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친황다오시

위키원
(친황다오 시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국 위치

친황다오시(중국어: 秦皇島市 qín huáng dǎo shì)는 중국 허베이성 동부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 [1][2][3][4]

개요[편집]

친황다오시의 면적은 7,791.57㎢이며 인구는 3,136,879명(2020년)이다. 동쪽은 랴오닝성(辽宁省), 서쪽은 톈진시(天津市)와 접하고 있으며 베이징까지는 대략 300㎞이다. 랴오닝성(遼寧省)과 발해만(渤海灣)에 접한 도시이다. 친황다오(秦皇島)라는 이름은 진시황제가 늙어 죽지 않는 불로장생약(不老長生)을 얻기 위해 서복(徐福)에게 명하여 5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파견했던 항구도시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20세기 들어 요서 지방을 대표하는 부동항으로서 석탄과 석유가 하역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간 중 친황다오의 올림픽 경기장이 축구 예선전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경내에는 징선(京沈, 경심)·징친(京秦, 경진)·다친(大秦, 대진) 철로가 경내를 지나고 징하(京哈, 경합), 산광(山广) 등의 간선도로가 있으며 친황다오항(秦皇岛港, 진황도항)은 국내 최대의 석탄 수출항이다. 유명한 산하이관(山海关, 산해관) 및 베이다이하(北戴河, 북대하)가 이곳에 위치하며 경내 고등교육기관으로 둥베이대학친황다오분교(东北大学秦皇岛分校), 옌산대학(燕山大学, 연산대학)이 있다

문화재로는 산하이관장성(山海關長城), 베이다이허(北戴河) 해변, 멍장뉘먀오(孟姜女廟), 수안양퉁(懸陽同)과 진산줘이(金山嘴) 고성의 옛터 등이 있다. 남서쪽 해안지구는 경치가 수려해 여름철 휴양지로 이용되고 있다.[5] [6]

자연환경[편집]

지리적으로는 옌산(燕山, 연산) 산지 구릉 지역과 평원지대로 이루어져 북부의 두산(都山, 도산)은 해발 1,846.3m에 달하며 남부는 연해 평원이다. 또한 126.4㎞의 해안선을 지니고 있다. 기후는 난온대반습윤 대륙성계풍기후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은 10.4℃, 연 강수량은 674.5㎜이다.

역사[편집]

고대부터 평야 지대를 바탕으로 관중(산시성)-중원(허난성) 등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운 동네였기 때문에 하북을 근거지로 삼았던 원소는 군웅할거 초창기에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고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 역시 관중-중원과 더불어 이곳에서 나오는 국력을 바탕으로 촉과 오를 압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북방의 수렵, 유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 역시 수도권을 화북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정치 중심지가 점차 황하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지금의 베이징 지방이 '계'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 연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게 다수설의 견해다. 전한대에는 '유주'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그렇게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후한 말에 유비, 관우, 장비가 그 유명한 도원결의를 맺은 곳도 지금의 이 지역이다. 조운의 출생지도 허베이성 쪽인 상산 진정이다. 조운이나 장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허베이 지역을 빼앗겼는데 이때 이곳에 전연, 후연 등의 나라들이 들어섰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한족의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변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북쪽인 점도 있고, 타 민족의 침입이 상당히 잦았다.

5대 10국 시대의 마지막에 이 지역을 연운 16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게 뺏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통일 왕조인 글로벌호구 북송이 몇 번이고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송의 떨어지는 군사력으로는 거란(요)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요나라가 쓰러지지 않아 그래서 여진족(금)과 연합해 거란을 뭉개고 이 지역을 탈환했으나 곧바로 금에게 뒷통수를 털리고 이번엔 화북 전체를 먹혀 버린다.

그리고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마침내 이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명나라와 청나라 역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는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인 즈리성(直隸省)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된 뒤에도 북양정부의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예성으로 불리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1928년 6월 국민정부가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의 군벌은 직예군벌로 불렸다. 1914년에 기존 순천부가 경조지방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에 순천부 관할이었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허(寧河)의 4개 현을 넘겨받았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몽골 지역에 차하얼 특별행정구와 러허 특별행정구가 설치되면서 이들 특별행정구에 북부 지역을 내주어 면적이 축소되었다. 1928년에는 경조지방이 폐지되어 중심 시가지만 베이핑시로 남으면서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현들을 넘겨받았다.

