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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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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 전경
오픈하우스

용산공원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국가 공원이다. 용산민족공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용산공원에 주둔 중인 대부분의 주한미군 용산기지가 2017년 말까지 평택시 USAG 험프리스로 이전함에 따라, 공터로 남는 이곳을 활용하기 위해 계획된 국가 공원이다. 공원의 개장시점은 2027년에서 '미군기지가 완전히 반환된 뒤 7년 후'로 대폭 늦춰졌다. 사실상 무기 연기된 셈이다.

개요[편집]

서울 용산미군기지가 경기도 평택시로 완전 이전한 뒤 조성될 용산공원 규모가 당초 계획보다 20% 이상 늘어난 300만㎡로 정해졌다. 공원 조성사업에는 당초(1조2000억 원)보다 1.78배 늘어난 2조1400억 원이 투입될 것으로 추정됐다. 재원은 국가와 서울시가 분담하되, 일부 시설에 대해서는 민간자본을 유치하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변경계획'을 확정했다고 2021년 12월 27일 발표했다. 용산공원 조성계획은 2011년에 수립됐고, 2014년에 한 차례 바뀐 뒤 두 번째 변경이다.

  • 용산공원 예정지는 서울특별시 중앙부의 용산구 내에 위치하고 용산구 내에서도 한 가운데에 입지하고 있으며, 한강에도 인접하여 명실상부한 서울의 지리적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 동쪽으로는 남산 2호터널과 3호터널에서 반포로를 통해 강남으로 연결되며, 서측으로는 서울역에서 노량진으로 연결되는 한강로가 남북으로 관통하며, 용산기지 중앙의 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의 중앙으로는 이태원로, 지하로는 지하철 6호선이 기지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 현재는 미군 용산기지 부지로 활용되고 있으나, 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의 병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 공원 예정지는 용산구 용산동 1가, 2가, 3가, 4가, 5가, 6가 및 서빙고동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편집]

용산공원은 2020년 8월부터 민간인의 방문이 가능하도록 부분 개장되었는데 이곳은 과거 미군 장교의 숙소이다. 현재 18개동 중 10개동을 어린이 도서관, 놀이터, 쉼터, 전시관 등으로 리모델링하여 가족 쉼터공원으로 만들었다. 외부 공간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영어 표지판과 시설들이 남아 있어 이색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적한 미국 마을 같은 이곳에서는 용산 기지의 역사와 미래를 담은 전시도 관람할 수 있다. 오픈 하우스에는 실제로 이곳에서 생활했던 미군 장교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포토존이 있으니 색다른 추억을 남길 수 있다. 겨보세요.

용산기지의 둔지산 동남 쪽에 위치한 미군장교숙소 부지는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서빙고가 인근에 있어 조선 초부터 '서빙고'로 불렸던 곳이다. 현재도 이 지역의 이름은 용산구 서빙고동이다. 지금은 이곳 미군장교숙소 부지를 포함해 용산기지라고 부르지만 일제의 패망 직후 용산에 진주한 미군들은 용산기지라고 부르지 않고, 대신 이 일대의 오랜 역사적 지명인 서빙고를 따서 '캠프 서빙고(Camp Sobinggo)'라고 불렀다. 캠프 서빙고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사용되다가 휴전협정 직후 미8군이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기지(YongsanGarrison)'로 다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장소성을 지닌 이곳 미군장교숙소 부지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이곳은 한강에 인접해 일제강점기부터 줄곧 경작지(논)로 활용되었다. 이후 6‧25전쟁 기간 미8군이 용산기지를 복구하면서 군수품의 효율적인 운반을 위해 서빙고역에서 용산기지 내로 지선(支線)을 새로이 설치해 운용하였다(현재 폐철도로 남아있음). 이로 인해 부지의 북쪽에는 군수창고가 자리잡고, 부지 서쪽에는 철길로 자연스럽게 경계가 만들어졌다. 이후 1970년대에는 미군헬기장으로 사용되다가 그 후 1986년 한국정부로 부지 49,368㎡(약 1만 5천평)가 공식 반환되어, 옛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가 미군장교숙소를 건설해 2019년 말까지 임대‧운영하였다.

