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사적 제271호이다.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인경궁, 자수궁, 경희궁)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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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경희궁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 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 부지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역사[편집]
조선 후기[편집]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편집]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가 아닌 조선 말기에 경희궁이 대거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 도시전설에 가까운 얘기로 치부되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에 만행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과 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아래에 상술되어 있듯이 고종 즉위 직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고종 2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고종 20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대한제국[편집]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광무 5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융희 원년)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새로 즉위한 황제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경희궁 사용 빈도 또한 현저히 줄어들다. 일제는 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홍교를 1908년(융희 2년)에 철거했다.
일제에 의한 잔여 전각 이건[편집]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더불어 경희궁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시점에 경희궁 권역 내에 남아 있는 전각은 5개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가 간행한 '경성부사' 뿐만 아니라 이전에 조선 측에서 간행된 자료인 '경복궁연건일기'에 모두 일치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기존의 나무위키 문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문서에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쓰여져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경희궁 터에 있는 비어있는 공터에 경성중학교를 신축했을 뿐, 경성중학교 건설 때문에 전각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1915년에는 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이건했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을 부순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매각했다. 때문에 숭정전, 흥화문 등이 다른 장소에서라도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경희궁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흥화문은 다시 경희궁으로 되돌아 왔다. 동국대학교에서 절로 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은 경희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복제하여 복원시켰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현재의 위치(동국대학교)로 옮겨서 법당으로 마개조하여 사용했다. 참고로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10] 광복 이후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흡수되었고, 조계종에서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를 세우면서 동국대학교의 법당 '정각원'으로 사용했다.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정문인 흥화문은 일본 사찰인 박문사에서 매입하여 박문사의 산문으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 박문사 자리에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 흥화문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선 관계로 개양문이 있던 자리로 이건되었다.
경희궁 외조 남쪽문인 개양문은 남산에 있는 일본사찰 서본원사에 매각되어 정문으로 쓰였다가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문인 대성문으로 사용되어 1960 ~ 1970년대 성균관대학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76년 석조교문으로 바뀌었고, 이후 서울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는 서울역사박물관측의 조사 내용인데, 일부에서는 1904년 ~ 1905년에 촬영하여 《꼬레에 에 꼬레아니》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개양문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경복궁 중건 때 소실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1930년대 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1943년 ~ 1944년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
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한반도까지 태평양 전쟁 전선이 확대되지는 않아서 이 방공호가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경희궁 회상전 문서에서 방공호의 외부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고등학교 터[편집]
경희궁 부지에 일제가 지은 경성중학교는 광복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되었고,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 현재 경희궁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1980년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도 서초구로 이전했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가자마자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부지의 서쪽 구석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신청사를 신축했으나, 나머지 부지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기까지 약 20년 간 그냥 공터로 방치되었다. 서울특별시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알짜배기 땅인 서울고등학교 부지의 매각을 시도했으나 선뜻 그 땅을 사겠다고 나서는 민간기업이 없었다. 땅값이 100억 원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앙 정부와 서울특별시에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다. 현대건설은 "별 생각 없지만 정부가 권유하니 인수하겠다"는 태도로 이 땅을 구매한다.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해간 것은 1980년 신학기부터였고, 현대 측에서는 구 교사자리에 '인력개발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현대그룹의 사원연수원으로 활용했다. 이 때 이미 현대그룹은 이곳에 28층짜리 대형건물을 지어 그룹 본사의 사옥 겸 외국 바이어 전용호텔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대규모 현대사옥이 들어선다는 것을 일반시민이 알게 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매스컴에서도 반대의견이 중론이었고, 서너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화제가 되었고 한결같이 '시민을 위한 공원화'를 주장했다. 이렇게 반대여론이 압도적이었던 것에 대해 손정목 전 서울특별시청 내무국장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분석한다. 엄혹한 시절이라 정치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현대로부터 땅을 빼앗아 공원으로 만들어라"는 소리는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잡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을 해소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현대그룹은 사옥 건설 계획을 보류하고 관망세로 전환한다. 서울특별시는 궁지에 몰렸다. 이 때 과천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 예술의전당을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대한민국 경찰청 신청사를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성난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기관도 강력하게 추진을 하지는 못했다.
