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
종각(鐘閣, belfry)은 범종을 달아두기 위하여 지어진 누각을 말한다.
종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보신각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으며, 이 이름에서 여러 명칭이 다시 유래되었다. 종각역은 서울지하철 1호선의 역으로 이 역의 이름을 두고 '종각'이라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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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과 종루[편집]
서울은 도성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도성에는 네 대문과 네 소문이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숭례문이 제일 정문이었다. 숭례문을 들어서서 성안의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오늘날의 남대문로이다. 옛 서울의 성안의 큰 가로(街路)로는 남대문로 외에 흥인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가로가 있었다. 흔히들 이 가로를 운종가(雲從街)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는 가로라는 뜻일 터이다. 이렇게 볼 때 운종가는 오늘날의 종로와 신문로를 합한 셈이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운종가는 이 가로의 일부, 곧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이 있던 종루(鐘樓)의 서쪽 편 일대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하자면 서울의 중앙부에 종루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와 모양은 차이가 나지만 오늘날의 종각(鐘閣)―보신각(普信閣)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종루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종각이라 하지만, 종루와 종각은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촐한 집이거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조선초기에 애초에는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을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行廊)을 짓던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이 무렵에는 그 종루에 누기(漏器), 곧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태종 14년에 이르러 파루(破漏) 치는 시각을 5경(更) 초점(初點)에서 5경 3점으로 늦추고, 밤을 알리는 인정(人定)은 주역의 64괘에 맞추어 64번이나 쳤었는데 하늘의 별자리 28수(宿)에 맞추어 28번만 치는 것으로 고쳤다. 그러나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치 못한데다가 그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키면 관원이나 민간인들의 출입까지도 이르거나 늦는 수가 많았으므로 1437년(세종 19)에는 궁궐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기 위하여 지금의 세종로에 쇠북(金鼓)를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440년(세종 22)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의 2층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 층으로는 인마가 다니게 하였다. 이 종루는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아 서울의 상징이 되는 장엄한 것이었다. 그 종루의 어간(御間)―중앙 간은 아무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왕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랬던 종루에 대해서 1459년(세조 5)에는 종각(鐘閣)을 광화문 앞에 지었다. 이 종각은 경복궁 안의 보루각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알려주는 중간 전달 기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종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거기 달려 있던 종은 깨어진 채 흙속에 묻혔다. 임진왜란의 와중에는 그 종을 녹여 다른 데 썼다. 그후 광해군 때 종루를 다시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전처럼 장엄하게 2층의 누각을 짓지는 못하고 단층 종각으로 지었다. 그것을 몇차례 고쳐 지으면서 그 모습으로 전해 왔다.
1895년(고종 32)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사액 (賜額)을 내렸다. 이것이 1915년 길을 넓히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렸었다. 그 종각은 6.25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뒤로 조금 더 물러 중건하였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에 중건한 것으로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이 아니라 "종루"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1]
종각 소개[편집]
보신각[편집]
보신각(普信閣)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종각이다. 보신각 터(普信閣 터)라는 명칭으로 1997년 11월 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보신각 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조선시대 한양(漢陽)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靑雲橋)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通雲橋: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明澧洞)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종은 본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懸額)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다.
창원대종각[편집]
창원대종각(昌原大鍾閣)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용지공원에 있는 종각이다.
창원시민들의 애향심과 화합, 평화, 번영을 기리기 위하여 1993년 12월 3일 제작, 건립하였다. 종각에 걸린 대종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으로 한국수자원공사, 창원상공회의소, 동남지역공업단지관리공단 등 4개 기관에서 뜻을 모아 제작하였으며, 무게 3,330관(약 12.5t), 높이 3.3m, 구경 2.06m 규모이다. 종의 치수를 나타내는 3이란 숫자는 창원, 상남, 웅남 등 3개 면을 나타낸다고 한다.
종의 가운뎃부분에는 창원 야철문화의 맥을 잇는 화염무늬와 3태극, 위아랫부분에는 창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까치, 구름를 새겼으며, 유곽에는 진달래 유두에는 솔방울을 조각해 놓았다. 3·1절, 광복절, 시민의 날 등 주요 행사 때마다 이곳에서 타종식을 갖는다.
