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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아제르바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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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아제르바이잔(North and South Azerbaijan)은 서아시아 캅카스 지역의 독립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이란 영토에 속하는 남아제르바이잔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아제르바이잔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 지역은 북아제르바이잔으로 소련 영토에 흡수되었고, 남쪽 지역은 남아제르바이잔으로 이란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아제르바이잔은 독립국가인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이 되었으나, 남쪽 지역에 있는 남아제르바이잔은 여전히 이란 영토에 속한다. 인구는 북아제르바이잔이 약 1천만 명이고, 이란 영토에 속하는 남아제르바이잔은 약 9백만 명으로서, 남북아제르바이잔을 합쳐면 약 2천만 명이다. 북아제르바이잔과 남아제르바이잔을 합쳐서 남북아제르바이잔 또는 '범아제르바이잔'이라고 부른다.[1] [2]

역사[편집]

근대와 현대[편집]

18세기 들어 러시아캅카스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페르시아(이란)와 오스만 제국과 연이어 충돌하였다. 러시아는 특히 이란이 통치하고 있는 캅카스 지역에 집착하여 1804∼1813년과 1826∼1828년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영토를 침공하였다. 러시아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승리를 거두고 캅카스 일대를 페르시아로부터 양도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는 아라크스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이란으로 분리되어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여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하고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와 함께 ‘캅카스 민주 연방공화국(Transcaucasian Democratic Federative Republic)’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3국은 곧바로 독자적인 공화국을 출범하여 1918년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민주적인 국가였다. 1919년에 설립한 바쿠 국립대학교(Baku State University)는 이슬람권에서 설립한 최초의 대학이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1920년 3월 러시아 적색군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당시 소련은 바쿠의 유전(油田)을 목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침공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을 폐기하고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와 함께 ‘범캅카스 소비에트연방공화국(Transcaucasian Socialist Federative Soviet Republic)’을 강제로 결성하였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는 오스만 제국과 카르스 조약(Treaty of Kars)을 체결하여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을 소련 연방으로 편입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소련의 에너지 생산기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필요한 에너지의 약 80%가 바쿠에서 공급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의 출범[편집]

1980년대 말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 개혁으로 이완된 분위기에서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 자치 지역인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양 민족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소련의 내부 혼란기를 틈타 1991년 10월 '아제르바이잔 최고 소비에트(Supreme Council of the Azerbaijan)'는 '소비에트 사회주의(Soviet Socialis)' 기치를 폐기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과 함께 1차 나고 르노 카라바흐 전쟁을 치러 패하면서 영토의 약 20%에 해당하는 나고 르노 카라바흐와 여러 고립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였다.

1993년 수랏 후세이노프(Surat Huseynov) 대령이 이끄는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아뷜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 1938~2000)를 폐위시키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와중에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장을 지낸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정권을 잡았다. 이어서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해 2003년까지 10년간 강권적인 방법으로 아제르바이잔을 통치하였다. 그가 취임한 직후 1994년과 1995년 연이어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98년 알리예프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 속에 재선되었으나 관료들의 극심한 부패와 빈부격차로 반대 세력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2002년 의회의 비례대표 시스템을 폐기하여 야당의 의회 진입 장벽을 높이고, 사법부에 정당 해산권을 부여하고, 언론통제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켜 권위주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2003년 건강이 악화된 알리예프의 뒤를 이어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취임 후 국가보안법(Law on State Secrets)을 강화하여 언론인을 해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2002년부터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로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여 카스피해 석유의 판로가 확장되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권위주의적인 통치가 이어지고, 군사력도 강화되었다. 2020년 9월 나고 르노 카라바흐의 군사 거점을 공격하여 2차 나고 르노 카라바흐 전쟁을 일으켰다. 1990년대 초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월등한 군사력으로 사실상 승리를 거두어 주요 군사거점을 획득하였다.[3]

문학[편집]

문학은 튀르키예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페르시아와 아랍의 지배하에서 형성되었다. 유목 민족에 뿌리를 두어 구전으로 전해지는 많은 전설과 시(詩)가 있었는데, 캅카스 지역에 정착하면서 문학작품을 통해 이를 계승하였다. 1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7세기까지 많은 시인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러시아와 페르시아가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러시아어와 이란어 사용을 강제하며 많은 지식인과 작가, 교사들을 탄압하면서 문학도 위축되었다. 이후에도 공산주의를 겪으며 오랜 침체기를 지나 1991년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현대문학의 시대가 열렸다.

14세기 시인 이마대딘 네시미(Imadaddin Nesimi)는 아제르바이잔과 오스만 제국 전역의 전설적인 시인으로, 아제르바이잔어와 페르시아어는 물론이고 아랍어로도 시를 썼다.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그를 투르크 문학의 기원으로 평가한다. 16세기 구전되어온 유목 민족의 생활과 신앙을 담은 12편의 서사시로 구성된 《쿠르트 할아버지, The Book of Dede Korkut》는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둔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계 민족의 고대문학의 정수이다.

