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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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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江陵 鏡浦臺)
낙산사(落山寺). 낙산사(양양) - 2005년 산불에 타서 완전 소실됐었으나, 2011년 10월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낙산사 홍연암
망양정(望洋亭). 왼쪽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있으며 앞에는 망양정 해수욕장이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望洋이란 이름에 걸맞는 탁트인 풍광을 자랑한다. 내부에 숙종과 설공찬전을 지은 채수등의 글씨가 있다.
삼일포(三日浦)
월송정((越松亭). 본래는 남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다 현재 위치로 옮겼다. 앞에 월송정 해수욕장이 있어 해수욕하기 좋다. 내부에 절재 김종서와 아계 이산해등의 글씨가 있다.
팔경 중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다. 내부에 미수 허목, 숙종, 정조등의 글씨가 있다.
청간정(淸澗亭)
총석정(叢石亭)

관동팔경(關東八景)은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를 말한다. 통천총석정(叢石亭), 고성삼일포(三日浦), 간성청간정(淸澗亭), 양양낙산사(洛山寺), 강릉경포대(鏡浦臺), 삼척죽서루(竹西樓), 울진망양정(望洋亭), 평해월송정(越松亭)을 들어 관동팔경이라 이르나, 월송정 대신 흡곡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대관령의 동쪽이라 하여 '관동'이라는 말이 붙여졌지만, 현재는 망양정과 월송정이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삼일포ㆍ총석정ㆍ시중대는 북한 지역에 들어 있다. 본래 강원도의 동해안 지방에는 명승지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특히 이들 팔경에는 정자누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풍류를 즐기고 빼어난 경치를 노래로 읊었으며, 또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많은 전설이 얽히게 되었다.

고려 말의 문인 안축(安軸)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에서 총석정·삼일포·낙산사 등의 경치를 읊었고,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자 시인인 정철(鄭澈)은 가사인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일대의 산수미와 더불어 관동팔경의 경치를 노래하였다. 또, 신라시대에 영랑(永郎)ㆍ술랑(述郎)ㆍ남석랑(南石郎)ㆍ안상랑(安祥郎)이 삼일포와 월송정에서 놀았다는 전설도 전한다.

개요[편집]

관동지방(강원도)의 8가지 명승지를 말한다. 영동 지방을 따라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팔경 중 망양정과 월송정이 소재하는 울진군은 현재 경상북도 소속이지만 관동팔경이란 말이 만들어졌던 당시에는 강원도 소속이었다.

팔경 중 대부분이 신라의 전설적인 화랑 신라사선과 관련된 곳들이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관동팔경을 모두 방문하는 것은 월북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며, 고령층에서나 간간히 모두 방문한 사람을 볼 수 있다.

이중환은 저서인 택리지에서 낙산사 대신 청초호, 월송정 대신 시중대를 넣었다. 그리고 정철관동별곡에서 7경은 언급했으나 월송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망양정이 평해군에 위치해 월송정과 가까웠기 때문에 멀어서 안갔다고 보기도 어렵다. 즉 8경중 6경은 뭘로 해도 들어가지만 나머지 2경은 공식적으로는 낙산사와 월송정이며 비공식적으로 이들 대신 청초호와 시중대가 들어가기도 한다는걸 알수 있다.

상세[편집]

경포대[편집]

경포대(鏡浦臺)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강원도 강릉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소재지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처음 지었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태조(재위 1392∼1398)와 세조(재위 1455∼1468)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앞면 5칸ㆍ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모두 4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다. 이름인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경포대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13년(1326) 강원도(江原道) 안렴사(按廉使) 박숙정(朴淑亭)이 현(現)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印月寺) 옛터에 창건(創建)하였던 것을 조선(朝鮮) 중종(中宗) 3년(1508) 강릉부사(江陵府使)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옮겨 지은 후 몇 차례의 중수(重修)가 있었고, 고종(高宗) 10년(1873)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건(重建)한 뒤 1934년, 1947년, 1962년 중수가 있었다.

