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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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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아름다운 경주 서악동 고분군
31대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의 모습
진시황릉

왕릉(王陵)은 임금무덤을 말한다.

개요[편집]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한다. 능에 붙는 이름을 능호(陵號)라고 하는데, 선대 제왕을 지칭할 때 보통 묘호나 시호를 쓰지만 사후 묻힌 곳의 능호로 지칭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나라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능(陵)이라 했기 때문에 합쳐서 산릉(山陵)이라고도 부른다. 왕의 칭호를 썼으면 왕릉(王陵), 황제의 칭호를 썼으면 황릉(皇陵) 등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그 무덤을 만들던 당시에는 황제, 왕 및 제후의 무덤에는 능(陵)을 구분해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는 각 무덤들의 주인이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명칭도 전해지지 않아 능(陵), 총(塚), 분(墳), 묘(墓) 등의 개념이 약간씩 다르지만 관용적으로는 다 고루 사용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 황제의 무덤들이 남아 있다. 거대한 황릉을 건설함으로써 왕권을 나타내고자 했던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 신라, 그리고 여러 가야들의 무덤이 각 국가의 수도 인근에 남아 있다. 남북국시대에는 거대한 왕릉의 축조가 중단되고 불교적, 도교적 영향으로 규모가 작아지며, 또 길지(吉地)에 입지하는 등 삼국시대의 왕릉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 왕들의 왕릉은 대부분 개성시 인근에 있고 고려 임금 중 단 4명만이 현재의 남한 땅에 묻혔다. 그중 소실된 강종의 후릉을 제외한 3기만이 현재 전한다. 희종의 석릉, 고종의 홍릉, 그리고 공양왕릉이 그 3곳. 이 외의 나머지 고려 왕릉은 북한 개성 주변에 남아 있는데, 현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종의 능은 밭 한복판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을 정도. 그나마 고려 왕릉 중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릉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공민왕 부부의 현정릉 정도. 개경의 고려 왕릉은 이곳에서 몇 기를 볼 수 있다.

조선 왕들의 왕릉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 사후 추존된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과 정종 부부의 능인 후릉(개성)을 제외하고 전부 남한 지역에 남아있다. 이는 전통 예법에서 무덤은 도성에서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이 예외사항.

대한민국 또는 한국의 역사에 해당하는 고대 국가들의 무덤들은 대부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왕릉들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 더불어 가야 고분군도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에 선정되었다. 조선 역대 임금들의 능들이 2009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단지 관리가 안 돼서 엉망진창이란 게 문제.

신라의 왕릉들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어서 봉황대처럼 훗날 왕릉이란 정체가 아예 잊혀지고도 인공 언덕으로 여겨져서 도굴을 거의 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삼국통일에 성공해 왕조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 미리 고려에 항복을 했기에 폭력적으로 멸망해 많은 유산이 소실된 고구려, 백제에 비해 평화롭게 멸망하면서 왕건의 예우를 받았다는 점, 그로 인해 신라계가 고려 정계에 대거 진출해 정치력을 행사했고 고려 조정 차원에서도 신라의 옛 수도를 고려의 부수도 동경으로 칭해 우대해 줌으로써 신라왕릉들도 좀 더 관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 이런 덕분에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의 왕릉이 거의 확인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은 반면, 신라는 역대 임금 56명 중 37명의 능묘를 확인했거나 추정하고, 19 임금만 어디에 묻혔는지 짐작하지 못할 뿐이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들도 적어도 시가지 주변에 분포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 무덤은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여긴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에 위치한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매우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고고학계에서는 희망과 동시에 큰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의 왕릉[편집]

선사시대[편집]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묘주(墓主)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일반인과는 무덤이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무덤 크기를 크게 하거나, 부장품(副葬品)들을 묻어 지도자의 무덤을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 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고조선[편집]

  • 단군릉: 평양 강동군 문흥리에 위치한 단군의 능이다. 장군총이 7단으로 축조된 것보다 더 규모가 큰 9단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 북한에서는 1993년 단군릉을 발굴해 연대추정기법으로 5천여 년전의 단군 무덤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현재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며 따라서 왕릉도 분명치 않다. 한편 교과과정에서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것으로 북방식 고인돌과 미송리식토기, 비파형동검을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현재 고고학계에서 고조선의 문화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십이대영자 문화'로 십이대영자유적, 윤가촌 유적, 정가와자 유적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유적의 무덤은 고인돌이 아니며 적석목관묘이다. 십이대영자문화를 고조선의 문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국가단계의 초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무덤의 규모와 부장품(껴묻거리) 등에서 주변의 다른 무덤에 비해 우월한 무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자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초보적인 단계이기 때문에 규모 및 부장품이 월등히 높은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고조선의 권력자 무덤은 대략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애초에 고대국가에서의 왕과 왕릉을 기준으로 고조선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는 현대의 눈으로 중세 또는 고대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구려[편집]

