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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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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노태우(盧泰愚)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개요[편집]

  •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군 출신 정치인으로, 12·12사태에 가담하였다. 이후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거쳐 제13대 대통령(1988~1993)을 역임하였다. 1988년 대통령 노태우는 7·7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1989년 9월 11일 정기국회 연설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안하였다. 주요 내용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 아래 "공존공영 → 남북연합 → 단일민족국가"라는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이 방안은 점진적 교류를 중시하는 기능주의적 통일방안으로서, 전두환정부의 통일방안과 마찬가지로 1민족 1체제를 목표로 하지만, 남북연합이라는 과도체제를 설정한 점에서 다소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민간차원의 통일방안으로 김대중의 연방제안과 재야·학생운동세력의 연방제 방안이 제기되었다. 1990년 9월 4일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1년 반의 회담을 거쳐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퇴임 후인 1995년 8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에 관한 소문이 돌았고, 10월에 이것이 구체화되자 노태우는 비자금 조성을 인정하였다(노태우비자금사건). 결국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1995년 11월 구속 기소되었다. 아울러 12·12사태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에 따라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이에 대한 재판도 이루어졌다. 1996년 12월 열린 항소심에서 노태우는 반란모의참여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으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9,600만 원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상고심에서 형량이 확정되었다. 1997년 12월에 특별사면되었으며, 김대중정부 때 복권되었다. 2013년 9월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투병 중인 본인을 대신하여 아들이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사죄하였고, 유서에서도 용서를 구하였다. 이후 투병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2021년 10월 26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고, 파주 동화경묘공원에 안장되었다.[1]
  • 노태우(1932년 8월 17일~2021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제4공화국 당시 친구인 전두환과 하나회를 결성하여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하였다. 반란 성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고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제41대 내무부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교하이며 대구 출생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198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로 써도 된다고 허용하여 이때부터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당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소신있는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던 이회창을 법관직에 복직시키고,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 금지령을 철회하였다. 그는 강경론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대화하려는 자, 타협하려는 자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평화적으로 해결의 길을 찾는 사람이 위대한 개척자이다."라고 했다. 1997년 12월에 사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0년대 초반부터 노태우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져, 연희동 자택 와병과 병원 입퇴원을 반복해 왔다. 2021년 10월 초 병세 악화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만 89세 생일을 40일 정도 앞둔 2021년 10월 26일 오후 1시 46분에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2]
  • 노태우는 박정희 정부 당시 전두환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시해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인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중도통합에 나섰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하였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통령이며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설 경우 처음으로 스스로를 '나'가 아닌 '저'로 표현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 퇴임 후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 이에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3]
  • 노태우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1988∼1993년 역임).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고 1981년 육군 대장 예편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1987년 12월 치러진 제13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취임 이후 북방 외교 정책을 내세우면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퇴임 이후에는 12·12 사태 주도 및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함께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까지 앓으면서 오랜 기간 병상에서 지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2021년 10월 26일 타계했다. 그리고 정부는 10월 27일 국가장법에 근거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이는 고인이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등과 관련하여 역사적 과오가 있으나, 직선제를 통한 선출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 북방정책으로 공헌하였으며 형 선고 이후 추징금을 납부한 노력 등이 고려되었다. 다만 국립묘지 안장은 관련 법령에 따라 하지 않기로 했다.

노태우의 생애[편집]

  •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대구에서 면서기(面書記)였던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5살이던 1939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노태우는 숙부 노병상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나갔다. 대구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48년 경북고등학교에 편입하였다. 6학년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헌병에 자원 입대하였고,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하여 1955년 졸업하였다.
  • 노태우는 1956년 육군 5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되어 사단장 박정희(朴正熙)와 조우하였다. 1957년 육군보병학교를 거쳐 1958년 육군정보학교에서 복무하였다. 1959년 김옥숙(金玉淑)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특수전학교에 입학하여 심리전 과정을 수료하였고, 1960년 군사정보대로 발령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全斗煥)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생도에게 5·16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게 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와 김재춘(金在春)이 부대장으로 있던 육군방첩부대의 업무를 같이 맡아보게 되었다. 19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같은 해인 1968년 수도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다. 1969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1971년 8사단 21연대, 1973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를 거쳐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25사단 부사단장, 제9공수특전여단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 9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였다. 노태우는 본인이 사단장이던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내어 서울로 진격시켜 군사반란에 힘을 보탰다.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의 정권 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한 것이다. 12·12사태에 따른 군사반란이 성공한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 노태우는 1981년 대장으로 예편(豫編)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 1982년 초대 체육부 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월 민주항쟁으로 인한 시국 수습을 위하여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가 되었고, '보통 사람'임을 표방하며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2월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828만 2738표(득표율 36.6%)를 획득하여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제6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88년 4월에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전체 299석 중 125석만을 확보하여 의석 과반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된 것이다.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서울올림픽 폐막 후 5공비리특별위원회 주도의 청문회가 열렸다. 여기서 전두환 정권 시기의 비자금 조성, 5·18 민주화운동 문제 등이 거론되었고, 전두환은 백담사(百潭寺)로 가 은둔하게 되었다. 정국 주도가 어려워진 노태우 정부는 1990년 1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3당 합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 1990년 6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와의 정상회담으로 소련과의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였고, 1992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북방정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여 이전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성사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및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루어졌다. 1990년 10월 민생치안 확립을 위하여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을 선포하였다. 대중매체 및 예술에 대한 검열이 비교적 완화되었고, 정치인에 대한 풍자도 허용되었다. 또한 1991년 기초 지방의회 및 광역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제한적이나마 지방자치체 선거가 이루어졌다. 1992년 9월 노태우는 민자당을 탈퇴하였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1993년 2월 대통령에서 퇴임하였다.

범죄와의 전쟁[편집]

  • 1990년 대통령 노태우가 발표한 10·13 특별선언이다. 1990년 10월 13일,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주요 골자는 첫째,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 둘째,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 셋째,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 등이었다. 그 후속 조치로서는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단속,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가정파괴범 ·유괴범 ·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 보복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지 2년 만에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가 선포 전에 비하여 5.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에서는 "범죄와의 전쟁 결과 폭력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매년 증가하던 흉악범도 감소 추세로 바뀌고 퇴폐 ·향락 분위기가 수그러드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체평가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노태우(盧泰愚,1932.12.4.~2021.10.26)〉, 《두산백과》
  2. 노태우〉, 《위키백과》
  3. 노태우〉,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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