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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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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이태원(梨泰院)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의 지명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쇼핑 상가음식점, 유흥 오락 시설, 관광호텔 따위가 밀집한 곳이다. 이 지역은 수많은 외국인과 주한 미군이 거주하여 여러 나라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특징이 있다.[1][2]

개요[편집]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은 과거 한강의 물길이 닿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점 때문에 용산은 한양의 관문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에는 외국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태원은 (프랑스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모여 사는) 서초구 서래마을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다문화 거리로 꼽힌다. 과거 미8군 사령부(일명 용산미군기지)와 인접해 있어서 주한미군들의 유흥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는데 덕분에 여러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이태원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외국 대사관이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 이태원1동의 인구 대비 외국인 비율은 2010년대 기준 25%를 넘는다. 이태원 소방서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이슬람 모스크인 서울중앙성원이 있어서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슬림들은 아랍권이나 터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 등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들이 많다.[3][4]

역사[편집]

조선 시대[편집]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역원제에서 유래한다. 역(驛)은 파발이나 관리에게 말을 대여해주는 시설을, 원(院)은 관리와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을 의미하는데, 과거 이 장소에 있었던 원의 이름이 이태원이었던 것이다. 이태원의 존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피란하는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당시 공민왕은 개경에서 안동으로 몽진할 때 파주 분수리를 거쳐 양주 영서역(현 은평구 대조동)을 지나 사평도로 한강을 도강했는데, 이 때 이태원을 지난다. 조선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이유로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시 이태원의 위치를 목멱산(남산) 남쪽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태원에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이 있어 그 동쪽에 샘물이 솟아나고 큰 소나무가 골짜기에 가득 심어져 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정보와 《경조오부도》상의 위치를 근거로 당시 이태원의 위치는 이태원동이 아닌 용산고등학교 부지로 비정된다.

이태원은 고려 시대에도 교통의 중심지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수도인 한양과 영남지역을 이어주는 영남로(嶺南路)의 출발지로써 그 기능이 더욱 부각된다. 한양에서 영남 지방으로 가기 위한 사신들이 첫 번째로 묵는 숙소가 되었으며, 이후 서빙고/한강나루, 사평진, 양재, 판교, 용인의 용인로를 거쳐 영남로가 이어진다. 이태원이 교통의 요지로 사용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교통 복지의 편리함이다. 숭례문을 지나 이태원을 거쳐 서빙고로 가는 길에는 별다른 하천이 없고, 둔지산이 113m로 야트막하기 때문에 길이 험하지 않고, 도둑을 당할 일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리적 이점이다. 서빙고나루는 사평리와 동작진 사이에 위치하여 사평리를 통해 기존의 영남로인 용인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동작진을 통해 과천이나 수원으로도 이동하기 편리하다는 것이다. 교통요지로서의 이태원은 막중한 것이어서, 연산군이 의정부에서 왕십리까지의 지역을 모두 금표(禁標)에 넣었을 때에도 이태원만은 특별히 제외하였다. 이처럼 많은 교통량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었다. 특히 일본국, 유구국 등에서 오는 외국 사신들이 이태원을 거쳤기 때문에 색주가와 시장도 같이 형성되었다. 당시 조선 관청에서 직접 관리했던 역(驛)과는 달리 원(院)은 국가가 관리비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모두 민간이 운영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이태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이 위치는 현 이태원주공아파트 위치로 비정된다.

교통이 편리하고 마을이 형성되자 남쪽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많이 정착하니, 세종 때에 이들을 구휼하기 위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후 임오군란때에 여기서 사회 하층민들이 많이 동조하고, 이를 진합하기 위한 부대가 파견되는 등 하급 군인과 빈민들이 조선 말기까지도 많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뀌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등 거란과 여진의 풍습이 이태원의 기록에서 특별히 발견되는 사실로부터 귀화한 외국인들을 고려 말기부터 여기에 정착시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후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겁탈당한 여승의 자식들이 여기에 살았다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불리기도 하고, 왜란 이후 귀화한 일본인들을 여기에 거주시키는 등 외국인의 후손들이 여기에 많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이외에 병자호란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라 불리며 천시당한 부녀자들도 여기에 모여 정착하였다.

일제강점기[편집]

포츠머스 조약,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은 1906년부터 용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해방 이후[편집]

미8군이 여기에 미군기지를 조성한다.[1]

지리[편집]

북쪽으로 남산이 있고, 서쪽에는 남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인 둔지산, 동남쪽으로는 한남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고지대가 있다. 서남쪽 방향으로 난 골짜기 지형으로, 지금은 남쪽 산등성이에 주택가가 들어섰기 때문에 알기 힘들지만, 본래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남산에서 발원한 만초천의 지류가 회나무로를 따라 흐르다가 용산기지 내부를 지나 원효대교 인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4]

교통[편집]

도로[편집]

이태원로와 녹사평대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녹사평역에서 이태원역을 지나 장충동 방향으로 난 도로가 이태원로이고, 이 길을 따라서 번화가가 들어서 있다. 용산구 내에서는 용산기지를 가로질러 용산구 서부와 동부를 잇는 도로가 이태원로, 서빙고로 이 둘 뿐인데, 이태원로를 따라서 번화가가 들어서 있는데다가, 겨우 4차선이라 정체가 여간 심한 것이 아니다. 강변북로가 용산 부근에서 늘 막히는 것은 용산구 내부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부실한 까닭이다. 또, 이태원로나 서빙고로가 한남대교 방면으로는 사실상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한남대교를 이용하려면 웬만해서는 강변북로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힘들다.

