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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金佐鎭)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개요[편집]

  • 김좌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10월 청산리(靑山里)계곡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김형규(金衡奎)이며 둘째 아들이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 김좌진(金佐鎭, 1889년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1906년)에 그는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도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한제국 교육 사회 사업 르네상스 혁신 선구자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형평사 운동에도 관여했다.[2]
  •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으로 유명한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교육자, 군인, 독립유공자이다. 그 유명한 김두한의 친아버지이기도 하다. 1889년 12월 16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 이씨 이상희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형 김경진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덕규(金德圭, 1848. 8. 19 ~ 1900. 11. 1)에게 양자로 가면서 집안의 차남인 김좌진 자신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정환덕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은 당시 헤이그 특사단을 수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나, 무슨 일인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20]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3]
  • 김좌진의 고향은 충남 홍성으로,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 이웃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불과 17세에 자기 집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80칸이나 되는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자기는 초가집으로 나가 살기도 하였다. 김좌진의 집터는 홍성의 갈산(葛山)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김좌진 자신은 어려서 서당 공부를 했고 16세에서 18세까지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 다른 정규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의 글씨는 다른 어느 문인보다 뛰어났고 학식 또한 높았다. 문무를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불과 19세에 '한성신보'라는 신문사의 이사가 되었고 오성(오성)학교 교감이 되었다. 그리고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하여 애국교육운동에 나섰다. 1930년 1월 24일 박상실(朴尙實)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향년 40세. 김좌진의 장례식은 그곳 교포들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중국 사람들까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통해 했다. 광복 후 장군의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훈장 중장을 수여하였다.

김좌진의 생애[편집]

  • 김좌진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흔히 청산리 대첩의 대표 장군으로 나온다. 만3살 때(1892년)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 김좌진은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1918년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김좌진은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고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사후 3년 뒤, 아내 오숙근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 홍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해방 후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안장되었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편집]

  • 김좌진 장군 생가지(金佐鎭 將軍 生家址)는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생가지이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백야 김좌진이 태어나 성장하던 곳이다. 1991년부터 이곳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생가지와 문간채·사랑채가 복원되었으며 관리사 및 전시관이 건립되었다. 1889년(고종 26)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인 형규(衡奎)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였으며 공부보다는 말타기와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노복 30여 명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하는 등 훗날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자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공산당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 근처 백야공원에 장군의 비(충남 문화유산자료)가 있으며, 보령시 청소면(靑所面) 재정리(才井里)에 김좌진 장군 묘(충남기념물)가 있다.

김좌진 장군 묘[편집]

  • 김좌진 장군 묘(金佐鎭 將軍 墓)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묘이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승리를 이끈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의 유해를 안장한 묘소이다.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葛山面) 행산리(杏山里)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국내에서 항일 비밀결사인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했다. 그리고 대한정의단이 군정부 조직으로 개편되어 '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꾼 뒤에는 총사령관으로 독립군의 편성에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둔 뒤에는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결집하여 결성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부총재를 지냈으며, 1925년에는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여 군사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좌우합작으로 만주 지역의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30년 1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살해되었다. 보령시는 1974년부터 묘역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해마다 10월 22일에 묘역에서 김좌진 장군 추모식을 열고 있다. 묘역의 전체 면적은 25,344㎡이며, 묘의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있다.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의 생가지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 비[편집]

  • 김좌진 장군 비(金佐鎭 將軍 碑)는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치적을 새긴 비석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의 치적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9년 대한청년단 홍성군단이 성금을 마련하여 건립하였다. 원래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있었으나, 2008년에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 근처인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11길(행산리 330-1)로 이전하였다.
  • 김좌진은 홍성 갈산에서 출생하여 15세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1907년에 호명학교(湖明學敎)를 세웠으며,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로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는 김좌진 장군 생가지(충남 기념물)가 있고,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는 김좌진 장군 묘(충남 기념물)가 있다.

청산리전투[편집]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국내 한정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 간도에 10여 차례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다. 중국 마적이 일으킨 훈춘 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독립군은 일본군과 교전했다.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도 특히 눈부셨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다.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좌진 金佐鎭,1889.11.24(음)~1929.12.25(음)〉, 《두산백과》
  2. 김좌진〉, 《위키백과》
  3. 김좌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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