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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이시(중국어: 乌海市 wū hǎi shì)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남부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 [1][2][3][4]
개요[편집]
우하이시의 면적은 1,754㎢이며 인구는 556,621명(2020년)이다. 황허강 연안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닝샤후이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와 접한다. 몽골족이 전체인구의 3%를 차지한다. 네이멍구자치구에서 인구가 제일 적으며, 면적도 제일 작다.
문화유적으로 양사오문화촌(仰韶文化村) 유적과 자오사오거우9(召燒溝),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의 암화(岩畵), 진창청(秦長城) 등이 있다.
시인민정부는 하이보완구(海勃湾区, 해발만구)는 자치구 수부(首府)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로부터 526㎞, 바옌나오얼시(巴彦淖尔市, 파언뇨이시) 린허구(临河区, 임하구)까지 151㎞, 닝샤후이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 수부 인촨시로부터 150㎞ 거리에 있다. 행정구획은 하이보완구(海勃湾区, 해발만구), 하이난구(海南区, 해남구), 우다구(乌达区, 오달구)의 3개 시할구(市辖区)로 이루어져 있다.[5] [6]
자연환경[편집]
황하에 접해있고 고비 사막과 오르도스 사막 사이에 위치해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1150m이다. 연평균온도는 9.3℃, 연강우량은 165mm이다.
역사[편집]
역사적 중원과 가까워 중국이 간간히 차지하였지만 북방 유목민족 거주지와 겹치고 만리장성 북쪽이었기에 방어도 어려워 개발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 지역은 독자 행정구역 없이 현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전신인 닝샤성 소속의 변방지대로 존재하였으나, 1955년 광산개발을 위해 이 지역에 자오즈산 광구(桌子山矿区)를 설치하였고, 1961년에 우다시(乌达市)와 하이보완시(海勃湾市)를 세운다. 이 두 도시가 1975년에 합쳐져서 우하이시(乌海市)가 출범한다.
산업[편집]
도시의 경제는 주로 석탄 채굴과 발전, 금속 작업, 화학 및 과일 재배(포도, 포도주 양조)와 낙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광업도시이기 때문에 광업을 주 산업으로 삼고 있다. 해당 도시 내 석탄 매장량은 30억 톤 정도로 추정되며, 철광석 약 600만 톤, 석회석 약 200억 톤이 매장 되어있다. 바오터우-란저우와는 철도로 연결되어 있고, 2003년에는 공항이 완공되었다. 도시의 경제는 주로 석탄 채굴과 발전, 금속 작업, 화학 및 과일 재배(포도, 포도주 양조)와 낙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광업도시이기 때문에 광업을 주 산업으로 삼고 있다. 해당 도시 내 석탄 매장량은 30억톤 정도로 추정되며, 철광석 약 600만톤, 석회석 약 200억톤이 매장되어있다. 우다광무국(烏達鑛務局)·하이보완발전소(海勃灣電廠)·첸리산제철소(千里山鋼鐵廠) 등 대형 기업이 있다.
교통[편집]
시내에 우하이역(乌海站), 우하이시역(乌海西站), 우하이베이역(乌海北站)이 존재하고 모두 바오란철도(包兰铁路)가 지나간다.
현재 고속철도는 없으나 바오인고속철도(包银高速铁路)가 지나갈 수 있게 공사중이다.
관내에 우하이 공항(乌海机场)이 있으며, 국내선 전용이다.
관광[편집]
황허강[편집]
황허강의 길이는 5,464km, 유역면적 75만 2443㎢이다. 칭하이성(靑海省) 바옌카라산맥(巴顔喀拉山脈)의 야허라다쩌산(雅合拉達澤山:5,442m)에서 발원하는 웨구쭝례거(約古宗列渠)가 원류로서, 싱쑤해(星宿海) 및 어링호(鄂陵湖)·자링호(札陵湖)를 거친 하류를 가리킨다.
