○○암이라고 씐 건물들 혹은 시설은 대부분 무속인들의 신당이다. (만다라 문양이나 빨간색과 흰색 깃발이 있는 암자) 근래의 도심사찰은 포교당, 포교원, 혹은 (도심)선원 등의 말을 쓴다. 원래 불교의 암자는 대부분 근접한 큰 사찰을 본사로 두고, 큰 절에 소속된 말사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식적인 암자의 다수는 도심사찰인데, 이중에는 대형 빌딩에 입주한 곳도 있다.

말사는 본사에 소속된 절로, 현재 한국 조계종에서는 지역 교구마다 중심사찰을 정해 본사로 하나씩 두고, 가까운 지역의 다른 절들을 형식상 소속된 말사로 두는 식으로 관리한다. 조계종 소속의 모든 본사들을 총괄하는 곳은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이다.

대부분 산사 위주인 한국과는 정반대로 일본에서는 "절 갯수가 편의점 갯수를 압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심지대에 굉장히 흔한 편이다. 실제로 '편의점보다 더 많은 종교시설'이라고 말하면 각각 한국에서는 개신교회를, 일본에서는 절을 언급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이런 팩트만 갖고 한국을 개신교 국가로, 일본을 불교 국가로 단정지을 순 없지만,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꽤 크다. 그렇다고 일본에 산사(야마데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엔랴쿠지(延暦寺), 곤고부지(金剛峰寺) 등 각 종단의 본산급 사찰들은 대부분 히에이산, 고야산처럼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다. 일본 신토에서 지금처럼 신을 모시는 고정된 신사를 짓고 신도들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형태를 갖춤도, 불교에서 절을 짓고 신도들이 참배하는 신앙양태에 영향받은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는 신토에서도 그냥 특정지역을 성역으로 지정하고, 특별한 날에 신이 강림하도록 하는 형식이었다.

중국 도교도 불교 영향을 받았다. 물론 불교 전래 이전에도 자체적인 교단 조직/기관을 갖추었지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구조가 비슷해졌다. 한국 무교의 신당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으면서 불상을 모시거나 절과 비슷하게 꾸미는 경향이 생겼고, 절 내부로 들어가 삼성각 등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물론 절에 소속되지 않은 신당도 많다. 오히려 현대에 접어들면서 절 주변에 장승이나 솟대를 설치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현재 조계종의 종헌상 승려가 무속인과 결탁해 사찰/신도 운영을 하면 승적박탈이다.

문화재[편집]

산속이나 풍광 좋은 곳에 길게는 천 년 이상 오랜 역사와 함께 남은 사찰이 많다. 서울에서는 봉은사조계사 정도가 예외다. 봉은사는 수도산을 끼고 있으나 지금은 강남 한복판에 떡 하니 있는 절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삼성역 주변이 논밭이었으니 산속에 위치했으나 개발로 역전한 사례다. 산사는 문화재로 지정된 곳도 상당수 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을 봐도 2019년 기준 13건 세계유산 중에서 5건(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경주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절이거나 절이 다수 포함된 곳이다.

특히 산 어귀나 등산로 입구, 중간쯤에 있는 절이 많아 일반 신도들 외에 등산객들도 많이 찾는 편. 템플 스테이의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파생된 것이 문화재 방문보다는 등산을 목적으로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등산로상에 있는 문화재 관람료를 강제 징수하는 문제이다. 특히 설악산 신흥사지리산 천은사가 정말 욕을 많이 먹는다.

1962년부터 문화재 관리비용 충당을 목적으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국립공원들이 지정되면서 국립공원 입장료와 별개로 징수하였으나 개별징수의 불편을 이유로 차츰 통합되어 87년부터 모든 국립공원에서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를 통합징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사찰 측은 통합징수의 법제화를 요구하였으나 각각 관리주체가 되는 법률이 다른 관계로 법제화까지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행정지침 수준에서 합의하여 시행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문화재 관람의사가 없이 등산이 주 목적인 국립공원 탐방객들에게 문화재 관람료를 강제 징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여 다시 분리징수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사찰 측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끊임없는 민원과 집단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강제 징수한 문화재 관람료를 부당이익으로 보고 반환소송을 하여 승소한 사례들이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 논란에서 빠지고 싶었는지 2007년부터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하였으나 사찰들은 여전히 사찰 입구가 아닌 등산로 입구에서 독자적으로 문화재 관람료 징수를 계속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오래된 문화재의 보존에는 지속적으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나 문화재 관리가 징수의 명목이라면 마땅히 그 수입은 문화재청과 같이 문화재를 관리하는 책임기관이 취합하여 적재적소에 배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전국 유명 산의 등산로 요지에 있는 대형 사찰들의 수입은 연간 10억 원을 넘으리라 추정하지만, 정확한 금액이나 사용내역에 대해서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입장료 문제에 반감이 심한 다른 이유도 있다. 하다못해 사찰의 입구에서 징수하는 형태라면 형식상으로나마 사찰 입장료 및 관람료라고 이해할 여지가 있는데, 특히 등산하러 전국에서 많이 찾아가는 명산에는 대놓고 등산객 주머니를 노리겠다는 듯이 그냥 도로만 있는 곳에 매표소를 설치하고 요금을 받는 형태가 있어서 마치 날강도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사찰 측에서는 이에 대해 "원래 사찰의 사유재산이던 산을 국가가 강제로 개방하여 국립공원으로 만들었으니 이건 우리가 받는 정당한 출입료"라는 입장이다. 그 근거로 일반적으로 절의 입구부터가 사찰의 사유재산이고 그 바깥의 산은 국가 소유라는 인식과 다르게 바깥의 산도 사찰의 사유지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그럼 정부와 협상해서 정부에서 돈을 받고 사유지 개방을 하는 협상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과, 조선시대때는 사유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산을 일제시대때 사유지로 인정받았다는 역사를 지적하며 그 소유권이 정당하게 취득한 것이냐는 반박을 하는 입장이 있다.