추진 경과[편집]

  • 1990년 06월 : 용산기지이전 한·미 기본합의서/양해각서 체결
  • 2003년 05월 15일 : 한·미 정상 용산기지 이전 합의
  • 2004년 02월 25일 : 공원화기획자문위원회 설치 (국무총리실 소속, ‘05. 7 활동종료 시까지 10차례 회의 개최)
  • 2004년 07월 23일 : 한·미 용산기지 이전협상 타결
  • 2004년 12월 09일 : 용산기지이전협정 국회비준 동의
  • 2005년 10월 12일 : 국가주도 공원추진 발표(대통령, 국회시정연설)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 발족 (국무총리실 소속, '07.11 활동종료 시까지 8차례 회의 개최)
  • 2006년 08월 24일 :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 개최
  • 2007년 06월 15일 : 용산공원 국제심포지엄 개최
  • 2007년 07월 13일 : 「용산공원조성특별법」제정·공포
  • 2007년 10월 30일 : 용산공원 미래상 전시 (국립중앙박물관)
  • 2008년 01월 01일 : 「용산공원조성특별법」시행
  • 2008년 03월 11일 :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설치(국토해양부)
  • 2008년 05월 16일 : 「용산공원조성특별법」개정(국회본회의 통과)
  • 2009년 08월 : 용산공원 기초조사 완료
  • 2009년 10월 :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 완료,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수립 착수
  • 2010년 05월 12일 :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기본구상 국제세미나 개최
  • 2010년 07월 12일 : 용산공원정비구역 지정(안) 관계부처 협의
  • 2010년 11월 14일 :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안) 사전환경성검토 협의
  • 2011년 05월 12일 : 용산공원정비구역 지정 고시
  • 2011년 10월 :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고시
  • 2012년 04월 : 국제공모 및 마스터플랜 수립
  • 2012년 10월 : 공원조성계획 및 기본설계 용역 착수
  • 2014년 10월 : 종합기본계획 변경 관련 공청회 개최
  • 2014년 11월 : 종합기본계획 변경계획안 관계기관 협의
  • 2014년 12월 :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변경 고시
  • 2015년 09월 ~ 10월일 : 용산공원 콘텐츠발굴 설문 및 수요조사
  • 2016년 12월 ~ 2017년 02월 : 용산공원 전시회 개최(전쟁기념관)
  • 2017년 05월 ~ 2017년 11월 : 용산공원 라운드 테이블 1.0 개최(총 9회)
  • 2017년 11월 ~ 2018년 04월 : 용산공원 기획전시(국토발전전시관)
  • 2018년 11월 : 용산기지 내부체험 버스투어 개시
  • 2019년 09월 :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총리소속으로 격상(前:국토부장관)
  • 2019년 12월 : 제1차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개최
  • 2020년 03월 : 용산공원조성지구 조성사업시행자 지정
  • 2020년 07월 : 용산공원정비구역 변경을 위한 공청회 개최
  • 2020년 08월 :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 대국민 개방 (장교숙소 5단지)
  • 2021년 12월 :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변경 고시 (2차)
  • 2022년 06월 : 용산공원지구 반환부지 유지관리 및 운영 위탁업무 수행기관 지정
  • 2022년 06월 10월 ~ 2022년 06월 26일 : 용산공원 시범개방
  • 2022년 08월 :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변경 고시(3차)

공원의 조성[편집]

생태체계[편집]

  • 녹지체계 : 남산으로부터 공원으로, 다시 한강으로 연결되는 연결 녹지 및 공원 내 신림녹지, 이용녹지, 생산녹지로 구분
  • 수체계 : 공원을 소유역으로 나누고, 만초천 복원과 함께 주요 결절지점에 저류기능 및 친수공간 호(pond)와) 이를 연결하는 내(steam), 그리고 빗물 저장과 정화 기능을 하는 습지(wetland)를 조성
  • 경관체계 : 숲, 들, 호, 내, 습지로 이루어진 대표 경관을 바탕으로 부지 표고가 높거나 주변이 열린 곳을 주요 조망점으로 삼고 남산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로막는 시설물 조성 제한

이용체계[편집]

  • 공간 및 시설체계 : 생태적 체계와 수체계, 그리고 지형, 경관 및 지하공간을 포함한 큰 틀 안에서 다얀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구조와 시설 활용방안 제시
  • 동선체계 : 대중교통 및 보행을 통한 접근이 용이하도록 여러 출입구를 설정하여, 부지를 순환하는 동선과 도시의 보행 연계성 강화
  • 프로그램체계 : 공원의 생태적 계획에 맞는 프로그램과 함께 부지의 역사 및 문화를 강조하고 주변도시와 연계될 수 있는 프로그램 제시
용산공원 기본구상도

