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옌나오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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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옌나오얼시(중국어: 巴彦淖尔市 bā yàn nào ěr shì)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서쪽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1][2][3][4]
개요[편집]
바옌나오얼시의 면적은 65,788㎢이며 인구는 1,538,715명(2020년)이다. 동쪽으로 바오터우시, 남쪽으로 어얼둬쓰시, 서쪽으로 아라산맹, 북쪽으로 몽골에 접한다. 몽골족·한족·후이족 등 20여 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시인민정부는 린허구(临河区, 임하구) 신화동가(新华东街)에 있으며 행정구획은 린허구(临河区, 임하구)의 1개 시할구(市辖区)와 우위안현(五原县, 오원현), 덩커우현(磴口县, 등구현)의 2개 현, 우라터전기(乌拉特前旗, 오랍특전기), 우라터중기(乌拉特中旗, 오랍특중기), 우라터후기(乌拉特后旗, 오랍특후기), 항진후기(杭锦后旗, 항금후기)의 4개 기로 이루어져 있다.
바옌나오얼시 덩커우 현에는 북위 때 옥야진이 설치됐다. 주요 작물은 곡창지대인 허우타오평원에서 경작되는 밀·옥수수·사탕무·수수 등이다. 또한 서부와 북부의 초원에서 목축이 이루어진다.[5] [6]
자연환경[편집]
경내에 우라산(乌拉山), 써얼텅산(色尔腾山), 랑산(狼山)이 횡으로 경내 중부에 걸쳐있으며 황하(黃河)가 남쪽부분을 지난다. 연평균 기온은 6.3℃, 1월 평균 기온은 -10℃, 7월 평균 기온은 23℃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200mm이다.
역사[편집]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서부 내몽골 지역, 특히 하투(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골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서한 때의 기원전 127년, 한의 무제는 흉노로부터 하삭(하투평원)을 탈취하기 위해 위청을 파견했고, 등구에 삭방성을 세워 지금의 오르드스와 바얀누르 맹 서남부 지역을 다스렸다.
주나라 동안 중부와 서부 내몽골 (하투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골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대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 - 295)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무령왕은 현재 허베이 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호흐호트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 무령왕은 장성을 하투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 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기원전 221) 몽념(蒙恬)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주의 장성을 편입한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을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기원전 206)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전한 시대동안 무제가 위청(衛靑)을 보내 하투 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골 동부지역은 선비가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후한 시대(25-220)에는 흉노가 한에 굴복하여 하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진 시대에 하투의 흉노의 대추장 유연(劉淵)이 한(漢)왕조(후에 조(趙)로 개칭. 뒤의 석(石)씨가 세운 조와 구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구분함)를 이 지역에 열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투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동안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합했다. 1227년에는 서하를, 1234년에는 금을 점령했다. 그의 후손들은 1279년에 중국을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1368년 한족이 명을 세우면서 다시 몽골 고원으로 되돌아왔고, 명은 현재 자리에 만리장성을 세웠다. 만리장성은 내몽골의 남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17세기에는 만주족이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1644년 명을 정복한 후 청을 세운다. 만주족의 청조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 등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통치한다. 일반 몽골인들은 자신의 맹 바깥으로 여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알탄 칸(1507-1582) 때부터 거주하기 시작하던 한족 농민들이 19세기 후반부터 대량으로 유입된다. 만주족의 중국화와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청 정부는 한족 농민들로 하여금 몽골과 만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게 되고, 이 정책은 이후의 정부들에 의해서도 계승된다. 이 지역에 건설된 철도는 한족의 이주를 촉진하였다. 토지는 몽골의 왕자들이 매각하거나, 한족 농민들에게 임대되거나 혹은 아예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아 한족 농민들에게 주는 방법으로 제공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중화민국 시기 동안 외몽골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수 있었지만, 내몽골은 중국의 한 지역으로 재편된다. 러허 성, 차하얼 성, 쑤이위안성 등이 신설되었고, 훌룬부이르는 헤이룽장성 안에 머물게 했다. 중화민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지도는 아직도 이 행정구역을 따르고 있다.