성립과 발전[편집]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인도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그들은 독신생활을 지키면서 걸식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하였다.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숲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서 좌선하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을 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 기후의 특성 때문에 우기에는 이와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원시불전(原始佛典)에 속하는 『사분율 四分律』의 기록처럼, 장마철에 외출한 불교수행인들이 질퍽해진 땅 위에 나온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관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교단이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이라는 이념적 이유에서 우기의 석달 동안 바깥 출입을 삼가는 것을 규율로 정하게 되었다.

이 여름 석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인도의 경우는 여름철만 안거에 해당하지만 중국 · 한국 등 북방성 기후의 국가에는 겨울철에도 석달의 안거기한이 있다.

안거를 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일은 규율을 정하는 것과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규율을 정하는 일은 부처님이 직접 제정하였지만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경제력 있는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이에 불교신도들은 부처님과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안거할 장소를 자발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집단거주의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수닷타(Sudatta)라는 장자(長者)가 온 산을 온통 금으로 덮어서 마련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오는 기원정사(祈園精舍) 등이 있다.

이들 정사는 안거를 지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불교교단의 공동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당시의 절은 단순한 공동주거지의 성격을 띠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서 그 성격이 승화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의례였던 포살(布薩) · 자자(自恣) · 가치나(迦絺那) 등, 주로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형식으로 된 이들 의례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 행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임의 근거지가 되었던 절은 규모나 숫자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기원 전후에는 불탑(佛塔)의 건립이 유행하여 새로운 사찰기능을 갖게 된다. 특히 조형문화예술품 등 불교건축의 찬연한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절은 그 목적과 지역적 여건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의 절이다. 이는 정사라고도 하는데, 주로 승려들의 공동주거지와 법회의식의 집행처로 사용된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비하라(vihara)라고 한다.

둘째는 전루(殿樓)로서, 넓은 형식의 누각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인도나 동남아시아 불교사원에 많은데, 12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첨탑(尖塔)의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셋째는 굴원(窟院)으로서, 자연 또는 인공으로 석굴을 파고 수도하는 도량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이 가운데에서 정사와 굴원만이 불교사원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전루는 정사에 포함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시대가 흐를수록 대건축군(大建築群), 조직화된 승원(僧院)으로 발전하게 되며, 인도의 나란다(Nālandā), 인도지나(지금의 캄푸치아)의 앙코르와트(AngKor Wat), 한국의 총림(叢林) 등 대본산(大本山)이 그 대표적 실례가 될 수 있다.

석굴군(石窟群)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잔타(Ajanta) · 엘로라(Ell○ra) 등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유지(遺址)도 있다. 이들 대규모의 석굴사원이 중국의 경우에는 운강(雲岡)석굴, 천룡산석굴 등으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석굴암이 그 대표적 예이다.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한(漢)나라 때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여 접대하고 머물게 하는 곳을 사(寺)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한나라 때 이역(異域)의 불교승려들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당시, 홍로사(鴻臚寺)라는 관청에 그들을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을 'ㅇㅇ寺'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인 67년이다. 가섭마(伽葉摩) · 축법란(竺法蘭) 등이 불상과 경문을 싣고 중인도에서 뤄양(洛陽)으로 들어오자, 명제는 크게 환영하여 뤄양성의 서옹문 밖에 정사를 지어 거주하게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 하였다.

원래 사원이라 할 때의 '원(院)'은 회랑이나 담장을 둘러친 '원(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을 같은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사'를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사'는 절 전체를 가리키며, '원'은 '사' 가운데에 있는 별사(別舍)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암(庵)'은 흔히 산속에 있는 작은 집 · 토굴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토굴 등 수행처를 수(藪)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에서 사원을 '절'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몇 가지의 설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질 때, 아도(阿道)는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郡)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말로는 '털레의 집'이 되어, 그 '털'이 '덜→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속설로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절'로 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절을 '데라'라고 하는데, 팔리어(Pali語) 테라(Thera)에서 왔다는 설과 '털레의 집'에서 연유된 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테라는 장로(長老)를 뜻하기 때문에 큰스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요약하면, 절은 불상과 당탑(堂塔)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수행하고 교법을 가르쳐 펴는 기능을 가진 집이다. 지역과 기후에 따라 그와 같은 기능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변형이 있을 뿐, 본질적인 면에서 정사 · 가람 · 사원 · 절은 모두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절은 고구려불교가 도입된 이후 375년( 소수림왕 5)에 세워진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년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음). 신라의 경우에는 아도가 선산지방에서 최초의 포교활동을 한 모례의 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빚은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를 효시로 보고 있다.

이 흥륜사지는 오릉(五陵) 곁의 절터로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이곳이 영묘사(靈妙寺)이고, 영묘사 터가 흥륜사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고대 우리나라의 절은 주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절에 따라서는 수행 또는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한 입지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른 특징적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기능별로 볼 때 우리 나라의 절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이다. 그것은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넓은 사역(寺域)에 걸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의 원당(願堂)주3이나 국찰(國刹)주4 등이 많고, 동시에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대중적 불교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둘째는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이다. 이것은 신라 말엽에 들어 온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주로 수행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녔다. 이와 같은 사원은 현재까지도 수도도량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셋째는 천연이나 인공의 석굴에 사원을 건립하는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암벽을 뚫어서 만들거나 석재로 지어서 거주장소나 법당을 세우게 되는데, 주로 기도도량의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입지조건에 따른 성격별 분류이고, 각각의 절은 모두 전문 수행인과 일반 수행인을 위한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즉 그 사찰의 특성에 따라 참선 · 염불 · 간경(看經)주5 · 기도 등 특정한 불교신행을 집전하는 곳이 된다.

