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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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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태조대왕은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이다.

개요[편집]

  • 태조대왕은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朝鮮)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1393년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이다.[1]
  • 태조대왕은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인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호는 송헌(松軒), 또는 송헌거사(松軒居士)다.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이후 존호를 더해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2]
  • 태조대왕은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을 건국한 조선왕조의 창업군주이다. 묘호는 태조(太祖), 성은 이(李), 초명은 성계(成桂). 즉위 후 개명한 이름은 단(旦)이다. 귀신같은 활 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내 최영과 함께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고려 말 최대 군벌로서 실력을 갖춘 데다가 신흥무인세력들과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협력과 지지를 받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했으며 마침내 1392년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다.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앞세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신덕왕후가 죽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둘째 정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처가 쪽 생존자였던 조사의를 내세워 1402년 함경도에서 군을 일으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태종에게 진압됐다. 1408년 붕어하여 건원릉에 안장되는 한편 신위는 종묘에 봉안됐다.[3]
  • 태조대왕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의 천축사와 관련된 조선 전기의 왕이다. 이성계는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박의(朴儀)를 죽이고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원나라, 여진족, 왜구와의 싸움에서 잇따라 전공을 세우며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1388년에는 최영(崔瑩)과 손을 잡고 이인임(李仁任) 일파를 제거,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당시 중국은 원명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서도 친원파와 친명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우왕과 친원파에 의해 요동 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던 이성계는 우군 도통사가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위화도까지 나아갔다가 회군을 단행,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 고려의 일인자가 되었다. 결국 1392년 7월 조선을 개창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사(王師)였던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건의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편으로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1394년 정도전(鄭道傳)이 기초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4]

생애[편집]

  • 태조대왕의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1335년(충숙왕 4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 살았으나 고조부 이안사 대에 간도지방으로 이주해서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까지 원나라 지방관리를 지냈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1362년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악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이성계는 출정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무인으로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 1364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1383년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1385년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 태조대왕은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1389년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趙浚)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1392년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태조대왕의 가계[편집]

  • 태조대왕의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흥 최씨(永興崔氏)이다. 목조(穆祖)로 추존된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남경(南京)[간도 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았으며,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과 덕원 지방에서 원나라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자춘 또한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천호로 있었으나,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하여 공을 세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성계 역시 담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1351년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 혼인하여 6남 2녀를 낳고,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대왕 태실[편집]

  • 태조대왕 태실(太祖大王 胎室)은 조선 시대 제1대 왕 태조의 태실이 있던 곳이다.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秋富面) 마전리에 있다. 1393년(태조 2)에 태조(1335~1408)의 태실을 마전리 태봉산(胎封山:이전의 만인산)에 조성하였다가 1928년 4월 조선총독부가 태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태실은 파괴되었고 1993년에 비석과 여러 석물들을 모아 복원하였다. 태실은 팔각형이며, 돌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 팔각원당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귀부 위에 태실비가 있으며, 정면에는 비문 '太祖大王胎室'이 음각되어 있다.
  • 이곳은 조선 초기에 한 시인이 만인산을 보고 산세가 깊고, 중첩한 산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99산의 물이 한곳으로 모여든다고 찬양한 곳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실이 이곳에 태조의 태실을 축조하였고, 옥계부사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추부면 장대리에 '玉溪府使都'라는 고적이 남아 있고, 비례리(備禮里)의 이름도 그 지점부터 예를 갖추고 태실에 참배하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태봉산은 이전에는 만인산이라 불렀으나 태조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를 묻었던 능선은 쌍봉낙타령으로 남향이며, 태봉산의 북풍을 막을 뿐만 아니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종묘 영녕전[편집]

  •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대 4조 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사당에는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正殿:太廟)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1421년(세종 3)에 건립되어 목조(穆祖)의 신주가 제1실에 옮겨진 이래 170여 년을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정전과 함께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67년(현종 8)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1836년과 70년에 각각 개수되었다.
  •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시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었을 때 영녕전으로 옮기어 모시게 되어,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금 이곳에는 태조 선대의 4조(祖)인 목조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를 비롯하여 정종(定宗) · 문종(文宗) · 단종(端宗), 기타 추존된 왕과 왕비 등 32위의 위패를 15실에 봉안하고 있다. 건물은 정전 서쪽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엮음은 평범하지만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재목들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꾸밈새도 그에 따라서 무게가 있으면서 소박하게 처리되어 엄숙하고 투박하다.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16칸, 측면 4칸 고설집이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다.

건원릉[편집]

  • 건원릉(健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안에 있는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다. 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구리 동구릉 경내에 있으며, 동구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건원릉을 포함한 40기의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태조는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숨을 거뒀다. 영의정 하륜(河崙) 등이 산릉지(山陵址)를 물색하다가 1408년 6월 28일 현 위치로 결정하였고,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군정(軍丁)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하였다.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고려시대 왕릉에는 없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고,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언덕 아래쪽에는 제향을 올리기 위해 세운 정자각과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를 보존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 있으며,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과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2011년과 2013년에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태조(太祖,1335~1408)〉, 《두산백과》
  2. 태조 (조선)〉, 《위키백과》
  3. 태조(조선)〉, 《나무위키》
  4. 태조 이성계〉,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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