칭하이성 남동부를 동류하여 쓰촨성(四川省) 경계에 이르고 지스산맥(積石山脈) 동단을 굽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 들어가 북서류하여 다시 칭하이성으로 들어간 다음 시닝(西寧) 남쪽을 동류, 류자샤(劉家峽)의 협곡을 지나 간쑤성 란저우(蘭州)에 이르러 북동으로 유로를 바꾸고,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銀川) 동쪽을 지나 네이멍구 자치구 오르도스 지방으로 들어간다.
다시 바오터우(巴頭) 부근을 동류한 다음 산시성(山西省) 허취현(河曲縣) 부근에서 남하하여 퉁관(潼關) 부근에서 또다시 동으로 진로를 바꾸어 싼먼샤(三門峽)를 거쳐 산시·허난성(河南省) 경계를 흘러 황토고원(黃土高原)을 관통하여 화베이평야(華北平野)로 들어가 산둥성(山東省) 컨리현(墾利縣)에서 보하이만(渤海灣)으로 들어간다.
황허강 중·하류는 중국문명의 요람지(搖籃地)로서 이름 높다. 유역에는 산시성 란톈현(藍田縣)에서 발견된 란톈원인(藍田原人)의 유적을 비롯한 채도(彩陶) ·흑도기(黑陶期)와 은(殷)나라의 유물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역대 왕조의 사적도 무수히 남아 있다.
황허강은 흘러내리는 토사에 의해서 화베이평야의 대부분을 형성한 만큼, ‘물 1말에 진흙 6되’라고 할 정도로 유수(流水) 중에 포함된 진흙의 양이 많아서 1년에 13억 8000만 t의 진흙이 하류로 운반되고 있어 토사 함유량으로는 세계 제일이다.
진흙이 많기 때문에 하구의 해안선이 3년 동안 10km나 전진하고 있으며, 하상(河床)의 상승 또한 빨라 천정천(天井川)이 되어 난류(亂流)하였다. 이따금 제방을 파괴하여 북쪽으로 하이허강[海河]에서 남쪽으로 화이허강(淮河)까지의 넓은 평야 위를 흐르면서 때때로 다른 하천의 유로를 빼앗아 유로를 바꾸며 흘렀다. 따라서 과거 3,000년 동안 범람과 제방의 파괴는 1,500회 이상, 하도(河道)의 변천은 26회에 이르고 특히 큰 하도 변화도 9회나 되며 그 피해도 막대하였다.
1938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국민정부군이 허난성(河南省) 화위안커우(花園口:鄭州市 부근)의 제방을 파괴했을 때에는 피해자 1250만 명, 사망자 9만 명에 달하였다.
유역은 반건조지역에 속하는데, 집중호우형으로 비가 내려 수해가 극심한 반면, 연강수량은 적어 한발의 피해도 크다. 일찍이 십년구한(十年九旱:10년 중 9년은 가물다)이라고 할 정도로 물과 가뭄의 피해가 모두 격심하였다. 1955년 중국정부는 ‘황허강의 수해를 근절하고 황허강의 수리를 개발하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국영공사로 황허강 중류부에 계단상의 댐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진흙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는 황토고원지대의 수토보유(수토 유실 방지) 공사를 확대 실시하여 황허강의 물을 맑게 하고 홍수를 없애는 동시에 발전(發電)·관개(灌漑)·주운(舟運)에 이용하는 대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제1기 공사 완성까지 50년 이상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이다.
그 결과, 황허강의 홍수조절 기능은 강화되고, 관개 효과도 높아지고 있다. 하구부에는 광대한 국영농장과 공장이 건설되어 있다. 그러나 황허강의 유량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화베이 지방의 관개에 필요한 수량(水量)에는 미치지 않으므로 양쯔강 이남 하천의 물을 북으로 공급하는 남수북조(南水北調)계획도 추진되고 있다.[7]
문화[편집]
양사오문화는 중국 황허강 중류 지역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했던 신석기 문화로서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한다.
