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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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America)은 북미 대륙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국명은 미합중국(USA;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중국어로는 메이구오(美國, měi guó)라고 한다. 수도는 워싱턴디씨(Washington D.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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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있는 다인종 · 다민족 국가이다.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동쪽으로 카리브해와 접하고 있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독립 당시 13개의 주로 시작하였으나 현재 50개의 주와 1개 수도구(District of Columbia:D.C.)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외에 푸에르토리코, 사모아 제도, 괌 등 다수의 해외속령이 있다.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영토의 국가이며,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한 본토 면적만으로는 중국에 이어 네 번째이다. 2020년 기준 3억 3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어 인구 규모 면에서 중국과 인도에 이에 세계 3위의 국가이다. 2021년 기준 GDP는 $23조를 기록하여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고, 1인당 GDP는 $69,288로서 세계 9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권분립의 민주주의를 현실정치에 구현한 최초의 국가인 만큼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수도는 워싱턴 D.C.이며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왕성한 도시는 뉴욕이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기는 성조기, 국가는 〈The Star-Spangled Banner〉이다. 냉전기간 소련과 경쟁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도전을 받고 있지만,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전히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엔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
상징
국호
미국은 (유럽인들 입장에서) 본래 이름이 없던 땅이기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미국인들은 자국을 뭐라 불러야 할지 마땅히 정해진 바가 없었다. 영국의 지배 하에서 그들은 '영국령 북아메리카(British North America)' 내지는 '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라 불렀고, 독립운동이 불거진 이후에는 오늘날의 정식 국호인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등장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와의 서신에서 '북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North America)'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일반명사만으로 이뤄져 있고 아무래도 낭만 없는 이름이기에 다른 이름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콜롬버스에서 따온 '컬럼비아(Columbia)'나 자유(Freedom)에서 따온 '프리도니아(Freedonia)' 같은 이름들이 제시되었지만 컬럼비아는 이미 남미에 거의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고 프리도니아는 너무 애국적이라는 이유으로 둘 다 다수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미국인들은 '아메리카합중국'이라는 애매한 이름에 만족해야 했다.
미국의 공식 명칭 United States(합중국)는 아메리카의 '국가(State)'들이 이룬 연합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미국의 state를 주(행정구역)라고 번역하지만 정치, 법률 분야에서 영단어 state의 뜻은 그냥 국가라는 뜻이다. 원래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할 때 이들은 여러 나라(13개)의 모임이지 한 나라라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독립 후에 다시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불가피하게 연합해 '한 나라'가 되어야 했고, 이에 따라 나라 이름에 "여러 나라가 연합함"을 명시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United States 미합중국이라는 약칭을 가장 자주 쓴다.
두문자어로는 U.S.A. 또는 USA를 쓰고 더 줄여서 U.S. 또는 US도 많이 쓴다. 주로 미국 영어에서는 마침표를 찍어 U.S.라고 쓰고 영국 영어에서는 마침표 없이 US라고 쓴다. 특히 미국 정부 기관 명칭은 대부분 U.S.를 쓴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 미국에서도 US를 쓰고 오히려 이쪽을 권장하는 가이드라인도 있다. 개개의 필자, 언론사, 출판사마다 방침이 각기 다르므로 어느 쪽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법칙은 US뿐만 아니라 USA도 비슷하다. 언론, 출판 등이 아닌 일상적 대화에서는 the States라고도 많이 줄여 부른다.
이 이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국호로 채택되기까지의 경위도 확실치 않다.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다만 이 이름을 사용한 기록물 중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1776년 1월 2일 미국 독립전쟁 중에 스티븐 모일런(Stephen Moylan)이 조지프 리드(Joseph Reed)에게 써서 보낸 편지며 이들은 독립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다. 모일런은 편지에서 유럽의 독립 지원에 관해 언급하며 자신을 United States of America라 부른다. 얼마 후 1776년 7월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서 자필 초안에서 도입부에 대문자로 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쓰고 결론에선 United States of America[5]라고 쓴다. 초안에서 꽤 수정을 거쳐 정식 발표한 1776년 7월 4일 이후에는 판본마다 표기법이 미묘하게 다른데 발표 당일의 인쇄 및 배포본에는 초안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했으나 대표자의 자필 서명이 들어간 양피지 문서에는 united의 u가 소문자다. 서명본의 도입부에서 united 앞에 thirteen이 추가된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 서명본이 몇몇 당사자의 증언에도 정말로 7월 4일 당일에 작성 및 서명되었는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또 며칠 뒤인 1776년 7월 16일부터 미국 최초의 헌법인 연합 규약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1777년 완성된 이 규약의 제1조에서는 연합의 이름을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로 규정한다. The를 따옴표 안에 넣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썼으므로 이때는 The까지 포함하여 정식 명칭으로 삼으려 했다.(이 규약은 13개 주가 모두 비준을 마친 1781년부터 발효하고 1788년 내용을 갈아엎은 새 헌법으로 대체하면서 없어진다.1783년 영국과 맺은 파리 조약에서는 다시 the를 소문자로 쓰는 원래 표기로 돌아오며 1787년에 제정하고 1788년 발효한 새 헌법에서도 파리 조약과 같은 표기법을 사용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국기
미국의 국기는 성조기(星條旗)이다. 저 국기 안에 있는 50개의 별은 미국의 새 주인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의 50개의 주를 상징한다. 적색 및 백색의 가로로 나란히 늘어놓은 13개의 줄은 미국이 초기 연방국에 가입시킨 연방주를 의미한다.
보통 'Stars and Stripes', 'Old Glory' 혹은 'The Star-Spangled Banne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단 후자는 국기를 나타내는 애칭으로는 잘 안쓰고 있는데 이유는 미국 국가의 정식 명칭이기 때문이다.
성조기(星條旗)라는 명칭은 별 성, 가지 조, 깃발 기로 별과 막대기가 그려진 깃발이라는 뜻이다. 과거 한자문화권에서는 화기(花旗)라는 명칭도 있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별을 점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오각성 모양을 별이 아닌 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국장
미국의 국장(國章)은 그레이트 실(The Great Seal)이다. 조약문과 같은 국가 중요 문서 원본에 대한 봉인(封印, seal)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어서다. 당시 문서에 실링 왁스를 이용해 봉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압인(押印, 압력 스탬프)으로 만들어져 국가 중요 문서 원본에 찍힌다. 즉 동아시아 각국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국새(國璽) 역할이다.
또 통상적인 국장과 달리 뒷면이 있다. 18세기 당시 '펜던트 실'(pendant seal)이라는 봉인 방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통상 실링 왁스로 봉인하는 경우 문서 말미에 그냥 도장처럼 찍거나 문서를 말거나 접거나 또는 봉투에 넣었을 때 종이가 겹쳐지는 면에 봉인을 하므로 반대쪽은 보이지 않아 뒷면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없다. 그런데 18세기에는 문서를 말거나 접거나 봉투에 넣은 경우 이를 함부로 풀지 못하게 묶는 리본이나 끈에만 왁스로 봉인하는 '펜던트 실'이라는 방식이 있었다. 이 경우 왁스가 굳으면 봉인이 리본이나 끈에 메달처럼 매달려 달랑거리고 '뒷면'이 존재한다. 이에 미국은 '펜던트 실'을 염두에 두고 그 양면에 각인하기 위해 국장 '뒷면'을 따로 디자인한 거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국장 앞뒷면 도안을 만들어 놓고 정작 국장 앞면만을 실제 봉인에 쓰이는 주물로 제작하고 뒷면용 금형은 단 한 번도 실물로 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펜던트 실' 방식으로 문서를 봉인하는 경우에도 앞면만 찍었다. 결국 뒷면 국장은 단지 디자인으로만 남게 되었다.
현재 앞면 국장은 대통령이나 연방 정부 명의로 발급하는 공문서, 서한, 조약, 협정문 등의 원본에 압인으로 날인하며 여기에 사용되는 거대한 프레스기를 미국 국무부 청사에 보관하고 있다. 그 밖에 다른 나라 국장과 마찬가지로 여권 표지, 외국 주재 미국 공관의 현판, 연방 정부 각 부처나 국가 요인들의 브리핑석 장식 등에 쓴다.
뒷면 국장은 1달러 지폐의 뒷면에 국장 앞면과 함께 그리고 그밖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간혹 기념품 메달 등에나 조각될 뿐이다.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가 국가다. 직역하면 별이 빛나는 깃발, 즉 성조기를 의미한다. 1931년에 공식 제정된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는 1814년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쓴 "맥헨리 기지의 방어전(Defence of Fort McHenry)"이라는 시를 원문으로 하며 곡조는 영국의 작곡가인 존 스태퍼드 스미스(John Stafford Smith)의 권주가(勸酒歌)인 "To Anacreon in Heaven"을 개사했다.
국화
미국의 국화는 장미다. 미국은 연방국이므로 국화가 없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1980년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장미로 지정하였다.
국조
미국의 국조는 흰머리수리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흰머리수리(American Bald Eagle)는 북아메리카에 서식한다. 흰머리 수리는 1782년 미국 의회에서 '미 합중국의 국조(國鳥)'로 지정하며 이후 미국의 각 공공기관에서 상징물로 쓴다.
지리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000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000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주 면적은 160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위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²,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²,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²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지형
미국의 지형은 대략 동부의 구릉지대 중서부의 평원, 서부의 산악 및 사막지대, 태평양 연안의 평야와 알래스카의 산악지대, 그리고 하와이의 화산지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부의 구릉지대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애팔래치아산맥이 중심으로 이루고 있다. 산맥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평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산맥이 닿지 않는 동남부도 높은 산은 찾기 힘들고 대부분 평야라고 볼 수 있다.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 서쪽은 대평원을 이루고 있다. 미시시피강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지역은 미국의 식량창고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농목축업의 중심지대라고 할 수 있다. 대평원의 서쪽은 로키산맥으로 대표되는 산악지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로키산맥은 해발고도 4,000m를 넘는 험준한 습곡산맥으로 매우 다양한 지형을 보인다.
와이오밍 분지를 경계로 북부 로키와 남부 로키로 구분된다. 북부 로키에는 유명한 옐로스톤 국립공원과 캐나다와 접해 있는 글레이셔국립공원 등이 있어서 휴양· 관광지로 잘 개발되어 있다. 로키산맥의 서쪽은 너비 800㎞가 넘는 고원지대와 사막이 있다. 콜로라도고원, 그레이트베이슨(Great Basin, 대분지), 콜럼비아 고원지대와 모하비사막과 같은 사막지대 등으로 나뉘며,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데스밸리 국립공원 등 건조 기후의 특이한 경관을 볼 수 있다. 태평양 연안의 산간고지는 캐스캐이드, 시에라네바다산맥 및 해안산맥의 두 줄기 산맥과 그 사이에 위치해 있는 그레이트밸리(Great Valley)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일부분인 캘리포니아 분지는 관개농업 특히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캘리포니아 중앙부 해안산맥의 태평양 연안은 환태평양 화산대에 속해 있어 이따금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며, 레이니어산, 샤스타, 라센 등의 아름다운 화산도 있다.
산간고지
동부의 애팔래치아산맥과 서부의 로키산맥이 대표적인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고 서부 태평양 연안의 시에라네바다산맥과 캐스케이드산맥도 있다. 가장 높은 산은 알래스카에 있는 해발 6,194m의 데날리산(매킨리산)이다. 본래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이 산을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의 '데날리 산'으로 불렀는데, 1896년 공화당 대선 후보 윌리엄 매킨리가 자신의 이름을 따 매킨리산이라 불렀고, 1917년 이 이름이 공식화되었다. 이후 원래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지역 주민의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2015년 8월 데날리산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반면 육지의 가장 낮은 지점은 해발 -86m의 데스밸리이다.
강과 호수
길이 3768km의 미주리강, 3544km의 미시시피강, 3190km의 유콘강, 3058km의 리오그란데강, 3057km의 콜로라도강 등이 대표적인 강이다. 광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5대호의 대부분이 미국 영토에 속한다. 미시건호, 슈피리어호, 휴런호, 이리호, 온타리오호 등이 포함된다.
기후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기후 또한 지역마다 매우 다양하다. 서부 태평양 연안의 경우 지중해성 기후이며 시카고를 비롯한 중부 내륙 및 오대호 주변은 일교차와 연교차가 아주 큰 대륙성 기후고 플로리다를 비롯한 남동부 및 멕시코만 연안 지역은 아열대성 온난 습윤 기후며 플로리다 최남단 마이애미의 경우 사바나 기후고 애리조나 주도 피닉스와 같은 서부 내륙 지역은 사막 및 스텝기후와 같은 건조한 기후다. 참고로 뉴욕의 연평균 기온은 서울, 시카고의 연평균 기온은 평양, 로스앤젤레스의 연평균 기온은 시드니와 비슷하다.
또 경도 100도 선이 국토의 정중앙을 통과하는데 이 100도 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건조 기후, 동쪽은 습윤 기후가 뚜렷하게 갈린다. 그래서 농업 역시 서쪽은 건조 기후에 맞는 목축이나 봄밀 재배를 하고 동쪽은 습윤 기후에 맞는 농사를 짓는다. 인구 밀도 및 도시의 분포 역시 이 100도 선을 기준으로 뚜렷하게 갈린다.
중서부 지역의 네브래스카, 캔자스 등은 평균 기온은 한반도와 비슷하지만 한국보다 대륙성이 강하고 기단의 변화를 심하게 받아 추울 때는 더 춥고 더울 때는 더 덥다. 그래도 강수가 연중 고른 습윤 기후라 강수 패턴이 한국처럼 극단적이지 않다. 본토 최북단 노스다코타주와 미네소타주는 최한월 평균 기온이 북한 자강도 지역과 비슷하며 심할 때는 -40도 이하가 된다. 미 본토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지역의 동계 평균 기온은 개마고원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다. 서부가 동부나 중부보다 동일 위도, 동일 고도 대비 기온이 높다.
남부 텍사스 남쪽 지역은 1월에도 20도가 넘는다. 하와이주는 1년 내내 여름이다. 알래스카 주는 가장 추운 포르 유콘의 최한월 평균 기온이 -29도로 이는 유럽의 그 어떤 곳보다도 낮으며 아시아에서는 몽골의 올랑검, 중국 헤이룽장성의 북쪽 끝인 모허의 최한월 평균 기온인 -30.9도와 비슷하다.
알래스카는 해안 지역은 생각보다 춥지 않아 일부 지역은 온대기후다. 다만 자주 저기압이라 바람이 강하며 흐린 날이 좀 있다. 애리조나주나 뉴멕시코주의 사막 지역은 여름에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며 전 세계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다. 맑은 날이 정말 많다.