고구려 초기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었다. 쉽게 말해 흙으로 봉분을 쌓은 오늘날 무덤에서 흙 대신 돌을 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에는 돌로 무덤을 만드는 문화가 존재했는데 고구려 역시 이를 계승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의 등장에 대해 고인돌과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적석총에 대한 연구 초창기에 나온 오래된 설이다. 이 외에도 커다란 돌을 뚜겅돌로 사용한 대석개묘라는 요동반도의 적석문화에서 기인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시기적, 공간적인 차이가 현격하며 오히려 형태 면에서는 장백 간구자라든지 물론 이것도 졸본(환인), 국내(집안)과는 거리가 멀다. 환인 망강루, 통화 운봉수고 고분군과 같은 사례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최근에는 무기단식 적석총과 대석개묘가 결합한 대석개적석묘에 대한 조사를 통해 무기단식 적석총과 대석개적석묘가 서로 결합되어 고구려 적석총이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4세기부터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올리는 형태가 아닌 돌을 다듬어서 만드는 무덤 양식이 등장하였다. 그게 잘 알려져 있는 장군총같은 무덤들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게 아니라, 하단부부터 연마석을 쌓는 단계를 거쳐 4세기~5세기 초에는 전부 연마석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돌을 연마하는 단계부터 옮기는 과정, 쌓는 과정 등 엄청난 노동력이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로 인해 굴식 돌방무덤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표적인 게 안악 3호분.

  • 동명왕릉
  • 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 퉁구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주변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한 점과 축조 기술 등을 토대로 현재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 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 무덤 구조와 출토 유물로 미루어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 천추총: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마선구 1000호묘로 무용총과 각저총이 근처에 있다. 출토된 명문기와 등을 토대로 현재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 중에 하나가 무덤의 주인일 것으로 추정.
  • 서대총: 중국 지린성 지안시 지엔캉춘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서대총에서 채집된 막새의 연대로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 우산하 992호분: 중국 지린성 지안시 과위안춘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 임강총: 중국 지린성 지안시 타이왕춘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태왕릉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 안악 3호분: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대형 무덤, 북한 학계 및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이 고국원왕의 릉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사실 항목을 잘 보면 왕릉일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일단 묘제 형식은 둘째치고라도 도무지 왕릉이 국내성도 평양도 아닌 안악에 있을 이유가 없다.
  • 강서대묘: 평양 근교 남포시에 위치한 고분으로 사신도가 유명하다. 주인은 미상이나 규모나 사신도의 수준 등으로 비추어 보아 왕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편집]

  • 석촌동 고분군: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무덤 집단으로 당대 지배 계층의 무덤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3호분은 출토유물의 시기와 규모 등으로 미루어 근초고왕 혹은 근구수왕의 릉으로 추정.
  • 송산리 고분군: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왕릉군. 총 7개의 고분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불명이다.
  • 무령왕릉: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의 왕릉. 발굴을 통해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임이 확인됐다. 현재 백제 왕릉 및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덤. 하지만 발굴과정은 한국 고고학에 있어 최고의 발굴이자 최악의 발굴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 능산리 고분군: 부여군에 위치한 백제 왕릉군. 총 7개의 고분이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절터가 발견되어 무덤들이 왕릉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23] 다만 각각의 주인은 현재까지 미스테리. 다만 동하총과 중하총은 각각 위덕왕릉과 성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 쌍릉: 익산시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왕릉 추정 무덤. 무덤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어서 이름이 명명됐으며 둘 중 대왕릉의 주인은 무왕으로 밝혀졌다. 다만 소왕릉은 죄다 털려있어서 선화공주가 맞는지 추측도 못하는 상황이다.

신라[편집]

신라 왕릉들은 역사상 지금까지 존재했던 한국사 국가 중 무덤의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백제 왕릉을 대표하는 무령왕릉이 남북 길이 4.2 m, 동서 너비 2.72 m, 높이 2.93 m이고, 고구려 최전성기 왕릉 중 가장 큰 태왕릉이 남북 지름 66 m, 높이 14 m인데 비하여 신라 황남대총은 면적 42만 2908 ㎡, 남북 지름 120 m, 남분 높이 22 m, 북분 높이 23 m로 고구려 태왕릉의 2배 가까이 된다.