한국 불교의 전문수행은 주로 현교(顯敎) · 밀교(密敎) · 참선(參禪) · 염불(念佛)의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절은 이 네 가지의 분류에 의하여 수행하는 전문도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교사찰은 주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한다는 뜻으로서 강원(講院)을 갖추게 된다. 밀교사찰은 주문을 중심으로 수행하면서 만다라(曼茶羅)의 구조에 따라 독특한 불상 및 형태를 갖추며, 참선도량은 선원(禪院)을, 염불도량은 왕생극락(往生極樂)을 염하는 염불당을 갖추게 된다. 이 네 가지 외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율원(律院)을 갖춘 도량도 있다.

한국의 절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수행도량을 모두 갖춘 곳도 있고, 한두 가지만을 전문적으로 닦는 곳도 있다. 특히, 선원과 강원 · 율원을 모두 개설한 절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예로는 해인사 · 송광사 · 통도사 · 수덕사 등이 있다.

또 불교의 삼보(三寶: 佛 · 法 · 僧)를 사찰에 대비하여 비유하기도 한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했다고 하여 법보(法寶)사찰, 송광사는 지눌(知訥) 이래 16국사를 배출했다고 하여 승보(僧寶) 사찰로 존숭받고 있다.

한국 절이 주로 산지가람형인 까닭은 몇 가지 사상적인 특색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인의 산악숭배 경향이다. 명산의 봉우리마다 불보살(佛菩薩)의 명호가 붙여지고 그곳을 골라 절터로 잡는 것은,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사상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금강산 법기보살(法起菩薩)에 관한 신앙과 풍수지리 등 도참설(圖讖說)의 영향으로, 마침내 이 땅을 불국토(佛國土)라고 믿는 독특한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를 들 수 있다. 즉, 일본과 경계선이었던 동래에 범어사를 세우고 토함산에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현재 석굴암)를 창건한 것이나,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 태백산 등에 절을 건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화되는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의 경향 때문이다. 즉, 불법을 세속의 계도(啓導)라는 입장에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탈속의 경지가 존중되었고, 나아가서는 자연주의적 고대 불교의 인간관이 절을 자연과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산속에 건립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당우 및 가람 배치[편집]

절은 수행 ·교육 ·포교의 3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당우가 건축되었다. 당우는 불전(佛殿) ·강당(講堂) ·승당(僧堂) ·주고(廚庫) ·욕실 ·동사(東司:측간) ·산문(山門)이라는 칠당가람(七堂伽藍)의 원칙에 따라 건립되었다. 불전은 본존불(本尊佛)과 보살 및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봉안하는 사찰의 중심건물이다. 이 불전의 명칭은 종파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주존불(主尊佛)을 비로자나불로 하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였다. 극락전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미륵전(彌勒殿),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는 약사전(藥師殿), 석가모니의 일생을 팔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봉안한 팔상전(八相殿), 16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원통전(圓通殿),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신 문수전(文殊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이들 당우와 함께 사찰의 중요한 구조물은 탑이다. 그러므로 가람배치는 탑의 배치형식에 따라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배치한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와, 2개의 탑이 불전앞 동서대칭으로 세워지는 쌍탑식(雙塔式) 가람배치가 있고, 1개의 탑에 금당(金堂)이 3일 때에는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라고 한다.

절의 건조물[편집]

주의사항[편집]

대부분의 전통사찰과 유사 형태를 띈 곳에서는 별도의 허가 또는 지시가 없는 한 법당으로 들어가는 중앙 계단의 이용이 금지되어있다. 중앙 계단은 "어간문"이라 하여 주지스님, 큰스님 또는 특정 법회를 집전하는 스님만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멋도 모르고 이용하다가는 눈총을 받기 쉽다.

법당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 특히 법회 진행 중 사진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별도의 허락이 없이 촬영이 허가된다 하더라도 플래시 사용은 금지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법당 내부 사진들은 해당 사찰 관계자 혹은 신행단체 관계자가 촬영하여 배포한 거 아니면 언론사가 해당 사찰에 허가를 받아 촬영한 경우가 많으며, 그 외에는 해당 사찰에서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 경우다. 단, 법당 외부 사진 촬영은 대부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주문[편집]

내소사 일주문

절이 시작되는 곳으로 재가(세속 세상)과 출가(부처님의 세상)를 구분하는 경계선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기둥을 일렬로 한 줄 세워 지붕을 얹은 것을 일주문이라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기둥이 하나로 보인다. 앞에서 보면 기둥이 2개(혹은 4개)인데 옆에서 보면 기둥이 하나로 보이게 만든 이유는, 불계와 속세가 만나는 경계에서 양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미분별과 비분리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일주문의 형식을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부른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양식이라는 것. 일본은 해탈문이 적은데, 고려문이나 일주문의 흔적이 나오기도 하는 모양. 해탈문에는 절의 이름이 쓰여진 현판이 걸린다. 보통 남쪽 가장 외곽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서 남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상징적인 문이라 문 좌우가 담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문짝도 원래 없이 항상 열려있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사찰들은 보통 일주문에 이 절이 어느 산 어느 절인지 이름을 쓴 편액을 걸어놓는다. 보통 가로 1줄로 'ㅇㅇ산 ㅁㅁ사'라는 형식으로 절만이 아니라 절의 진산(鎭山) 격인 산의 이름을 앞에 함께 쓰는 관습이 있다. 절을 지켜주는 산신을 우대하는 의미라고 한다. 불교임에도 민간신앙인 산신을 언급하는 점에서 불교가 민간신앙과 섞여 민중에 녹아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위 범어사 일주문에도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라고 한자로 쓴 편액이 있다.