버스투어[편집]

사우스포스트 벙커
용산총독관저 터
용산위수감옥
둔지산
미8군사령부
한미연합군사령부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舊 병기지창 무기고
남단터(추정)
  • 코로나19로 잠정 중단
버스투어 지도안내.png
사우스포스트 벙커(SOUTH POST BUNKER)

현재 한미연합군사령부 군사시설로 사용중인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용산기지의 남서쪽에 위치해 일제강점기 일본군사령부 작전센터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배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는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식민지배의 양대 기둥으로 이 곳에서 군사령관으로 재직했던 하세가와, 미나미, 고이소 등은 조선총독이 되기도 했다.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광복 이후 미7사단사령부가 사용(1945. 9~1948. 12)하다가 주한미군이 철수한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작전실(1949. 7~1950. 6)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쟁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점령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한 때 박정희, 김종필, 장도영, 김백일, 채병덕 등 한국현대사의 궤적을 남긴 인물들이 거쳐갔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6·25전쟁 발발 당시 한강다리 폭파 결정도 이 일대에서 이루어졌다(당시 국방부 및 육군본부는 옛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 건물을 재활용해 사용했음). 공원계획에서는 현재 원형을 최대한 보존할 계획이며 창이 없는 벙커 모양의 저층부는 문화시설 등으로, 창문이 많은 최상층은 방문자 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용산총독관저 터(주한미군 121 종합병원)

주한미군 121병원(2019.11 평택 이전)이 있던 이곳은 일명 '용산아방궁(龍山阿房宮)'으로도 불렸던 용산총독관저가 위치했다. 용산총독관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제2대 조선총독까지 오른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러·일전쟁 잉여금으로 건설한 유럽풍의 초호화 건축물이었다.

처음에는 하세가와 본인을 위한 일본군사령관 관저로 지은 것이었으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용산총독관저로 용도 변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위관장교 숙사로, 1949년 7월 주한미군 철수 직후에는 미군사고문단(KMAG) 장교 클럽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파괴된 채로 방치됐다. 그 후 1950년대 후반 미군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공원계획에서는 기존 121병원을 해체하고 총독관저터와 그 앞에 위치했던 정원을 복원하고 그 주변으로 문화시설과 수경시설을 배치할 계획이다.

용산위수감옥(용산위수감옥)

용산위수감옥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둔지산 자락에 위치해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으로 1909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감옥(형무소)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됐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1949년 7월 대한민국 국방부가 용산기지에 자리잡으면서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사용되면서 군 감옥의 기능과 역할이 이어졌다.

현재까지 감옥을 둘러싼 벽돌담장과 일부 건물들이 당시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용산총독관저 터(121병원 부지)와 함께 사우스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감옥 담장에는 6·25전쟁 당시의 탄흔이 그대로 남아있어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원계획에서도 위수감옥의 역사를 전시하는 용도를 포함한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둔지산(屯之山)

위수감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둔지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둔지산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약 70m)으로 남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일부다.

예부터 한강을 지키는 군부대가 둔(屯)을 치고 있는 곳이라서 '둔지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평지 가운데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둔지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둔지산 자락에는 우리 선조들의 마을인 둔지미(둔지리)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06년부터 둔지산 일대를 군사기지화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2차례에 걸쳐 강제 이주당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옛 기록에는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고 하여 둔지산에 하늘 제사를 지냈던 원단과 기우제를 지냈던 풍운뇌우단(일명 남단터(추정)) 등 여러 종류의 단(壇)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미8군사령부(EUSA·EIGHTH UNITED STATES ARMY)

미8군사령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보병병영을 재활용한 것으로 1978년 맞은 편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UNC)·주한미군사령부(USFK)·미8군사령부(EUSA)가 함께 있었던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주한미군의 상징인 미8군사령부(EUSA)는 1944년 6월 10일에 미 본토에서 창설되었다. 미8군사령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배치돼 인천상륙작전 후 38선을 넘어 북한으로이동했다가 전황의 변화에 따라 1951년경 옛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에 자리잡았다.