콜로라도는 미국에서 가장 평균 고도가 높고 여름에도 선선하다. 대신 겨울엔 춥다. 버지니아 주는 대략 한국의 남부 지방, 펜실베이니아 주는 한국의 중부 지방, 메인 주의 경우 북한 지역과 기온 분포가 비슷하다. 동남부 해안 지역은 한국의 여름 못지않게 습하며 기온은 한국보다 높아서 불쾌지수가 높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텍사스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이들 주는 여름이 4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국토가 넓어 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상 기후를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2019년 1월의 강추위는 플로리다와 텍사스, 캘리포니아 남부 지방을 제외하고 전 국토가 체감 온도 영하 40도 이하를 기록하고 때때로 미국의 한 사막 지방은 여름 최고 기온이 56.7도 까지 올라간다. 캘리포니아 주 데스밸리에서 1913년 7월에 기록한 섭씨 56.7도는 전 세계 공식 최고 기온이다.
시카고가 위치한 중서부는 기온 변화가 상당히 심하다. 기단 변화가 잘 일어나 강풍과 함께 한파가 닥친고 폭염이 온고 하는 일이 있다.
자연재해로 피해가 매번 이만저만이 아닌 나라다. 북동부 지역은 겨울마다 소위 '스노마겟돈'이라고 불리는 극심한 폭설과 혹한에 시달리며 뉴욕에 지하철이 깔린 것도 이것이 계기다. 오대호 주변을 포함한 중서부 지역 역시 추위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남동부 지역은 여름마다 허리케인을 두들겨 맞으며 특히 2004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뉴올리언스의 피해는 미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서부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늘 지진의 위협 속에서 산다. 중부 대평원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대기 불안정이 극심한 지리적 요건을 가져 이곳에서 발생하는 슈퍼셀은 아치구름이나 토네이도 등 다른 동네의 소나기나 폭풍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험성을 자랑하며 간혹 오래가는 것은 동부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기후가 좋으며 중국이나 러시아, 캐나다, 호주보다 국토 면적 대비 기후가 좋다.
그러나 2020년대 이후로 2021년 북아메리카 서부 폭염 등 급속도로 빠른 기후변화로 미국 북서부 지역의 온도가 무려 50도까지 오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제트기류가 약해져 뜨거운 고기압이 북반구 전체를 돔처럼 덮는 열돔 현상이다.
식생과 토양
미국 본토의 식생(植生)은 동부 삼림지대, 그레이트플레인스의 초원지대, 태평양 연안의 북부 삼림지대, 건조한 남부의 반사막·사막의 4개구로 대별된다. 동부의 삼림대는 다시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남부 해안평야의 난대성식생으로 플로리다반도 남부의 열대삼림과 북쪽의 상록침엽수림, 그리고 그 이북의 혼합림지대이다. 다른 하나는 뉴잉글랜드 남부에서 중앙평지 남부에 걸쳐 전개되는 낙엽활엽수림이다. 이들 두 지역은 현재 농업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목화, 옥수수, 담배, 밀 등을 재배하고 있다. 또 북쪽의 뉴잉글랜드 북부에서 오대호 주변에 이르면 점차 냉대림의 양상이 짙어져, 낙엽활엽수림 사이에 전나무 등의 상록침엽수가 섞여 혼합림을 이룬다. 낙엽수로는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거목이 뒤섞여 단풍철이면 산야가 곱게 물든다. 오대호에서 북쪽의 캐나다로 들어가면 활엽수는 침엽수로 바뀌고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의 저하로 토양은 산화되어 포졸(Podzol:灰色土)로 변한다.
따라서 농업은 부진하나 삼림은 비교적 많다. 미시시피강(江)의 서쪽에서는 강수량이 적어짐에 따라서 점차 떡갈나무와 같은 결이 단단한 나무가 많아지고 키가 큰 풀이 밀생한 임간초지(林間草地)가 눈에 띄게 된다. 이 초원이 이른바 프레리(Prairie:大草原)이며, 토양은 검고 비옥한 프레리토(土)로 농업에 가장 알맞은 토질을 이루나 농업 용수가 크게 문제된다. 서쪽의 그레이트플레인스에 이르면 건조도(乾燥度)가 높아져 반건조기후구가 된다. 이곳에서는 이 지역 특유의 키가 작은 단초(短草)초원과 관목지대가 펼쳐진다. 이들 단경초는 목초로서의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업적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토양은 체르노좀(흑토의 일종) 내지 밤색 토양이 탁월하여 농업에는 적당하나 프레리보다 더욱 수리의존도가 높다. 이와 같은 단초초원은 로키 산맥 기슭까지 연속된다. 코르디예라의 식생은 지형이 복잡한데다 기후차가 크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위 50˚에 가까운 지역의 평지에서는 상록침엽수림이 전개되고 워싱턴주, 오리건주(州), 몬태나주 등의 임산자원이 되어 있으나, 컬럼비아 고원상에는 수림이 적고 단초의 프레리가 전개되어 있다. 남부 로키의 산중턱, 콜로라도고원, 캘리포니아분지 등 침엽수림대의 하한(下限)에는 떡갈나무가 분포한다.
대분지와 와이오밍분지 이남의 산간고지와 분지에서는 건조기후를 이루기 때문에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상록침엽수 또는 활엽낙엽수도 볼 수 있으나 저지대로 내려갈수록 기온이 높아지고 건조도가 심해지기 때문에 관목이나 단초로 바뀐다. 캘리포니아주 남부, 애리조나주 남서부 사막이 펼쳐지는 건조대에서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선인장이 유일한 식생이 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중부의 지중해성기후 지역은 조엽수림 등이 자라며, 콜로라도로부터 관개용수를 끌어들여 캘리포니아 분지를 녹색의 비옥한 평야로 바꾸어 대규모 농업지역으로 개발하였다.
역사
식민지시대 이전(~1493)
북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16,000~20,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미국 뉴멕시코주 클로비스에서 발견된 유적을 통해 알려져 콜로비스(Clovis) 문화로 불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있으나,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현재의 알래스카를 거쳐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들은 처음에 동부에서도 많이 살고 있었으나 유럽인에게 쫓겨 일부는 남부와 북부로 흩어지고, 대부분은 중서부에서 남서부에 걸쳐 정주하게 되어 지금도 그 문화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남서부 지역이 낳은 문화를 아나사지(Anasazi) 문화라고 하며 여러 시기로 나누어진다. 가장 오랜 몇 개의 시기는 '바스켓 메이커'라고 일컫는 시기인데, 그 명칭의 유래는 이 시기에 바구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이것을 계승한 것이 푸에블로(Pueblo) 문화이다. 전자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동성의 수렵민이며 후자를 대표하는 푸에블로는 정주민이었다.
이 두 시대를 통하여 투창기·토기의 제작, 활의 사용, 옥수수의 재배, 초기 촌락 등이 점차로 확대되었다. 건축도 수혈식(竪穴式) 오두막에서 진흙과 긴 막대기로 지은 집인 어도비나 돌로 만든 커다란 집으로 진화하였다. 다음 시대를 고전기라고 하며 대략 11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커다란 암굴 밑을 이용하는 주거가 만들어졌으며, 개중에는 500개 이상의 주거가 하나의 암굴 밑에 늘어선 것도 있었고 무명천도 정교하게 짜여졌다. 이렇게 진보된 문화를 가졌던 푸에블로도 마침내 다른 유목민인 인디언(shoshoni 등)의 압박으로 차츰 퇴세를 거듭, 점거지역도 좁아져 1300년경에는 리오그란데 강과 리틀콜로라도 강 연변에 새로운 촌락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토기가 없어지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장식된 도자기가 많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16세기에 들어서자 에스파냐인이 침입하였으나 그들은 이 지역 고유의 문화를 소멸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지금도 옛 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어 인디언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식민지건설시대(1607~1776)
유럽인들이 최초로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서이지만 북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영국인들로 1607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북미 대륙을 탐험하고 개척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식민지 개척에는 실패하였다. 그 당시 영국은 현재의 버지니아 해안가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첫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일련의 영국 출신 청교도들이 현재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식민지가 개척되었고, 순차적으로 뉴욕과 뉴저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등 중부 지역의 식민지와 메릴랜드,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의 남부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는 지금의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강 서쪽을 식민지로 개척하였고, 플로리다는 스페인 사람들이 식민지를 세웠다.
초창기 동부해안을 따라서 건설한 13개의 식민지들은 각각 그 시기와 종교, 식민의 동기 등이 상이하여 단일한 공동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개신교를 믿고, 설탕, 커피, 면화, 담배 등의 농작물로 농장을 일구고,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서 노예화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쫒아내고 점점 서부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독립혁명과 미국의 건국
18세기에 들어서 식민지와 영국 본국 사이에 경제적인 문제가 불거졌다. 영국은 잇따른 전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무역독점을 강제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에 극심한 반발을 가져왔고, 급기야 1773년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구를 습격한 '보스턴 차 사건'이 터졌다.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독립의 열망을 불태웠다. 1774년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마침내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회의를 열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775년 4월 19일, 영국의 주둔 병사와 식민지 주민들이 조직한 민병대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벌어졌다. 독립전쟁의 포문을 연 '렉싱턴 콩코드 전투'를 통해 보스톤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퇴각했다. 그해 5월 10일,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제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조지 워싱턴을 전쟁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륙군을 창설했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잡은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본격적인 전쟁은 미국과 프랑스가 1778년 '동맹협약'(Treaty of Alliance)을 체결한 직후 벌어졌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전투에서 영국군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미국 대륙군과 영국은 1783년 9월 3일에 파리에서 '파리조약'으로 평화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최초의 헌법은 1787년 9얼17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회의에서 제정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는 조지 워싱턴이 선출되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인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었다. 독립혁명에 의하여 각지의 식민지는 주(州)가 되고 이들이 연합하여 합중국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현재 미국의 주는 한국의 시·도와 같은 행정상의 지역이 아니고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유하는 스테이트(state)이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는 모두 영국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 사상과 정치제도를 본뜨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은 여러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제(代議制)의 의회제도이다.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영국 성공회를 신봉하였으며 1619년 제임스타운에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의회를 만들어 자치(自治)를 시작하였고, 이와 동시에 미국 최초의 흑인매매도 행하여졌다. 즉 대의제 의회의 탄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와 흑인노예라는 비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가 병행하여 동시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 대의제 의회와 흑인노예 제도는 그 후에 건설된 각 식민지에서도 똑같이 채택되었으며, 식민지 거주인이 본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자치를 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국왕의 직접통치 하에 있었던 스페인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영토 확장과 서부 개척 시대
1783년 독립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스페인령의 플로리다반도 일대를 제외한 미시시피강 동쪽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수송은 미시시피강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1800년에 루이지애나의 주인이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바뀌면서 물류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서 루이지애나를 포함하는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일반적으로 "Louisiana Purchase"라고 부른다.
이 거래를 계기로 미국의 영토는 기존 영토의 거의 두 배가 되었다.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반도 일대를 매입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부개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845년에 지금의 텍사스주와 뉴멕시코주 지역을 합병하였고 이로 인하여 미국과 멕시코 간 전쟁이 벌어진다. 미국은 손쉽게 전쟁에서 이겼고 1848년 2월, 양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의 국경선은 리오그란데강으로 설정되었고 지금의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 콜로라도주, 네바다주, 유타주에 해당하는 서부 지역이 미국 영토가 됐다. 알래스카는 1867년 러시아로부터 매입하였고 하와이는 1900년 미국에 편입되었다.
미국 정부는 서부 개척을 장려하기 위해 1862년에 홈스테드법을 제정하였다. 미국에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은 21세 이상 성인은 누구나 160에이커(약 20만 평)의 농장 부지를 공짜로 받을 수 있었다. 5년간 의무적으로 경작을 하는 조건이었다. 때마침 184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일명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몰몬교도들의 유타주 이주, 오리건 트레일의 개발, 1869년 대륙횡단철도 개통 등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서부 개척이 본격화되었다.
남북전쟁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식민지 건설 당시부터 종교·경제 등 사회의 여러 면에서 성격을 달리 하고 있었다. 북부가 이민에 개방적이고 상공업 발전에 적극적이었다면 남부는 보수적이면서 대농장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특히 남부에서 면화 재배가 본격화되자 노예제도는 남부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반면, 북부의 여러 주에서는 노예제도가 이미 폐지되었던 것이다. 새로 미합중국에 편입된 주에 대해서도 북부는 노예주가 증가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남부에서는 오히려 노예주를 확장하려 하였다. 1820년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미주리주가 합중국의 주가 되려고 하였을 때, 노예제도는 첨예한 정치문제로 떠올랐다.
1860년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흑인 노예 해방을 공약으로 내세워 복부 자본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남부의 노예주들은 링컨의 정책에 반대하여 남부연합을 결성하여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미합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861년 4월 남북전쟁이라는 형태로 내전이 발생했다.
남북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북군은 해상 봉쇄 등으로 대항하였고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하면서 급속하게 지지를 확대하면서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남군의 세력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1865년 남부연합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종결되고 미합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종전 후에 링컨은 헌법을 개정하여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하였고, 수정헌법 제13조에 의한 노예해방(1865), 제14조에 의한 시민권보장(1867), 제15조에 의한 투표권부여(1870) 등으로, 비로소 모든 흑인노예도 법적으로는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었다.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어도 그들의 인권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보호받기까지는 그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재건과 좌절
남북전쟁 이후 북부 산업 부르주아지의 대변자인 공화당의 군사적 독재에 의한 정치상·사회상의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나 남부경제의 중심과제인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처리하려다가 남부의 농장주와 여기에 예속된 백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재건정책에 대한 반항은 주법(州法) 또는 지방조례로서 흑인을 사실상 차별하는가 하면 비합법적 비밀결사인 이른바 KKK단 등에 의한 흑인 살해, 협박 등 갖은 박해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북군의 남부철수와 전후하여 남부의 여러 주는 흑인의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두세, 교육·취직·임금 등 일상생활에서 흑인을 차별하기 위한 법의 제정이나 행정조치 등 합법적 수단은 물론, 비합법적인 차별수단을 차례로 고정화하였다. 남북전쟁 중 남부 출신 의원들이 워싱턴에서 떠났으므로 종래 남부에서 반대하던 여러 법안이 모두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중에는 산업자본주의를 조장·육성하는 국립은행법, 모릴관세법, 서부의 급속한 발전을 기대하는 자영농지법 등이 있었다.