중국 황허의 중류 지역에서 나타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문화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하였다. 1921년 스웨덴 사람인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 1874~1960)이 허난성 싼먼샤시(三門峽市) 민츠현(澠池縣) 양사오촌(仰韶村)에서 유적(遺蹟)을 처음 발견하여 양사오문화(仰韶文化)라고 불리며, 그 뒤 황허의 중류(中流)와 그 지류(支流)인 웨이수이(渭水), 펀수이(汾水), 뤄수이(洛水) 유역에서 1,000여 곳의 유적(遺蹟)들이 발견되었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유적은 산시성(陝西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허난성(河南省) 서부와 산시성(山西省) 남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간쑤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의 경계, 남쪽으로는 후베이성(湖北省)의 서북지방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라오관타이(老官台) 문화의 특징을 계승하여 나타난 것으로 여겨지며, 시대 순서에 따라 반포(半坡) 유형,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 반포(半坡) 만기(晚期) 유형 등으로 나뉜다.
양사오문화는 농경(農耕)을 중심으로 경제 생활이 이루어졌지만, 수렵(狩獵)과 어로(漁撈)도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조[粟],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일부에서는 보리나 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돼지나 개, 양 등의 사육이 이루어졌는데, 개와 돼지의 뼈에 비해서 양의 뼈는 상대적으로 적게 출토되었다. 실로 뜨개질한 것과 같은 편직물(編織物) 무늬가 새겨진 토기(土器)가 출토되어 편직(編織) 등의 원시 수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해석되며,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양잠(養蠶)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세우는 고상식(高床式) 건축물(建築物) 유적은 곡물창고(穀物倉庫)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양사오문화 시대에 농업 생산력이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농지(農地)를 영속적(永續的)으로 이용하는 집약농업(集約農業)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계(學界)에서 다양한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농경이나 수렵에는 돌도끼, 돌호미, 돌삽, 뼈삽, 돌가래, 돌낫 등의 간석기와 골각기 등이 사용되었는데, 석기(石器)의 종류가 쓰임새에 따라 매우 전문화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지닌다. 돌을 갈거나 흙을 구워서 만든 팔찌 등도 발견되었다.
주거지는 주로 강변의 높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다양한 규모의 촌락(村落)들이 발견된다. 주거지는 대부분 원형(圓形)이나 네모반듯한 방형(方形)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초기에는 원형(圓形)이 많지만 뒤로 갈수록 방형(方形)이 주로 나타난다. 진흙에 풀을 섞어 수혈식(竪穴式)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 부근에 따로 움구덩이를 파서 창고로 사용했다. 다른 부족이나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촌락(村落) 주변을 띠처럼 둘러싸고 도랑을 파기도 했으며, 촌락 밖에 묘지(墓地)와 도요(陶窯) 등을 두었다. 시안[西安] 린퉁(臨潼)의 쟝자이(姜寨) 유적(遺蹟)은 이러한 양사오문화 시대의 촌락 구조를 잘 보여준다. 양사오문화는 후기(後期)로 갈수록 단혼 가정의 독립 등 부계사회(父系社會)의 특징이 뚜렷해져서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 부계사회(父系社會)로의 변동을 보여주며, 빈부 격차나 사회 내부의 계층화가 진행되는 모습도 나타낸다.
양사오문화는 백색(白色), 적색(赤色), 흑색(黑色)의 토기(土器)에 인면(人面), 동물(動物),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여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중기(中期) 이후에는 물레의 사용도 나타나며, 룽산문화[龍山文化]의 흑도(黑陶)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양사오문화의 채도(彩陶)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산시성 시안의 반포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형과 허난성 산현의 먀오디거우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채도가 대표적이다. 반포 유형에서는 사람얼굴, 물고기그림, 사슴무늬 등의 동물 무늬가 주로 나타나며, 22종의 각획부호(刻劃符號)도 나타나 고대문자의 발달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에서는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의 채도가 주로 나타난다.[8]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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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우하이시〉, 《위키백과》
- 〈우하이시〉, 《나무위키》
- 〈내몽골 자치구〉, 《위키백과》
- 〈내몽골 자치구〉, 《나무위키》
- 〈두산백과: 우하이〉,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우하이시〉,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황허〉,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양사오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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