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건축물)
산성(山城, Hill Fortress)은 산세를 따라서 산에 쌓은 성(城)이다.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복잡한 방호시설은 대개 갖추어지지 않았다.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에 가까운 수준의 작은 산성도 보인다.
개요[편집]
산성은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목책·토루·석축 등으로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특히, 한국에서 잘 발달되었으며, 고개나 고갯마루에 쌓은 것을 포함하여 불리기도 한다.
한국 산성은 그 기원이 선사시대의 남부시베리아나 만주지방의 도피용(逃避用) 성책(城柵)과 아주 닮았으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산성이 많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산성은 평상시에 군창(軍倉)을 두고 여기에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며, 적이 침입하여 오면 평지의 주민들은 모두 들어오게 하여 농성(籠城)하는 곳인데, 때로는 성과 다른 성을 연결하는 통신용(通信用)의 작은 보루(堡壘)도 산성의 범주에 넣고 있다.
산성은 성벽이 어떻게 축조되었느냐에 따라서 목책(木柵)·목익(木杙)·녹각성(鹿角城)·판축(版築)·삭토(削土)·협축(夾築)·내탁(內托) 혹은 산탁(山托)의 축조방법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목책·판축·협축·내탁의 방법이 가장 많다.
또, 성이 위치한 지형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산봉형(蒜峰形)·사모형(紗帽形)·마안형(馬鞍形)의 4가지로 구분한다. 신관호(申觀浩)의 ≪민보집설 民堡輯說≫에 보이는 이러한 구분은 사방이 높고 중앙이 낮은 지형을 이용한 고로봉형이 가장 이상적으로, 남한산성이 그 전형이다.
산봉형은 마늘을 세워 놓은 것처럼 오똑한 산의 정상부를 에워싼 것을 일컬음이고, 사모형은 배후(背後)에 산이 있는 산단(山端)의 사면을 이용한 것이며, 마안형은 말의 안장모양으로 가운데가 오목한 두 봉우리를 연결해서 돌려 쌓은 것이다. 이러한 구분방법은 최근에 구분하고 있는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보다 세분은 되었으나, 실제의 산성을 놓고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테뫼식은 산의 정상부만을 두른 것으로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여 발권식(鉢圈式)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작은 규모에 많고, 포곡식은 산의 정상에서부터 계곡의 아래쪽까지를 감싸안은 큰 규모의 산성이 많은데, 실제로는 위의 두 가지 형식의 중간형식으로 산의 정상부에서 7부능선쯤까지만 쌓은 산복식(山腹式) 혹은 사면식(斜面式)이 가장 많다. 이들 각각의 형식에서 그 발전방향은 테뫼식이 먼저이고 포곡식이 뒤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국의 산성은 이미 삼국시대에 그 전형이 완성된 것이며, 특히 축성기술은 일본에 전하여져서 일본의 신롱석(神籠石)은 한국 산성의 모습과 동일하다. 또, 백제인이 감독해서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는 산성이 현재까지 일본에 남아 있다.
산성은 크기가 아주 작은 둘레 100m 이하의 것으로부터 둘레가 10㎞가 넘는 대형도 있다. 규모가 큰 산성은 성안에 얼마간 거주할 수 있는 주거지가 있었던 것도 있다. 산성은 일반적으로 성안에 우물이나 계곡의 물이 있어야 하고, 성안에 창고시설이 있었던 것이지만,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하므로 특별히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을 갖추지 않아도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거나 천험(天險)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는 데 공력(工力)이 적게 소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야입보(淸野入保: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성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하였다가 적의 양식이 다하고 지치게 하여,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기본적인 전통적 전술은 이러한 산성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산성 위주의 발전은 우리 나라가 산지지형이 많음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우리 민족이 면면히 이어오게 된 원동력이기도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역사상 유명한 산성으로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환도성(丸都城),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 백제의 북한산성이 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때도 산성을 중심으로 항쟁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서울 근처의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임난이어처(臨難移御處)로서 계속 중요시되어왔다.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200여개 이상의 산성터가 남아 있어서, 한국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산성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짓고 보존하여 왔음을 실증하고 있다.