16세기 아제르바이잔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무하메드 퓌주리(Muhammed Fuzuli)는 아제르바이잔어와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시를 썼으며,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황금기를 연 인물이다. 16~18세기는 아제르바이잔 문화의 전성기로, 음악과 함께 시를 낭독하는 아쉭(Ashik)이 널리 유행하여 샤 이스마멜(Shah Ismail) 등 여러 유명한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18세기에 출간된 《코로루 서사시, Epic of Koroghlu》는 튀르키예계 민족들에게서 구전되어온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 서사시로 아제르바이잔 문학 중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음식[편집]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음식은 야채가 풍부하고 다양한 과일이 곁들여지며 허브의 일종인 민트·딜·바질과 고수가 많이 들어간다. 이외에도 파슬리·리크·양파·쪽파·백리향 등도 여러 음식에 빠지지 않고 첨가된다. 아제르바이잔은 여러 기후 대가 혼합된 지역으로 지역마다 음식재료도 다양하지만, 양고기와 소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이 많다. 생선은 주로 카스피해 연안에서만 즐긴다. 차 문화도 발달하여 식사와 함께 국민 음료라고 할 수 있는 홍차를 즐겨 마신다.

전통음식인 보츠베쉬(bozbash)는 일종의 양고기 스프로 지역마다 다양한 야채를 첨가하여 요리한다. 꾸뜹(qutab)은 얇게 말린 밀가루 반죽에 다진 고기와 야채를 넣어서 먹는 요리로 케밥과 유사한 형태이다. 두쉬바라(dushbara, joshpara)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캅카스 지역까지 즐겨 먹는 일종의 만두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매우 대중적인 음식이다. 쌀을 주재료 한 음식도 많으며 쌀과 다양한 고기와 야채를 볶은 음식인 필라프(plov)는 주식으로 널리 즐긴다.

튀르키예, 중동지역과 캅카스 일대에서 즐겨 마시는 요구르트의 일종인 아이란과 장미 꽃잎과 사프란을 넣은 샤벳은 대중적인 음료이다. 인근 캅카스 국가와 유사하게 다양한 와인이 생산된다. 조지아와 러시아 음식도 대중적이며, 점차 식문화도 현대화되어 바쿠에는 이란, 이탈리아 그리고 여러 아시아 음식점도 많이 들어서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관광[편집]

아제르바이잔은 지역마다 고도 차이가 심해 다양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기후를 즐길 수 있다. 다만, 관광산업이 성장한 것은 2010년대 이후로 부족한 교통망과 인프라로, 수도인 바쿠 이외의 지역은 아직도 많은 관광지가 개발되지 않았다.

바쿠는 오래된 유적지 및 구시가지와 함께 2010년대 들어 에너지 수출로 경제적 여건이 호전되면서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1871년부터 석유를 채굴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909년 카스피해를 따라 조성된 바쿠대로(Baku Boulevard)는 번성한 바쿠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거리이며, 대로와 연결되는 블러바르공원(Park Bulvar)과 국기광장(National Flag Square) 또한 바쿠의 명소이다.

바쿠 올드시티는 도시 방어를 위해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시가지 안에는 15세기에 지어진 쉬르반샤 궁전과 12세기에 지어인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등 유서 깊은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2003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2년에 문을 연 헤이다르 알리예브센터(Heydar Aliyev Center)는 경제적으로 번영한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로, 2012년에는 유로비죤 송페스티벌(ESC. Eurovision Song Contest)이 개최되었던 곳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오랜 역사인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하는 182m에 달하는 플레임타워(Flame Tower)는 2012년 건축된 이후 호텔과 아파트로 활용되고 있는데 바쿠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랜드마크이다.

북부의 대캅카스 산맥(Greater Caucasus mountains)에 위치한 투판다 산악리조트(Tufandag Mountain Resort)는 겨울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인근의 노허호수(Nohur Lake)와 콰발라(Qabala), 1797년에 세워진 셰키 칸 궁전(Palace of Shaki Khans)으로 유명한 북부도시 셰키(Sheki)도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북서부 도시 간자는 페르시아 시인을 기린 니자미 간자비 영묘(Nizami Ganjavi Mausoleum)와 이맘자데 사원(İmamzadeh İbrahim) 등 유적지가 잘 보존된 고대도시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아제르바이잔〉, 《나무위키》
  2. 아제르바이잔〉, 《위키백과》
  3. 아제르바이잔〉, 《네이버 지식백과》
  4. 아제르바이잔의 관광〉,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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