당간지주[편집]

절 바깥에 설치되며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 불리는 깃발을 걸어두는 용도로 쓰이며 신성한 영역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의미도 있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붙들어 고정, 지탱하는 기둥 2개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천이나 종이로 만든 당과 나무로 만든 당간은 대부분 사라진데 반해, 당간지주는 돌로 만든 경우가 많아 현재에도 많이 남아있다. 대부분은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드물게 당간을 돌이나 철로 만든 경우가 있어 같이 남아있는 사례가 있다.

당간지주와 비슷한 것으로 괘불(掛佛)을 거는 용도의 괘불지주(掛佛支柱)라는 것도 있는데 당간지주와 생김새가 매우 비슷해서 개념을 혼동해 쓰기도 한다. 차이점은 당간지주는 절 바깥에 1쌍만 있지만 괘불지주는 법당 앞에 2쌍을 세운다는 차이가 있으며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사람보다 큰 반면, 괘불지주는 사람보다 작은 편이다. 예외적으로 경주 불국사의 당간지주는 절 밖에 2쌍이 있는데 두 당간지주의 조형미가 조금 달라 한쪽이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치 측면에서 보면 문화재로 지정된 당간지주는 다수가 있는 반면 괘불지주는 '청도 적천사 괘불탱 및 지주'(보물 제1432호)가 유일하다.

당간과 관련된 유물로 '금동 당간 용두'(보물 제1410호)가 전하는데 이것은 간두(竿頭)라고 해서 당간 맨 위에 두어 장식하는 용도이다. 양평 세미원의 수련 연못에 이 용두가 장착된 당간지주의 형상을 본따 만든 분수가 있다.

천왕문[편집]

사천왕을 모신 문. 해탈문에 이은 2번째 문. 이 때문에 중문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 문에 들어가면 사천왕 조각상이 왼쪽에 2좌(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오른쪽에 2좌(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있는 구조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네 하늘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이므로 보통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근육질로 묘사하며 자세도 위압적이다. 크기도 3~6m로 사람에 비해 거대하게 만든다. 마구니, 잡귀를 발로 밟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대의 절들을 보면 회랑으로 금당 주변을 막아놓기 때문에 반드시 이 중문을 지나야 했다. 한국에서는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이 웬만한 제대로 된 절에는 거의 반드시 입구에 세워져 있지만, 현 일본이나 고대 한반도에서는 이천왕이나 금강역사 2좌가 있는 금강문을 세운 사례가 일반적이다. 예외적으로 구례의 화엄사, 하동의 쌍계사에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둘 다 있다. 둘 다 있는 경우 먼저 금강문을 지나 오르면 천왕문이 등장한다.

이 곳에서도 법당을 향해 합장반배를 한다.

해탈문[편집]

해탈문(解脫門) 혹은 불이문(不二門)은 절의 3문 구조 중 마지막 문이다. 불이(不二)는 말 그대로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의 진리, 즉 해탈을 의미하기에 해탈문이나 불이문이나 같은 뜻이다. 본래는 경사진 곳에 문을 만들어 들어갈 때는 서서 들어가고, 나올 때에는 몸을 숙이면서 나오는 구조인데, 부처님께 숙이면서 들어오라는 의미와 어두운 곳을 지나고 밝은 빛을 본다는 뜻을 지닌다.

누(樓)[편집]

유가사 범종루

3개의 문을 통과하면 이전 문들보다 규모가 큰 건물이 나온다. 1층은 나무기둥만 있고 실제 공간은 2층인 건물이며, 방문객은 나무기둥만 있는 1층을 걸어서 통과하게 해 놓은 곳이 많다. 여길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절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마당이 시작된다. 건물 이름은 범어사 보제루나 부석사 범종루처럼 'xx루' 형식이다. 절이 아닌 촉석루 같은 누각은 경치 감상용이라 문이 없지만 절에 있는 누는 모임을 가지는 공간이라 문을 달아 놓는다.

범종은 이 누 옆에 종루 혹은 종각을 두고 거기 달아놓는 게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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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상이나 보살의 상들을 모셔 놓은 건물들을 전이라 하고, 그 외에 보살보다 아래의 존재를 모시는 각종 건물들은 각이라 한다. 불상을 모셔놓은 전이 그 절에서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해 있다. 금당이라고도 한다.

절에서 주불로 어떤 부처를 모시느냐에 따라 중앙이 되는 전의 이름이 다르다. 석가모니를 모신다면 대웅전,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신다면 극락전ㆍ극락보전ㆍ아미타전ㆍ무량수전ㆍ안양전(安養展, 안양은 극락의 다른 표현), 약사여래를 모신다면 약사전, 대일여래(비로자나불)를 모신다면 대적광전ㆍ대광명전ㆍ비로전이라고 부른다. 특이한 사례로는 건물에 석가모니의 일생을 담은 팔상도를 그려 팔상전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 외에도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ㆍ원통전, 지장보살과 명부시왕, 지옥의 현왕을 모신 지장면ㆍ명부전, 아라한을 모신 나한전, 절을 처음 세운 스님을 모신 조사전 등이 있다.