발굴 조사 및 복원 시작[편집]
1985년 1월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서울특별시 간부들이 주요업무계획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가오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한 민심수습책을 논의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희궁 터 공원화 계획이 거론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서울고등학교 부지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부지를 취득한다. 이 때 서울고등학교 부지 가격으로는 당시 매립한지 얼마 안 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과 등가교환했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
서울특별시는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를 세우고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1985년과 1987년 1,2차 발굴 조사를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했으며,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3차~7차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에도 발굴 조사를 계속 진행했다.
1,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한 단국대학교 박물관은 월대석을 노출했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등학교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발굴 결과 및 문헌 고증을 거친 경희궁 전각 복원 사업도 시작했다. 1987년에 우선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 및 복원했다. 다만 원래 위치에 이미 구세군회관이 들어섰기 때문에 서쪽으로 100여 m 가량 옮겨 복원했다. 1991년에는 숭정전을, 1998년에는 자정전과 회랑을, 2000년에는 태령전과 그 일곽을 각각 경희궁 내에 복원했다. 그리고 2002년에 숭정전 주변부 복원을 완료하여 경희궁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후로 2017년 현재까지 경희궁 복원 사업은 상당히 지지 부진하여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2013년에 복원한 숭례문의 용 그림이 문제가 되면서 경희궁 숭정전 용도 덩달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위쪽 사진의 용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쓰이고 있는 본래의 숭정전 천장에 달려있는 것이고, 아래쪽 사진의 용은 옛 숭정전 자리에 새로 복원한 건물의 천장에 달아놓은 것이다. 현재 경희궁에 복원해둔 숭정전 용 조형물은 장난감 같이 조잡하게 제작되었다는 평이 많으며, 천정의 그림과 다른 조형물 역시 원형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져 비판받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 1월 27일에 문화재청에서 2014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복원 작업에는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예산도 국비 70%, 시비 30%를 투입하며 2023년까지 진행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서울특별시에서 제작한 종합정비계획안에 따르면 2035년 이후를 목표로 경희궁 전체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우선 2016년 말에 경희궁 옆에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철거가 되고,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차장이 들어서고, 지금의 주차장 자리는 발굴을 통해 복원을 시도할 예정이다. 또한 방공호도 철거하고, 2025년까지 흥화문 등도 고쳐 짓는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등은 2026년부터 장기계획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건축물[편집]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 흥화문(興化門)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 숭정문(崇政門) :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
- 숭정전(崇政殿)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철거전 경복궁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흥화문,숭정전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경복궁의 10/1정도가 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3대궁은 모두 복원을 시행하고 있으나 경희궁은 그 궁궐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지언정 복원 조차 되지 않았다.
- 자정전(資政殿) :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 태령전(泰寧殿) :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 방공호 :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 융복전(隆福殿) :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고 숙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 철거되었다.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6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있었다.
- 회상전(會祥殿) :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불 타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에도 숭정전, 흥정당, 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28년에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식 사찰에 팔려 옮겨가 주지 집무실이 되었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회상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동쪽으로는 융복전이 남서쪽으론 집경당이 있었다. 대한제국 당시 찍은 사진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있었다.
관람[편집]
-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
- 관람요금 : 무료
- 위치 : 서울역사박물관 바로 뒷편
※ 서울역사박물관 중정을 통해서도 경희궁으로 직접 관람이 가능하다.
- 주차장: 서울역사박물관 부설주차장 이용. 〈교통, 주차장 요금 안내 바로가기〉
- 주의사항 :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관람 시에는 커피류, 음료수, 과자 등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 문의 : 02-724-0274 ~ 6(서울역사박물관 안내데스크)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1102710000&pageNo=1_1_1_1
- 〈경희궁〉, 《위키백과》
- 〈경희궁〉, 《나무위키》
- 〈경희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희궁〉, 《서울특별시》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