난한산성 종각[편집]
조선시대 4대 명종으로 손꼽히는 국보 성거산 천흥사 동종이 있던 자리이나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으로 옮겨진 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종은 주철장 원광식씨가 복원한 종이다
동정각[편집]
동정각(動靜閣)은 진관사 종각 이름이다.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이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불린다. 고려 제8대 현종(顯宗) 2년(1011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 · 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이다.
우정의 종각[편집]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은 독립 200주년을 맞이해서 한미 두 나라의 우의와 신의를 다지자는 뜻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미합중국 국민에게 기증한 선물이다. 우정의 종각은 1976년 7월 4일에 준공되었는데, 미국 LA에서 3-40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Angel's Gate 공원에 있으며 한국인들에게 상징적인 곳이 한 곳 있다. 바로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있는 우정의 종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특히나 한국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우정의 종각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아무래도 한국인에게는 의미 있는 곳 중 하나라 미국에 살거나 여행을 온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우정의 종각에 대해서 설명이 적혀있는 곳에는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정의 종각에는 또 이 우정의 종각을 지키고 서 있는 목장승을 볼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장승은 재앙을 막고, 수호신 역할로 이 곳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각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남자는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고, 하늘이라는 뜻이고, 여자는 관이 없고, 지하여장군, 땅을 의미한다고 해서 저렇게 적혀있다. 사람 모양으로 생긴 기둥으로, 이정표 역할도 한다.
우정의 종각의 상징인 종은 주석, 동, 금, 은을 섞어서 만들어졌다. 종의 높이는 3.63 미터, 둘레는 7.25 미터로 크기도 크지만, 무게가 17톤이나 한다고 하니 상상도 하기 힘든 무게이다. 이 종과 종각을 세우는 데에는 57만 불이 투자되었고, 한국의 전통을 그대로 담기 위해 장인 30여 명이 거의 1년 동안 머물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 종뿐만 아니라 종을 감싸고 있는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인 청기와는 한국의 전통적인 단청과 문양으로 채색되어 있어 한국의 전통과 멋이 그대로 담겨있다. 단청에는 땅을 지키고 있는 십이지신이 이 종을 지키고 있다. 이 우정의 종은 자유와 독립의 뜻은 담아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의 우의와 빛나는 발전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이 곳은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과 멋을 조금이라도 알리는데 이 우정의 종각이 미국 서부에서 상징적인 곳이지 않나 싶다.
한국학교와 노인회가 매주 한 번씩 환경미화 활동을 하며, 청소년 봉사단도 홍보와 환경미화에 힘쓰고 있다.
평양종각[편집]
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에 있는 조선후기 주조된 평양종이 걸려 있는 종각이다. 평양종각은 1726년에 주조 완성한 평양종이 걸려 있는 종각으로 북한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1673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현재의 평양종은 1726년 6월∼9월에 부벽루 서쪽 뜰에서 주조 완성한 것이다. 종의 무게는 2만 2,520근 15량(12t 914㎏)이고 종의 금속은 평양성내 35개 방의 백성들로부터 거둔 주철, 생동, 유기, 철 등이다. 종에는 불상, 사천왕상, 구름무늬, 팔괘무늬, 종명 등이 조각되어 있다. 새로 만든 평양종은 당시 객사이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짓고 걸었다. 현재의 종각은 1827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홍순민, 〈종각(鍾閣)? 종루(鍾樓)!〉, 《한국역사연구회》, 2007-12-12
참고자료[편집]
- 〈종각〉,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 〈보신각〉, 《두산백과》
- 〈창원대종각〉, 《두산백과》
- 〈남한산성 종각〉, 《네이버 이미지 라이브러리》
- 〈진관사의 종각, 동정각〉, 《네이버 이미지 라이브러리》
- 〈평양종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소소한 행복, 〈한국 국민이 기증한 우정의 선물,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 《티스토리》, 2020-12-28
- 홍순민, 〈종각(鍾閣)? 종루(鍾樓)!〉, 《한국역사연구회》, 2007-12-1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