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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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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曹溪寺)
조계사'(曹溪寺)
조계사'(曹溪寺)

조계사(曹溪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조계사는 조계종 절로 1395년에 지어졌다. 1910년에 승려들의 모금으로 설립된 각황사가 모태이다. 1938년에는 태고사가 설립되었고, 1954년에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불교의 1번지이자,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總本山),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 많이 들어오는 사찰로는 쌍두마차이다.

사찰 규모는 굉장히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크고 아름다운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이 자라고 있는데, 500년 이상으로 늙은 데다 도심지라 생장 환경이 안 좋아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역사[편집]

1917년 각황사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보성학교 운동장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 목표 중에는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이에 3개월 동안 백미 1천 석, 6천여 환을 모아 중부 박동(薄洞)[4]에 있던 동녕위궁(東寧尉宮)을 3천 환에 사서 허물고 1910년, 그 터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웠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이다. 각황(覺皇)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승려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내 절 설립을 허가한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원종의 창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부윤에 신청했는데, 서류 처리 도중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만다.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 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행적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북쪽에서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에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고, 북의 원종과 남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다가,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했고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했으며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되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안 해줬고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강제해산당한 한용운 등 임제종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하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방해하여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교묘하게 회유하였으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은 이에 감격하여 많은 수가 친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용운 등 지각 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면서 3.1 운동, 만당(조선불교청년총동맹) 등을 주도하며 일제에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등의 지원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비록 과정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냈다는 점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것으로 부분회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근본주의 항목 참조.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 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조계종/태고종이나 조계종/태고종 주도로 펴낸 불교관련 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를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 측에서는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화재[편집]

종목 명칭 시대 지정일
천연기념물 제9호 서울 조계사 백송

(서울 曹溪寺 白松)

조선 1962.12.03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5호 조계사 석가불도

(曺溪寺 釋迦佛圖)

조선 2000.07.1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6호 조계사 목석가불좌상

(曺溪寺 木釋迦佛坐像

조선 2000.07.1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7호 조계사대웅전

(曺溪寺大雄殿)

조선 2000.09.10

시설[편집]

대웅전
십일전
조계사 사천왕상
조계사 옆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대웅전[편집]

대웅전에 불상 3좌를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불상은 대웅전 크기 때문인지 법당 내에 모신 불상 중에선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실제로 보면 크기에 압도된다. 불단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사이즈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온 불상이다

조계사 대웅전은 1.6 m 높이 돌 기단 위에 아름드리 나무 기둥 34개를 세웠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 길이는 정면 30 m에 측면 17 m이다. 원래 십일전보다는 대웅전이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사진상으로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을 정도의 규모지만 근정전보다는 좀 작다. 일단 근정전의 기단은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이기에 조계사 대웅전의 석축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다만 대웅전의 기단이 단층석축기단이긴 해도 기단 높이는 1.6m에 이른다. 그리고 아마 이 점이 오해의 원인이겠지만,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조계사 대웅전보다 칸 수는 적지만 오히려 면적은 정면 30 m에 측면 21 m로 더 넓다. 1칸의 길이가 근정전이 훨씬 커서 일어난 오해일 것이다. 높이 또한 단층인 조계사 대웅전보다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인 근정전이 당연히 더 높다. 다만, 사실 근정전도 경회루에는 데꿀멍 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 건물은 상당히 건방진데 지붕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공포의 형식에서 그러한 면을 느낄 수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공포는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근정전보다 외부, 내부 모두 2출목씩 많다. 부분적인 형식면에서는 조선의 정궁보다 위에 더 화려한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유난히 높고 화려해 보인다. 실제로 창덕궁 대조전 중건을 맡았던 정5품 도편수 최원식이 건축을 지휘한 건물이다.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원래 증산종교 계열의 보천교 본당으로 쓰던 건물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문짝 등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과 문양들이 불교와는 맞지 않다. 원래 보천교 본당인 십일전 기와도 화려한 청기와였다. 십일전을 해체하면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 쓰이게 되고,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대통령 관저로 삼으면서 경무대(景武臺)로 명했는데, 이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 이름을 개칭하면서 십일전의 청기와는 '푸른 기와'를 덮은 데서 유래한 청와대(靑瓦臺)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20] 그래서인지 조계사에서는 2004년 대웅전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부구조를 개수하여 불교에 맞지 않는 도교적인 색채를 없애는 등 전통불교 양식으로 단장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인 관점으로만 사물을 보는 문화재/역사 관련 학계에서는 이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참고로 현 대웅전 현판은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인데, 해당 편액의 글씨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8남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이 썼다고 한다.

조계사 대웅전과 보천교 십일전[편집]

보천교 진정원의 십일전(十一殿). 그 이름도 비범하다.