전쟁 중인 1952년 미8군은 한국근로단(KSC)을 배속받아 용산기지 복구 및 재건 공사를 개시하면서 구 일본군 78연대 병영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재활용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9월 15일 미8군사령부는 옛 서울대 건물을 반환하고 용산기지로 이전했다. 1954년 11월 미8군사령부는 미8군전방사령부를 용산기지에 남겨두고 일본 도쿄 근교의 캠프 자마로 이동했다. 이듬 해 1955년 7월 미8군사령부는 다시 용산기지로 복귀하고 미8군사령관이 겸직하는 미극동육 군사령부도 같이 서울로 따라왔다. 대신 일본 캠프 자마에 있던 미8군사령부는 미8군 후방사령부로 격하됐다. 미8군사령부가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용산으로 복귀한 이유는 당시 냉전시대의 동아시아 거점으로 용산기지의 군사전략적 비중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1957년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 따른 미군재편이 이루어지는데 하와이에 태평양통합사령부(PACOM)를 창설하면서 일본에 있던 미극동군사령부(Far East Command)가 해체된다. 이에 따라 용산기지의 미극동육군사령부가 해체되고 주한미군사령부(USFK)가 새롭게 신설된다. 결국 1957년 7월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UNC)마저 도쿄에서 용산기지로 이동하면서 용산기지는 그야말로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핵심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미8군사령부는 6·25전쟁의 주력부대로 용산기지에 주둔하면서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대한민국 안보의 한 축으로 기능해 왔다. 1944년 창설 이래 부대 역사의 대부분을 용산에서 보낸 것은 미군역사상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한미군사관계의 역사는 곧 미8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한미군기지 이전 및 재배치에 따라 지난 2017년 7월 미8군사령부는 평택으로 모두 이전했다. 이로써 6·25전쟁 이래 반세기 넘게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미8군사령부도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되었다.

한미연합군사령부(CFC 
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미연합방위태세의 심장부로 한미 부대를 통합지휘하기 위해 1978년 11월 7일에 창설되었다. 이로써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력이 신장되면서 한미군사협력과 유대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미연합사 창설로 한국군이 작전통제권 행사에 참여하면서 장래 전시작전권 환수를 위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평시작전권은 1994년에 환수함).

한편,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 뒷편에는 남산 자락의 이태원에서 발원해 삼각지쪽으로 흐르는 만초천 지류가 남아있다. 만초천 지류 한 가운데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보병 연대 정문으로 사용됐던 보행다리와 정문 기둥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은 1970년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건물로 지붕은 한국전통 기와를 사용하고 벽체는 콘크리트 형태로 구성돼 1970년대 한국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공원계획에서도 건축물의 외관을 최대한 유지하고 건물 뒤편 만초천 지류의 보행 다리와 돌기둥에서 진입이 가능한 통로를 만들 계획이다.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蔓草川 : 덩굴내

만초천(덩굴내)은 원래 인왕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한강으로 흐르는 약 7.7km에 이르렀던 큰 하천이었다. 1960년대 복개가 진행되어 지금은 거의 볼 수 가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용산미군기지 내에 복개되지 않은 상태로 약 300m 구간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용산미군기지 내에 남아있는 만초천은 엄밀히 말해 남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삼각지 부근의 만초천 본류와 만나는 지류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 만초천에는 '만초(蔓草)'라는 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덩굴내'라고도 불렀다. 고려말 목은 이색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용산팔경' 가운데 만초천의 게잡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통해 예전 용산 만초천에서는 밤에 불을 켜고 많은 사람들이 게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태종 태에는 만초천 물줄기를 이용해 용산강(지금의 한강 원효대교 인근)까지 들어오는 배를 남대문까지 끌어 올리기 위한 논의도 이루어졌었다. 용산강으로부터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만초천에 군사 1만명을 동원해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물자를 남대문에서 도성으로 손쉽게 운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많은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했다. 만초천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명칭으로 욱천(旭川)으로도 불렸다. 1990년대 중반 일제식 용어를 바로잡으면서 욱천을 만초천으로 변경했다.

1960년대부터 복개공사를 시작하여 현재는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어 용산기지에 남아있는 만초천 지류는 옛 자연과 생태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이다. 흐르는 물 위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와 석축 등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옛 만초천의 물길을 상상할 수 있다.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JOINT U.S. MILITARY AFFAIRS GROUP-KOREA)·옛 일본군 장교숙소

현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은 원래 용산기지 내 일본 육군 장교들이 머물렀던 장교숙소로 1908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줄곧 일본군 장교숙소로 사용되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단의 수행원들이 머무르기도 했다(소련군대표단 고위층은 조선호텔에 머무름).