여기서 절의 규모나 성격에 따라 일부 전각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절의 중심격인 대웅전이나, 윤회 교리의 핵심인 사후세계를 다루는 명부전은 거의 반드시 존재하는 편이다.

전이 없고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절도 있는데,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그렇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적멸보궁은 그 부처에게서 나온 사리가 있는 곳이므로 불상을 굳이 두지 않는 것이다.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통도사가 바로 이런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면서도 불상을 두는 사찰들도 현대에 생겼다. 진신사리를 불상 내부에 복장 형식으로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전[편집]

일반적으로 절의 핵심인 건물. 다만 적멸보궁에서는 얘기가 좀 다르다. 절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당이며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고도 하고, 석가모니를 깨달음의 왕이라 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고도 한다. 화엄사의 경우는 대웅전과 각황전이 따로 있다.

대부분의 절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금당(金堂)이라고도 하나, 일부 절은 특별히 모시는 부처나 보살이 있고, 그에 따라 적광전이나 극락전이 금당이 되기도 한다. 화엄종 계열은 적광전, 법상종 계열은 미륵전, 정토종 계열은 극락전이 금당이 되어 사찰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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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전성기 신라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불국사 석가탑의 모습. 균형과 비례가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리, 경전 등을 보관해놓는 장소로 사용된다. 특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곳들은 특히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는 5곳이 있다. 목탑, 석탑, 전탑들이 있으며, 한국의 절에서는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탑의 비중이 상당히 컸고, 고려시대까지는 목탑이 많았으나 고려 후기부터는 목탑이 거의 사라지고 석탑만 남게 된다.

석등[편집]

종교적 의미로, 또한 기능적 의미로 설치되며 보통 탑과 같이 불전 앞에 배치된다. 석등(石燈)은 불교 석조물 중 하나로, 석탑의 부수물이다. 초기 석등은 진짜 어두운 곳을 걷거나 어두울 때, 실용적 상태가 낡았을 때, 후대에 작업자가 중생의 마음에 온라인을 던지는, 개성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보통은 석탑으로 설치하는 관례이다.

크게는 상대석 / 중대석 / 하대석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각의 부분은 탐사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상대석 : 지붕 역할을 하는 부분을 옥개석, 불이 밝혀지는 화사석(火舍石)으로 구성
  • 중대석 : 책임을 포함하는 부분이고, 간주해야 합니다.
  • 하대석 : 상당을 받는 부분

발해 석등, 불국사 석등, 부석사 석등, 범어사 석등, 관촉사 석등, 해인사 석등 등 많은 문화재 석등이 있다.

승탑[편집]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위 불탑과 달리 승려의 화장한 사리를 안치하는 탑.

이것도 절에 있는 탑이지만 위 문단에서 설명한, 석가탑 같이 부처를 상징하는 탑과는 좀 다르게 생겼는데, 탑은 사각형이고 승탑은 팔각형(신라, 고려 양식)이나 종 모양(조선 전후 양식)이다. 옆에는 승려의 행적을 기록하는 비석을 거북이 조각(귀부) 위에 세운다.

선방[편집]

선방

승려들이 참선하는 곳. 선불교(선종)가 발달한 지역(특히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절의 관계자 외는 출입금지/사진촬영 금지이므로, 절에 갔을 때 함부로 들어가 실례를 끼치지 말도록 하자.

종각[편집]

한반도 유일의 십(十)자형 완주 송광사 종루

절에는 범종, 목어, 운판, 법고의 4가지 악기가 있는데 범종은 지옥의 중생들에게, 목어는 물짐승들에게, 운판은 날짐승들에게, 법고는 들짐승들에게 부처의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 친다고 한다.

요사채[편집]

절의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곳. 신도와 거사/보살, 행자, 사미 등이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승려들의 숙소, 절의 창고 등을 한데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건물의 특성상 다른 사찰 건물과는 달리 화려함이나 엄숙함을 강조하는 종교건물 분위기보다, 사람들이 사는 가정집 모습. 그래서 다른 사찰건물과 비교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나며, 근래에는 그냥 양옥을 짓기도 한다.

일본 사찰은 비가 많이 오는 기후인 데다 대처승이 일반적이라, 절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편의를 위해 부처를 모신 법당과 요사채가 별개의 건물이 아니라 복도로 이어진 곳이 많다. 한국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에서 이런 구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규모 암자나 포교당이 아니면 별개의 건물로 떼어놓음이 일반적이다.

노전채[편집]

각종 공양행사의 진행과 기도를 맡는 노전스님(부전스님)이 머무르는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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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와 별개였던 토속신앙의 신을 모시는 곳을 각이라고 부른다.

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불교이므로 불교 교리와 관련된 대웅전 등등 '전'들이 절 가운데 좋은 자리에 있지만, '각'들은 위치도 전보다 좀 구석이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불교의 타 신앙 포용 차원에서 받아들여졌지만 어쨌든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살보다 아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류가 다양해 이를 헷갈리는 사람이 흔하다. 이름에서부터 '전'보다 격이 낮은 '각'을 붙이는 데서 불교와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건물.