산성의 기원[편집]
한국에서의 산성의 기원은 『사기(史記)』에 의하면, 위씨조선 말에서부터 그 존재가 기록되고 있다. 즉 한 무제가 위씨조선을 공격할 때에 『왕검성(王儉城)』에서 1년 가까이 저항하게 되는데 "우거(右渠)는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왕검성이 산성일 가능성만 추측할 뿐이다. 아직 한국 산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에 이르면 분명히 그 존재를 살필 수 있다. 즉 부여조(夫餘條)에는 "성책(城柵)은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구려조에는 "이 성을 책구루(책溝루)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동옥저에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고 하고,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었다."고도 기록하고 있으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루)라고도 한다."고 하여 이 시기에 성곽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한 중 진한조와 변진조에는 "성곽이 있다"고 하여, 성곽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마)한조에는 "성곽은 없었다."고 하고 있어 유독 마한에만 성곽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마)한조를 잘 살펴보면 뒷부분에 "국중(國中)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이라고 하여 성곽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곽이 어떠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규모는 어떠한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마한에도 성곽이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최근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부여 송국리(松菊里)에서는 B.C. 5세기경 집자리를 보호할 목적으로 목책(木柵)을 시설한 유적이 밝혀지고 있어, 상기 기록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하는 시설물이다. 산성을 쌓고 지키게 되면 전술·전략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그것은 평지에 성을 쌓고 지키는 것보다는 아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반면에 적군의 장점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세한 인원과 우수한 장비를 준비하여 가지고 간다 하여도, 힘들여 산 위를 기어올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기력이 쇠진하여 막상 전투 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 안에 있는 아군의 사정을 파악할 길이 없어 작전에 어려움이 수반된다.
반면에 아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최악의 경우 농성만 한다하더라도 적을 퇴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산성을 중심으로 축조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보장왕 6년조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고려사(高麗史)』에 "당감(唐鑑)에는 고(구)려에서 산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을 상책(上策)이라 하였으니, 외방(外方)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을 마땅히 정파시켜야 합니다."라고 한 기록에서 그 효용성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당시의 산성은 그 용도와 기능면에서 볼 때 단순히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략적인 요새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행정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산성의 중요성은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다. 특히 조선 전기 및 양란(兩亂)을 전후한 시시기에 산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논의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다수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구조[편집]
한국[편집]
한반도에 존재하는 산성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까지 축조한 것으로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가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내의 가용면적을 넓히고 성내에 수원이 포함되도록 하여 주민들이 평상시 거주하거나 지구전이 가능하도록 한 산성이다. 서울 외곽의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부산 금정의 금정산성, 충북 청주의 상당산성 등은 규모가 큰 포곡식 산성들이다.
둘째는 테뫼식 산성으로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울산의 이천리 단조산성, 양산의 울산으로 연결되는 단조산성, 김해의 분산성, 함안의 성산산성, 순천의 검단산성, 부여의 증산성과 청마산성 등이 있다. 그밖에 산성이 위치한 지형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산봉형(蒜峰形)·사모형(紗帽形)·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나누기도 하나 이에 따른 실제적인 구분은 매우 어렵다. 산성과 평지성의 성격을 함께 갖춘 평산성(平山城)이 있는데 이는 평지에서부터 배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축조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지형과 취락입지에 기인한 한국 성곽 특징에 속한다. 주로 국경지방의 변방읍성이 이에 속하며, 한국 대부분의 읍성이 이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성문[편집]
성문은 성의 안밖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며, 성문의 위치에 따라 도시의 가로체계가 형성되고, 더욱이 성문의 견고성에 비례하여 성곽의 방호능력이 평가되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다. 성문은 다른 곳에 비해 큰 돌을 사용해 튼튼하게 구축했다. 다른 한국의 성과 같이 산성에서도 성문의 둘레에 옹성(甕城)과 적대(敵臺) 등을 시설하여 그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강화하였다.
장대[편집]
장대는 전투시 군사의 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장대는 모든 성에 다 둔 것은 아니고 성곽의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곽에 장대를 둠으로 유리한 지형적 조건이 있는 곳에 설치하였다. 장대는 성내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는데 성내 면적이 넓고 한곳에서 지휘하기 곤란한 지형에서는 지휘에 편리한 곳에 장대를 추가로 두어 방향에 따라 동, 서, 남, 북 장대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대의 위치는 성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형에 따라 성벽에 붙여 설치하기도 하였다. 실전에 있어서는 장대 한 곳에서 독전하기 어려워 문루 등으로 나아가 지휘하기도 하였는데 보통은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형식이였다. 대부분 남한산성의 서장대인 수어장대와 수원화성에서는 중층 누각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산성[편집]
성곽은 거대 건축물로써 한번 축성되었다고하면 완전히 철거되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처음 만들어질 때 고려된 지정학적 요소는 근대 이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특정시기에 만들어지더라도 그 후대에 다시 사용되는 경우가 꽤나 많다. 예를 들어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의 산성으로 생각되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에도 활용되었던 산성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ㅇㅇ시대의 산성, ㅇㅇ의 산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대에 다시 사용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만들어진 산성을 재활용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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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