이 건물은 익공계양식(翼工系樣式)에 팔작지붕으로 건축(建築)된 누대(樓臺)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鏡浦八景)(녹두일출(綠豆日出), 죽도명월(竹島明月), 강문어화(江門漁火), 초당취연(草堂炊煙), 홍장야우(紅粧夜雨), 증봉낙조(甑峰落照), 환선취적(喚仙吹笛), 한송모종(寒松慕種)) 및 경포월삼(鏡浦月三)(월주(月舟), 월탑(月塔), 월파(月波))은 천하의 장관이다. 대호(臺號)인 '경포대(鏡浦臺)'의 전자액(篆字額)은 유한지(兪漢芝), 해서액(楷書額)은 이익회(李翊會)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先生)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肅宗)의 어제시(御製詩) 및 명문(名文)으로 알려진 조하망(趙夏望)의 상량문(上樑文) 등 여러 명사(名士)들의 기문(記文),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또한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주지번(朱之蕃)이 썼다고 전하는데 '강산' 두 자를 잃어버려 후세인(後世人)이 써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낙산사[편집]

낙산사(落山寺)는 한국의 3대 관음도량 가운데 하나로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이다. 소재지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5번지이다. 시도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된 낙산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기도를 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나 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지은 법당이다. 낙산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대신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있다. 낙산사에는 이를 비롯해 종각ㆍ일주문ㆍ천왕문ㆍ선실ㆍ승방 등의 건물이 있다.

낙산사에는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보시한 동종(보물 479호)이 있다. 높이 158㎝, 입지름 98㎝인 이 동종은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불교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지어진 7층 석탑(보물 499호)은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이밖에 보물 1362호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도 문화적 가치가 높다.

시도 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된 홍예문은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으로,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시·도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된 의상대는 신라 문무왕 16년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여행객이 즐겨 찾는 전망대로 유명하다.

홍련암(문화재 자료 36호)은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불전으로,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낙산사 원장(시도유형문화재 34호)은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세조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몇 년 전 연결ㆍ보수를 끝냈다. 또 시도유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된 사리탑은 승려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조선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부도로 모신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망양정[편집]

망양정(望洋亭)은 강원도 관동팔경 중에서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누각이다. 그 위치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이곳의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 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중종 13)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屯山洞)으로 이건하였다 한다. 그 후 오랜 세월 풍우로 인해 낡은 것을 1957년 울진군, 울진교육청이 국·도비 보조금과 뜻있는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1959년 9월에 중건 낙성한 것을 1979년11월에 군에서 보수 정화한 바 있고, 1994년 9월에 사업비 9천 120만원을 들여 재보수하였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하여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하며, 숙종과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초,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오고 있다. 망양정 아래 포구에는 군이 1985년에 개설한 망양 해수욕장이 있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천연동굴 성류굴이 있다.

망양정(望洋亭)은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산(屯) 정상에 날을 듯 앉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망양정은 고려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1471년(조선 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기슭에 옮겨 놓았다. 1517년(조선 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 해에 안렴사 윤희인(尹希人)이 평해군수 김세우(金世瑀)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1590년(조선 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방치될 때 1854년(조선 철종 5)에 울진현령 신재원(申在元)이 망양정을 이축할 것을 향회(鄕會)에 발문해 둔산 해안봉에 장소를 정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60년(조선 철종 11) 윤 3월 6일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정자가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그 이름하였다. 그 후 정자가 퇴락되어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7년에 울진군 및 울진교육청의 보조금과 여러 사람들의 목재 기증으로 1958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다시 낡고 기울어진 것을 울진군에서 여러 차례 보수하여 유지해 오던 것이 다시 심하게 낡아 2005년에 완전해체하고 새로 지었다.

특히 조선 숙종 임금은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시와 글로는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 정추?김시습의 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등 다수가 전해오며, 그림으로는 정선(鄭敾)의 <백납병(百納屛)>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망양정도(望洋亭圖)가 유명하다.

숙종 어제시
列壑重重逶迤開(열학중중위이개) 뭇 멧부리들이 첩첩이 둘러 있고
驚濤巨浪接天來(경도거랑접천래) 놀란 파도 큰 물결 하늘에 닿아 있네
如將此海變成酒(여장차해변성주) 만약 이 바다를 술로 만들 수 있다면
奚但只傾三百盃(해단지경삼백배) 어찌 한갓 삼백 잔만 마시리
정조 어제시
元氣蒼茫放海溟(원기창망방해명)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誰人辨此望洋亭(수인변차망양정)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縱目宣尼宅(흡여종목선니택)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훑어보듯
宗廟宮牆歷歷經(종묘궁장역역경) 종묘며 담장 하나하나 훑어본다

삼일포[편집]

삼일포(三日浦)는 온정리에서 12km 거리에 있는 큰 호수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호수의 풍경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호수의 둘레는 8km, 깊이는 9~13m이다. 호수이면서 포(浦)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포구였던 것이 점차 토사로 막혀 호수가 된 것이다.