남북전쟁 후 공화당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기간에 걸쳐 장악한 일은 그후 미국사회를 공업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도시는 발달하고 교통기관도 확장되었다. 그러나 패전 후의 재건에 고심하는 남부는 여전히 농업사회로 남게 되었고 대(大)플랜테이션은 분할되었다. 해방된 흑인은 자본의 결여, 기술의 결여, 낮은 교육 수준 등으로 자립하거나 기간산업의 임금노동자가 될 수 없어 태반은 영세소작인이 되었다. 남부에 공업이 발달하여 흑인들이 공업 노동자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제국주의 시대
1890년 이후 서부 개척시대가 정점을 지나면서 미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는 "국경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식이 일어났고, 1889년의 '전미회의(Pan-American Conference)'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진출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때마침 쿠바를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의 쿠바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을 구실로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의 영토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898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독립국이 됐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을 다시 식민지로 삼았고 이에 반발해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1902년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그 이후 카리브해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다. 중남미의 여러 지역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경제식민지(바나나 공화국)를 건설했다. 필리핀과 괌 이외에 쿠바를 보호국으로,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물류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필리핀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중국과 일본으로 관심을 확대하였으며, 특히 중국에 대하여 어느 국가도 독점적인 교역권을 가질 수 없도록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자본주의 발전
식민지 시대부터 미국의 경제는 외국의 투자와 자유무역에 기반하여 성장하였다. 1776년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로 상업선단을 보유하였으며 북대서양 연안의 거의 모든 유럽의 국가들과 통상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국 식료품과 면화, 담배 등에 대한 유럽인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과 1812년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무역관계는 중단 없이 지속되었고, 미국 서부지역으로의 확장 덕분에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서부경제의 성장에는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9년에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자 광부나 목축업자에 이어 많은 농민이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철도는 동부의 자본으로 건설되어 그 시장을 서부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농민은 차별적인 운임 등으로 손해를 보았다. 농민 공제조합인 그레인지(Grange)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에 의하여 각 주정부에 철도운임을 규제하는 주법을 제정하게 하였고, 이것은 마침내 1887년 주간통상법(州間通商法)으로 발전하여 연방정부가 민간기업에 처음으로 통제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노동자도 미국 노동총동맹을 조직하여 숙련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도모하였다. 1891년에는 농민에 의하여 인민당이라는 제3당이 결성되어 이듬해부터의 선거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내걸고 세 번이나 싸웠다. 그들이 주장한 철도·전신·전화의 공영, 비밀투표제의 채택, 누진소득세의 부과, 우편 저금 및 소포제도, 상원의원의 직접선거, 여성참정권 등은 20세기에 들어와 점차 실현되었다. 건국 초기에 농업이 중심이었던 미국사회는 공업의 발달과 함께 점차 변하여갔다.
국내자원의 개발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에 힘입어 석유업, 금융업, 철강업 등 다수의 산업이 국가경제의 중추적 부분으로 떠올랐다. 미국식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서 생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었고, 엑셀, J.P.모건, 앤드류 카네기, 존 D. 록펠러, 헨리 포드 등 잘 알려진 산업자본가들이 이 시기에 거대 기업을 일구어, 결과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890년에는 미국 공산품의 생산총액이 농산품 생산의 총액을 초과하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국의 산업 생산과 1인당 국민소득은 전 세계 1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들이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고 저 개발된 지역에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하였다.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절정에 달했는데, 이 기간에 2200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자 그때까지의 서·북유럽으로부터의 이민보다도 남·동유럽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민과는 달리 주로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민으로,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국에서 왔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 더구나 종교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므로 종래의 이민에 비하여 동화력이 없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때문에 1920년대에는 할당이민법의 재정을 보게 되었다. 테오도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부터 대통령 윌슨의 제1기말, 즉 1919년까지의 시기는 독점 반대의 사회개혁이 행하여진 시기였으며, 이것을 혁신주의시대라고 한다. 공공의 복지를 해롭게 하는 독점은 정부에 의하여 고발되고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해산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독점적인 지주회사를 금지하는 반(反)트러스트법이 제정되었다. 루스벨트는 노동쟁의도 정부가 직접 조정한다는 선례를 만들었으며, 또 상무부 노동성이 신설되었다. 또한 철도의 통제에 대하여도 주간통상법을 강화하는 여러 법률이 제정되어 국토자원의 보존이 행하여졌다. 태프트 시대에는 우편저금 및 소포제도가 만들어지고, 또 누진적 소득세를 규정하는 수정헌법 제16조 및 상원의원의 직접선거를 정한 제17조가 1913년에 제정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관세인하와 은행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미국은 당초 유럽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고립주의를 표방한 '먼로 독트린'을 고수하면서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국 선박들에 대한 독일의 무차별적인 잠수함 공격과 독일이 멕시코에 도움을 요청하는 비밀 전보, 이른바 '짐머만 전보(The Zimerman Telegram; 독일은 멕시코에 협력의 댓가로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1917년 4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은 1919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전후처리를 위해 모인 베르사이유 평화회의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 등 세계평화를 위한 일련의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국제연맹안은 이상주의적이어서 국제정치의 현실에 실현되기는 어려웠으며 국내의 반대가 강력하여 끝내 상원의 비준을 얻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대의 미국은 공화당의 시대로 바뀌어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 국내적으로는 또다시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갔다.
1920년대에 라디오, 자동차, 영화, 인견공업(人絹工業) 등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여 미국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 반면, 농업·석탄·면공업은 쇠퇴하였다. 공화당은 또다시 고관세 보호정책을 취하였으므로 국제무역은 침체되고 기업활동과 독점은 더욱 촉진되었다. 호경기는 1925년에 그 절정을 맞이하여 주식투자가 성행하고 과대투기가 유행하였다. 이것은 번영이라 하지만 균형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1929년 10월 뉴욕주식시장의 주가폭락을 계기로 대공황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즉시 유럽에 파급되어 세계공황으로 번졌다.
경제대공황과 뉴딜정책(1929~1939)
전쟁기간 동안 전쟁물자를 팔아 수익을 올렸던 기업들은 종전 후 수요가 줄어들면서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수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났다. 미국의 산업이 쇠퇴하고, 금융시장이 붕괴되면서 경제 대공황이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 당시 미국은 국민총생산이 이전의 3/4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률은 33%까지 치솟았고, 농작물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까지 겹쳐 발생했다. 국민들의 구매력은 떨어지고, 예금이 고갈되는 등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경제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경제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이른바 뉴딜정책을 시행하였다. 공공사업에 정부의 재정을 투입하여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정책이 그것의 핵심 내용이었지만, 그 밖에도 루스벨트 행정부는 반독점법을 제정하고, 노동조합의 설립을 보장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본주의가 가진 내재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순수자본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현실화했다. 이후에는 순수 자본주의보다 정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수정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
경제대공황 이후 미국은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서 1935년 중립법을 제정하고 다시금 고립주의를 표방하였다. 이 당시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정권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이 군사대국과 유럽 정복의 야심을 키우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은 참전을 반대하였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은 전격적으로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연합국의 편에서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결국 1945년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위상은 이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전쟁 중 미국은 연합국의 군수물자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고, 민간기업은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으로 전환되어 급속한 생산의 증가가 이루어지고 경제는 대규모로 팽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날 즈음, 미국은 1945년 50개 연합국 대표들을 샌프란시스코에 초청하여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국제정치, 경제에서의 주축을 담당하는 국제주의의 길로 나아가면서 세계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전쟁 중에는 아군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과 냉전의 시작으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은 서로의 세력을 확장하고 상대방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는데, 실제로 전면전에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냉전(The Cold War)'이라고 부른다. 냉전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1947년 미국이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소련의 침공 또는 개입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그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세력의 확대를 위해서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전후 복구를 위해 엄청난 재정지원을 쏟아 부었고, 나토를 창설하여 유럽의 안보까지도 책임지고자 하였다. 유럽 외의 여러 신생국들에게도 무기와 군사훈련 지원, 재정 지원 등의 형태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회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전 세계의 기본질서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목표에서 비롯되었다.
냉전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이 전면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1950~1953), 베트남전쟁(1960~1975),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양측의 무력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는 미국이 직접 개입을 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소련과 핵전쟁 직전까지 갔지만 가까스로 전쟁을 피하기도 했다. 양측 간의 군사적·정치적 긴장은 시기에 따라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했지만, 1989년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시작될 때까지 양측의 이념 대립은 계속되었다.
풍요의 시대와 미국사회의 진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0년대말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뉴딜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개혁 정책들을 재시도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위기가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경제적 성장이 지속되었다.
미국 내 메카시즘의 출현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냉전과 반공의 혼란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면서 행정부의 권한 축소와 주정부 활동의 장려를 통한 분권화와 기업가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친기업적인 공화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시하는 자유주의로의 방향전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아이젠하워 시기의 미국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소득의 재분배가 실현되고 사회복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이른바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임금노동자들의 수입이 상승함으로써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1960년대에 이르면 노동력의 절반이상이 전문직, 사무직,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은 항상 잠재된 사회적 불안 요소였다. 이로 인해 195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의 지위향상을 위한 민권운동은 여전히 상존하였던 인종차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커져갔다. 민권운동의 결과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대다수의 미국 남부의 주들은 이러한 흑백차별의 철폐에 반대하였다. 흑인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들의 저항운동은 비폭력의 원칙하에 평등과 정의를 부르짓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적 민권운동의 결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할 많은 관련법들이 만들어짐으로써 흑인들의 권리가 법적으로는 조금씩 신장되어갔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43세의 젊은 가톨릭교도인 케네디가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그동안 미국사회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하는 '뉴프론티어'를 제시하였으며, 빈곤의 타파와 흑인을 중심으로 하는 민권의 신장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남부의 백인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적이며 관습을 법으로 폐지할 수 없었다. 케네디는 대외정책에서도 미국적 국제질서를 강요하기보다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에 긍정적이었으며, 신생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함으로써 공산화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케네디는 뉴프런티어를 우주에까지 확장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움으로써 우주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던 소련을 조금씩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1961년에 쿠바침공계획을 세우다가 실패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1962년에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시도로 냉전시대 최대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기를 겪었다. 이 쿠바미사일 위기 사태는 미국이 튀르키예의 기지를 철수하고 소련은 쿠바의 기지를 철수한다는 협상이 성사되어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케네디가 암살로 갑자기 사망하였지만 그의 뒤를 이은 존슨은 케네디의 정책을 계승하여 빈곤의 퇴치, 사회보장제도, 교육진흥 등 '위대한 사회'라고 부르는 그의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하였다. 케네디에서 존슨에 이르는 민주당 정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은 미국사회의 평등과 자유를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였다. 그렇지만 1960년대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의식이 상승하면서 항의와 폭력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주요도시에서의 흑인의 폭동, 킹목사의 피살, 케네디의 암살 등과 같은 폭력적인 요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성세대와 기존체제에 대한 반항은 대학가의 중심 이슈였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개혁과 발전은 국제문제에 있어서 베트남전쟁(1960-1980)이라는 수렁에 빠져들면서 점점 약화되었으며, 미국의 서방세계 주도권도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다. 1965년 그동안 미국이 지원하던 남베트남정부가 패배하는 기미가 보이자, 미군은 지상군을 파견하면서 북베트남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더 깊이 개입하면서 징집거부나 납세거부 등을 통한 정치적 행동이 표면화되었고, 기존사회를 변혁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히피들로 대변되는 반문화운동이 대두되는 등 반전과 반항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에 대항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흑인 외에 인디언·히스패닉 등 미국 내에서 소외된 소수집단의 권익을 회복하려는 운동도 나타났다.
냉전의 해체와 미국 패권의 시대
1960~70년대가 진보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보수가 힘을 받던 시기였다. 베트남전쟁의 충격과 오일쇼크가 겹치면서 미국의 국력이 국내외에서 의심 받으면서 미국은 강력한 지도력과 보수주의의 물결이 강해졌고, 이런 경향은 강경한 보수주의자인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복지비 지출을 감축하고 국방비의 지출을 늘리는 등 보수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했던 강력한 군사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과의 데탕트 무드를 만들어냈다. 원래 미국과 소련은 1969년부터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 논의를 시작하고 데탕트 무드가 조성되었으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모처럼의 화해 분위기는 막을 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다. 결정적으로 1989년 11월 동독과 서독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이 잇달아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그들의 경제시스템으로 채택하였다. 또 권위주의 독재자들을 축출하면서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세력으로 편입되었고, 1991년 소련마저 해체되어 현재의 15개 국가로 분리되었다. 비록 러시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나, 그 위상은 이전 소련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이자 패권국가로 올라섰다.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에 대한 경계에 사용하던 막대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다 강력해진 군사적,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동지역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중동은 전략자원인 석유를 둘러싼 강대국의 이권 개입, 지역 내 패권에 대한 갈등, 동·서양 문화충돌로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와 석유 분쟁을 벌이던 중 이란-이라크 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항복시키고 쿠웨이트를 복구시키면서 아랍 지역에서의 석유자원에 대한 교두보를 지켰다. 1990~1991년의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핵무기 사찰에 응하지 않는 이라크를 1998년에 다국적군을 동원하여 집중적으로 공습하였다.
이러한 미국 주도 다국적군의 공습은 아랍의 회교권국가들로부터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왔고, 그 결과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해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뉴욕의 무역센터가 파괴되고 수천 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테러조직과 대량살상무기를 제공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2003년 세계평화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량살상무기 사찰에 응하지 않는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하여 영국, 호주 등 연합군과 함께 전면적인 전쟁을 개시하였다. 전쟁 발발 26일만에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미국은 2011년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 이후 약 20년에 걸쳐서 미국은 경제 호황기를 보냈고, 중동, 아프리카, 유럽의 발칸반도 등 세계 여러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여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91년 1차 걸프전쟁과 2003년의 이라크전쟁 등 필요하다면 군사적인 활동도 결코 마다하지 않으며 세계의 리더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의해서 자행된 9.11 테러, 2008년의 금융위기 등의 위기가 없지 않았으나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패권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로는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이른바 "중국몽"이라는 이름 하에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야심을 키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무역전쟁, 기술전쟁 등의 형태로 표면화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최근의 미국의 정치·사회적 분열은 이전 대통령과 구별되는 제45대 트럼프 대통령의 독특한 통치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출현 이후에 미국 사회의 분열 양상이 더욱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미 의회에 난입하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치적인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그 양상이 더욱 과격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2021년에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치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할 당시부터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가 존재한다는 점이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미국은 건국 당시 13개의 주가 모여 이룬 연방공화국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주공화국이자 연방제 국가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이상, 즉 '국민에 의한 지배'를 현실정치에 구현한 최초의 근대국가로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서 정부가 운영되는 대통령제를 세계 최초로 채택하였다. 미국이 연방제 국가라는 것은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국가를 운영하는 권한과 권력을 분담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방정부의 주요 기능은 국방, 외교, 대외무역 정책의 조정,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州) 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을 포함하고, 주정부의 주요 기능에는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공공안전,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교도행정, 개별 주 내부의 통상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 포함된다.
