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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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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金蛙王)은 부여의 군주. 해부루의 아들이며 대소왕의 아버지이다.

개요[편집]

  • 금와왕은 고구려 동명성왕 설화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왕이다. 늙도록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며 정성을 들이던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어느 날 곤연(鯤淵) 못가의 큰 돌 밑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여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자라서 태자(太子)가 되고, 해부루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뒤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 유화부인)를 만나, 궁중으로 데려와 깊숙한 방에 가두었더니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주몽(朱蒙, 동명성왕)이 나왔다고 한다.[1]
  • 금와왕은 해부루(解夫婁)를 이은 동부여(東扶餘)의 왕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부루가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것을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고 하고 이에 거두어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자 태자로 삼고,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金蛙)는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 왕위를 태자 대소에게 전하였다.'하여, 동부여왕 해부루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거두어 금와(金蛙)라 하였으며, 금와를 태자(太子)로 삼고, 해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金蛙)가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으며, 금와의 아들 대소가 왕위를 잇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금와왕은(재위: 기원전 60년~기원전 24년)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금와(金蛙)는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전하기를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큰 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 보니 그곳에서 금빛을 두른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왔다. 해부루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짓고 고이 길렀다. 이후 금와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설화에서 나오는 곤연이라는 지명은 동부여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의 땅에 있었으며 금와의 일족들은 곤연의 호족(豪族)이었다고 알려져 있다.[2]
  • 금와왕은 부여의 건국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 대소왕의 아버지이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거두어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아들이 7명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금와왕의 탄생 설화를 다루고 있다.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왕은 나이가 들어도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중에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아들을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그랬더니 해부루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치웠더니 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타났다. 이에 해부루왕은 하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었다고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로 삼았다. 후에 금와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여의 군주가 되었다. 대소왕은 훗날 고구려와 대립하던 중에 대무신왕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서기 22년에 죽었는데 그 막내 동생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추종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동남쪽에 갈사국을 세웠다. 갈사국은 46년 뒤인 서기 68년에 손자 도두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사라졌다. 한편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서기 22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낙씨 성을 받고 대무신왕으로부터 부여의 왕으로 책봉되었다.[3]

금와왕의 생애[편집]

  •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유화(柳花)를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금와왕은 그것을 보고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짐승이 알을 밟지 않고 도리어 품어주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부인에게 그 알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朱蒙)'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帶素)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 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

금와왕 설화[편집]

  • 금와왕설화(金蛙王說話)는 동부여(東夫餘)의 왕인 금와(金蛙)의 탄생 설화이다. 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 때의 재상(宰相)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天帝)를 만났는데, 천제가 말하기를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터이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여 동해 부근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왕도(王都)를 옮기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곧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천도(遷都)를 하고 국호(國號)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큰 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 보니 그곳에서 금빛을 두른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왔다. 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짓고 고이 길렀다. 이후 금와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뒷날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데려다가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주몽(朱蒙:동명왕)이 나왔다.

해부루왕[편집]

  • 해부루왕(解夫婁王)은 부여의 2대 국왕으로 해모수왕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해모수의 아들로 부여의 왕위를 계승한 해부루는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아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자, 그에 따라 동쪽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나라를 옮겨 이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옮겨간 뒤에 원래 도읍지에는 동명제(東明帝)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른 전승에 따르면, 해부루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옮겨간 뒤에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여는 해부루대에 동해의 바닷가에 있는 '가섭원(迦葉原)'으로 천도를 하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단순한 설화로만 보거나 두만강 하류에 위치했던 하나의 독립된 세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자국의 영역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들어, 해부루왕이 영역 내 동쪽의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해부루의 이름인 부루(夫婁)는 단군왕검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부루와 이름이 같아 《삼국유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해부루와 부루를 동일 인물로 파악한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와 해부루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어 구분하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부여[편집]

  • 동부여(東夫餘)는 부여의 일부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세운 나라이며, 동시에 해모수왕이 세운 북부여와 구분 짓기 위해 부르는 명칭이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위치와 영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서기 285년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금와 金蛙(蝸)〉, 《두산백과》
  2. 금와왕〉, 《위키백과》
  3. 금와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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