만주는 1931년부터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훌룬부이르나 지림 맹은 만주국의 판도에 들어있었다. 1933년부터는 러허 성도 만주국에 속하게 된다. 이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7년에는 중화민국과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몽골의 유력자였던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는 1936년 5월 12일에 만주국에 편입되지 않은 쑤이위안 성과 차하르 성에 몽골군정부(후에 몽강연합자치정부로 개칭, 이하 몽강국)를 수립했다. 이 나라는 만주국과 일본만 승인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내몽골은 일본의 괴뢰정부가 되었다. 수도는 허베이 성의 장베이에 설치되었고, 그 통치력은 서쪽으로 호흐호트까지 미쳤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을 공격한 작전인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몽강국은 소련과 외몽골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다.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일본 제국이 철수하고 소련은 바로 만주와 내몽골에 침략하였다. 내몽골의 좌익 지도자 20명은 서둘러 모든 내몽골의 몽골인들을 모아 독립의 준비를 하였고 외몽골에 내몽골의 합병 요청을 하였다. 하지만 외몽골은 이전까지 소련과 국민당의 기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몽골의 합병 요청을 외몽골의 독립 저지의 수단으로 보고 내몽골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또한 내몽골의 독립을 두려워 하였다. 결국 외몽골은 국민투표을 앞둔 혼란한 상태에서 내몽골 지도자들의 독립과 합병 요청을 거절하게 되었고 독립이 불가능해진 내몽골은 자치를 요구하였다. 이후 1947년에는 소련의 국가 정책에 따라 내몽골 자치구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오직 훌룬부이르 지역만 차지하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고, 1969년 문화혁명 당시 내몽골 자치구의 많은 부분이 이웃하고 있는 성들에게 분할편입된 적이 있었으나 1979년에 복귀된다.
2003년 12월 1일까지 이 지역은 바얀누르맹으로 불렸다. 중화민국 시기 쑤위안성(绥远省) 소속이었고, 2003년에 지급시로 승격된다.
교통[편집]
바옌나오얼시는 내몽골 자치구 내에서 교통 요충지로, 철도와 도로가 잘 발달해 있다.
- 철도: 바옌나오얼시는 내몽골 자치구와 중국 북부를 연결하는 주요 철도 노선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 고속도로: 바옌나오얼시는 주요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인근 도시들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 공항: 바옌나오얼 공항(巴彦淖尔机场)이 위치해 있으며, 중국 주요 도시로의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관광[편집]
황하[편집]
황하(黃河, Yellow river) 또는 황하강(黃河江)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이다. 칭하이성 쿤룬 산맥에서 발원하여 쓰촨성, 간쑤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산시성, 허난성을 지나 최종적으로 산둥성 둥잉시에서 보하이 만으로 유입되며 전장은 5,464km, 유역 면적은 75만 2,443km²에 이른다. 강의 길이에 비하면 수량이 적은 편이고 유역 면적이 상당히 좁은 편이다. 수량은 심각할 정도로 적은 편인데, 건기에는 아예 건천이 될 때도 있을 정도이다. 현지 발음을 살려 황허라고도 한다.
중국 대륙에서는 장강 다음으로 길고 지구에서 5번째로 긴 강이다. 중요한 지류로는 시안 근처를 지나가는 위수(渭水)가 있다. 황하는 황해의 바닷물을 누렇게 만드는 원인이며 황해를 잠수함의 지옥으로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황하는 황하 문명의 젖줄이고 중국의 상징이다. 중국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인 중원은 본디 황하 유역을 의미했다. 河라는 단어가 원래 황하의 본명이었다가 큰 강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될 정도로 중국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이다. 때문에 CCTV에서 틀어주는 국가 영상(의용군 진행곡)의 첫머리에는 황하의 흙탕물이 힘차게 흐르는 장면이 거의 반드시 들어간다.[7]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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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바옌나오얼시〉, 《위키백과》
- 〈바옌나오얼시〉, 《나무위키》
- 〈내몽골 자치구〉, 《위키백과》
- 〈내몽골 자치구〉, 《나무위키》
- 〈두산백과: 바옌나오얼〉,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바옌나오얼시〉, 《네이버 지식백과》
- 〈황하〉,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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