남산2호터널과 남산3호터널이 이태원동 서북쪽에서 교차한다. 이 터널들은 녹사평대로로 빠져나와 반포대교 방향으로 이어진다. 강남구나 분당신도시, 판교신도시 쪽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와서 한남동을 지나 남산1호터널을 통해 사대문안으로 들어가는 반면, 서초구 방면에서는 반포대교를 건너와서 이태원동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편이다. 거기에다 안양시, 과천시, 의왕시, 군포시, 수원시 등지에서 올라오는 동작대교 쪽 차량들은 동작대교 북단이 용산기지로 인해 뚝 끊겨 있어, 좌로 가던 우로 가던 아무튼 우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녹사평대로도 한남대로 만큼은 아니지만 차량이 꽤 붐비는 구간이기도 하다. 관내 지선 도로로는 소월로와 회나무로, 보광로가 있다.

철도[편집]

서울 지하철 6호선이 이태원로를 따라 지나간다. 녹사평역과 이태원역이 있다. 이태원역 1, 2번 출구 쪽으로 식음료 상권 세계음식거리가 형성되어있고 3번 출구 아랫길로 우사단로, 4번출구 아래로 퀴논길이 있다. 3, 4번 출구 사이길로 쭉 내려오다보면 앤틱가구거리가 있다. 또한 녹사평역과의 거리가 가까워 녹사평역으로도 위의 거리를 도보권으로 이동할 수 있다.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구 미군기지 쪽을 따라 남산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해방촌, 건너편으로 경리단길이 있다. 한강진역도 녹사평역만큼은 아니지만 도보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 한강진역 근처에는 서울용산국제학교와 블루스퀘어, 수입차 전시·판매장들이 위치해있다. 1, 3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이태원 메인 사거리가 나온다. 추후에 신분당선이 들어오면 이태원1동 쪽에서는 신설되는 동빙고역이 꽤 가깝다. 이외에도 GTX-A가 이태원동을 지나가긴 하지만, 대심도로 지나가면서 이태원동 쪽에는 정차역을 만들지 않을 계획이다.

버스[편집]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중에서 110번, 400번, 405번, 421번, N72번, 서울특별시 시티투어버스가 다닌다.[4]

주거[편집]

서울의 3대 클럽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이태원 번화가 주변은 주말 저녁이면 굉장히 시끄럽고 번잡해진다. 유흥가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재밌지만 클럽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취객이나 난봉꾼들도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실제 오래되긴 했지만 여러 의문점 등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1997년 이태원 살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주한미군도 제법 보였고, 때문에 미군 헌병대도 돌아다녔지만 주한미군 기지가 용산구에서 평택시로 이전함에 따라 현재는 이태원에서 미군들을 보기가 꽤 힘들어졌다. 대신 한국에 거주하는 원어민 강사들이나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 덕에 서울 번화가 중에서는 미군이 빠진 후에도 명동 등과 함께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임에는 틀림없다. 명동이 쇼핑 관광객 위주라면 이태원은 실거주 외국인이나 음주가무 목적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덧붙여 가상의 세계에서나 회자되는, 길을 걸을 때 이성(주로 남성)이 휘파람을 불면서 캣 콜링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매우 드문 장소이기도 하다. 이 문제로 같이 길을 걷던 남친 혹은 일행과 캣콜을 한 외국인의 다툼이 발생하기도 한다. 드물지만 커플들에게도 캣 콜링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태원역과 해밀턴 호텔을 기준으로 동네의 빈부격차가 있는 편이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민 주택과 재래시장이 주로 있는 반면, 동쪽과 북쪽에는 운동장만한 대형 최고급 저택이 즐비한 국내 최고 부촌 지역 중 하나이다.