보통 이런 토속신앙의 전각들은 대웅전의 뒤편 위쪽이나(일반적인 위치) 대웅전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위치하나, 절에 따라서는 종종 대웅전과 맞먹거나 더 좋은 자리에 있을 때도 있다. 전통적인 동양 건축의 위계질서에서는 안쪽이나 더 높은 곳에 있을수록 상위 대접을 받는 건축물이다. 도심에 있는 포교당처럼 작은 시설에도 토속신령을 모시는 건물이 따로 없을 때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대웅전 안에 신중단과는 별개로 토속신을 모시는 단을 차리곤 한다. 진각종 같은 밀교계 종단의 사찰을 비롯한 일부 종단에서는 따로 안 모시기도 한다.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는 무당들이나 시주를 많이 하는 노보살/노처사들이다 보니, 현대 절들은 다른 전각들에 비해 작던 기존의 건물을 크게 재건축하거나 처음에 절을 지을 때부터 상당히 크게 짓고, '각'이 아닌 '전'을 붙여 칠성전, 삼성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오래된 전통사찰에도 칠성전이라는 표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딱히 틀린 건물 이름은 아닌 듯하다.

삼성각[편집]

삼성각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셋을 하나로 묶은 개념이다. 독성(나반존자), 칠성신, 산신의 3위를 같이 모신 전각이다. 종종 다른 토속신이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삼성각이 있는 절이라면 앞의 셋은 따로 없다.

독성각[편집]

천태각이라고도 부르며, 독성(나반존자)만 모신 전각이다. 독성은 홀로 수행하는 성인이란 뜻이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와는 별개로 홀로 득도한 성인이라 하는데, 문제는 불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다.

일설에 따르면 단군이라고도 하는데 최남선이 처음 주장했다. 중국 천태산에서 도를 닦은 사람이라고도 하고, 말법시대에 미륵이 오기 전까지 강한 신통력으로 중생을 돌본다는 전승에 기초해 불경의 인물 중 가장 비슷한 빈두로존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반존자 신앙의 시작은 현재 연구된 바로서는 1693년이 처음이고, 대중화된 것은 1800년대부터이다. 존재야 어쨌건 한국에서 두드러진 신앙인 건 사실이다.

나반존자를 비롯한 나한들은 성인임에도 성격이 매우 무섭고 엄격해, 예불 시 재물은 물론이고, 기도할 때도 신도의 자세가 불성실하면 여러 가지로 안 좋다고 한다. 다른 학설에는 '토속신앙의 천신이 불교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칠성각[편집]

칠성각

칠성당, 북극보전이라고도 한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칠성신만 모신 전각이다. 절에 따라 칠성탱에 칠성신앙을 불교화한 칠성여래(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모시기도 한다. 이 경우 중심적인 부처는 칠성신이 아니라 북두칠성 신앙과 관련이 있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다. 칠성신은 치성광여래 근처에서 옛날 관복 차림을 한 신령이나 부처 7위이다.

산신각[편집]

산신각은 산신(호랑이)을 모신 곳으로 산령각, 산왕각이라고도 하며, 산신만 모신 전각이다. 다만 종종 산신각이면서 산신 외에 독성이나 칠성도 같이 모시는 곳도 있는데, 이런 데서는 3위를 한 데 모시지 않고 독성이나 칠성신 중 1위만 산신과 같이 모셔놓는 경우가 많다.

용왕각[편집]

용왕각은 용왕당, 용왕단이라고도 한다. 용왕을 모신 건물로, 내륙지방의 절보다는 해안지역의 사찰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절 근처에 영험하다고 알려지거나 유명한 샘이나 우물, 강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용왕은 불교의 호법신 성격이 강하다보니 용왕각보다는 관음전만 짓거나 관음전 안에 용왕을 합사한 곳도 많다.

가람각[편집]

가람각은 국사당, 국사단, 우호당이라고도 하며 절을 지키는 것을 전담하는 신인 가람신을 모신 건물이다. 가람신의 성격상 기존 토속신앙의 신이라 하기도 힘든지라 일반적으로 신도들의 발길도 상대적으로 적고, 절을 지키는 일이란 게 신중이나 산신과 겹치다 보니 가람각까지 갖춘 절은 오래되고 규모가 큰 절이라도 상당히 보기 어렵다.

종무소[편집]

사찰의 행정과 관리, 안내를 담당하는 곳으로, 전통적인 시설은 아니다. 보살이나 거사들이 있으면서 기도/불사 접수, 템플스테이 안내 등을 맡는 사무실이 바로 종무소다. 위에서 말한 요사채와 같은 건물에 있기도 한다.

염불당[편집]

염불수행을 집중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건물. 근대까지도 만일회 등의 염불결사가 융성하여 여러 사찰에 흔하게 지어졌으나, 근현대 선종이 중심이 되면서 많이 줄어들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 신도들을 중심으로 염불이 점차 중시되는 풍조가 퍼지면서 다시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

인법당[편집]

한자로는 因法堂 혹은 人法堂이라고 쓴다. 큰 법당을 별도로 갖출 수 없는 사찰에서 한 건물 안에 요사채와 법당이 같이 있거나, 승려의 거처 한쪽을 법당으로 쓰는 작은 절을 말한다. 일본 불교에서는 동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법당과 요사채가 이어진 곳이 상당히 흔하지만, 한국 불교는 암자가 대부분이다.

현황[편집]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원의 운영은 오교구산(五敎九山) 혹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로 유지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31본산제도(本山制度)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의 절을 지역별로 나누고, 그 각 본산 밑에 말사(末寺)를 두어 본산에서 말사들을 관장하는 제도였다. 말사로 등록된 당시의 사찰은 1,384개소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불교종단은 비구 · 대처(帶妻) 승단 간의 분쟁과 여러 신흥 불교종단의 출현으로 본산제도가 사실상 사원을 관장할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 통합종단으로 출범하게 되면서 북한에 있는 사찰을 제외하고 25본산제도를 확립하였다. 행정적으로는 총무원(總務院)이 불교사업을 관장하며, 그 밑에 각급 본산이 자율로 사업을 관장하게 된 것이다.

