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분
발해고분(渤海古墳)은 남북국시대 발해 영역에서 축조된 무덤을 뜻한다.
발해유적은 고분·성터·절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발해고분은 1933∼1934년 발해 동경성(東京城, 현재의 上京城址) 발굴 때 가까이 있던 삼령둔고분(三靈屯古墳)을 조사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중국, 북한 및 러시아 연해주에서 많은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중국에서는 50여 곳에서 2,000기 가까이 확인되었고 150기 이상이 발굴되었다. 북한의 함경도 일대에서는 20여 곳에서 2,000기 정도가 확인되었고 100여 기가 발굴되었다. 또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약간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상세[편집]
발해고분은 발해시대의 고분이다.
발해 고분들은 구국(舊國)의 소재지였던 중국 지린성 돈화시(敦化市)를 비롯하여 상경성·서고성·팔련성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서경의 관내였던 길림성 통화(通化)지구, 남경의 관내였던 함경도지역을 비롯하여 변방에 해당하는 吉林市지역·綏芬河유역·沿海州 일대에서도 고분들이 조사되었다.
중국에서는 50여 곳에서 2천 기 가까이 발견되었고, 이 중에서 150기 이상이 발굴되었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함경남북도 일대에서 발해 고분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20여 곳에서 2천 기 가까이 확인하였고, 100여 기를 발굴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2∼3곳에서 10기 미만의 극히 적은 숫자의 고분만이 발견되었는데 성터나 주거지·절터유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조사가 부진한 실정이다.
주요한 고분군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돈화시에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는 모두 80여 기의 무덤이 있으며, 이 중에서 32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특히 1949년에 정혜공주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에 발해 초기의 왕족과 귀족들이 묻혀 있음이 밝혀졌다.
정혜공주무덤은 대형 石室封土墓로서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무덤 앞에 벽돌을 깐 11m 길이의 墓道가 있고, 여기서 羨道를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연도의 길이는 1.74m, 너비는 1.10m이다. 무덤 안에는 4면에 현무암 돌을 쌓아 반지하식의 玄室을 만들었고, 천정은 고구려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抹角藻井천정을 하였다. 현실은 남북 길이 2.80m∼2.94m, 동서 너비 2.66m∼2.84m이며, 전체 높이는 2.68m이다. 지상에는 1.5m 높이의 원형 봉토를 하였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발해 왕실이 건국 초기에 고구려 전통을 강하게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는 墓誌 1점을 비롯하여 木棺 조각들, 암수의 돌사자 조각 각 1점, 도금된 구리못 4점 등이 출토되었다.
다음으로 서고성에 가까운 화룡현 용두산(龍頭山)고분군에서도 1980년에 정효공주무덤이 발견되어, 이 고분군에 있는 10여 기의 무덤이 역시 발해 왕실과 귀족들의 것임이 밝혀졌다.
정효공주무덤은 남향인데 무덤 전체 크기는 남북 길이 약 15m, 동서 너비 약 7m이다. 벽돌과 판석으로 쌓았는데 현실·연도·墓門·묘도·탑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7.10m 길이의 계단식 묘도는 두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폭이 좁아지고 끝 부분에 벽돌을 쌓아 무덤을 막았다. 그 뒤에는 石門이 있고 연도가 이어진다. 연도는 1.90m로서 바닥에 벽돌을 깔았고 墓誌를 세워 놓았다. 현실은 길이 3.10m, 너비 2.10m, 높이 1.90m로서 지면에서 약 4m되는 지하에 만들었고, 벽돌로 棺臺를 쌓았다. 현실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1∼2단의 평행고임을 하고 다시 한 번 2단의 평행고임을 한 뒤에 큰 판석을 덮었다. 현실 위에 쌓은 탑은 이미 무너져 한 변의 길이가 5.60m인 방형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무덤 양식은 벽돌로 쌓는 당나라 방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정을 쌓는 고구려 방식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무덤 위에 탑을 쌓았는데 이는 발해의 독창적 방식이다. 무덤 앞에는 무덤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건물터가 있고, 산 아래에는 陵寺로 보이는 龍海절터가 있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유골이 수습되어 공주 부부의 합장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이 밖에 벽화와 묘지·陶俑 조각·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1971년에는 화룡현 팔가자(八家子)에 있는 허난툰고성(河南屯古城) 안에서 부부 무덤이 발굴되었다. 동서로 4.5m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있는 두 무덤은 長方形 塼築墳에 해당한다. 둘 다 남향으로서 크기는 길이 2.4m, 너비 1.4m, 높이 0.47m로 거의 동일하다. 현실 바닥에는 정방형 벽돌을 깔았고, 네 벽은 장방형 벽돌로 쌓아 백회로 틈을 메웠다. 발굴할 때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무덤 위에는 8개의 판석을 두 층으로 덮고 그 위에 동서 길이 약 28m, 남북 너비 약 20m, 높이 약 2m되는 커다란 봉토가 있었으며, 이 봉토 위에는 30여 개의 주춧돌이 동서 방향으로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어서 무덤 위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 주위에는 길이 500m되는 방형의 담이 쳐져 있어서 墓域을 이루고 있었다. 이 무덤에서는 순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화려한 장식물들이 출토되었다.