신라시대 네 화랑(영랑, 술랑, 안상랑, 남석랑)이 하루만 놀러 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3일을 놀고 갔다고 해서 삼일포라 한다. 또 금강산을 다녀간 시인묵객 중에서 삼일포를 찾지 않은 이 없고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이 없어 가장 많은 시를 낳은 곳이 삼일포이다.

호수 안에는 신선들이 춤을 추던 무대라는 무선대, 네 명의 화랑이 노닐던 정자라는 사선정, 화랑들이 다녀간 흔적인 '술랑도 남석행(述郞徒 南石行)' 이라는 붉은빛을 발하는 글씨가 적인 돌과 매향비가 있는 단서암, 소나무가 우거진 누워 있는 소 모양의 와우도등 4개의 섬과 이름 없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호수주변으로 36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자태가 잔잔한 수면위에 담겨 있다고 할 만큼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

월송정[편집]

월송정(越松亭)은 경상북도 울산시 평해읍(平海邑) 월송리(月松里)에 있는 정자이다.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이곳의 울창한 송림에서 달을 즐기며 선유(仙遊)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이미 월송사 부근에 창건되었던 것을 조선 중기 연산군 때의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으나 한말에 일본군이 철거, 1967년 재일교포들이 정자를 신축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다 하여 해체하고, 1980년 7월에 현재의 정자(정면 5칸, 측면 3칸, 26평)로 복원하였으며, 현판은 최규하(崔圭夏)의 휘호로 되어 있다. 관동8경을 꼽을 경우, 월송정 대신 강원 통천군 흡곡(歙谷)에 있는 시중대(侍中臺)를 꼽는 이도 있다.

죽서루[편집]

죽서루(竹西樓)는 고려시대에 건축된 누각이다.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9-3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칸ㆍ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조선(朝鮮) 태종(太宗) 3년(1403) 삼척부사(三陟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중건하였다 하며, 누 동쪽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절과 명기(名妓)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이 있어 죽서루(竹西樓)라 이름하였다 한다.

오십천(五十川) 층암절벽(層岩絶壁) 위에 세운 이 누는 자연암반(自然岩盤)을 초석(礎石)으로 삼고 암반 높이에 맞춰 길고 짧은 기둥을 세운 5량구조(五樑構造)의 팔작집인데 공포(공包)에서는 익공계수법(翼工系手法)과 다포계수법(多包系手法)이 혼용(混用)되었는데 천장구조(天障構造)로 보아 맞배집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조선(朝鮮) 후기(後期)까지 여러 번의 수리(修理)로 많은 변형(變形)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액(書額) 중 '제일계정은(第一溪亭)'은 현종(顯宗) 3년(1662) 부사(府使) 허목(許穆)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肅宗) 37년(1711)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憲宗) 3년(1837) 부사 이규헌(李圭憲)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正祖),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 등 많은 명사(名士)들의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본 누의 남쪽에는 별관(別館)인 연근당(燕謹堂)이 있었다 한다. 두타산의 푸른 숲,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 기암절벽(奇岩絶壁) 등과 어울려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다.

청간정[편집]

청간정(淸澗亭)은 조선시대에 만든 정자로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89-2. 청간천 하구 언덕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종 15년(1520)에 군수 최청이 고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2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ㆍ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누각형식 정자이다. 추녀 밑에 걸린 '청간정(淸澗亭)' 현판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다. 창건 연대(創建年代)나 창건자(創建者)는 알 수 없으며 조선(朝鮮) 중종(中宗) 15년(1520) 군수(郡守) 최청(崔淸)을 비롯한 역대 군수가 중수(重修)하였다 한다.

주위가 모두 석봉(石峯)으로 되어 층층이 대(臺)를 이루고 높이도 수십 길에 달하는 곳에 위치하여 동해(東海)의 파도가 암석에 부딪쳐 흰 거품을 남기며 부서져나가는 광경은 실로 장관(壯觀)이다. 특히 해와 달이 솟을 때의 정경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서 희귀한 경치라고 할 만하다. 고종(高宗) 21년(1884)에 타버린 것은 1928년 면장 김용집(金容集)의 발의(發議)로 지금의 정자(亭子)를 재건(再建)하였으며, 청간정의 현판은 1953년 5월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이 친필로 쓴 것이다.