본래 이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증산 계통의 종교인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이었다.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188?~1936)은 전라북도 정읍에 진정원이라는 궁궐 같은 집을 지었고,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차 천자"로 불렸다. 그런 진정원에 경복궁 근정전만큼 큰 건물을 본당으로 지었는데 바로 십일전(十一殿)이다. 십일전 앞의 삼광문(三光門)도 용머리 조각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1928년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보천교를 독립운동 지원 혐의를 빌미로 교단을 해체하면서 보천교의 시설들을 압수해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이때 진정원의 십일전 목자재들을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게 되었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하였다.

참고로 당시 매각된 십일전의 가격은 당시 돈으로 1만 원이 좀 넘는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가격이었다. 보천교 보화문의 2층 누각은 해체 후 단층으로 복원돼 현재 내장사 대웅전 건물로 쓰이게 됐다. 다만 내장사 대웅전은 여러 차례 화재로 인해 현재는 돌기둥인 대웅전 기둥만 원래 보화문 기둥이다. 보천교에서 쓰던 크고 아름다웠던 종은 일제가 무기제조용으로 압수하였다.

극락전[편집]

대웅전 옆의 건물 1층에 위치한 작은 법당.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곳은 조용히 염불이나 참선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특히나 조계사 신도들의 49재나 천도재 등을 이곳에서 하는지라 더더욱.

관음전[편집]

2015년 현재 조계사 앞쪽에 새로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은 그냥 현대식 사각형 시멘트 건물이다. 법당에는 관음좌상이 안치되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법회도 많이 열려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 곳은 그야말로 고요한 좌선실 분위기 그 자체다.

사실상 24시간 개방인 대웅전과 달리, 17:00경이면 문을 닫으므로 좌선이나 참배를 하려면 그 전에 가야 한다.

불교중앙박물관[편집]

조계사 안에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는데, 여느 절의 박물관과는 수준이 달라서 나름대로 소장품의 질이나 전시의 질이 꽤 좋은 편이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눈여겨 볼 만하다.

불교대학[편집]

정식 4년제 단과대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신도와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 교육기관이다.

신도들에게 불교교리 및 문화강좌가 진행되는 곳. 일종의 불교교양대학이다. 불교대학 2년 4학기, 불교대학원 2년 4학기를 운영한다.

구 조계사종[편집]

과거에 조계사에 걸렸었던 범종으로 광복 이후 국보에서 해제되면서 위작이냐 진품이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지만 현대의 조사 결과 신라시대 범종이 맞다는 설이 대세. 그러나 국보 재지정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소장 중이다.

기타[편집]

2013년 11월 26일에 사천왕상을 일주문 앞에 새로 설치하였는데 아주 멋과 위엄이 넘친다. 철판을 잘라서 겹쳐 만들었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왼쪽은 증장천, 오른쪽은 지국천. 철로 만들어 무게는 개당 1톤에 달한다. 제대로 천왕문을 만들어 사천왕상을 설치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일주문 네 기둥 앞에 하나씩 세웠다. 조계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에 따르면 직접적인 제작기간은 6개월에 못 미쳤으나 디자인을 구상하고 다듬는 문제로 3년이 소요되었으며, 일주문 밖에서 일주문을 바라보아 왼쪽부터 증장천, 광목천, 다문천, 지국천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천왕의 지물과 조계사 일주문에 설치된 사천왕상의 지물이 서로 다른데, 조계사 사천왕상은 조선에서 17세기부터 나타나는 사례를 따랐다. 비파를 들면 보통은 지국천왕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문천왕이다. 이를 모르면 지물만 보고 사천왕의 이름을 착각하기 쉽다.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이 조계사에 사천왕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금속공예가 이근세를 만나 작품을 주문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주문 기둥 앞에 하나씩 일렬로 세워두었으나, 지금은 마치 천왕문을 통과할 때처럼 (사천왕이 통로의 중심을 바라보도록) 일주문 양 옆으로 2개씩 세웠다.