25본사는 ①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 ② 용주사(龍珠寺), ③ 신흥사(神興寺), ④ 월정사(月精寺), ⑤ 법주사(法住寺), ⑥ 마곡사(麻谷寺), ⑦ 수덕사(修德寺), ⑧ 직지사(直指寺), ⑨ 동화사(桐華寺), ⑩ 은해사(銀海寺), ⑪ 불국사(佛國寺), ⑫ 해인사(海印寺), ⑬ 쌍계사(雙磎寺), ⑭ 범어사(梵魚寺), ⑮ 통도사(通度寺), ⑯ 고운사(孤雲寺), ⑰ 금산사(金山寺), ⑱ 백양사(白羊寺), ⑲ 화엄사(華嚴寺), ⑳ 선암사(仙巖寺), ㉑ 송광사(松廣寺), ㉒ 대흥사(大興寺), ㉓ 관음사(觀音寺), ㉔ 선운사(禪雲寺), ㉕ 봉선사(奉先寺)이다.

이 25본사에는 1,068개의 말사가 소속되어 있고, 각 사암(寺庵)에는 신도회(信徒會)가 조직되어 있다. 그들 신도단체의 횡적 연계를 맡은 본부가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이다.

최대 종단인 조계종 이외의 종단으로는 천태종 · 태고종 · 진각종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불교의 해외포교는 1965년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 설치된 재일 홍법원(在日弘法院)을 비롯하여 1971년 홍콩에 홍콩 홍법원이 건립되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혜능사(惠能寺), 캘리포니아의 조계선당(曹溪禪堂), 버지니아의 일붕선원(一鵬禪院), 캐나다의 홍법원 등이 있다.

1974년에는 네팔 정부가 추진하는 룸비니(Lumbini)개발사업에 참여하여, 부처님의 성지(聖地)에 우리나라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1982년에는 대만에 한국 홍법원을 건립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의 해외 홍법원은 미국 · 캐나다 · 일본 · 독일 · 스위스 · 프랑스 · 동남아시아 · 남미 등 12개국에 이르고 있다.

국가별 사찰[편집]

한국의 사찰[편집]

불국사

한국에서 불교사원을 '절'이라고 일컫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定說)이 없다.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가 전해질 때,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경북 구미시)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한국말로는 '털레의 집'이었고, 그 '털'이 '덜', '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또 속설(俗說)에 사찰이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하여 '절'로 되었다고도 하나 모두가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사찰을 일컬어 ‘데라’라고 하는데, 팔리어[巴梨語]의 테라(Thera)에서 왔다는 설과, '털레'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한국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3년 뒤인 375년(소수림왕 5)에 세워진 이불란사(伊弗蘭寺)와 초문사(肖門寺)이다. 신라의 경우는 구미(龜尾) 지방에서 최초의 포교활동을 하던 본거지인 모례(毛禮)의 초가집을 들 수도 있겠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를 들 수 있다. 고대의 한국 사찰은 주로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한국의 사찰은 수행이나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입지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기능별로 볼 때, 한국 사찰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①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 수도를 중심으로 넓은 사역(寺域)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王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 등이 많고, 동시에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대중적 불교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②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 깊은 산골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거하여 수행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닌다. 이와 같은 사찰은 지금까지도 수도를 위한 도량(道場)으로서의 전통을 지켜 오고 있다. ③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되며 주로 기도를 위한 도량으로서의 기능을 지닌다. 이상과 같이 입지적 조건에 따른 성격별 분류 외에도 한국의 사찰은 전문적인 수행과 일반적인 신행(信行)을 위한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중국의 사찰[편집]

소림사

중국에서는 불교의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한(漢)나라 때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하고 머무르게 하는 일을 맡은 관청을 '寺'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한나라 때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역(異域)의 불교 승려들이 머물렀던 관청의 이름이 홍로시(鴻'A寺)였고, 이로 말미암아 승려들이 머무르는 곳을 '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원(院)'이란, 원래 회랑(回廊)이나 담장을 둘러친 원(院)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당(唐)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園)이 같은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후대에는 '사'를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사(寺)는 절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그 사(寺) 안에 있는 별사(別舍)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불교 건물을 원(院)이라고 일컬은 것은 당나라 때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번경원(飜經院)이 효시가 된다. 또한 암(庵)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집, 토굴(土窟) 등을 가리키는 말로 써 왔다. 그리고 이것을 통틀어 오늘날에는 '사원(寺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쿠온지

일본의 사찰[편집]

일본의 사찰은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건축물로 간주된다. 일본 전국시대 이후로 일본의 막부 및 각지의 영주들은 불교 사원을 건립하고 수리해왔다.

일본의 불교는 신토와 공존했지만 8세기에 불교가 국교가 되었고 사찰이 세워졌다.

