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산태양궁전
금수산태양궁전(錦繡山太陽宮殿)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에 있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건물이다. 궁전 내부에는 김일성의 유품이나 생전에 사용했던 금수산 궤도전차의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별칭은 '주석궁(主席宮)'. 북한에는 주석이 오직 김일성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 생존 당시에 주석궁으로 불리던 건물은 바로 이곳이다. 오직 수령만 안장될 수 있는 이곳은 북한의 1급 묘역이며 북한 인민들이 안장될 수 있는 최고의 묘역인 대성산혁명렬사릉조차 북한의 2급 묘역이다.
북한을 방문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만경대 고향집,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대성산 혁명렬사릉, 애국렬사릉, 조국해방전쟁 참전 렬사묘,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유라도 방문해서는 안 될 곳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근처에 백화원영빈관, 조선중앙동물원, 조선중앙식물원, 대성산혁명렬사릉이 있다.
개요[편집]
금수산태양궁전은 1977년에 건설되어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하였던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김일성 사후에 그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목적으로 개조한 시설이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1994.7.8) 이듬해인 1995년 6월 12일 당중앙위원회·당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현 내각) 연명으로 김일성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에 영구히 안치하도록 하였다. 금수산태양궁전은 김일성 사망 1주기인 1995년 7월 8일 개관하여 2012년까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불렸으며, 2012년 2월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였다. 2011년 12월 17일 사망한 김정일의 시신도 이곳에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이 자리 잡은 곳은 평양 대성구역 미산동 모란봉의 연봉인 금수산 기슭으로 평양 중심가에서 약 8km 가량 떨어져 있으며, 총 부지면적은 350만㎡에 달한다. 북한은 1996년 7월 27일부터 김일성 시신을 일반에 공개해 왔고, 외국인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곳에는 어떠한 소지품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입장객이 멈춰 서서 보는 것은 허가되지 않는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김일성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도 전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 사후에도 동 시설을 개보수하여 김정일 시신의 참배 공간과 유품 전시실도 마련하였다.
건물 앞에는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 광장이 있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폭 415m, 길이 216m의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이 광장은 김일성광장과 함께 각종 정치적 행사에 활용되는 대표적 장소로서 김정일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2012년에 북한 당국은 이 광장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 대규모의 공원 조성 공사를 진행한 바 있다. 광장의 공원화는 금수산태양궁전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방문 편의 공간을 조성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김정일 시신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부각하고 김정은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주체의 최고 성지'라며 신성시해 왔다. 앞으로도 주요 계기시에 김정은이 당·정·군 요인과 각계 대표를 대동하고 참배하는 관례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징[편집]
김일성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무덤용이 아니라 금수산의사당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청와대, 대통령실 청사와 유사한 역할인 국가주석 집무실 용도였다. 그것을 김일성 사후에는 김정일이 무덤으로 개조하고 이름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바꾸었는데,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무덤이 아니라 김일성 미라 전시장에 가깝다. 나중에 김정일도 죽은 뒤 곁에 합장되었다. 북한을 흔히 김씨 왕조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보면 종묘와 같이 역대 국왕을 추모하는 시설이 된 셈이다. 이후 김정일의 70회 생일인 2012년 2월 16일에 '금수산태양궁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칭했다.
참고로 김일성 사후 김정일-김정은은 이 건물 대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를 관저 및 집무실로 사용한다.
금수산은 지명이 아니라 '수를 놓은 비단'을 뜻하는 금수(錦繡)로, '금수강산'할 때의 그 금수이다. 일반명사에 가까운 지명이므로 발음과 한자가 같은 지명이 몇 군데 더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의 금수산, 사이비 단체인 금수원 등.
외관은 이름에 어울릴 만큼 궁전 구조로 되어 있고 시신의 유지 및 관리는 러시아의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들어간 비용은 8억 9,000만 달러이다.
구글 위성 사진으로 보면 능라도 경기장을 제외하면 평양국제비행장 건물보다도 큰, 북한 최대 규모의 건축이다. 비교하자면 아이파크몰을 포함한 용산역 전체 규모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역사[편집]
주석궁 시절[편집]
북한 평양시 대성구역 미암동에 있는 말 그대로 궁전. 예전 이름은 '금수산 의사당'으로 김일성이 거주하며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즉, 남한으로 치면 청와대에 해당하는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북한 관련 용어 가운데 '주석궁'이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외교관 등 외국인 인사가 방북하면 여기로 데려가기 때문에 내부를 관람한 사람도 꽤 많고 방송에서도 종종 보여주는데 내부는 이름처럼 궁전 구조로 되어 있고 인테리어는 아름답다고 한다. 한국 고위인사들 중 1990년에 강영훈 당시 총리가 면담차 이곳에 들렀다.
김일성 시체 전시[편집]
미라화되기 전에 임시 안치된 김일성의 시체. 과학동아에 따르면 유지비 절감을 위해 처음 부검을 할 때도 내장, 안구 등 썩기 쉬운 부위는 다 제거했다고 한다.