6·25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5년 대구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와 미군사고문단(KMAG)이 용산으로 이동한다. 이 때 육군본부는 현 전쟁기념관 부지에 자리를 잡았고 미군사고문단은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옛 일본군 장교숙소(미소공위 당시 소련군대표단 수행원 숙소)를 미군사고문단 본부로 사용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989년 대전 계룡대로 이전하며 그자리에는 현재의 전쟁기념관이 들어섰고, 미군사고문단(KMAG)은 국군의 성장과 발전에 비례해 그 역할이 점차 축소되면서 1971년 주한 미합동군사원조단(JUSMAG-K)으로 통합되었다.

舊 병기지창 무기고(兵器支廠 武器庫)

병기지창은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던 곳으로 인근의 육군창고(현 캠프킴 부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주한미군 역사실에서 발간한 『Historical Walking Tour of Yongsan Garrison(2008)』에 따르면 병기지창 일대 일부 건물은 일제 말(1944~1945) 보충대 막사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용도가 변경된 이유는 1908년 용산기지 완공 당시부터 줄곧 병기지창으로 사용되다가 1943년초 용산기지의 일본군 부대가 대거 뉴기니아 전선으로 차출되면서 이른바 '뿌리뽑기 강제동원'에 의해 수많은 한국청년들이 보충대로 강제동원되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일대는 주한미군 공병대와 시설대가 사용 중이다.

사진에서 보듯 1908년 완공된 병기지창 병기고(兵器庫=무기고) 건물은 현재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주한미군 사병막사로 이용되었다.

공원계획에서는 병기지창 일대의 배치구조를 복원할 수 있도록 마당을 계획하고 건물은 증축된 부분을 철거하고 원형을 회복할 계획이다.

남단터(추정)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남단(풍운뇌우단)은 조선시대 한양도성 내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더불어 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제례시설로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다.

조선시대 묘와 단은 유교이념 아래 국가가 설치 운영하는 신성한 곳이었으며, 백성의 풍요와 사회의 안위를 희망하는 이념의 장치였다. 개혁군주 정조(正祖)는 이 남단을 예전 하늘에 천지 제사를 지냈던 원구단(원단)으로 보고 남단의 장소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구단(원단)과 남단(풍운뇌우단)은 별도의 단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원래 '산천단(山川壇)'으로 불렸는데 1406년 숭례문 밖 목멱산 남쪽(둔지산)으로 옮겨졌고, 1411년 5월 '풍운뇌우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537년 4월 중종은 남단(풍운뇌우단)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내고 이후로도 역대 임금들이 남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기우제는 3~5일간의 간격을 두고 목멱산, 용산강, 사직과 종묘 등 여러 곳에서 12차례까지 지냈다.

그 후 남단은 1906~1908년 일본군 병영 조성과정에서 훼손되었고 현재는 유구로 추정되는 일부 석물만이 남아있다. 1937년 발행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엔 "용산중학교 동쪽에서부터 뻗은 작은 언덕 줄기를 따라 내려와, 현재 야포 병영 가운데 돌출한 부위의 남쪽 끝에는 예부터 남단이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이 언덕길을 남단고개라 부른다"고 나와 있다.

공원계획에서는 정밀 발굴 조사 및 원지형을 회복하고 현재 구릉지에 남아있는 남단 유구(추정)를 보존할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이용안내[편집]

  • 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221 (서빙고동 235-101)
  • 운영시간 : 매주 화~토요일, (내부시설**) 09:00~17:00 / (외부공간) 09:00~18:00 / 입장마감시간 17:00
  • 휴관일: 1월1일, 설‧추석당일, 매주 일‧월(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열고 연휴 다음 평일에 휴관)
  • 다만, 일부 내부시설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여 개방시기 추후결정(외부공간은 개방)
  • 이용요금 : 무료
※ 최대 500명까지만 동시 입장 가능하여 대기할 수 있습니다.
  • 주차안내 : 주차불가(장애인 차량만 주차가능)
※ 주차가 불가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고, 인근 유료주차장(용산가족공원주차장 또는 이촌 반포대교 북단하류 공영주차장)을 이용 바람.
  • 문의전화 : 전화번호 070-4224-1708 (문의 가능시간 : 09:00~18:00)
  • 반드시 신분증 지참

교통정보[편집]

신용산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해 3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용산공원의 출입구인 14번 게이트를 만나게 된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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