사실 대웅전은 크지만 기타 건물이나 부지가 좁아서 기본적인 사찰 가람 구조도 갖추지 못한 안습한 느낌도 있다. 차차 정비를 해서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춘다고 하는데 2016년이 넘어도 아직 멀었다는 느낌. 저 웅장한 대웅전을 빼면, 사찰 건물다운 건물은 대웅전 뒷쪽에 있는 범종루극락전밖에 없다. 조계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초라함이 사실. 사실 절의 위치가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서 확장이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근처 호텔 부지를 매입해 확장하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잡음이 많았다. 조계사 길 건너편에는 '템플스테이'라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불교 서적을 파는 서점,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 템플 스테이 등 불교 관련 프로그램을 취급하는 곳 등이 있으며, 2층과 5층에는 사찰음식을 파는 발우공양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사찰음식 전문가로 유명한 비구니 대안 스님이 총책임자로 있는 식당인데, 대부분의 식재료는 승려들이 직접 기르거나 만든 것을 사용한다. 2층은 뷔페식 메뉴와 일품요리 및 도시락, 5층은 좀더 비싼 코스요리를 파는데, 모두 채식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채식이나 사찰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하다. 2층은 그렇지 않지만, 5층은 며칠 전까지 예약 필수. 2층 식당 '발우공양 콩'은 적자 누적으로 인해 2015년에 폐업했다가 같은 해 '삼소'라는 식당으로 재개업했다. 이 곳 역시 사찰음식 전문점으로 점심에는 뷔페, 저녁에는 단품메뉴를 판매힜는데, 얼마 못 가 다시 폐업하여 현재는 사찰음식 교육관이 들어섰다.

조계사 바로 옆에 조선 말 우정총국 건물이 붙어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조계사를 가면 잊지 말고 들리자. 지금은 우정 박물관으로 쓰인다.

조계사는 선종으로 분류되는데, 굳이 연원을 따지자면 중국의 소림사와도 닿는다. 조계사의 직할 말사 중에 한자도 똑같은 소림사가 있다.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학교 입구 부근에 있으며, 태조 5년 암자 규모로 창건되어 나중에 절규모로 중건 승격되었고 조계종이 자리잡은 이후에 흡수된 절이므로 본사인 조계사보다 오히려 연원이 깊은 절이다.

관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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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관련 연락처
  • 기도접수처 02-768-8500
  • 신행상담소 02-768-8600
  • 교육문화센터 02-768-8580
  • 가피 성지순례 02-768-8520
  • 조계사 템플스테이 02-768-8660
  • 선재어린이집 02-720-9770
①일주문②대웅전③극락전(1층), 대설법전/소설법전(2층)④신행상담실⑤제사공양간(1층), 범종루(2층)⑥청년센터⑦안심당⑧만발공양간(마당 아래), 수유실(마당)⑨교육문화센터(1~4층), 신도회 사무처(1층)⑩백주년기념관: 어린이법당(지하1층),승소(1층),관음전(2층),템플스테이(3~4층)⑪8각10층 부처님진신사리탑⑫회화나무⑬가피⑭성지순례 가피⑮선재어린이집⑯권선각⑰템플스테이홍보관⑱기도접수처⑲사찰안내소⑳천진불㉑백송㉒사적비㉓주차장㉔우정총국㉕화장실㉖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중앙박물관(지하1층), 전통문화예술공연장(지하2층)㉗국제회의장㉘신도회 회장단·자문위원회

교통[편집]

조계사 주소 안내[편집]

  • 조계사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 교육문화센터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9
  • 조계사 템플스테이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5-20
  • 안심당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5-24
  • 청년센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4길 49-2
  • 선재어린이집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1-4

버스[편집]

  • 1BUS : B109, B151, B162, B172, B606, G1020, G8000(맞춤형버스)
  • 2BUS : 직1005-1, 직1500, 직5500-1, 직5500-2, B151, B162, B172, B401, B406, B704, B708, G7022, G8000(맞춤형버스)
  • 3BUS : 직9000
  • 4BUS : 종로01,종로02
  • 5BUS : 종로01,종로02
  • 6BUS : B162, B606, G1020, G8000(맞춤형버스)

지하철[편집]

  • 1호선 : 종각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70m 쯤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넌 후 100m쯤 더 오면 좌측에 조계사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있다.
  • 3호선 :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오셔서 50m쯤 걷다가 동덕 갤러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후 좌측으로 50m쯤 오면 우측에 조계사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있다.
  • 5호선 :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우측 도로로 300m쯤 걷다가 버거킹 골목으로 오시면 조계사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있다.

자가용[편집]

  • 안국역에서 종각방면 : 안국동사거리 종로1가 방면으로 좌측방향(우정국로)→우회전(우정국로)→우회전(율곡로4길)

경내 주차장 이용안내[편집]

  • 모든 차량에 대하여 주차요금을 부과. 주차요금은 10분당 1,000원. 조계사(조계종) 신도에 한하여 할인쿠폰을 판매다.
- 할인쿠폰 : 1시간 1,000원
1. 할인시간은 최대 3시간까지, 3시간초과 시 10분당 1,000원의 주차요금을 부과
2. 조계종 스님 / 장애인 / 국가유공자 차량은 신도와 동일하게 적용
3. 조계사 자원봉사자는 최대 5시간 까지 할인쿠폰을 적용

조계사 주변 유료 주차장 안내[편집]

  • 서인사마당 공영주차장 : 10분당 800원
  • 조계종 총무원 주차장 : 1시간에 3,000원(30분에 1,500원 추가)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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