금수산태양궁전은 엠버밍 처리한 김일성의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김일성이 생전에 생활하던 주석궁을 개조했다. 미라의 관리는 기술력이 있는 러시아에 큰 돈을 내면서 전담하게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입장자는 한 자리에 서서 관람할 수 없다. 지나가면서 보고 퇴실해야 한다. 이는 모스크바의 레닌 영묘에 안치되어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시신, 베이징의 모주석기념당에 안치되어 있는 마오쩌둥의 시신,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 안치되어 있는 호찌민의 시신도 마찬가지인데, 북한이 이들을 따라한 것이다. 단 일부 특권층은 서 있어도 상관없는 듯하다.
궁전 내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이나 열차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주석궁 개조 비용은 핵심계층이 '충성심 입증' 차원에서 바친 재산으로 충당되었다. 인력은 뭐,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그 재산과 노동력이 다 누굴 쥐어짜서 나온 것이냐'는 소리가 나오겠지만 여기에 더해 인민들을 상대로 외화 헌납 운동이란 것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인민들에게 건설 노동까지 시키면서 "수령님 궁전 좀 크고 반짝이게 짓게 돈 좀."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일성 시체를 보존작업하던 시기가 하필 북한이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으로 고생하던 시기라서 상당수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나가는 시기에 이 건물을 지었다.
사실 김일성 본인은 이렇게 까지 대대적인 우상화를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의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사실상의 권력을 이양한 후에는 주석궁의 자기 집무실에서 망원경으로 대성산혁명렬사릉을 바라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게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에게 '내가 죽으면 과거 함께 싸웠던 동지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고, 즉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누누이 말했다지만, 김정일은 권력 이양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은 깔끔하게 무시해버리고 있는 예산 없는 예산 싸그리 다 끌어다 박제 후 궁전을 지었다.
매년 1월 1일 자정이 되면 김정은과 수뇌부 핵심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참배한다. 이 외에도 북한 내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참배를 한다. 예외적으로 비정기적 참배도 간간히 있는데, 주로 북한과 사이가 좋은 국가의 대표급 인물이 방문했을 때와 뭔가 큰 일이 있을 때에도 참배 행사가 자주 개최된다고 한다.
2000년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당시 하마터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여길 가야 할 뻔했다고 한다. 회담 참석 조건으로 북한 측이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를 끈질기게 요구했다는데, 다행히도 결국 이 조건 자체가 폐기되고 참배 일정은 뺀 상태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엔 북한이 이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공개하지 않았다가 회담 4년 뒤인 2004년에야 공개했다. 간단한 이유를 말하자면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바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려던 시기였는데, 이를 공개할 경우 위에 서술했듯이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당시 어렵게 조성해 놓은 남북 화해 무드를 깨뜨릴까 봐 우려했던 것이기 때문에 회담 4년 뒤에 이 사실을 밝혔다.
그 외에도 유럽이나 북미 쪽 인사가 방북하면 이쪽으로 끌고 가려고 시도한다고 한다. 또한, 북한 주재 외국 대사는 부임할 때마다 이쪽으로 최소 한번씩은 끌려가서 참배하게 된다. 대사 본인은 가고 싶지 않아도 다른 일정 소화 중 갑자기 차를 꺾어서 이쪽으로 끌고 가므로 대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러시아 대사, 영국 대사, 스웨덴 대사는 꽤 자주 끌려가고 그 참배 광경이 북한의 지상파를 타는데, 이런 강대국 대사들도 우리의 위대한 수령에게 참배를 한다는 선전용으로 삼기 위함이다.
김정일 시체 전시[편집]
2011년 12월 17일 공식적으로는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김정일도 이 곳으로 간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김정일을 김일성과 동급으로 보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2011년 12월 20일 사실이 되었다.
위의 사진은 방부 처리를 하지 않은 임시 상태지만, 궁전 자체가 결국 김씨 일가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장소인 만큼 단순한 무덤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차후 김정일 신격화 작업의 밑거름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김정일 장례식과 뒤이은 조선인민군 장병 결의대회 등의 공식 일정 뒤 대규모 개축 공사가 진행되었고, 김정일 사후 1주기였던 2012년 12월 17일에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정치권과 군부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재개관했다. 김정일 사체의 엠버밍 작업도 완료되었다고 하며, 김일성 조각상만 있던 중앙홀에 김정일 조각상이 추가되고 김정일의 '유품'이 전시된 전시실도 새로 개관하는 등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공식적인 묘소가 되었다.