상경 부근의 三陵鄕 三星村에서 확인된 산링툰(三陵屯)고분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분군 주위에는 길이가 약 450m되는 日자형의 토벽(土壁)이 둘러싸고 있고, 3기의 무덤이 북쪽 구역에 삼각형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1호묘는 일제시대에 조사가 이루어졌고, 2호묘는 1991년과 이듬해에 발굴되었다. 이 무덤들은 대체로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1호묘는 반지하식으로 쌓았고 남향하고 있으며, 현실·연도·묘도로 구성되어 있다. 묘도는 약 7m로서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었고 길 좌우는 돌로 쌓았다. 현실 남벽 가운데에 낸 연도는 길이가 4m이다. 현무암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서로 맞물리게 하면서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현실을 쌓았는데 벽의 표면에는 회칠한 흔적이 있다. 현실 크기는 길이 3.9m, 너비 2.1m, 높이 2.4m이다. 천정은 꺾음식 천정을 하고 있고, 봉토 위에는 주춧돌이 동서로 길게 줄지어 각각 4개씩 있고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어서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호묘는 지하식으로서 남향하고 있고 역시 현실·연도·묘도로 구성되었다. 묘도는 13단의 흙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길이가 9.8m이고 너비는 2m이다. 연도는 현실 남벽 가운데에 있고 바닥에는 현무암 판석을 깔았으며 길이는 2.7m이다. 현실은 현무암으로 7층 정도를 쌓았는데 길이 3.90m, 너비 3.30m, 높이 2.45m이다. 현실 천정은 3층의 말각천정으로 하였고 연도는 1층의 평행고임천정을 하였다. 이 무덤에는 모두 15인의 인골이 출토되었고, 현실과 연도의 벽 및 천정에는 인물과 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상은 대형의 석실봉토묘나 전축묘로서 왕실이나 상층 귀족들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보다 낮은 계층의 무덤은 중형이나 소형의 석실묘·석곽묘·석관묘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층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방 세력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安圖縣 東淸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1990년과 이듬해에 걸쳐 모두 13기가 발굴되었다. 여기에는 土壙墓·積石墓·石壙墓(石槨墓)·石室墓 등의 여러 형식이 존재하고, 方壙積石墓·方壇石壙墓·方壇階梯積石墓·方壇階梯石室墓 등과 같은 새로운 유형도 조사되었다. 매장 습속에서도 1인장과 多人合葬이 있고, 1·2次葬이 모두 있으며, 火葬도 있어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 고분군이 있는 곳은 발해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상경에서 당나라로 가는 중간 경유지에 해당하므로, 중앙 귀족보다는 지방 세력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永吉縣 楊屯 大海猛유적이나 楡樹縣 老河深유적 등에서는 발해시대의 수혈식 토광묘들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무덤들은 말갈적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발해에 편입되었던 말갈족의 고분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 무덤에는 흙무덤·돌무덤·벽돌무덤 등이 있다. 흙무덤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던 양식으로 발해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돌무덤은 다시 석실묘·석곽묘·석관묘로 나눌 수 있는데, 석실봉토묘가 발해 고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적인 것으로서, 특히 석실봉토묘는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정혜공주무덤이 대표적이다.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발해 중기 이후에 왕실에서 일부 받아들여졌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이러한 것으로는 정효공주무덤과 마적달무덤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효공주무덤의 벽은 벽돌로 쌓았으면서 천정은 돌로 평행고임을 하여 당나라 양식과 고구려 양식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 밖에 상경 부근의 삼릉둔 1호묘는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방식으로는 單人葬·二人合葬·多人合葬이 모두 보인다. 2인합장은 부부합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습속의 특색인데, 大城子고분이나 大朱屯고분에서처럼 주인공과 陪葬者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예도 있다. 배장자는 적게는 1인에서 많게는 16인에 이른다. 이러한 배장자에는 주인공과 혈연관계에 있었던 가족뿐만 아니라, 그에 딸린 奴婢나 部曲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殉葬의 한 遺風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배치상태로 보아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존재하며, 하나의 무덤에서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인골은 대체로 追加葬에 의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는 木棺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목관없이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발해 초기에는 육정산고분군에서처럼 火葬도 유행하였다. 이것은 시신을 관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풍습은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진다. 이 밖에 육정산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들도 출토되었다. 동물뼈로는 말·소·개의 뼈들이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고분들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 특이한 현상으로서 발해 초기에 유행하였다.
한편 발해에서는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릉둔 1호묘와 하남둔고분에서는 봉토 위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고, 육정산고분군과 용두산고분군에서는 봉토에서 기와들이 다수 노출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대체되었는데, 정효공주무덤과 마적달무덤은 승려의 무덤이 아닌 데도 그 위에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학자들이 말갈의 풍속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보다는 고구려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고분에서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고, 將軍塚 정상부에 있는 건물 난간의 흔적같은 것들이 이를 증명해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발해고분〉, 《위키백과》
- 〈발해고분(渤海古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발해고분〉, 《우리역사넷》
- 이기환 선임기자, 〈중국 지린성서 발해 황후 무덤 발굴〉, 《경향신문》, 2009-08-26
-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고구려 발해 문화유산 지도》
- 〈발해 정혜공주, 정효공주 묘비는 발해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 말한다.〉, 《스팀잇》
- 소이나는, 〈<남북국시대> 16. 발해의 예술 (정혜공주묘, 종효공주묘, 이불병좌상, 돌사자상, 발해석등, 보상화무늬벽돌)〉, 《티스토리》, 2019-02-1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