입법과 의회
미국 최초의 헌법은 1787년에 제정되었고, 1789년에 발효되었다. 그 이후 1992년까지 27번의 개정을 거쳐 현재의 헌법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헌법은 세계 최초의,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문헌법이다.
법률안 제출권을 갖는 의회는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과 하원은 대등한 권한은 갖고 있으며 법률안은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만 법률로서의 효력이 발생한다. 양원에서 통과된 법안은 대통령의 서명이 있어야 법률로서 성립되며, 대통령은 법률안 거부권 행사로 의회를 견제할 수 있지만 의회가 3분의 2 이상으로 재가결하였을 경우에는 다시 거부하지 못한다.
상원은 100명의 정원을 갖고 있으며 각 주에서 2명씩 선출하기 때문에 주를 대표하는 성격을 갖는다.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고 2년마다 1/3을 다시 선출한다. 상원은 2/3의 찬성으로 모든 조약을 비준하고 연방 고위 공무원 및 대사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을 승인하며, 2/3의 찬성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 상원의 의장은 부통령이 겸임한다. 하원은 435명의 정원이며 임기는 2년이고 각주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1명에서 53명(캘리포니아)까지 선출한다. 하원의 의장은 호선한다. 대부분의 주에서 양원 모두 소선거구제와 단순다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당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양당제가 정착되었다. 제3의 정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력이 매우 약해 오래 가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민주당(Democratic Party)이 양당체제를 이루고 있다.
미국의 보수와 진보는 이슈에 따른 국가 개입의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진보정당인 민주당은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자유를 추구하고, 보수정당인 공화당은 사회적 규제와 경제적 자유를 중시한다. 따라서 민주당은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지지하고, 총기 규제에 적극적이며, 보편적 의료보험을 지지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고자 하는 등 친서민 정책을 지향한다. 이와 반면 공화당은 생명권을 존중하여 여성의 임신중지권에 반대하며, 총기 규제에 소극적이고, 보편적 의료보험에 반대하며, 상대적으로 낮은 세금을 부과하여 친기업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민주당은 계층적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사회적 약자(minority) 등이, 지역적으로는 북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이 주요 지지층이고, 공화당은 계층적으로는 백인 기득권층을, 지역적으로는 남부와 중부지역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
행정부
행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으로 부통령과 함께 4년 임기로 선출되며, 대통령의 연임은 2회로 제한된다. 대통령은 의회에 법안을 발의할 수 있고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또한 대통령은 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15개 행정부서와 대통령 집무실(통상 백악관)을 통솔한다. 행정부서의 장은 대통령이 추천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아 임명한다.
미국에서 출생한 35세 이상의 미국 시민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데,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채택하고 있다. 각 정당은 선거 몇 달 전에 대통령 후보자를 선출하고,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는 4년마다 11월에 시행된다. 각주의 유권자들이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하면, 각 주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후보가 그 주의 전체 선거인 투표에서 승리하게 된다. 선거인은 12월에 각주의 주도에 모여 자기 당의 대통령 후보자에게 투표하고, 그 결과는 다음 해 1월 5일 개표되어 당선자가 정식으로 확인된다. 부통령은 상원 의장을 겸임하며, 대통령의 궐위 시에 대통령의 직위를 승계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궐위 시에는 하원 의장이 그 직위를 승계한다.
대표적인 행정부서는 국무부(Department of State), 재무부(Department of Finance),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 내무부(Department of the Interior), 농무부(Department of Agriculture),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 노동부(Department of Labor), 보건사회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주택도시개발부(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 운수부(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교육부(Department of Education), 제대군인부(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등이다.
행정
미국(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주
미국의 주(state, 州)는 미국의 최고 단계 행정구역으로, 총 50개가 있다. 미국의 국토는 본토의 48개 주와 따로 떨어져 있는 알래스카, 하와이,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를 포함한 기타 속령으로 구성하는데 50개의 주 가운데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하와이를 제외하고 북아메리카에 존재하는 49개 주를 일컬어 '미국 대륙(Continental United States)'이라 한다. 대륙 미국 내에서도 캐나다로 인해 단절되어 혼자 있는 알래스카를 제외한 서로 연결된 48개 주를 '미국 연속령(Contiguous United States)' 또는 의역해서 '미국 본토'라 한다.
MIMAL을 경계로 동부, 서부가 갈라진다. 주 경계를 따라가다 보면 미국 가운데에 마치 요리사 모자를 쓴 사람이 서부에 등을 대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주들이 미네소타(모자), 아이오와(얼굴), 미주리(몸통), 아칸소(다리), 루이지애나(장화)라서 이니셜을 따 MIMAL이라고 한다.
미국은 연방국가이기 때문에 각 주가 하나의 국가와 비슷하다. 쉽게 말해 여러 국가들을 통합해 각 나라별 자치권을 인정해주되 최상위 국가 기관인 연방 정부가 전반적인 일을 추진하는 꼴이다. 그래서 각 주마다 정책들이 조금씩 다르고, 미국의 프로 스포츠 리그들은 사실상 국가 대항전과 비슷하게 인식된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미국 본토 안에는 있지 않지만 미국 본토와 대등하게 취급되며 해당 지역과 미국 본토 48개 주 사이 여객기는 국내선으로 취급된다. 또한 이 2곳의 주에서도 본토 의회의원 및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다. 다만 이 두 주는 인구가 적어 선거인단 숫자는 본토에 비해 매우 적다(알래스카 3명, 하와이 4명).
현재는 푸에르토리코의 51번째 주 승격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2012년 푸에르토리코 주민투표 결과 찬성이 61%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주 승격은 미 연방 의회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일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2022년 현재 연방 의회는 허가는커녕 논의조차 할 생각이 없다. 주민 대부분이 히스패닉인 데다 영어도 사용하지 않고 스페인어를 쓰며, 공식적으론 영어도 쓸 수 있지만 써봤자 잘 알아듣지도 못한다. 더불어 인구 41%가 빈곤 소득선 밑에 있는 푸에르토리코가 주가 된다면 그것대로 연방에 짐덩어리가 될 것이 우려된다. 정치적으로는 히스패닉과 빈곤함이라는 특성이 겹쳐 민주당 텃밭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공화당과 보수 미국인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지역 정당들이 후보를 내지 않을 때 이야기. 하지만 2021년에는 상황이 조금 반전되는데, 푸에르토리코 주 승격에 우호적인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상원과 하원, 양원 전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푸에르토리코 주 승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푸에르토리코를 51번째 주로 승격한다면 현재 푸에르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부채 전액을 미국 연방정부가 대신 갚아줘야 하는데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미국이 큰 경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는 의견이 주류인 상황이다.
연결된 미국 내에서도 더 나누면 주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태평양 연안 남서부, 포틀랜드와 시애틀이 있는 태평양 연안 북서부, 콜로라도주와 와이오밍이 있는 중부 고산 지대, 텍사스부터 동쪽의 조지아까지 이어지는 남부(흔히 말하는 바이블벨트다)[44], 시카고와 미네소타가 있는 중서부(대평원), 그리고 뉴욕과 보스턴이 있는 대서양 연안 북동부가 있다. 각 지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서남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등이다. 건조한 기후다. 그중 캘리포니아는 건조하면서 온화한 날씨 덕에 날씨 쪽으로는 천국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도 남부, 북부, 그리고 벨리 지역으로 나눈다. 남부는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가 있는 1년 내내 화사한 곳이라면 북부 캘리포니아는 샌프란시스코가 중심이고 날씨가 조금 더 춥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 산업의 메카고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지역의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의 정보 산업의 중심지로 구글, 애플, 페이스북, 인텔 등의 본사가 위치한다. 또한 농업 생산량도 중부 인랜드 엠파이어를 중심으로 많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다.
- 북서부: 워싱턴주와 오리건주가 있다. 각각 시애틀과 포틀랜드가 대표적 도시. 이 지역의 두 주 모두 마리화나를 합법화했다. 그만큼 민주당 지지자가 많다. 시애틀 지역은 아마존닷컴, 마이크로소프트, 밸브 코퍼레이션이 본사를 두는 등 실리콘밸리 다음으로 정보 산업이 발달했다. 정치적으로 주로 민주당을 지지한다.
- 남부: 텍사스부터 시작해 조지아주까지 이어지는 바이블벨트를 주로 일컫는다.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하다. 흑인 및 히스패닉 비율은 어느 정도 많지만 대부분 큰 도시나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 있고 시골은 백인이 절대다수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에서 가장 낙후하고 많은 지역은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 많이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렴한 세금과 집값으로 미국 곳곳에서 이주하며 발전 가능성이 높다. BYC급의 시골이던 앨라배마주도 현재는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이어서 자동차 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했다. 물론 미국 특성상 GDP가 서민층의 실제 생활 수준보다 높아 실제 생활 수준은 예상보다 낮지만 주의 1인당 GDP가 독일과 비슷하다. 남부의 간판인 텍사스 주는 20세기 후반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하며 세계 8위권인 경제 규모를 가지고 중국에 뺨치는 5-6%급 연간 경제 성장률을 보인다. 당연히 미국 내에서는 가장 높은 축이며 삶의 질도 차 없으면 못 다닌다는 점 빼면 높고 날씨도 더운 곳 치고 쾌적하다. 미국 중서부에서 망해가는 제조업을 이어받았으며 많은 한국 기업의 공장이 있다. 정치적으로 주로 공화당을 지지하지만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등에서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해지는 추세이며 버지니아는 아예 민주당 텃밭으로 정치문화적으로 동북부와 묶여 취급받기도 한다.
- 로키스/중부: 콜로라도, 아이다호, 몬태나, 와이오밍, 유타와 뉴멕시코 같이 로키 산맥에 있는 주를 말한다. 큰 도시는 덴버, 솔트레이크 시티 정도 밖에 없는 한적한 곳이고 보수적이며 공화당을 주로 지지한다. 하지만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민주당 우세 지역이다.
- 중서부: 인디애나, 오하이오, 일리노이, 미네소타, 위스콘신, 미시간,아이오와를 가리킨다. 수많은 들소와 가지뿔영양과 같은 대형 포유류들이 살며 생물상이 풍부하다. 미국 제3의 도시 시카고가 있다. 동서부나 남부에 비해 백인 비율이 높다. 한때 미국 제조업의 중심이었으나 높아진 인건비에 제조업이 쇠락해 클리블랜드나 디트로이트 같은 제조업 중심의 중서부 도시가 쇠퇴했다.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민주당을 지지하지만[48] 몇몇 주는 러스트벨트로 점점 쇠퇴하는 제조업 때문에 인구가 남부 주들로 유출이 되고 슬럼화가 진행하며 점차 보수화되고 있다.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이 매우 춥다. 대륙성 기후를 띤다. 정치적으로는 경합세나 점점 공화당 지지율이 높다.
- 동북부: 뉴욕, 펜실베니아와 뉴잉글랜드를 가리킨다. 미국이 탄생한 유서 깊은 지역으로 현재는 민주당의 지지세가 강하며 미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민주당 성향이다.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이 꽤 춥다. 뉴욕시와 워싱턴 D.C. 그리고 보스턴 등 미국의 주요 도시가 몰렸다.
시차로 구분하자면 Pacific Time (PT, UTC-8h), Mountain Time (MT, UTC-7h), Central Time (CT, UTC-6h), Eastern Time (ET, UTC-5h)로 나눌 수 있다.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듯 PT에 해당하는 지역은 태평양과 인접한 서남부와 서북부 지역이며 MT는 로키스 지역, CT는 로키스 지역 동쪽의 중부 주들 및 일리노이, 위스컨신, 텍사스, 알라바마, 테네시와 켄터키 일부까지를 포함하며, ET는 그 동쪽 주들부터 대서양 연안주들까지를 포함한다.
또 국토의 균형 발전 면에서도 미국은 아름다운 밸런스를 자랑한다. 남부, 서부, 중/중서부, 동부가 각각 4분의 1(8천만 가량)의 인구를 가지며 4대 도시인 뉴욕(동부), 로스앤젤레스(서부), 시카고(중부), 휴스턴(남부) 역시 적당히 서로 떨어졌다.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뉴욕 대도시권도 미국 인구의 7% 정도만 거주해 인구 분산이 잘 됐으며[52], 50개 주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GDP가 프랑스/영국과 비슷하다.)에 미국 인구 8분의 1이 있다. 한국에 대입하면 뉴욕 광역권은 부산광역시와 인천광역시, 캘리포니아는 울산광역시 분리 전 경상남도의 지분을 가진다. 광역권이 아니라 도시 대 도시로 비교하면 뉴욕은 수원시, 로스앤젤레스는 포항시, 시카고는 원주시와 비슷한 수준의 지분이다. 만약 뉴욕 광역권이 서울특별시 정도의 지분을 가지려면 이탈리아와 비슷한 인구와 일본보다 큰 경제 규모 를 가져야 한다.
컬럼비아구(D.C.)
수도는 워싱턴 D.C.로서, 미국 역사상 3번째 수도이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뉴욕시에서 취임하였다가 곧바로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고,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새로운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한 이후 현재까지 그러하다. 일부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큰 도시인 뉴욕이 미국의 수도인 줄 알고 있으나, 뉴욕시는 심지어 뉴욕주의 주도도 아니다. 또한 동명의 이름을 가진 워싱턴 주가 있어서, 미국인한테 그냥 '워싱턴'으로 말한다면 워싱턴 주라고 알아듣는다.
사법
미국의 사법부는 헌법에 의해 특별히 설치된 유일한 법원인 연방대법원이 이끌고 있으며, 항소법원과 미국 전역의 도시에 산재한 연방지방법원은 의회에 의해 설치됐다. 미국의 사법제도는 다른 대부분의 연방제 국가들과 달리 사법제도가 연방과 주 체계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방법원과 주법원은 서로 다른 법적 영역과 관할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법원의 판결과정에서 연방헌법 규정에 대한 위반이 발생했을 때에는 연방법원이 주법원의 판결을 다룬다.
연방사법체계는 연방대법원을 주축으로 13개 항소법원, 95개 연방지방법원, 2개 특별법원(국제무역법원, 연방 청구 법원)으로 구성된다. 연방대법원은 1명의 연방 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으로 이루어지며,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법원에도 상소할 수 없다. 연방대법원은 외국의 고위인사들이 관련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주 전체가 사건에 연루될 때에만 제1심 관할권을 행사한다. 판결은 만장일치가 아니라 다수결에 의해 판결이 이루어지므로, 최소 6명(법적 정족수)의 판사들이 판결에 참여해야 한다.
항소법원은 순회지구 내 연방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거나 행정관리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항소한 사건을 심의한다. 연방 관할권을 지닌 제1심 법원인 연방지방법원은 연방사법체계의 심리법원으로 설립됐으며, 대부분 불법 우편물 이용, 연방 재산의 절도, 식품위생법이나 금융 및 위폐관계법 위반과 같은 연방법 위반 행위를 담당한다.