1933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았고 하북 사건을 구실로 1935년 6월 10일 하매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거듭나면서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항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점령지로 8년을 점령당했고 신멸작전이 벌어져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이 학살로 당시 세를 불리며 거대해지던 팔로군의 기세가 꺾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다시 베이징에 두었지만 다시 즈리성으로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말기 허베이성 정부는 베이핑시에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바오딩시에 허베이성 인민정부를 설치하면서 바오딩시로 성도가 옮겨졌다. 이후 베이징시 주변 상당 지역이 베이징시에 편입되고 차하얼성과 러허성이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폐지되면서 그 남부 지역을 다시 편입했으며 1958년에는 톈진시를 재편입하여 톈진시로 성정부를 이전하였다. 톈진시가 1967년에 다시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바오딩시를 성도로 삼았으나 당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성도 기능을 할 수 없어 이듬해에 스자좡으로 다시 허베이성 성정부를 이전하여 현재까지 스자좡을 성도로 삼고 있다.

1948년에 친위시(秦楡市)라고 불렀고 1949년에 친황다오시(秦皇島市)와 산하이관시(山海關市)가 설립되었다가, 1953년에 친황다오시와 산하이관시를 합병하였다.

친황다오시 시인민정부는 하이강구(海港区, 해항구)에 소재하며 성회 스자좡시(石家庄市, 석가장시)로부터 480㎞ 거리에 위치한다. 행정구획은 하이강구(海港区, 해항구), 산하이관구(山海关区, 산해관구), 베이다이허구(北戴河区, 북대하구)의 3개 시할구(市辖区)와 창리현(昌黎县, 창려현), 푸닝현(抚宁县, 무녕현), 루룽현(卢龙县, 노룡현)의 3개 현, 칭룽만족자치현(青龙满族自治县, 청룡만족자치현)의 1개 자치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업[편집]

14개 해안개방구 중 하나로, 친황다오 경제기술개발구(秦皇岛经济技术开发区)가 존재한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친황다오는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자원수출단지가 존재하며 중국 내 석탄이나 석유는 주로 친황다오항을 통해 해외로 수출된다. 또한 하술할 장성의 동쪽 끝구간인 산하이관이 있는 지역이라서 관광업 또한 활성화된 도시이다.

관광[편집]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해변에는 만리장성의 첫 관문으로서 하북과 요서 지방의 경계점이 되는 산하이관과 장성과 바다가 만나는 노룡두(老龙头)가 있다. 그밖에 주변 해변이 아름다워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시내에서 서쪽으로 30여km 가면 창리현(昌黎县)이 나오는데, 한나라 때에 세워진 유서깊은 도시이며 재야 사학계에서는 낙랑/대방군의 치소가 한반도 북부가 아닌 이곳이라고 주장하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다만 인근 랴오닝 성의 도시인 차오양에 고조선의 초기중심지가 위치해있으리라고 추정되는 만큼 고조선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은 사실이고, 고구려에 의해 한반도 북부 → 요동을 거쳐 북위/수나라 시기에 요서 지방인 창려까지 밀려났을 가능성은 있다. 창려현 읍내 뒤편의 갈석산은 해발고도가 695m 이지만 평지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있는 자태가 아름다워 중국/한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교통[편집]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 281km, 톈진으로부터 245km 떨어져 있어, 관문도시와 경제기술 개발구의 특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매년 6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피서지인 베이다이허(北戴河)와 만리장성의 최동단의 산하이관(山海關)이 친황다오시 관할지역에 있다. 최근에는 베이징까지 2시간 만에 주파하는 고속열차의 개통으로 더욱 관문으로써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이 두 시간이면, 톈진에서 가는 소요 시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베이징과 하얼빈을 잇는 고속도로인 징하 고속도로가 친황다오시를 통과한다.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배를 타고 베이징까지 가깝고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 관문도시로 유명하기도 한 이 곳은, 현재 한중합작으로 만들어진 진인항운(진인페리)이 인천-진황도 구간을 운항 중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친황다오시〉, 《위키백과》
  2. 친황다오시〉, 《나무위키》
  3. 허베이성〉, 《위키백과》
  4. 허베이성〉, 《나무위키》
  5. 두산백과: 친황다오〉, 《네이버 지식백과》
  6. 중국행정구획총람: 친황다오시〉,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친황다오시 문서는 중국 행정구역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