김정은도 개인숭배 체계를 만드는 것을 보면 김정은 역시 사후 여기에 안치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세습이 계속되어 역대 수령들이 계속 입주하면 김일성 우상화 장소를 벗어나서 판테온이나 파르테논 신전, 종묘와 같은 북한 사상의 상징적인 건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금수산태양궁전법[편집]
북한당국은 2013년 4월 1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7차 회의에서 '금수산태양궁전법'을 채택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금수산기념궁전법을 제정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5장 40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 법의 제1장은 금수산태양궁전의 지위를 주체의 최고 성지로 영원히 보존하고 길이 빛내도록 하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3조에서 북한당국은 금수산태양궁전을 민족존엄의 상징으로, 4조에서는 민족번영의 만년유산으로, 5조에서는 민족의 영원한 성지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만년유산과 영원한 성지는 김씨 일가의 영원한 세습독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금수산태양궁전법 제2장은 궁전 시설물의 영구보존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금수산태양궁전의 영구보존 문제를 토의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기구로 금수산태양궁전 영구보존위원회를 조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0조에서 북한당국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보관 되어있는 영생홀의 온도, 습도, 조명, 위생상태 등이 정확히 보장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11조에서 15조까지의 조항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증서, 열차, 승용차, 배, 전동차, 사진, 문헌 등의 보존에 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3장은 금수산태양궁전 내에서 김일성, 김정일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분에 대해 규정되어 있다. 3장 16조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에 경의를 표시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 북한 주민, 재외동포, 외국인 누구나 가능하도록 규정했고 17조는 경의를 표시하는 장소로 입상홀, 영생홀과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 있는 태양상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 주민과 재외동포는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해야 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는 대외사업일꾼의 안내를 받아 해당 국가의 예법을 준수할 수도 있다고 규정했다. 또 '국가적 명절, 기념일, 중요 계기'에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국가 경의식'을 진행한다고 규정했다.
금수산태양궁전법 4장은 궁전의 관리와 운영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25조는 이곳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영구보존, 관리운영, 환경보호에 지장을 주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고 26조는 해마다 5월과 6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을 휴관일로 정해 건물과 시설물을 보수하고 정비하는 기간을 둔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사실 5월과 6월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에 대한 약물 재처리를 하는 기간이다. 1924년 구소련의 레닌이 사망하고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하면서 러시아의 시신관리기술이 처음으로 지구상에서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1949년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1953년 구소련의 스탈린,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고트발트, 1969년 베트남의 호치민, 1976년 중국 모택동, 1979년 앙골라의 네트, 1985년 가이아나의 바남, 1994년 김일성이 사망 후 시신영구보존 되면서 그 기술도 발전했다.
1997년에 망명했던 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당중앙위원회 국제비서였던 황장엽 선생은 '김정일 정권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성역으로 꾸미는데 쓴 엄청난 돈을 3분의 1만 절약해도 200만 톤의 옥수수를 살 수 있었다'며 '그 정도의 식량이면 1990년대 300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당시 김일성이 사망하고 금수산기념궁전을 개건한데 든 비용이 약 8억 9천만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결국 고난의 행군은 죽은 자를 위해 국고를 탕진하다보니 백성이 죽어야 했던 북한 같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박제표본 같은 시신영구보존을 위해 든 비용이 1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시신을 약물재처리하는데 그 비용도 80만 달러가 소요된다고 한다.
김일성이 사망 후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 17년 동안 김일성 시신영구보존에 든 비용이 약 1400만 달러에 달한다. 국제시장에서 입쌀가격이 알랑미는 톤당 약 360달러, 찹쌀은 약 700달러가 된다고 한다. 일반 입쌀 평균가격 450달러로 환산한다면 김일성의 시신보관에만 사용한 돈으로 3만 톤을 넘는다. 이는 결국 승리58자동차 1만 2천여 대에 실을 어마어마한 량이다.
그런데 지금은 김정일의 시신까지 영구보관하고 있으니 그 비용은 2배나 늘어나는 셈이다. 살아서 이밥에 고기국을 먹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그들이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인민들에게서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꼴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력사정이 어려운 북한에서 두 시신보장을 위해 금수산태양궁전법 36조에는 궁전관리에 필요한 전력, 설비, 자재, 물자를 최우선으로 보장할 데 대해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궁전 영구보존 관리운영을 위해 39조에는 김일성김정일기금을 내오도록 규정했다. 김정일이 사망하고 지난 8년 동안 김정은이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한 횟수는 51회로, 17년간 김정일이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한 횟수인 29회보다 훨씬 많다. 김정일은 1년에 1.7회인데 비해 김정은은 6.4회로 약 4배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수산태양궁전법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보관의 중요성과 궁전관리운영에 대한 내용은 규정되어 있으나 이 법이 규정한 내용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벌칙규정은 없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두말할 것 없이 가장 큰 범죄로 여긴다는 의미로 잘못하면 정치범으로 취급되어 처형되거나 정치범관리소에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편집]
금수산태양궁전 때문에 평양 지하철도 혁신선의 광명역이 폐역되었다. 대신 삼흥역에서 이곳까지 금성거리 궤도전차 혹은 금수산선이라는 이름의 1,000mm 궤도를 사용하는 전용 노면전차가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금수산태양궁전〉, 《나무위키》
- 〈금수산태양궁전〉, 《위키백과》
- 〈금수산태양궁전〉, 《통일부북한정보포털》
- 이제훈 기자, 〈김정은, 1월1일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한겨레》, 2023-01-02
- 김주원 탈북자, 〈영원한 김씨 일가의 권력계승을 위한 금수산태양궁전법〉, 《자유아시아방송》, 2020-08-12
- 〈‘참배 성지’ 금수산태양궁전…김일성 부자 시신 관리는?〉, 《KBS뉴스》, 2021-12-25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