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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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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두환(全斗煥)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개요

  • 전두환(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5살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였고,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 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을 주도하였다. 1980년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21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에 확진되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70년 친구였던 노태우 대통령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서거한 이후 28일 뒤인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대변을 보던 와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오전 9시 12분 사저에 방문한 경찰에 의해 사망 판정을 받으며 향년 91세로 서거하였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1]
  • 전두환은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했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 소장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위시한 신군부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고,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광주에서 다수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임기 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그해 12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면되었다. 사면 후에도 24년 동안 건강을 유지했으나 이후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2]
  • 전두환은 군인, 정치가이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 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과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국정 목표로 설정하였다. 우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환율과 금리를 인상하고 물가 인상률을 한 자릿수로 만들었다. 정부의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중화학공업에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였다. 1986년부터 저유가, 저환율, 저금리의 3저 호황이 열려 투자와 수출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수출의 급증으로 3년 동안 286억 원의 흑자를 달성하였다. 외교 방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악화된 한미관계를 개선하였다. 미국은 핵무기 개발 포기와 시장 개방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대통령의 대소련 강경 정책에 동참하여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전두환의 대미정책은 대외 지지기반 확보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 반면 5·18 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을 공격한 군대의 투입을 미국이 묵인하였다는 이유로 광주, 부산, 서울 등의 미문화원에 방화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에게는 한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는 근거로 경제 협력 차관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일본이 차관 요구에 난색을 표하자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중재하였고, 1983년 전두환과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なかそね やすひろ) 총리의 정상회담으로 약 40억 달러의 차관 도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3]
  •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11~12대(1980~1988) 대통령(제5공화국)을 역임한 인물이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했으며,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한 뒤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1958년 이규동 장군의 딸 이순자 씨와 결혼했으며,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고 1965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는 등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움직임을 묵살하고 8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8년 대통령 퇴임 이후에는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의 혐의로 1995년 구속 수감돼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대법원에서 감형돼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받았다. 그러다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1998년 복권되었다. 2021년 11월 23일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전두환의 생애

  • 전두환은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호는 일해(日海)이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25사단에서 근무하였고, 1960년에는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61년 육군본부를 거쳐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朴正熙)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6년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18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1969년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3년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 전두환은 1976년 청와대경호실 차장보가 되었고,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국군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12·12사태(군사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 부장서리가 되었다.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8월부터 사회악 일소를 목표로 삼청계획 5호를 시행하여 많은 사람을 강제 연행하였고, 분류에 따라 강제 노역 삼청교육대 입소 등의 처분을 내리는 등 인권탄압을 벌였다. 이어 1980년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는데, 16일 퇴임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후임이 되기 위함이었다.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제11대 대통령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진행되어 '체육관 선거'로도 불린다.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 취임 후, 12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유신헌법을 일부 수정하여 대통령 임기 7년 및 간접선거 선출, 대통령의 국회의원 1/3 추천, 법관 임면권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의 총재가 되었고,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은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제5공화국이 출범되었다.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전두환은 1988년 2월 퇴임하였다. 퇴임 후, 국정을 운영하는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제5공화국의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제5공화국 청문회가 열리자 강원도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2년여간 칩거하였다. 1995년 12·12 군사반란 가담, 뇌물 수수 등으로 기소되어 1997년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사면되며 징역은 면하였으나 추징금은 완납하지 않았다. 2021년 11월 29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전두환 정부

  • 1982년 1월 22일 제109회 임시국회에 참석한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연설을 통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안하였다. 주요 내용은 남북 간 민족적 화합에 기반하여 통일헌법을 제정한 후 통일국회와 단일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통일민주공화국을 완성시키자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1민족 1체제를 지향하는 체제통일론(體制統一論)이었다. 1984년 11월부터 모두 5차례의 남북경제회담이 열렸고, 1985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이 재개되었다. 1985년 9월 20일 분단 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라는 민간교류가 이루어졌으나, 정부차원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 민간차원의 통일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제5공화국

  • 제5공화국(第五共和國)은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지속된 한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 등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여 수립하였다. 이들은 12월 12일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를 연행함으로써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2월 21일 최규하(崔圭夏)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신군부세력에게 있었다. 1980년 4월 사북(舍北)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을 광주(光州)에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2월 초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고,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 1인 장기집권을 배격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고 중임을 금지하였다.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한 제도를 폐지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대통령의 일반법관 임명권을 폐지하고 대법원장이 그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고,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는 등 유신잔재 청산에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경제분야에서는 과거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저물가·저금리·저환율의 3저(三低)정책과 부동산 투기억제 등 안정우선정책을 추진하였다. 외교분야에서는 1983년 1월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방한하였고,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방한하는 등 정상외교를 벌이는 한편, 소련·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스포츠분야에서는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유치에 성공하였다.
  • 제5공화국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이 정권은 물가안정,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부정부패와 민주화운동탄압, 고문 등의 인권유린행위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마침내 1987년 6월에 일어난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1988년 2월 제6공화국으로 교체되었다.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民族和合民主統一方案)은 1982년 1월 22일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이 국정연설에서 발표한 통일방안이다. 제5공화국 정부는 통일정책으로 남북한 최고책임자회담을 개최하여 남북대화의 교착상태를 타개한 다음 남북한이 협의하여 마련하는 헌법적 절차를 통하여 평화통일을 실현해 나간다는 기본방향을 정해 두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81년 6월 5일 전두환은 남북한 최고책임자 간의 직접회담을 제의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1982년 정부는 다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방안은 ① 양측 주민들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한 대표들로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고, ② 이 협의기구에서 민족 ·민주 ·자유 ·복지의 이상을 추구하는 통일민주공화국의 완성을 위한 통일헌법 초안을 마련하며, ③ 이에 대하여 남북한 전역에서 민주방식의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헌법안을 확정 ·공포하고, ④ 확정된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 통일조국의 국호 ·정치이념 ·정책방향 ·정부형태 ·국회구성을 위한 총선거의 방법 ·시기 ·절차 등은 민족통일협의회의가 구성되면 거기서 통일헌법을 기초하는 가운데 토의 ·합의하기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통일까지의 과도적인 조치로서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여 그동안의 민족자해적 ·비정상적인 상호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민족자애적인 정상관계로 전환시킬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실천조치의 일환으로 1982년 국토통일원장관 손재식의 성명을 통하여 20개 항의 시범실천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을 북한에 제의하였다. 그 내용은 서울과 평양 간의 도로연결, 남북이산가족의 편지교류 및 상봉실현, 남북한 군사책임자간의 직통전화 설치 ·운용 등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사항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5공화국의 통일정책은 북한의 계속적인 거부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동영상

각주

  1. 전두환〉, 《위키백과》
  2. 전두환〉, 《나무위키》
  3. 전두환(全斗煥,1931.1.18.~2021.11.23)〉,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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