거기다 황남대총보다 더 큰 봉황대 등,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초대형 왕릉들이 더 있는데다, 경주 전역에 황남대총과 비슷한 규모의 왕릉들도 꽤나 있는 편이다. 경주 시내의 신라 왕릉 중에서는 평균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평가받는 금관총(12 m)이나 천마총(12.7 m)이 태왕릉과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

신라 왕릉은 도굴이 어려운 구조, 최후의 승자라는 점 덕분에 다른 한국사 고대 왕조에 비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었지만, 피장자가 누군지 정확히 밝혀진 왕릉은 태종 무열왕, 흥덕왕 등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망국의 왕 경순왕릉을 제외한 모든 왕릉이 경상북도 경주시 행정구역 내에 다 있어서 아래의 고려 왕릉이나 조선 왕릉이 그래도 이곳저곳 퍼져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밀도가 높다. 경순왕릉이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는 이유 또한 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들어선 후였기 때문에, 고려 수도인 개경에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야[편집]

  • 수로왕릉: 경상남도 김해시에 위치한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능.
  • 수로왕비릉: 경상남도 김해시에 위치한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의 능.
  • 전구형왕릉: 경상남도 산청군에 위치한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능.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왕산심릉기를 통해 왕릉임이 밝혀졌다.
  • 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반파국(대가야)의 고분군으로 왕릉급 고분이 다수 포함되었다.
  •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상남도 함안군에 위치한 안라국(아라가야)의 대형 고분군.
  •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상남도 고성군에 위치한 고자국(소가야)의 왕릉급 고분군.

발해[편집]

발해의 왕릉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혀진 것이 없다. 발굴자료가 왕묘급에서는 많지 않고 있더라도 발해 주요 왕릉이 소재한 중국 측 정부가 자료공개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며 일부만 공개하는 상태도 원인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중국 길림성 돈화시육정산 고분군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이 있다.

후백제[편집]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견훤왕릉이 있다. 망국의 군주여서인지 일국을 30여 년을 통치한 왕의 능 치고는 초라한 편이다.

고려[편집]

1대부터 34대까지 모든 왕릉의 위치가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려사 기록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능호들이 전해진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왕릉, 백제왕릉, 신라왕릉, 가야왕릉이나 남북국시대의 발해왕릉, 조선왕릉이 그렇듯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근처에 모여있는 편인데 잠시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했던 대몽항쟁 시기와 공양왕의 경우만 특이한 케이스로 다른 지역(현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4기의 능은 대한민국, 나머지는 북한에 있는데 아쉽게도 남한의 고려왕릉들은 고려가 힘들 때(여몽전쟁)나 망한 뒤(공양왕)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식이 매우 초라하며, 북한의 고려왕릉들은 태조의 현릉이나 공민왕의 현릉 등 일부를 제외하면 관리상태가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북한의 산들이 많이들 그렇듯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어서 자료사진들을 보면 봉분이 마치 반사막지대 같은 황무지 가운데 덩그러니 떨어져 있거나 한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북한 치하인 지금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후손으로서 조상의 능을 관리해야 할 개성 왕씨가 몰락해 주요 왕릉을 제외하고 그다지 관리를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개성 동쪽의 교외 지역인 장단군이 비무장지대 안에 갖히게 되었기에 몇몇 고려왕릉은 비무장지대 내에 묻혀있을 가능성도 있어 상황이 더욱 암울하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꾸준한 관리를 받으며 랜드마크가 되고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조선왕릉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구조적으로도 석회를 두껍게 바른 조선왕릉이나 거대한 돌무지가 무덤을 보호하는 신라왕릉에 비해 별달리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 돌방구조라 도굴하기 쉬워서 굉장히 도굴피해를 많이 당했다. 게다가 후대의 조선왕릉은 귀족적 풍조를 배제하려 한 조선왕조의 특성상 무덤 안에 상징적 물건만 넣고 사치품은 부장하지 않아서, 그저 귀중품만 노리는 도굴꾼의 표적이 될 일도 적었지만 귀족정치 시대였던 고려의 왕릉에는 고려청자 같은 사치품을 많이 부장했기 때문에 더욱도 도굴범의 표적이 되었다. 도굴은 특정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왕릉 자체가 고려[6], 조선 구한말, 일제강점기, 광복 후 모두 도굴당해서 남북한 각자의 발굴 조사 기록에서도 그야말로 발굴된 유물이 별로 없다. 현재 고려왕릉에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고려왕들의 얼굴들 정도이다. 그런데 왕릉의 보존 상태나 북측의 부실한 관리 상황을 보면 이조차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고려왕릉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시기 정립한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불탑을 모방해 봉분 주변을 둘러싼 난간석, 12지신을 봉분 아래에 부조한 병풍석, 무덤 주변의 석물 배치는 확실히 원성왕릉 같은 신라 후기 양식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분 벽화 같이 고구려 양식 영향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일부 포함되었다. 이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를 모두 이어받으려고 했던 국가라는 점을 말해준다.

조선[편집]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왕릉은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 남쪽에 물이 있고 뒤로는 언덕에 의해 보호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이며, 멀리 산들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자리를 선택해 마련되었다. 왕릉에는 매장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를 위한 장소와 출입문도 있다. 봉분뿐만 아니라 T자형의 목조 제실, 비각, 왕실 주방, 수호군(守護軍)의 집, 홍살문, 무덤지기인 보인(保人)의 집을 포함한 필수적인 부속 건물이 있다. 왕릉 주변은 다양한 인물과 동물을 조각한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5,000년에 걸친 한반도 왕실 무덤 건축의 완성이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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