2개의 특별재판법원은 특정 유형의 사건에 대해 전국에 걸쳐 관할권을 행사하는데, 국제무역법원은 국제 무역이나 관세 문제와 관련된 사건을, 연방청구법원은 미국에 대한 금전적 손해배상 청구, 연방 협약과 관련된 분쟁, 연방 정부에 의한 사유재산의 불법적인 ‘취득’, 미합중국에 반하는 기타 다양한 청구들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국방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할 수 있다. 국방부는 워싱턴 D.C. 인근에 위치한 펜타곤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육군(Army), 해군(Naqvy), 공군(Air Force), 해병대(Marine Corps), 그리고 우주군(Space Force)을 총괄한다. 해안경비대(Coast Guard)는 평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관할하지만, 전시에는 해군으로 지휘권이 이관된다.
미국은 2019년 기준 6490억불의 군사비를 지출함으로써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36%를 차지하고 있다(세계1위). 이것은 국내총생산(GDP)의 4.6% 규모이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GDP 대비 세계 2위 규모이다. 미국은 또한 전 세계의 핵무기 중 40%를 보유하고 있어 러시아에 이은 2위에 올라 있다. 2019년 기준 미국은 1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시에 소집할 수 있는 예비군의 성격인 주 방위군의 병력은 230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또 국방부는 계약직을 제외하고 약 70만 명의 민간인을 고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징병제는 1973년에 폐지되고 모병제로 전환되었으나, 전시에는 징병국(Selective Military Service)에서 징병을 실시할 수도 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중국과 인도에 이은 세계 3위의 병력 규모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은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중동 전 세계에 군대를 배치하고 있다.
외교
미국 외교의 기본은 먼로주의라고 하는 비개입 고립주의(非介入孤立主義)로 자세로 중립주의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국내의 자본주의 체제가 정돈되고 국내 프런티어가 메우어지자 태평양을 향하여 적극적인 진출정책을 취하였으며,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결과 하와이, 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등을 병합하고 이어서 1921년에는 중국시장의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워싱턴조약을 체결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에는 먼로주의를 관철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말려들었으나, 개입의 배경에는 유럽에서 초대국(超大國)으로 성장한 독일의 세력이 미국의 번영을 크게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 당시 그 역할이 지대하였던 미국은 유럽의 피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대두 등 국제정세에 비추어 외교정책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의 참가,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 원조, 중국의 공산화, 더욱이 소련과의 냉전 격화 등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에서 '반격정책'을 목표로 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적극적인 체결 및 신흥 제국에 대한 원조로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소련 수상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한 미·소 간의 해빙(解氷)은 1962년의 쿠바미사일위기를 거쳐 1963년의 부분적 핵실험 정지조약의 체결을 성립하게 하였고 1970년부터 시작된 SALT(전략무기감축협정)에서는 우발 핵전쟁 방지협정이 1971년 9월에 체결되었다. 5월에는 대통령 닉슨이 소련을 방문함으로써 ABM망(網)의 제한 등 일련의 성과가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통령 레이건 때 다소 경화되었던 미·소 관계는 대통령 부시가 1989년 12월 몰타에서 소련 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적대관계에서 동반관계로 변화하였다. 양 거두는 베를린 장벽 개방과 동유럽의 혁명적 개혁을 지지하면서 비개입을 다짐, 냉전시대의 종식과 신(新)데탕트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와 새로운 협력관계를 추진해온 미국은 1993년 2단계 전략무기 감축 협정 합의, 대 러시아 경제지원 등으로 옐친정부의 민주화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의 종결 후 대 중국관계의 개선에 노력하던 중 1979년 1월부터 정상화되었던 미·중 관계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크게 진전되어 왔으나, 중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1989년의 톈안먼(天安門) 사건으로 급격히 냉각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평화와 동북아 지역 안정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고려하여 미국은 대 중국 최혜국 대우를 연장하였으며, 1993년 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경제지도자 회의에서 양국 관계 강화와 경제협력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대 중남미정책으로는 1989년 12월의 미군 파나마 침공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으며,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있다.
1979년에 조인된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조약, 1980년대의 이라크·이란 전쟁과 호메이니 사망 후의 대 중동 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나 1990년 이라크군의 전격적인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다국적군의 반격으로 시작된 걸프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국제적인 지위는 한층 견고해졌다. 그후 이라크, 리비아 등에 대한 강경한 외교노선을 펴는 한편 이스라엘과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의 화해를 주도함으로써 중동평화협상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으로 5,0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고, 미국은 그 주범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중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Usama Bin Laden)을 지목하고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무하마드 오마르(Mohammed Omar)가 이끄는 탈레반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우방인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미국의 침공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는 이슬람문화권과 미국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2011년 5월 미국은 마침내 파키스탄에서 은신 중인 빈 라덴을 찾아내어 사살했다.
2000년대 들어 가장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대 중국관계이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당시 중국을 우호적인 파트너로 대우하면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중국의 부상을 제어하려는 목적의 대 중국 견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요약하면, 미국은 양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세계 패권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 이전까지는 주로 고립주의 외교를 취하면서 국내문제에 치중하였으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하고 세계패권국으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과 경쟁하기 위하여 봉쇄정책을 추진하였고, 냉전이 끝나고 공산권이 몰락한 이후에는 세계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중국의 도전을 받고 있는데, 중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는 것이 미국 외교안보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각 정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고립주의와 국제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무력사용에 대한 선호, 다자주의에 대한 선호 등도 정권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었다.
각국과의 대외 관계
유럽 선진국들과 바로 위의 캐나다,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뉴질랜드 등의 같은 서양 국가들 및 동아시아의 부유한 선진국들인 일본, 한국, 중화민국(대만), 동남아 및 서남아시아의 지역강국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인도,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5개의 눈, 북대서양 조약 기구, 미일안전보장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등등 크고작은 조약들을 맺고 있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일대 국가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국민들이 반미 감정을 가진 경우가 많더라도 정부는 미국과 친한 나라는 수두룩하다.
한국 입장에서 미국은 공식적인 동맹국이기도 하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있으며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패권 국가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정권 들어서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고 이란과도 핵 협상을 하고 차라리 수니파 세력 말고 시아파 세력으로 중동 질서 유지하자는 흐름도 있어서 또 좀 변할 수가 있다. 러시아는 유로마이단으로 인해 미국이 유럽 연합과 연대하며 러시아와 매우 관계 안 좋은건 분명하고 중국과도 경제적으로는 꽤 밀접하지만 안 좋은 편이다.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는 차기 5대 위협으로 북한 핵, 대 러시아 관계, 대 중국 관계, 이슬람국가(IS), 사이버 전쟁을 뽑았다.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 외에 주요 경쟁국을 찾아보면 중국을 꼽을 수 있다. 중국은 21세기 미국의 경쟁국으로(미국 VS 중국 참고) 인구 수와 천연자원을 통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향후 미국의 지위와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또 다른 두 강대국인 일본과 러시아는 한때 미국의 패권에 도전을 했지만 현재로썬 두 나라 모두 기본적으로 미국보다 체급이 현저하게 작다.
미국은 전자, 기계, AI, 우주항공, 의학 등 각종 분야에서 초일류급의 기술력과 풍부한 지하자원, 자급자족이 가능한 식량을 모두 갖췄으며 세계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1인당 GDP를 지닌 나라다. 이런 미국을 질적으로 능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미국에 맞서려면 중국처럼 아예 압도적인 체급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는데 일본과 러시아는 인구가 미국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데다가 이미 인구가 감소하고 있거나 감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경제성장률이 미국보다 낮아 앞으로도 이들과 미국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예정이다. 결국 앞으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북한과 미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북한의 적국인 대한민국, 일본 등에 이어 대표적인 적국 관계이다. 미국에서도 북한을 적국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현재 북한과 미국은 미수교 상태이다. 따라서 상호 대사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란, 시리아처럼 사실상 적대관계다. 북한은 시리아, 예멘, 소말리아와 함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 입국금지 국가로 지정된 국가이다. 미국과 북한은 사실상 직접 연락 채널이 없고 뉴욕에 있는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를 통한 연락채널이 유일하다. 비록 유엔에 주재하는 대표부이지만 미국에 위치하는 유일한 북한 공관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미국-북한과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뉴욕 채널이라고도 한다.
미국 외에는 북미간 연락이 주로 한국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국은 북한과 직접적으로 마주해있는 나라이고 미국과 동맹국이기 때문에 중국, 러시아와 달리 도청 위험이 없으며 주한미군이 주둔해있고 주한미국대사관이 있어 북한과의 회담 결과를 미국 중앙정부에 신속히 보고할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주로 남북간 국경지대인 판문점을 통해 이루어지며, 2018년 북미 비핵화협상도 판문점에서 진행했다. 이를 가리켜 판문점 채널이라고도 한다.
또한 판문점에서 유엔군사령부 - 조선인민군 정전주체간 회담을 통해 북미간 군사회담 채널이 운용중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군이 아닌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간 연락통로이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군 사령관직을 겸직하고 상당수 인원이 미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군 - 북한군간 군사채널이라고도 할수 있다. 2018년 유해송환 협상때에 유엔사 회담 형식을 빌려 미군과 북한군간 유해송환에 관한 실무협의를 진행했다.
아직 양국간 교류는 외교적 회담 외에는 없으며 완전히 교류가 차단된 상태이다. 미국인 또한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북한 방문이 금지돼 있는 상태이다.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미국 시민의 북한 방문을 전면 금지했다. 미국 정부는 정부 허가없이 북한 입국시 처벌을 받게 됨을 경고했고 북한을 방문하려면 국무부의 허가가 필요하며 사망을 대비하여 미리 보험계약을 하고 유서를 작성해야 하며 가족과 상의해서 유산문제등을 미리 협의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미국-평양간 항공노선도 존재하지 않으며 양국간 이동시에는 중국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갈아타야 한다. 김영철 또한 미국에 특사로 파견될때 베이징 국제공항을 거쳐 환승하여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까지 이동했다.
2018년, 역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고 앞으로 수십년간 풀리지 못했던 북미 갈등이 해결되어 북미관계가 역사적인 대전환을 맞을지 주목되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이후 또 무기한 갈등 중이다.
도시와 지역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 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경제
- 2021년 10월 IMF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2021년 '예상' GDP는 약 26조 1,852억 달러다. 90년대 초 일본에게 위협받긴 했지만 2000년~2007년 전 세계에서 미국의 경제 규모(GDP)는 나머지 2~5위(일본, 중국, 독일, 인도) 국가를 다 합친 것보다 컸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브렉시트와 유로화 약세의 여파로 미국의 총생산량은 2016년 기점으로 EU를 제쳤다. 무서운 사실은 영국이 탈퇴한 EU와의 격차는 앞으로 점점 더 벌어질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당장 2021년 10월 예상치 기준, 미국의 GDP는 22조 9395억 달러고 EU의 GDP는 14조 5175억 달러다. 한 국가와 여러 국가의 연합체의 GDP 격차가 약 1.58배 정도 되는 것이다.[12] 또한 2021년 10월 기준, 미국의 GDP가 중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크다. 그리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G7 국가+대한민국의 GDP의 합계(=약 21조 3421억 달러)를 능가하며 여기다가 '호주'까지 더해야(=22조 9527억 달러) 미국을 겨우겨우 넘어선다.
- 그리고, 미국은 인구가 3억 3천인데도 계속 증가하는 반면 2022년 기준 일본,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한국은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서 어쩌면 2020년대 중후반에 미국의 GDP가 미국을 제외한 G7+한국+호주+스페인의 GDP보다도 많아질지도 모른다. 당장 IMF가 2021년 10월을 기준으로 예측한 수치에서는 2026년 미국의 GDP는 29조 1025억 달러고 앞서 말한 9개 국가(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한국, 호주, 스페인)의 GDP는 29조 391억 달러로 미국이 약 634억 달러 앞선다.
또한 영국의 싱크탱크 중 하나인 CEBR이 2021년 12월에 내놓은 예측치에 따르면, 2036년이면 미국의 GDP가 43조 2460억 달러인데, 이는 같은 시기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캐나다, 한국, 이탈리아, 호주, 스페인, '네덜란드' 10개 국가의 GDP 합인 42조 7860억 달러보다 4600억 달러 정도 더 많다. 해당 10개 국가에 '스위스' GDP까지 더해야 44조 2140억 달러로 미국보다 9680억 달러 정도 앞선다.
- 또한 미국은 2021년 기준으로도 전 세계 GDP의 약 25%, 즉, 4분의 1을 혼자서 점유하고 있는데, 이는 1960년 40%를 점유하던 시기나 2000년대 초반까지 25% 이상을 꾸준히 점유하던 때에 비하면 하락한 것이다.
- 외환 보유액은 2020년 기준 1,448억 9,000만 달러이다.
- 2021년 10월 기준, 1인당 GDP는 약 69,000달러다. 인구 1,000만 이상, 즉 도시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이외의 나라 중에서는 세계 1위의 국민소득을 자랑한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보다도 1인당 GDP가 높다. 어차피 달러가 기준이므로 PPP도 정확히 같다.
- 미국은 세계에서 부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미국인은 전 세계 인구의 4.1% 정도에 불과하지만, 전세계 백만장자 중 약 39.1% 미국인이다.
- 하나부터 열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자본주의화가 되어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인들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들을 보고 일을 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부지런함은 미국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IT 업계의 부흥 이전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현재의 애플, 구글 등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가장 극단화되어 있다. 피자가 이탈리아에서 나왔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건 거의 대부분이 미국식이며 사교육, 사립대학, 의료 민영, 연금 없음, 정치 후원액 등 출생부터 사망까지 자본주의화가 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선진국 대다수가 사용하는 경영, 산업 생산 방식도 전부 미국에서 나왔을 정도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상징인 나라이고 국민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도 높지만, 의외로 세금은 이것저것 많이 떼어가는 편이다.
- 미국에서 가장 GRDP 규모가 큰 주인 캘리포니아 주의 GRDP는 2022년 기준으로 무려 3조 6천억 달러로 3조 5천억 달러를 기록한 세계 경제 대국 5위인 인도보다 규모가 크다. 여기에 같은 시기 GRDP 2위인 텍사스 주의 GRDP만 합쳐도 일본까지 추월한 세계 제3의 경제 대국 수준까지 올라간다! 모국인 미국은 당연히 넘을 수 없으므로 제외하면 캘리포니아, 텍사스 단 2개 주의 경제 규모 총합보다 경제력이 더 큰 나라는 지구상에 중국밖에 없다. 다른 48개 주도 유럽의 웬만한 선진국이나 인구가 매우 많은 개발도상국 이상이다. 캘리포니아>영국/프랑스, 텍사스/뉴욕>대한민국/러시아. 하다 못해 미국에서 가장 GRDP가 작은 버몬트 주의 GRDP조차 예멘이나 도미니카 공화국 같은 어지간한 국가의 GRDP에 맞먹는다.
