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우짐웡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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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우짐웡구(중국어: 油尖旺区 yóu jiān wàng qū)는 중국 홍콩 가우룽반도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구다. [1][2][3][4]
개요[편집]
야우짐웡구의 면적은 6.99km²이며 인구는 310,647명(2021)이다. 가우룽의 도심 지역에 해당한다. 홍콩의 구 중에서 3번째로 인구 밀도가 높다. 홍콩 섬 중서구 및 완자이구와 함께 홍콩 양대 번화가로 꼽힌다. 한국 여행자들은 빅토리아 피크 정도를 빼면 대개 이 지역을 돌아다닌다. 한식당도 많고 단체 관광객 대상 라텍스나 찻집, 보석상 등 쇼핑센터도 많다.
경내에 홍콩이공대학(香港理工大学, The Hong Kong Polytechnic University)이 소재하고 있다.
야우짐웡구에는 28개의 역사적 건축물이 있으며, 이 중 5곳은 법정 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전 구룡영동학교(前九龙英童学校), 전 구광철도 종착역 종루(钟楼), 전 수경본부(前水警总部), 홍콩 천문대, 유마지 동화삼원 문물관이 있다. 이 건물들은 《고물 및 고적 조례》에 따라 관리된다.
첨사저는 홍콩의 상업과 관광 중심지로, 약 200개의 호텔과 여관이 있다. 홍콩문화센터, 홍콩예술관, 홍콩과학관, 홍콩역사박물관, 홍콩이공대학, 구룡공원이 위치하여 이곳은 중요한 문화와 교육, 여가 중심지가 된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2019년 후반부 충돌 무대가 이 지점이다. 이 지역에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여러 사건들이 있는지라 소위 용무파라 불리는 과격 시위대는 대개 이 지역을 목표로 해서 따로 모인다. 11월 24일 구의회 선거에서 민주파의 압승 후 원래 충돌무대인 홍콩 섬은 충돌이 사라지고 질서있는 대규모 평화시위를 벌여 안전해진 반면 이 지역에는 과격 시위대가 모여들어 이쪽에서만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프린스에드워드역의 경우는 8월 31일 경찰 과잉진압 사태로 많은 부상자 및 체포자가 나왔고 같은 구의 동쪽 지역인 홍콩이공대학은 경찰이 아예 과격 시위대를 고립 포위하여 감금하는 일까지 있었기 때문이다.[5][6]
자연환경[편집]
야우짐웡구는 번화한 도시의 활기를 보여주는 곳으로, 상업 건물과 다양한 대형 쇼핑몰, 유명 거리, 관광 명소가 방문객들을 매료시킨다. 또한, 홍콩 교통의 중추로, 여러 주요 교통 수단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은 홍콩 시민과 관광객 모두를 위한 중요한 교통 허브이자 문화, 교육, 여가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홍콩은 중국 남부의 온대 하우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 Cwa)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홍콩의 여름은 따뜻한 남서풍과 가끔씩 오는 소나기와 뇌우 등의 영향으로 대체로 덥고 습하다. 태풍은 여름에 가장 자주 발생하며 때때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킨다. 겨울은 온화하며 초반에는 화창하나 대체로 2월부터 흐려지며, 가끔 발생되는 한랭전선은 북쪽에서 강하고 차가운 바람을 가져온다.
홍콩에서 가장 온화한 계절은 봄과 가을으로, 봄 기간은 날씨가 변덕스러우며, 가을은 일반적으로 맑고 건조하다. 강설은 극히 드물며, 대개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홍콩은 인접한 중국 대륙의 공업 지대에서 계절적인 대기 오염의 영향으로, 겨울에 굉장히 높은 수준의 미세먼지를 기록한다.
최한월인 1월 평균기온은 약 16℃, 평균최고기온 19℃, 평균최저기온 14℃ 정도로 한국 수도권의 10월 초 날씨와 비슷하며, 최난월인 7월 평균기온은 약 29℃, 평균최고기온 32℃, 평균최저기온 27℃ 정도로 일본 오사카와 비슷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2,400㎜인데 5월부터 9월까지 집중되는 편이다.
역대 최고기온만 놓고 보자면 북쪽에 있는 중국 대륙(본토)와 한국, 일본의 도시보다 평균 대략 5℃ 가량 더 낮다. 즉 여름철 평균기온 자체는 한국보다 높지만 연중 최고기온이 35℃를 넘는 해는 생각보다 드문 편이었으나 요즘 지구온난화 때문에 많이 더워지는 추세이다. 단 습도가 매우 높아 체감온도는 대구광역시 이상이다. 애초 7월 평균기온 자체가 30℃에 육박한다. 공식 역대 최고기온이 36.6℃다. 일단 해안도시여서 바다가 열 창고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대외적인 인식과 달리 구름이 많아 흐린 날이 많고 연간 일조량이 적기 때문이다. 이 두 요인이 겹쳐 동절기에도 미미한 일교차가 하절기에는 1°C에도 못 미치는 기염을 토한다고도 하는데 그것보단 크다. 덕분에 이슬점도 밤낮에 따른 변동이 없고, 수증기는 바다에서 꾸준히 공급되므로 습도의 변동 역시 미미하다. 따라서, 5~9월 홍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균 기온이 섭씨 28℃, 습도 80% 이상을 유지한다.
