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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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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방화 테러로 붕괴되기 이전의 모습.
2013년 재개방 직후의 모습.
숭례문 야경

남대문(南大門)은 서울특별시숭례문을 자칭하는 말이다.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조선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현재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건축물이다.

숭례문[편집]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국보 제1호라는 타이틀로도 유명한데, 가장 중요한 국보라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전자의 의미로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2021년 11월 19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국보 제1호'라는 말이 없어지고 '국보 서울 숭례문' 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힌다'는 뜻으로, 사서 중 하나인 유교경전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숭례문과 남대문[편집]

"남대문(南大門)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강제로 개명시킨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다. 특히 숭례문 전소 이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런 오해(혹은 악의적 왜곡)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는 잘못된 오해 중 하나로,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식 명칭과 통상 명칭이 다른 예는 매우 흔하며, '남대문' 역시 숭례문의 통상 명칭으로 불린 것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는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세종 9년 1월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이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남대문내행랑실화 연소십여간)'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 놓았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泰山)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했다. 이에 많은 재상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김병기가 머리를 들고 말하길, "천리를 지척으로 하려면 지척이 될 것이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하려면 삼층이 될 것입니다. 대감이 지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태산은 본디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하길, "혼자 잘난척 하는군."이라 했다. 대저 천리 지척이라는 함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 함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 평지라 함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말이다.
《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 상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하자.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대문', '동대문' 명칭은 잘못된 것도, 일제의 잔재도 아니다.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 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한 것을 전소사건 이후 '남대문은 틀린 이름' 이라거나 '일제 잔재'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와 불성실일 뿐이다.

역사[편집]

숭례문 (1900년경)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한국의 대부분의 도시 성곽들의 운명이 그러했 듯이 한양도성도 철거되기 시작했으며,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 역시 헐렸다.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이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보도블록에는 성돌이 박혀있다. 성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숭례성터길이다. 도시 성곽이 헐린 이유는 교통에 방해되었기 때문이므로 해방 이후에도 딱히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 사실이지만 일제가 숭례문을 보존한 이유에는 이를 일종의 개선문처럼 여긴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상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하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입니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라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숭례문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한양 점령'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겼으며, 훗날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면서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을 이뤄낸 자신들의 역사를 빛내는 시초의 건축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 이유가 크다. 같은 이유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과한 흥인지문 역시 철거가 취소되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일제만의 시각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원래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자리매김했다. 본의 아니게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셈이다.

이후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서울을 뒤덮은 융단폭격에도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비록 건물의 일부가 피탄되어 무너졌으나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할 수 있었다.

  • 1396년(태조 5년) : 최유경의 지휘로 준공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 1398년(태조7년) : 숭례문 완성.
  • 1433년 07월 :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뒤 새로 짓기로 정함.
  • 1447년 08월경 : 숭례문 신축 착공.
  • 1448년 03월 17일 : 숭례문 신축 완공.
  •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룸.
  • 1479년 04월 02일 : 숭례문 중수 완공.
  •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 1908년 09월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훼철됨.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 1962년 12월 20일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재지정.
  •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 2002년 0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5년 0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 2006년 03월 0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 2008년 0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 2008년 0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 2010년 0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 2013년 04월 29일 :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 2013년 05월 01일 : 숭례문 관리단체를 종전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
  • 2013년 05월 04일 : 숭례문 공식 개방

특징[편집]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홍예문에는 철이 덧 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숭례문 현판[편집]

숭례문 현판 (2013년 5월)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에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이 발생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해당 결실편을 현장에서 95% 정도 확보함에 따라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리한 편액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이송 후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함과 동시에, 그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응급조사 및 자문결과를 기초로 과학적 상태조사(X선, 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부분의 접착복원 등 숭례문 현판의 정밀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며 처리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예정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 5월 말에 복원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했으며, 최고라 일컬어지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했고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

숭례문 방화 사건[편집]

붕괴되는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 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초기에는 왜 불을 일찍 끄지 못하였나가 주 초점이였다. 하지만 이는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은 물이 닿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

불을 지른 사람은 자신의 땅을 나라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복구[편집]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울타리(일제강점기에 설치됨)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하였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 위에 옛 성곽 자리를 표시했다.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하여 2013년 4월 29일 공사 완료하였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cm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

교통[편집]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서울역에서 약 400m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버스의 경우 옛 YTN타워 앞의 정류장이나 숭례문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가 많으므로 이것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일부 노선들은 한쪽 방향에만 숭례문에 정차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중앙차로는 서울역 방향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서울역버스환승센터 7번 승강장은 숭례문 쪽으로 직결되어 있다.

버스 정류장명 중 서울역 방향으로 "서울역, YTN"으로 된 정류장이 있는데, 정작 서울역에서 이 정류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 게다가 노숙자들을 보면서 횡단해야 한다.

정류장이 옛 YTN타워와 신한은행 바로 앞에 있고 이 정류장에서 숭례문이 코앞인데다가 YTN이 본사를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정류장명도 숭례문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버스들은 여전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버스들이 이 낚시성 표기를 많이 하므로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서울역과 숭례문을 오갈 때 유의해야 한다.

기타[편집]

  • 남대문시장의 준말이기도 하다.
  • 북한 개성시 북안동에 위치한 성문을 남대문이라 부른다. 북한의 국보 제124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에 위치한 개성 내성(內城)의 남문. 내성의 문으로는 남대문 외에 6개가 더 있으나 서쪽의 눌리문, 북창문은 축대만 불완전하게 남았고, 나머지 문들은 터만 남았다.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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