도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서울의 절[편집]

봉은사[편집]

봉은사

봉은사는 약 1천2백여 년의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절로서,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어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365일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언제든지 방문하기 좋다. 직접 향을 피울 수 있고 곳곳에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 불교신자들도 자주 찾는 장소지만, 코엑스와 매우 가깝고 아기자기한 다양한 기념품도 많이 팔아 특히 외국인 친구들을 데려가면 한국의 전통문화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할 수 있다. 절 입구에 한글과 영어로 된 안내문이 있으니 참고할 것.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바로 23미터가 넘는 국내 최대 크기의 대형 미륵대불로 1986년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무려 10년 동안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96년에 완성되었다. 미륵대불의 왼쪽에 있는 판전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84호로 지정된 곳으로 이곳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죽기 3일 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꼭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절만 방문하지만, 봉은사 뒤쪽으로 가면 산책할 수 있는 명상 길이 고즈넉하니 나있다. 조용하게 풀 내음을 맡으며 이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특히 계절마다 달리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로 언제 방문하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봉은사에서 해볼 수 있는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은 바로 템플스테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매 주말 1박 2일의 정기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보호자가 동반한다면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부터 투숙이 가능하며 홈페이지나 전화로 예약할 수 있다. 비용은 약 7만 원 선. 예불, 사찰 순례, 참선, 다도, 울력, 108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어 평소에는 해보기 힘들었던 특별한 경험으로 하루를 채우고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 🕒 매일 오전 5시 ~ 오후 22시
  • 📍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길상사[편집]

길상사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한 절로서, 1997년에 세워져 역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전통 사찰과는 조금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 법당인 극락전은 이곳의 본 법당으로 과거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던 곳이었지만, 이 요정의 주인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여 지금의 길상사가 만들어지게 된 시초가 된 곳이다. 극락전 바로 옆에 위치한 길상헌은 큰 스님들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이곳을 지나면 길상화의 공덕비와 진영각을 각각 만나볼 수 있다. 진영각은 바로 이 절의 초대 주지이자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스님의 유골이 이곳에 묻혀져 있다. 이곳은 한동안 문이 닫혀있었지만 지금은 전시실로 탈바꿈 되 법정스님의 유품과 저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스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노트가 있어 조용히 혼자만의 이야기를 남길 수도 있다.

많은 방문객들이 모르고 스쳐 지나가지만, 이곳의 조용한 산책길에 '침묵의 집'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가 명상을 할 수 있다. 길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문 거리 중 하나는 조선 중기(1600년~16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상 7층 보탑으로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네 마리 암수 사자가 기둥을 받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길상사에서는 숙박을 할 수는 없지만 체험형으로 템플스테이를 경험해 볼 수 있다. 108배가 가능한 나이대라면 누구나 참가 가능하며, 참가비는 약 1만 원 선으로 수련 기간 중 묵언을 해야 하고 전자기기는 사용할 수 없으니 하루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나만의 내면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도심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꽤 넓은 규모를 자랑하며 절 곳곳을 둘러본다면 한 시간은 족히 할애해야 한다. 이곳은 대중교통으로 간다면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성북 02번를 타고 길상사 정류장에서 하차, 혹은 일반버스 1111번이나 2112번를 타고 홍익중고에서 하차한 뒤 20분 정도 걸으면 된다.

도선사[편집]

도선사

도선사는 신라 시대 말 승려 도선이 창건한 절로서, 이곳은 단순히 절을 둘러보려는 사람들보다는 불교 신자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도선사 입구에서 절까지 약 3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셔틀버스가 다닌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도선사 석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도선대사가 절을 짓고 큰 바위를 손으로 갈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시사철 이곳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많은 신자들로 붐빈다.

여기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포대화상이 있는대 이 포대화상의 배꼽에 양손 엄지손가락을 넣고 양손을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포대화상의 배 주위가 반짝반짝 닳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웅전 앞에 빼곡히 걸려있는 연등은 늘 북적이는 방문객의 수를 실감하게 하며, 위치상 불교 신자들도 많지만 북한산을 등반하기 전후로 방문하는 많은 등산객도 볼 수 있다.

도선사 좌측에 위치한 공양간에서는 불자나 등산객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 본인이 사용한 식기는 설거지까지 마치고 가는 것이 예의임을 명심하자.

  • 📍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504

조계사[편집]

조계사

조계사는 1395년에 지어져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절로서, 종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접근성 때문에 봉은사와 더불어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특히 석가탄신일과 가까운 날이 되면 색색의 연등이 불을 밝혀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은 크기는 작지만 한 개당 1톤이 넘는 무게를 자랑하며, 철제로 층층이 입체 형식으로 제작돼 독특한 이곳만의 분위기를 풍긴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입장하면 아름다운 단청 지붕의 대웅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에 심어져 있는 백송은 천연기념물 9호로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며,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소나무이기 때문에 꼭 찾아보길 추천한다.

매해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TV에서 볼 수 있는 법요식을 진행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24시간 항시 개방되어 있어 시간에 관계없이 방문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 위치 때문인지 외국인들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1박 2일에서 3박 4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템플스테이를 제공하며, 휴식형과 체험형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어 온 가족이, 친구와 함께 참여해 볼 수 있다. 가격 대는 1박 당 5만 원 선이며, 예약은 홈페이지를 통해 하면 된다.

  • 📍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화계사[편집]

화계사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보덕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로서, TV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나오고 유명인들도 종종 방문하는 템플스테이가 유명한 절이다. 예불, 108배 체험, 염주 만들기, 북한산 둘레길 명상, 사찰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사찰의 일상생활을 경험해 보고 마음을 비워내는 하루 동안의 체험이 체계적으로 잘 짜여있으며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체험해 볼 수 있다. 가격은 약 6만 원 대로 체험형과 휴식형 프로그램이 있으며 모두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사찰 경내에는 1683년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사인 비구 제작 동종을 볼 수 있는데 이 동종은 종에 꾸며진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종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동종뿐만 아니라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역시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미륵전 뒤편에는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들의 불상이 진열되어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 📍 서울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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