- 애플 시총 하나가 코스피 전체 시총보다 많다.
- 2021년 기준 미국 군 1년 예산(약 801조 원)이 대한민국 '전체' 1년 예산(약 558조 원)보다 많다. 1년 예산에는 국방 외에도 보건, 복지, 고용, 외교, 문화, 체육, 관광, 환경, 농림, 수산, 식품, 사회간접자본, R&D, 교육 등도 포함된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 없는 수치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면 앞서 언급했듯 2021년 단 한 해 동안 미군 국방비가 7405억 달러(한화 약 801조원)인데 반해, 한국군의 34년(1988년~2021년. 즉 노태우~문재인 정부.)간 국방비가 약 790조원 정도로 미군 국방비에 근소하게 밀린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부족하다고 느낀 것인지, 2023년이면 1년 예산이 922조원이 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천조'국이 정말로 되게 생긴 것이다.
- 비행기, 라디오, 축음기, 영사기, 전구, 전화기,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전자레인지, 진공관, 트랜지스터, 컴퓨터, 레이저, 복사기, MRI, 인터넷과 최근의 스마트폰, 인공지능, 드론, 자율주행 자동차 까지 20세기 및 21세기의 주요 발명품 중에 미국의 발명품이 아닌 것을 찾기 어렵다.
농림수산업
미국은 광대한 국토의 대부분이 온대기후에 속하는데다가 평지도 넓어 자연조건의 혜택을 받은 세계적인 농업지대를 이룬다. 그리고 남북전쟁 후의 공업화와 노동력 부족은 일찍부터 기계화농업을 발달시켰으며, 대규모의 합리적인 기업적 농업이 주가 되었다. 미국 경제 전체로 보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림·수산업의 비율은 불과 3%이며, 취업인구 비율에서도 4.3%에 불과하나, 그 생산규모는 세계 유수의 농업국임을 입증한다.
경작지·삼림지역의 면적은 약 2억ha로 세계 제1위, 목초지는 2.4억ha로 오스트레일리아·러시아연방에 이어 세계 제3위이다. 농산물 중 밀은 세계의 12.6%로 세계 제2위이고, 옥수수 46%(1위), 콩 66%(1위), 귀리 20%(2위), 담배 17%(2위), 목화 23%(1위), 포도 67%(1위), 귤 19%(1위), 파인애플 19%(1위), 사과 14%(1위) 등 세계 제1∼2위를 다투는 생산량을 올리고 있다. 축산에서도 우유·버터·육류·치즈·달걀의 생산량이 세계 1~2위를 다툰다. 임업은 태평양 연안 북부의 워싱턴주·오리건주 및 로키산맥 지역이 성하며, 용재 생산량은 세계 25%, 펄프 생산은 세계 37%를 차지하여 모두 세계 제1위이다. 조림사업에 의한 2차림은 극히 적고, 자연림의 벌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삼림의 보호관리에 노력하고 있다. 수산업은 북태평양·북대서양의 세계 4대 어장 중에서 2개의 연안어장을 가지고 있으나, 어획량은 270만t으로 세계의 4%(6위)에 그쳐 세계 최대의 수산물(가공품을 포함) 수입국이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식량의 완전자급이 가능한 몇 나라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수출능력도 높고 대형 농업기계나 비행기까지 사용하는 고도의 기술로 생산성도 높다. 또한, 밀이나 쌀은 가격안정 등 원활한 수급을 위해 경작제한 등 미국 정부는 생산 억제정책까지도 취하고 있다. 미국 농림업의 지역분포는 기업적 경영과 적지적작(適地適作)업이 특징이다. 중서부의 옥수수지대, 남부의 목화지대, 프레리의 밀지대, 그레이트플레인스의 기업적 방목과 건조·관개 농업, 캘리포니아의 과수농업, 로키산맥과 태평양 연안의 해안산맥 지대의 침엽수림, 멕시코만안의 원교농업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지하자원과 에너지자원
미국은 국토가 광대한 만큼 각종 지하자원 및 에너지 자원이 풍부하다. 미국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철광석 등 주요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의 매장량과 생산량은 세계적이며, 니켈 등 극히 일부분의 비철금속을 제외하고 모든 자원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2021년 기준 석유 생산량은 세계 1위이면서 석유 수입도 유럽연합과 중국에 이어 3위이다.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 오일셰일(oil shale) 혹은 샌드오일(sand oil: 석유를 포함하고 있는 흙이나 모래층)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등 석유 확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석탄은 애팔래치아 산지와 로키 산지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으며, 확인된 매장량이 세계 매장량의 17%로 러시아 다음으로 많으나 생산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애팔래치아산맥에 위치한 펜실베니아 탄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역청탄은 미국의 산업혁명기에 철강업 등 각종 산업에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공업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광석의 매장량도 풍부한데 주요 광산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천광산인 메사비 광산이 있다. 오대호의 수운을 이용하여 애팔래치아 산맥의 석탄과 결합되어 그 중간에 위치한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에서 세계 제1의 철강산업을 육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 조선, 기계 등 관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철금속으로는 구리가 세계 생산량의 22%를 차지하는 것을 비롯하여 납(15%, 1위), 바나듐(42%, 1위), 몰리브덴(64%, 1위), 아연(8%, 3위) 등을 생산하며, 경금속 마그네슘도 47%로 1위이다.
에너지 소비량은 그 나라의 경제나 물질문명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은 에너지자원의 소비량과 이에 의해 생산된 에너지 소비량도 단연 세계 1위이다. 전력 생산은 2020년 기준 화석연료 약 60%, 원자력 약 20%, 풍력 8.3%, 수력 7%, 태양열 3.2% 등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고 있다.
2004년 8월 발효된 부시 대통령의 에너지법안(Energy Bill)에도 자국의 에너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싼 석유 수입을 줄이고 향후 300년 사용이 가능한 석탄 매장량을 활용하기 위한 광산, 건설, 지역 실업문제 해소 등 관련 산업 구제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기 중 환경오염의 주범인 화력발전을 대체하기 위하여 최근 안전성 확보와 친환경을 기치를 내세우는 원자력, 생물체를 열분해시키거나 발효하여 얻는 바이오매스(Biomass)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 석탄을 가스로 바꿔 대기오염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인 IGCC(Integrated Gasification Combined Cycle) 등이 각광받고 있다.
원자력의 경우 2022년 현재 92기의 원전이 가동되어 원자력발전소의 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고 원자력에 의한 전력 생산도 세계적인 규모이다. 그러나 1979년 펜실베니아주 쓰리마일(Three Mile Islands) 원전 사고 이후 안전을 이유로 원자력 발전소를 거의 세우지 않고 그동안 출력 증강에 주력하였으나, 2005년부터 다시 원전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연료가 되는 우라늄도 세계의 53%를 생산하고 있다.
공업
미·영전쟁(1812∼1814)으로, 영국으로부터의 공업제품 수입이 단절된 것을 계기로 국내 공업이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북부의 산업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은 그후 공업 입국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거기에 풍부한 지하자원과 제1,2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국제적 우위성을 배경으로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공업생산량은 일본·독일·프랑스의 합계에 필적할 뿐만 아니라, 항공기·전자계산기·우주산업 등 기술적인 면에서도 최첨단을 걷고 있다. 공업은 국민총생산의 26%, 취업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이 나라 최대의 산업으로 세계에서 그 생산성이 가장 높다.
중화학비율은 51%로서 독일·영국보다 낮으나 일본보다 높다. 미국 공업 최대의 특징은 거대한 독점자본에 의한 과점(寡占)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업관계 기업의 매출액에 의한 세계적 랭킹 상위에 드는 기업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동차업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제너럴모터스(GM)·포드·크라이슬러, 전기업계의 상위를 차지하는 제너럴일렉트릭·IBM·웨스턴일렉트릭, 석유업계 1위인 엑슨, 철강업계 1위인 US스틸, 화학업계 1위인 뒤퐁, 항공여객기 업계 1위인 보잉사(社)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상위권 50사(社)가 전국 생산량의 65%, 취업자의 75%를 독점하고 있다. 철강 부문에서는 일본이, 자동차와 가정용 전기제품 부문에서는 일본·독일 등이 눈부신 진출을 보여 미국의 국제적 독점의 비중이 낮아지고는 있으나, 이들 제품 대신 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항공기·우주산업·컴퓨터 등을 대표적인 공업제품으로 생산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컴퓨터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들 공업은 정부의 국방지출에 의하여 지탱되는 군수산업이기도 하여, 이 군산복합체가 새로운 기술개발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 미국 공업은 원래 자원입지형으로 북동부에서 오대호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석탄과 철광자원에 의존한 공업지대를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1980년대 경제구조의 개편이후 새로운 지식·기술집약형 공업이 주류를 이루면서 텍사스주나, 애리조나주 등의 남서부, 또는 캘리포니아주나 워싱턴주와 같이 태평양 연안의 쾌적한 지역에 공업이 분산입지하여 새로운 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고부가가치산업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과거 자동차-조선-중화학공업으로 대표되던 공업화시대의 산업들은 대부분 쇠퇴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개편되었다. 이른바 첨단하이텍 산업과 4, 5차 산업의 핵심산업인 군사-우주-항공산업, 정보-전자-통신-컴퓨터 산업, 유통-금융-서비스 산업 등이 국가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선진화된 산업구조로 성공적으로 발전하였다. 소프트웨어, 반도체, 에너지, 건설, 유통, 무역, 금융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고부가가치 산업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으며, 전체적으로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군수산업이라는 점이 미국산업의 특징적인 측면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군수.산업 복합체는 다방면의 방위산업체들과 민간기업들이 연결되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엄청난 관련효과를 가져오는데, 하나의 우주선 발사와 관련하여서도 수천개의 산업체가 관련된다.
미국은 인터넷을 탄생시킨 종주국으로서 인터넷관련산업이 미국의 경제구조를 바꾸고 있다. 인터넷경제는 2000년에 이미 약 8,300억 달러정도의 엄청난 매출액을 만들었고,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는 기존의 시장구조를 바꾸고 있다. 또한 외식산업과 영화산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과 함께 미국문화의 전 세계로의 전파에서 첨병역할을 한다.
소득분배
세계 인구의 4.24% 밖에 안되는 미국이 전 세계 GDP의 30.2%를 차지한다는 통계는 세계에서 미국 경제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상위 10%의 인구가 전체 부의 72%를 차지하고, 하위 50%가 단지 2%의 부만을 차지할 만큼 빈부격차가 크다.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0.41(2016)로, 주요 선진국들 사이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다. 실업률은 3.89%(2018)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잘 반영되어 빈부격차가 크고, 공공건강보험 등 사회복지시스템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률도 12%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상당히 낮은 편이며, 해고와 고용이 쉬운 나라로 꼽힌다.
교통통신
광대한 국토로 인하여 철도·수운·자동차·항공기 등 각종 다양한 교통수단이 이용되여 국토이용의 효율성을 능동적으로 추진해 온 나라이다. 개척시대, 광활한 지역에 걸쳐 대규모 개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철도이며, 독립 후에는 영국·멕시코와 싸우면서도 볼티모어·오하이오철도(1830)를 개통시켰고, 남북전쟁 4년 후에는 최초의 대륙횡단철도(1869)가 개통되었다. 철도가 19세기를 통하여 미국의 산업자본 형성에 미친 영향은 컸으며, 세계 제1의 철도왕국을 이룩하였다. 1970년대 미국은 철도여객업무를 전담할 미국철도여객공사(AMTRAK)를 창설하여 전국 500여 개 정거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업철도 연장 33만 8000km는 세계 제1위이며, 현재 철도의 기능은 여객수송보다 화물수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연간 1조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고 있다.
화물수송에서는 내륙수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은 천혜(天惠)의 수로로서 미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오대호와 허드슨강을 연결하여 뉴욕의 발전을 촉진한 이리 운하와 대서양 항로의 외항선박이 직접 오대호에 드나들 수 있게 한 세인트로렌스수로 등은 많은 내륙운하 중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항행거리는 4만 1009km이다.
제철산업의 발전에 이어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산업이 발전하였는데 포드회사는 세계최초로 컨베이어시스템에 의해 자동차의 대량생산시대를 열었다. 자동차가 출현하자 정부는 자동차 산업의 육성을 적극적으로 꾀하는 한편, 교통정책을 철도에서 도로로 전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간선국도였던 US 하이웨이는 40만km의 포장도로이다. 전후에는 증가하는 교통량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주 새롭고 완전한 중앙분리대를 형성하여 평면교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편도가 최소 2차선인 도로 6만 8000km의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를 1956년에 착공하여 1975년 완공하였다. 이들 도로와 대형화된 고성능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도시가 교외로 확산되어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미국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세계 제1의 자동차 보급률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도시의 교통체증과 지나치게 자동차에 의존하는 생활, 그리고 자원낭비 등에 대한 반성이 싹트기 시작하여 도시의 대중 교통기관의 필요론이 대두되어 새로운 교통기관의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지상 교통의 발달뿐만 아니라 높은 국민소득에 의하여 항공교통도 2차대전전후 급속도로 성장되었다. 대도시는 서로 다투어 거대한 비행장을 건설하였으며, 지방의 소도시까지 항공로로 연결되어 있을 정도이다. 1960∼1970년 동안에 플로리다, 텍사스, 애리조나주(州) 등이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메갈로폴리스의 인구증가의 둔화가 눈에 띄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인구분산을 촉진한 원인의 하나로 항공교통의 보급을 들 수 있다. 미국의 민간항공은 1999년 현재 1만 4572개가 넘는 공항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어서 많은 승객과 화물을 운반하고 있다. 미국의 여객수는 전 유럽의 항공여객 총계의 3배 이상이나 된다.
미국의 통신제도 중 우편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것은 민영화되어 있다. 1876년 A.G.벨에 의해서 전화가 발명되고 1878년에 벨전화회사가 설립되었고 1885년에 미국 전화전신회사(ATT)가 되었으며, 그후 벨 시스템은 전국 전화대수의 80%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웨스턴일렉트릭을 비롯한 많은 기업을 산하에 두고 있다. 전신사업은 1851년에 설립된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에 의하여 거의 독점되고 있다. 컴퓨터를 최초로 생산하여 이를 상호연결하는 인터넷 시스템의 개발로 세계첨단의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무역
미국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신봉해온 나라이다. 가끔 정권의 성격이나 대공황과 같이 글로벌 경제 상황에 따라 보호무역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은 자유무역을 추구해 왔고, 이것이 미국의 경제성장에 큰 원동력이 되어 왔다.