종합해보면 4-11월의 길고 무더운 여름과 12-3월의 짧고 서늘한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5-10월 사이 다섯 달 정도는 태풍이 흔히 내습하며 그 덕에 홍콩의 해안지대는 여기저기 태풍 대피소인 타이푼 셸터(Typhoon Shelter)가 조성되어 있다. 홍콩 국제공항도 지하에 태풍 대피소를 둘 정도로 태풍이 흔하다. 한국에서 부산이나 여수, 제주도 등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태풍에 자주 시달리는 것과 똑같다.[33] 10월 태풍은 한국에선 진짜 드물게 남부 지방으로 오지만 홍콩에선 11월 초까진 태풍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며 가끔 2017년 하토 및 2018년 망쿳 등 슈퍼태풍이 관통해 피해가 커지기도 한다.
태풍이 자주 내습해서 홍콩의 태풍 경보 시스템은 일본과 함께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이다. 5단계로 나누어져 1호는 유의, 3호는 경계, 8호는 위험, 9호와 10호는 초위험경보이다. 8호경보가 발령되면 식당 등 상점도 문을 닫으며 직장은 쉬거나 재택근무, 학교는 휴교로 돌린다. 홍콩 버스, 홍콩 트램 등 지상 교통수단이 경보 발령 2시간후에 운영을 종료하는 대신 MTR는 계속 운행한다. 홍콩 국제공항은 항공기 이착륙이 무조건 금지되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대부분 태풍의 위력이 8호경보의 수준에서 그치지만 풍속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면 9호경보가 발령된다. 이때 MTR지상구간에서 운행하고 있는 열차들도 다음 역에 도착하는 즉시 운행을 중단하고 경우에 따라 발이 묶인 승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역대합실이나 열차를 개방한다. 10호경보는 보기 드문 편이었으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점점 잦아지고 있다. 홍콩 반환 이후에 총 5번을 발령했는데 각각 1999년 태풍 요크, 2012년 태풍 빈센트, 2017년 태풍 하토, 2018년 태풍 망쿳, 2023년 태풍 사올라이다.
역사[편집]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기 전인 1830년대 처음 홍콩에 온 영국인은 홍콩이 척박한 땅이었다고 했지만, 이미 홍콩에는 중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 사당, 사원. 밭, 집이 있었고 사업을 하거나 그 외 일상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었다. 원나라 시기에 홍콩은 농부, 어부, 해적, 송나라의 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명나라 때는 광동과 푸젠(福建) 사람들이 구룡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839년 시작된 제1차 중영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1842년 난징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했다. 중영전쟁은 '아편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의 아편 밀무역으로 청에 급속히 확산된 아편 중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청나라는 아편 금지령을 내렸지만, 영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아편 밀무역을 시도하면서 은의 대량 유출과 아편 중독 현상이 심각해졌다. 청나라가 아편 밀무역을 제지하면서 이에 반발한 영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1857년 수출 부진을 빌미로 영국이 제2차 중영전쟁을 일으켰다. 난징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성과가 부진하자 다시 무력을 쓴 것이다. 청나라가 또다시 패배하면서 1860년에는 1차 베이징조약에 따라 구룡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1898년에는 영국이 2차 베이징조약을 통해 99년 동안 신계 지역을 조차하였다. 50여 년에 걸쳐 홍콩섬, 구룡, 신계 등 지금의 홍콩을 구성하는 세 지역이 모두 영국의 관할권이 된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홍콩을 점령하면서 1945년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홍콩은 156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홍콩은 항구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제적 번성은 정치적 무관심을 낳기도 했지만,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7년 5월부터 12월까지 발생한 시위, 파업, 암살, 폭파 등을 통칭하는 67폭동은 영국 식민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쟁의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식민정부 비판까지 나아갔다. 50여 명 이상이 사망한 대규모 폭동은 홍콩의 공산주의자들이 연루되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한 그들만의 폭동이었다. 홍콩의 학생단체는 폭력의 중단을 호소하고, 식민정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홍콩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대기근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거주공간의 부족, 열악한 노동환경, 극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홍콩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야우짐 구(油尖區) 와 웡곡 구(旺角區, 몽콕 구) 로 나뉘어 있었다. 1994년에 이들 구가 합쳐지면서 3개의 주요 지구인 야우마데이(油麻地, 야우마테이) , 짐사저이(尖沙咀, 침사추이) , 웡곡(旺角, 웡곡)의 머릿 글자를 합쳐서 현재의 구 이름이 만들어졌다.[7]
산업[편집]
가장 번화한 지역인만큼 야우침몽구에 홍콩 및 중화권 본부를 둔 글로벌 기업들이 굉장히 많다. 금융회사들은 센트럴이나 완차이구로 가지만, 패션브랜드는 주로 야우침몽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교통[편집]
야우짐웡구는 홍콩의 교통망 중심에 위치한다. 구광철도, 홍함 해저터널, 서구 해저터널, 천성 부두(天星码头), 중항 부두(中港码头), 공항철도 구룡역, 미단도(弥敦道), 서구룡 고속도로 등이 이곳을 관통한다. 또한, 향후 개통 예정인 사틴-중환선, 관탕선 연장선, 중구룡 간선, 광심항 고속철도 등이 추가될 예정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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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야우짐웡구〉, 《위키백과》
- 〈야우침몽구〉, 《나무위키》
- 〈홍콩〉, 《위키백과》
- 〈홍콩〉, 《나무위키》
- 〈중국행정구획총람: 유젠왕구〉,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홍콩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油尖旺区〉, 《百度百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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