이태원로 이북에 산등성이를 타고 형성된 부촌은 재벌총수 일가들이 사는 서울의 베벌리힐스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 이병철 - 이건희 - 이재용까지 3대가 다 여기에 살고 있고,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사용하던 승지원(承志園)은 아직까지도 삼성그룹에서 귀빈을 맞이할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 회장의 막내 딸인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과 그 자녀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그룹 총괄 사장도 이건희 회장 자택 인근에서 살고 있다. 그 외에도 방송으로 부를 축적한 소위 졸부들이 거주한다. 이태원로 이남은 상업지역인 동시에 서민 주택가인데, 외국인 비율이 높은 곳이다. 북쪽에 비해 주거환경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비싼 편이고, 한남 뉴타운로 지정되어 재개발 투자 1순위로 꼽혀 가격이 더욱 상승한 곳이다. 보광로 서쪽의 한남1구역은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보광로 동쪽의 한남2구역은 좌초될 뻔하다가 최근 들어 급물살을 타고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태원역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나오는 보광동은 주택 위주의 지역인데 재개발도 안되어서 옛날 골목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특히 언덕이 엄청 많아서 일부 언덕길의 경우 거의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가파르며, 길 옆을 계단식으로 해서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쪽 구간을 운행하는 마을버스의 경우 대형 차량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라 소형 차량만이 다니고 있다. 대신 배차 간격이 짧은 편이다. 이태원동 259-16번지에는 남산 외인아파트가 있었다. 1994년에 남산 제모습가꾸기 사업으로 소월로 이북에 있는 모든 건물은 철거한다는 방침에 따라 사라졌지만, 당시 여느 외인아파트들이 그렇듯, 고급주택으로 명성이 높았다. 발파해체 공법으로 사라졌는데, 이 아파트는 폭파되는 모습까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는 볼거리가 될 정도였다. 대한뉴스에서 그 장면을 실었는데, 아직 까지도 이 아파트의 폭파 장면이 유튜브에 돌아다닐 정도다.[4]

관광[편집]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이다. 1997년 서울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후 명동, 동대문 등이 뒤를 이었다. 외국어에 능통한 관광경찰이 배치된 곳이다. 프랑스인의 서래마을이나 차이나타운처럼 국적에 따라서 특화된 외국인 공간은 있지만 세계 각지의 다양한 외국 문화가 집합된 곳은 서울에서 이태원만한 곳이 없다. 주말이면 다른 국적,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함께 탄다.[4]

사건 사고[편집]

이태원 살인 사건[편집]

1997년 4월 3일 밤 10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재학생 조중필 씨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근처 햄버거 가게인 버거킹[1]에 갔다. 여자친구가 주문하는 사이에 조 씨는 화장실에 들어갔고, 곧 이어 2명의 한국계 미국인들[2]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조 씨는 화장실 좌측 소변기 아래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신고를 받고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홉 군데가 흉기로 찔린 조 씨는 왼쪽 목 동맥이 절단되는 치명상을 입고 구급대원이 오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5]

이태원 클럽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편집]

2020년 4월 30일에서 5월 5일까지 있었던 황금 연휴 기간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소재한 다수의 클럽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이 발생한 사건이다. 확진자 수가 1명 수준까지 떨어져 방역전쟁이 끝나가는 듯 보였던 대한민국의 코로나 상황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다시 사태가 심각해져, 2개월이 지난 7월 말까지도 확진자 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아 사실상 8월 중순 이후 코로나19 2차 대유행의 도화선이 되었다.[6]

이태원 압사 사고[편집]

이태원 해밀톤호텔 서측 골목 저지대 중간(저지대 입구에서 25m쯤 올라간 곳)의 18.24m²(5.5평)공간에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 행인끼리 우왕좌왕하는 과정에 서로 뒤엉켰고, 점차 밀집되는 상황에서 불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응급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한편 해밀톤호텔 북서측 삼거리(고지대)에서는 20분만에 막대한 인파가 빠르게 유입되는 바람에 서측 골목 중간쪽 18.24m² 공간의 상황은 순식간에 심각해져만 갔다. 사고 초반 뒤쪽 인파였던 사람들도 앞쪽으로 누적되어 갔고, 뒤쪽 인파에서 세 차례 정도 밀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져 이른바 '연쇄 깔림'으로 인해 앞쪽 참변이 가중됐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던 데다 트래픽 과잉으로 인해 전화와 데이터 통신까지 먹통인 상황 속에서 뒤쪽 인파는 이때까지도 (미디어를 통한)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저 멈출 줄 모르며 내려오고만 있었다. 앞쪽 인파에서 청색증 및 구토 현상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일제히 '뒤로! 뒤로!'를 외치며 18.24m² 뒤쪽 인파가 대부분 역행하여 빠져나갔으나, 18.24m²에는 이미 300여 명의 사상자끼리 의식을 잃고 몸이 껴서 빼내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외상성 질식이, 밑에 깔린 사람들은 장기 파손으로 인한 복부 팽창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18.24m²의 공간에서 15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7]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1.0 1.1 이태원〉, 《위키백과》
  2. 이태원〉, 《네이버 국어사전》
  3. 이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4.0 4.1 4.2 4.3 4.4 이태원동〉, 《나무위키》
  5. 이태원 살인 사건〉, 《나무위키》
  6. 이태원 클럽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나무위키》
  7. 이태원 압사 사고〉,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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