2019년 기준 미국의 수출량은 약 2조5천억 달러를 상회하고 수입은 약 3조1천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이다. 주요 수출국은 캐나다(17%), 멕시코(16%), 중국(7%), 일본(5%) 등이고, 주요 수입국으로는 중국(18%), 멕시코(15%), 캐나다(13%), 일본(6%), 독일(5%) 등이 있다. 주요 수출 품목으로는 기계류(13%), 전기전자기기류(11.3%), 유류 및 석유화학류(9.0%), 항공우주 관련 제품(8.5%), 자동차 및 부품(8.4) 등이며, 수입 품목은 전기전자기기(15%), 기계류(14..6%), 자동차 및 부품(12.4%), 유류 및 석유화학(8.3%), 의약품(4.1%) 등이 대표적이다.
인문 사회 환경
이민정책과 사회통합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서 건설된 나라이다. 그만큼 초창기부터 이민을 장려해 왔다. 19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이민을 제한하는 연방법은 없었고, 각 주가 규제한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민의 증가와 함께 많은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많은 제한 입법이 마련되어 이민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이민집단의 구성은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크게 바뀐다. 1965년 수정이민법은 종래의 백인국가위주의 출신국별 할당제와 동양계 배제의 원칙을 폐기하고 국가별로 동일한 이민자수를 할당하였다. 이로 인해 중남미계, 동양계 등 다양한 소수집단이 등장하였고 인종구성은 기존의 흑백이원론적 구성을 탈피해 더욱 다양해졌다. 1960년대 이후에 형성된 동양계와 중남미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新)이민자 집단은 후기산업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저급노동력을 대체하였으며, 주로 소매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경제적·문화적으로 백인 주류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힘들었으며 흑인집단과 함께 새로운 하위집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흑인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향상된 지위를 바탕으로 이미 중산계층과 빈민으로 분리되었다.
2017년에 외국에서 태어난 미국 인구 중에서 약 45%에 해당하는 2천 7십만 명 정도가 귀화한 시민이고, 약 27%(약 1200만 명)가 합법적 영주권자, 23%(약 1000만 명)가 불법이민자로 집계되었다. 이민자들의 본국은 멕시코가 25%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중국(6%), 인도(6%), 필리핀(5%), 엘살바도르(3%)의 순이다. 2010년 이후 최근에는 아시아 이민자들이 가장 많아지면서, 이민을 제한 내지 억제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편 여성의 지위향상과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수인종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여성과 동성애자 등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미 1970년대에 여성인권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법적 조치들이 취해지고, 여성의 교육수준도 높아져 여성의 공직취임도 늘어났다. 한편 동성애자 문제는 사회적 통념과 개인의 자유 간에 대립되는 문제로 미국사회의 또다른 쟁점이 되고 있다. 추산되는 미국의 동성애자의 숫자는 1,500만 명으로, 이는 미국 내 아시안 인구 1,200만 명을 넘는 수치여서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다. 2003년 11월 메사추세츠주에서 처음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한 이후 2015년 6월 미국 전역에서 합법화되었다.
주민 구성
미국은 건국 초기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이민자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후에 노예해방과 함께 흑인 인구가 공식적으로 미국인으로 편입되어 소수 인종을 구성하였다. 초기 백인 이민자들 중에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았으며, 이후에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등 남유럽계나 동유럽계의 이주자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0% 이상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어 미국 인구에서 또 다른 하나의 소수인종을 구성하게 되었다. 최근에 두드러지는 인구 구성의 특징은 중남미 출신의 히스패닉/라티노 인구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들은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소수 인종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소수인종들은 미국 전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흑인들은 미국의 동남부에, 아시아계는 캘리포니아주와 같은 서부해안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히스패닉/라티노 인종은 플로리다, 조지아주와 같은 동남부와 텍사스, 뉴멕시코주, 애리조나주와 같은 서남부에 많이 거주한다.
2020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백인 57.8%, 히스패닉/라티노 18.7%, 흑인(아프리칸 아메리칸) 12.1%, 아시안 5.9%, 혼혈 4.1%, 아메리카 원주민 0.7%, 하와이/태평양 도서 원주민 0.2%, 기타 0.5%의 인종 구성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히스패닉/라티노의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다.
인구
2022년 5월 인구 3억 3,700만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다. 19세기 말부터 1991년 소련 붕괴 전까지 거의 100년 가까이 세계 4위 인구를 유지하였으나 인구 3위 소련의 해체로 순위가 올랐다. 흔히 인구를 국력이라고 하는데 미국은 선진국인데도 인구가 줄고 있는 한국, 일본, 대만, 서유럽과 달리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민자도 많고 저출산도 2000년대까지 없었고 2010년대 출산율이 하락했지만 유럽이나 동아시아 대다수 국가보다 크게 높다. 25년 동안 인구가 6천만 명이 늘었다. 90년대 인구 증가율이 1년에 1% 이상으로 그냥 증가가 아니고 폭발적인 수준이었고 2000년대 이후 히스패닉 이민 규제로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지만 꾸준히 증가한다. 1년에 대구광역시급의 대도시 인구를 하나씩 더한다. 그런데 영토는 인구수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 당장 미국보다 영토 크기가 조금 작은 중국의 인구가 14억이 넘고 미국의 1/3 정도인 인도도 14억 인구를 지탱한다는 걸 생각하면 인구 밀도는 매우 낮다. 자원도 넘쳐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도 문제가 없다. 인구가 지금 당장 2배, 아니 4배로 늘어도 먹여 살릴 자원이 있다. 미국 본토 기준으로 한국 수준으로 인구 밀도가 높다면 무려 40억 명 이상이다. 물론 2008년 이후 출산율이 떨어졌지만 그렇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미국 이민을 희망해 인구는 앞으로도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미국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 인구는 1938년 이후로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자연 증가를 기록했으나 2018년부터는 자연증가 인구가 81년 만에 처음으로 백만 명 미만으로 줄고 2020년대 들어 코로나19로 사망 인구까지 급증하며 2021년에는 자연 증가 인구가 불과 200,592명이다. 이민 증가까지 합치면 45만 명이 늘었으나 이것도 최저 수준이다. 201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이민 증가까지 합치면 매년 200만 명이 늘었었다.
인종의 구성은 서서히 바뀐다. 과거엔 미국 인종 주류가 단순히 백인과 흑인이었는데 현재는 히스패닉이 제3의 주류 세력이다. 1990년대까지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이민자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으며 급속히 유입된 히스패닉이 아이를 많이 낳았다. 그로 인해서 정치권에서 히스패닉의 눈치를 보는데 일부 정치권에서 히스패닉만 우대하는 정책을 내놓자 이에 반발하는 백인 유권자가 많다. 2000년 이후엔 히스패닉 이민을 규제한다.
유럽인이 오기 전 상당수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있었으나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수준였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진 못한다. 전염병과 학살 등으로 원주민이 급감하고 서유럽인과 캐나다계 미국인이 그 자리를 주로 채운다. 그 후 노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들어오고 19세기 중후반부터 남유럽, 동유럽, 아시아 등에서 이민한다. 21세기 들어서 히스패닉, 최근 들어서 아시아계의 유입이 크다.
이민의 경우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답게 선진국, 개발도상국, 최빈국 할 것 없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한국은 과거에 비해 많이 주춤해 공식 이민은 1990년을 마지막으로 끊겼으나 박사 등 고학력자를 위주로 이주를 계속 받는다.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 취득 후에 눌러앉다. 다만 요즘에 한국에서 이들을 좋은 직위로 불러 대학교수 등이 역이민을 택한다. 특히 미국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에게 취업을 오픈하는 IT업계는 종사자가 지금도 미국으로 많이 간다. 그리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후발 선진국도 미국 이민을 원한다.
후진국 내지 개발도상국 말할 것도 없다. 인도, 중국, 필리핀, 라틴아메리카, 중동에서 지금도 수많은 이민을 한다. 특히 같은 아메리카 대륙인 중남미 출신은 타 지역 출신을 압도하고 메이저 소수민족이 돼 사실상 미국 주류에 편입한다. 스페인어는 원래부터 루이지애나 및 텍사스 확보 후 이 지역에서 공용어였으나 현재는 대도시는 적어도 전부 다 제2언어화됐다. 뉴욕 지하철의 안내 방송도 미국식 영어 다음이 스페인어고 유튜브 광고도 스페인어 광고가 많다. 배너도 스페인어라 여기가 미국인지 남미인지 헷갈린다.
다만 미국은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인구의 15% 이상이 1세대 이민자로 이루어진 적 없다. 2022년 현재도 독일 등 유럽 국가에 비해 이민자 비율이 낮다. 생각보다 적은데 이는 이주해 들어온 사람이 몇 세대에 걸쳐 높은 출산율로 아이를 많이 낳아서다. 예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의 숫자는 400만 정도지만 오늘날엔 4천만을 넘는다. 세계인구를 감안할 때 미국은 높은 출산율에 이민 등의 이유로 인구가 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현 추세라면 2050년에 4억 명을 넘는다. 서구 선진국 중 인구가 느는 곳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호주 및 뉴질랜드 정돈데 다들 이민을 받아들이는 곳이다. 가톨릭을 믿는 히스패닉이 열심히 낳고 친족을 남미에서 미국으로 끌어들인다. 다만 미국은 유럽이나 동아시아에서 흔히 발견하는 인식 문제가 상류층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고졸까지 제대로 키워줬으면 당연히 성인이 돼 독립한다.
다만 미국도 취업난과 주택난이 심각해지면서 자식이 도덕적인 문제나 개인의 잘못, 가정 불화, 가정폭력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으면 가정에서 자녀를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독립시키는 일은 드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독립하는 문화는 2차대전 이후 도시 외곽의 개발을 해 값싼 집값에 매력을 느낀 미국인이 대도시를 떠나 이사하면서 생긴 거다. 집값이 많이 오르고 도심 거주 인구가 다시 늘어나는 21세기에는 현실적으로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언어
미국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앵글로색슨문화로 언어도 백인과 흑인 모두 영어로 통일되어 있으며 법률적으로 정한 바는 없다. 그러나 히스패닉계는 대다수가 에스파냐어(스페인어)를 사용하며 그밖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중세 유럽의 문예부흥기, 종교개혁 등을 경험하였으므로 자본주의 발흥기의 근로정신에 투철하며 독립심과 진보적 정신,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인 발전과 함께 언어는 발음이나 단어 등 본래의 영어와는 좀 달라진 것도 있어 ‘미국어’라고 할 때도 있다. 지역에 따라 방언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서부와 남부의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이다. 중남미지역의 이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에스파냐어 억양이 섞인 영어, 이탈리아인 거리와 차이나타운에서도 독특한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사용한다. 뉴욕지방의 영어는 일반적으로 말이 빠르다. 언어사용인구를 보면 2017년 기준 영어를 사용하는 비율은 78.2%이며, 스페인어 13.4%, 중국어 1.1%. 기타 7.3%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종교
유럽에서 이민 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종교는 사교(邪敎)라 하여 배격하였으나, 건국 후 헌법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인 만큼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으나,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인종이 다양한 만큼 종교도 많지만, 미국은 역시 기독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202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40%, 로마가톨릭 21%, 몰몬교 1%, 무교 29%, 유대교 1%, 이슬람교 1% 힌두교 1%, 불교 1%, 기타 3%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 인구가 대략 70%에 이를 정도로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교 공동체를 갖고 있기도 하다. 서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교와 힌두교 커뮤니티도 갖고 있으며, 이슬람교도의 숫자도 북미에서 가장 많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6,40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중국과 일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교육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 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
문화예술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옛 세계'에서 도입된 문화예술이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풍부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미국의 대중음악과 영화는 세계 각국의 문화에 빠르게 흡수, 발전되었다.
영화·공연
미국의 영화와 공연산업은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로 대표된다.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전세계에서 상영되며, 폭스,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등의 영화사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 들인다. 1929년에 처음 시작된 아카데미 시상식은 아직도 세계 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 여겨진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극과 뮤지컬도 전 세계인을 매혹한다.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존 웨인과 마릴린 먼로는 미국 영화 배우의 상징이며, 제작가/사업가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영화 캐릭터를 상품화 시킨 장본인이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음악
미국은 장르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종류의 대중음악이 소비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중음악 시장이다. 컨트리 블루스, 포크 록, 댄스, 랩, 재즈, 블루스 등 다양한 종류의 대중음악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 매주 순위를 매기는 빌보드 차트와 매년 시상하는 그래미 어워드는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리듬과 가사 스타일은 유럽의 전통 음악과 다르게 미국 음악의 많은 부분에 있어 깊게 영향을 끼쳤다. 블루스와 같이 포크의 한 요소로 은어로만 알려져있던 장르는 요즘에 옛날 음악의 일종으로 인식되면서 세계적인 인기 있는 장르로 변했다. 재즈는 20세기 초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과 같은 사람들이 도입해 발전시켰다. 컨트리 음악은 1920년대 발전되었고, 리듬 앤 블루스는 1940년대에 발전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는 1950년대 중반 락앤롤 장르를 대중화시켰다. 1960년대에는 밥 딜런은 포크 장르의 부흥과 함께 미국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펑크를 발전시켰다. 최근 미국 음악계는 힙합과 하우스 음악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같은 미국의 팝 스타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미술
뉴욕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과 시카고 미술관 등 그 외 지역의 미술관들은 세계적인 작품들을 다수 전시하여 연중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미술관들은 고전 작품 외에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e), 마스덴 하틀리(Marsden Hartley),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 stei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필립 존슨(Phillip Johnson), 프랭크 게리(Frank Gehry) 등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등 사진작가들의 작품도 자주 전시한다.
문학 철학 예술
역사를 통틀어 미국은 일단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코튼 매더와 조내선 에드워즈의 설교집에서부터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의 불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시대와 건국 초기시대가 미국 문학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문학은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등과 같은 작가들로 대변되었다. 20세기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 H. L. 멘켄, F. 스콧 피츠제럴드, 노먼 메일러, 솔 벨로, 존 업다이크 등의 작가들이 이름을 떨쳤다. 희곡 작가로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시인으로는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로버트 프로스트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흑인 문학으로는 랠프 엘리슨의 《투명 인간》 (Invisible Man, 1952년)이 20세기 미국 소설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보다 최근에는 여성운동이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토니 모리슨, 앤 타일러, 루이즈 에드리히 등의 작품이 애독되었으며 여성 소설의 급속한 팽창을 경험했다.
건축 분야의 경우, 스칸디나비아에서 전해진 통나무집은 신속하게 보급되어 숲이 우거진 프런티어 지역의 상징적인 주택이 되었다. 연방양식, 그리스 부흥 양식, 고딕 양식 등 보다 정교한 건축양식이 19세기에 도시와 시골의 건축물에 이용되었다.