총석정[편집]

총석정(叢石亭)은 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바다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동해의 명승으로 불리고 있는 이곳에는 바다기슭에 높이 솟은 모난 돌기둥들이 1 000m구간에 우뚝우뚝 늘어서있다.

총석정의 이름은 반도처럼 바다로 쭉 뻗어나간 봉우리꼭대기에 정각이 세워진 데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총석'이란 돌 묶음이란 뜻인데 이곳에 정자가 세워진 다음부터는 이 일대의 기암들도 모두 총석정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총석정의 경치는 바닷물 위에 솟은 절벽경치로서 바다에 나가서 보아야만 그 진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수천수백개의 모난 기둥들이 참빗살처럼 늘어선 봉우리들이 거의 모두가 비슷한 크기, 비슷한 높이를 가지였다.

총석정의 모난 이 돌기둥들은 화산작용에 의하여 땅 겉면으로 뿜어 나온 현무암이 냉각 응축되면서 6각, 8각으로 쪼개진 후 오랫동안 바닷물과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이루어진 것이다. 총석들은 길게 혹은 짧게, 세로 혹은 가로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고 흩어져있기도 하여 참으로 신기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십 개의 입총군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네 개의 큰 돌기둥인데 그것들이 바닷물 위에 차렷 자세로 서있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하기에 옛 사람들은 네 개의 커다란 돌탑을 물속에 세워놓은 것 같다고도 말했고 어떤 힘 장수가 조선동해의 경치가 하도 좋아 이 바다기슭에 돌 정자를 지으려고 세워 놓았다고도 전해왔다.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첫자리에 총석정을 꼽았고 이 고장 사람들은 총석정을 '통천금강'이라고 자랑해왔다.

총석정에는 금강산의 만물상과 같은 온갖 형태의 바위들이 있으며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전설도 있다. 네 신선이 놀고 갔다는 '사선봉'이 그러하며 어떤 힘 장수가 총석을 베여 용궁까지 다리를 놓다가 총석정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어 그만두었다는 돌다리'와 의좋게 서있는 '부부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는 '거북바위' 등이 그러하다.

입총(立叢)들이 끝나고 돌기둥들이 벼랑을 이룬 곳에는 5~7m의 깊이를 가진 금란굴이 있다. 총석정의 뒷면에는 바위들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흙산으로 되어있고 소나무들이 보기 좋게 서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조선동해의 경치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곳은 달밤의 경치도 좋지만 해돋이는 황홀하기 그지없어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또한 이곳에서 총석들을 내려다보면 푸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 총석정 밑에 와 부딪치면서 흰 갈기를 날리는 모습은 총석정의 억센 기상을 잘 보여준다.

총석정 앞바다에 펼쳐진 알섬과 천도를 비롯한 섬들의 경치도 참으로 볼만 하다. 이렇듯 총석정과 그 부근의 섬과 해안은 기암, 청송, 창파로 하여 조선동해의 명승으로 세상에 이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출전[편집]

안축[편집]

1330년 고려 충숙왕 17년 안축은 44세 때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에 감흥하여 《관동별곡》을 지었다. 경기체가로 된 가사로 전체 9장이 《근재집》(謹齋集) 2권에 전한다. 그는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등의 절경을 노래하였다.

허목[편집]

현존하는 기록 중 관동팔경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삼척부사였던 허목의 《죽서루기》(竹西樓記)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는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간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정을 들었다.

정철[편집]

1580년 선조 13년에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과 해·내·외금강 등 절승지를 유람하며 읊은 《관동별곡》을 지었다.

숙종[편집]

조선 숙종(1674년 ~ 1720년)은 관동팔경을 시로 읊으면서 1군 1경이라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는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만경대,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을 들었는데 그 수가 9개로 9경이 된다. 숙종은 망양정에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하사한다.

이중환[편집]

그 외에도 이중환(1690년 ~ 1752년)의 《택리지》에도 관동팔경이 나오며, 그는 만경대 대신, 청간정을 넣었고, 월송을 대신, 흡곡의 시중대를 넣었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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