도시들이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로 접어들면서 마천루가 등장해 미국 사회의 기술적 업적과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윌리엄 러 배런 제니와 루이스 설리번은 시카고 출신의 건축가로, 그러한 건축양식의 선구자들이다. 설리번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9~1959)는 프레리 학파(Prairie School)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설계운동을 시작해 20세기초에 미국 전역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주요 미국건축가로는 독일 태생의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르 로어, 그의 제자들인 필립 존슨, 로버트 벤투리 등이 있다. 1825~1870년에 유행했으며 황야 그 자체를 소재로 삼았던 허드슨 강파(Hudson River School)는 미국 미술에서 일어난 최초의 토착화 운동으로 여겨진다. 아셔 B. 듀랜드가 그 대표적인 화가다. 도시생활은 에드워드 호퍼 같은 사실주의파나 스튜어트 데이비스 같은 추상파 화가를 막론하고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20세기 중엽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로 알려진 미국의 회화양식이 결과적으로 서양미술을 압도하게 되었다. 중심인물은 잭슨 폴럭과 로버트 머더웰 등이었다. 추상표현주의의 위세도 1960년대에 또다른 미국적 양식인 팝 아트(Pop Art)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앤디 워홀과 로버트 라우셴버그 등의 팝 아티스트들은 대중문화와 상업에서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했다.
종종 조각의 발전은 회화의 발전과 병행되는 경우가 있는데, 루이즈 니벌슨과 마크 디 주베로의 추상화와 클래스 올덴버그의 팝 아트 조각이 바로 그 예다. 다양한 양식과 경향과는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미국 예술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다. 고립상태에서 제작된 그들의 작품들은 국가적 경험에서 발견된 본질적인 것을 표현한다. 19세기의 윈즐로 호머와 20세기의 조지아 오키페 등의 화가들이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미국인은 과소비성 소비행태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소비 행동이 절약적으로, 소량 구매, 쿠폰의 생활화가 되어 있다. 창고 세일, 일회용 상품, 패스트 푸드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소비 생활의 흐름은 전문 유통 업체가 증가하고, 쇼핑몰이 대형화되고, 소비자의 안목이 고급화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많은 나라이고 전체적인 국민 소득 수준이 높은 관계에다 자유롭고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 등의 이유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나라며, 각종 자원들을 엄청난 양으로 소비하는 나라다. 일부 특권층의 과소비가 악명 높으며, 중산층 역시 소비생활을 즐기는 문화 속에 살며,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스포츠
20세기 후반 경제적인 여유와 여가시간 및 여가활동에 대한 수요 증가는 미국사회에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위락산업을 발달시켰다. 스포츠의 특색은 순수한 기업으로서 이루어지는 프로스포츠, 학교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적인 의의를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 그리고 개인적인 오락으로 행해지는 레크리에이션 스포츠의 유기적인 융합이라 하겠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생활 속에서 체육을 즐길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으로 즐긴다. 올림픽과 같은 국가 대항 국제경기에서도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프로 스포츠도 활성화되어 있다. 주로 TV를 통해서 프로 스포츠와 대학 스포츠를 즐긴다.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NFL), 농구(NBA), 야구(MLB), 아이스하키(NHL) 등이다. 이외에 테니스와 골프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화려한 스포츠 행사들로는 프로 야구의 월드시리즈, 대학 미식축구의 각종 볼(로즈볼), 프로 미식축구의 슈퍼볼, 미국 프로 농구협회(NBA)의 플레이오프전, 프로 아이스하키의 스탠리컵 대회, 미국 오픈 테니스 선수권 대회, 미국 프로골프인 협회 선수권 대회 등이 있다.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경주, 켄터키 더비,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벨몬트 스테이크스, 서러브레드 경마, 프로 복싱 선수권대회(WBA(세계복싱협회), WBC(세계복싱평의회), IBF(국제복싱연맹), 미국복싱협회(NBA: National Boxing Association))가 주도하는 대회 등도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 하키, 골프, 테니스, 아이스하키 등이며 가라테를 포함하는 마셜아츠(종합격투기와 무예 등), 레슬링, 모토스포츠 등도 대중적이다.
매스커뮤니케이션
미국은 ‘자유’의 나라답게 언론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고 그만큼 다양한 언론들이 활동하고 있다. 언론은 크게 방송, 신문, 인터넷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방송은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으로 나눌 수 있다. American Broadcasting Company(ABC), Microsoft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MSNBC), Columbia Broadcasting System(CBS), Cable News Network (CNN) 그리고 FOX Broadcasting Company(FOX)가 있다. 네 개의 메이저 방송사들은 모두 민영방송이다. 이밖에 뉴스, 영화, 취미,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수 백 개의 민간 케이블 채널이 운영되고 있다. 2021년 기준 12세 이상 인구의 83%가 라디오를 청취하고 41%가 팟캐스트를 듣는다. 공영방송은 1967년 공영방송법(Public Broadcasting Act)에 의하여 설립된 NPR(National Public Radio)과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가 담당하고 있다.
신문은 각 주 혹은 지역마다 대표적인 신문들이 있으나,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신문은 New York Times, Wall Street Journal, Washington Post, USA Today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성향으로 분류하면 New York Times는 진보, Wall Street Journal은 보수 Washington Post와 USA Today는 중도에 가깝다. 거의 대부분의 신문들이 민간 소유이다.
기념일과 명절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와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을 가장 중요한 명절로 기념한다. 이때는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데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다음해 1월 1일까지 휴가를 즐기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 기간에는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추수감사절의 경우는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목요일 추수감사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있다. 금요일에는 많은 상점들에서 이른바 '블랙프라이데이'라는 1년 중 가장 큰 할인행사를 연다.
명절을 제외한 기념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7월 4일의 독립기념일이다. 이날 밤에는 미국 전역에서 거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그 외 공휴일로 지정된 기념일은 New Year Day(1월 1일), MLK Day(마틴 루터 킹 탄생일, 1월 셋째 월요일), 현충일(5월 마지막 월요일), 노동절(9월 첫째 월요일) 등이다. 일부 주에서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는 프레지던트 데이(2월 셋째 월요일)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콜럼버스 데이(10월 둘째 월요일)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요리
주류 미국 요리는 다른 서양 나라들과 유사하다. 밀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곡물이다. 북미 원주민과 초기 유럽 이주민들은 전통적인 미국 요리에 칠면조, 사슴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메이플 시럽(캐나다의 메이플 시럽을 체출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시럽)과 같은 원산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리하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바베큐, 크래브 케이크, 초콜릿 칩 쿠키는 독특한 미국 요리들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솔 푸드는 남부를 중심으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루이지애나 크리올요리, 케이준 요리, 텍스 멕스와 같은 싱크리티즘 요리는 지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애플파이, 프라이드치킨, 피자, 햄버거, 핫도그와 같은 미국 특유의 음식은 다양한 이민자들의 레시피가 섞이면서 생겨났다. 프랑스식 감자튀김, 부리토(Burrito)와 멕시코식 타코(Taco)와 같은 멕시코 요리, 이탈리아에서 전해지면서 미국식으로 변형된 파스타 요리는 널리 퍼져있다. 미국인들은 보통 차보다 커피를 좋아한다. 미국의 기업들에 의한 마케팅은 아침 식사와 함께 오렌지 주스 또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흔한 모습이 되는데 큰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시장은 세계에서 제일 큰데, 1930년대 드라이브 스루 형식을 만들어냈다. 패스트푸드의 소비는 건강에 대한 우려를 촉발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열량 섭취량은 24%가 증가했고,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자주 식사하는 것에 관련해 미국 공중 위생 관리는 "비만 유행성"이라고 부른다. 높은 당이 들은 청량음료는 널리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러한 설탕이 첨가된 음료는 미국인들의 칼로리 섭취량 9%를 차지하고 있다.
총기 소지
미국만의 가장 개성적인 점을 꼽자면, 많은 이들이 총기 문화를 꼽을 것이다.
미국은 전 인민의 무장화에 성공한 국가란 농담이 있을 정도로 선진국 중 인구 대비 총기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다. 기껏 해봐야 산탄총 또는 볼트액션 소총 따위의 수렵용 총 보유가 허가되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핀란드 등과 달리 이쪽은 권총이나 돌격소총 등 군이나 경찰이 쓸 법한 게 민간인 손에 쥐어져 있다. 그러니 총기가 동원된 강력 사건도 비교가 안 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일반인 총기 소유량 1위 국가로 물론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의 전쟁, 내전으로 얼룩진 지역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풀린 민간 총기들의 경우도 있으니 미국이 실제로도 세계에서 가장 많을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안정된 선진 사회를 유지하며 합법적으로 총기가 유통되는 국가 중에서는 부동의 1위를 자랑한다. 미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총 말고도 미등록 총기가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뉴스도 선거철마다 나온다.
총기 관련 규제 법규는 미국 정치권의 만년 떡밥인데, 매번 전미총기협회의 로비로 무산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처럼 총기를 완벽하게 규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드넓은 영토에 비해 턱도 없는 경찰력 때문인데 미국처럼 넓은 영토를 전부 다 커버할 수 있는 경찰력이 없기 때문이다. 낙후된 어느 시골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해서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이 도착하는데 1시간 이상이 걸리는 곳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낙후된 시골 마을에 사는 미국 주민들은 총기규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경찰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총기규제에 찬성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인들의 사망 원인 2위가 총기라고도 한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나 알 샤바브 등 외국 테러조직의 위협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한 사망자보다 국내 총기 사고나 총기 강력범죄 등으로 죽는 사망자가 훨씬 많다. 하루 평균 40명, 2016년만 해도 9월까지 벌써 1만 명이 총기로 죽었다고 한다. 시카고 2016년 총기 사망자가 7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총기로 암살당한 미국 대통령만 해도 4명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A. 가필드, 윌리엄 매킨리, 존 F. 케네디. 이 밖에도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등이 총격을 당했고 해리 S. 트루먼, 제럴드 포드는 총격을 당할 뻔했다.
다만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이라고 해서 마냥 총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완전자동화기까지도 큰 어려움 없이 소지가 가능한 소수 주가 있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뉴욕 주의 경우는 주민들이 장난감 너프 건이나 물총이 규제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총기를 빡빡히 규제하고 있다. 그런 주에서는 총기를 합법적으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간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총기를 합법적으로 구매했다고 해도, 이를 공공장소에서 휴대하기 위해서는 또 별도의 면허증을 따야 한다. 공공장소 내 총기 휴대도 공개 휴대(Open carry)와 은닉 휴대(Concealed carry)로 나누어진다. 또한 극소수의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자동소총을 비롯한 자동화기와 폭탄류의 구매 및 소지는 철저하게 규제하기 때문에, 미국의 민수시장에 풀려 있는 대부분의 소총들은 자동화기들의 반자동 버전뿐이다. 비합법적인 경로로는 그냥 음지에서 자동화기를 구매하거나 반자동화기를 자동으로 개조하거나 사제 폭발물을 제조하는 것 등이 있지만, 수사 기관에 걸리면 골로 간다.
미국에서는 의외로 권총이나 단축형 총기 같은 물건을 더 까다롭게 규제하는데, 이유는 당연 작은 총들이 은닉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장총은 크기가 커 숨겨서 들고다니다 사고치는 게 어렵고, 눈에 잘 띄므로 이를 범죄에 사용하는 건 작정하고 잃을 게 없거나 미친놈들밖엔 없다. 실제로 미국의 소규모 총기 범죄의 대부분이 권총을 통해 발생한다. 다만 언급했듯 대규모 총기 난사로 넘어가면 대다수 범인은 고화력의 큰 총들을 휘두른다.
물론 이렇다고 해도 총기가 워낙 만연한, 자기 방어용으로 집에 하나씩은 좋으나 싫으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이기 때문에, 현지 미국인이나 시민권이 있는 이민자와 친해져서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갈 경우, 총 한번 보여달라 하면 실제로 총 구경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한국을 잘 모르는 현지인의 경우 "이게 뭐라고 보여달라 하지?" 식의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을 정도. 또, 총기 규제가 조금 널널한 지역의 경우, 총기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꼭 몇 명은 있다. 이런 집에 기회가 돼 놀러 가면 무기 전용 금고가 따로 있고 권총, 소총, 산탄총, 저격소총이 종류별로 수두룩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장관도 볼 수 있다.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보여주려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관심 가져주면 신이 나서 총기 스펙을 열심히 설명해 줄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집이 어지간히 잘사는 경우나 목축업 등을 해서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사유지까지 있을 경우, 실제로 총 쏘는 걸 눈앞에서 보여줄 수도 있다.
거기에다가, 길에서 걷는 사람들 중에 Concealed Carry, 즉 총기 은닉 휴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의외로 상당히 많다. 합법으로 허가받고 하던, 안 잡히면 된다는 마인드로 불법으로 하던 자기 안주머니에 작은 권총 하나씩 품고 다니는 사람이 의외로 꽤 있다는 소리다. 가끔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무장 강도가 깽판치는 상황에 웬 아저씨가 갑자기 총 꺼내들고 범인을 제압하여 영웅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이런 경우이다.
연국 및 과학기술
-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 수상자가 무려 377명이다. 1943년부터 끊임없이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 수상자만 놓고 봐도 세계 3위인 독일보다 많으며, 여기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 컬럼비아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를 포함하면 각각 세계 1, 4, 5위를 차지한다.
- 에너지부 산하 17개의 국립 연구소가 운영된다. 상당수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여하였으며 주기율표 상의 많은 원소들을 발견하여 미국의 지명이나 인물명을 원소명으로 박아넣었다. 각 연구기관마다 세계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인우주선을 독자적으로 보내고, 우주정거장에 도킹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국가이다.
- 보이저 등 태양계 밖으로 탐사선을 보낸 유일한 국가이다.
- 비행기를 최초로 발명한 나라인 만큼 항공 우주 분야에선 단연 세계 수석이며 항공기 제조에는 아직까지도 미국이 강세이다. 특히 록히드 마틴에서 개발한 F-22는 단연 최강의 전투기로 유명하며 현재까지도 이 전투기에 대적할 만한 기체가 전무하다. 세계 군용기 시장도 미국이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으며 민항기 분야도 유럽의 에어버스와 함께 쌍두마차를 달린다. 보잉에서 개발한 전설의 여객기 보잉747은 하늘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며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 초대형 여객기로 유명하다. 제1세계와 구 공산권, 제3세계 국가들도 미국제 군용기를 많이 애용한다.
- 컴퓨터 분야에서는 미국 기업들을 빼놓을 수 가 없다. 세계 최초의 전자 계산기인 ABC(어태너소프-베리 컴퓨터)와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도 알려진 에니악이 각각 미국의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현대 컴퓨터의 핵심 부품들은 대부분 미국 기업에서 만들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컴퓨터 CPU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인텔과 AMD는 모두 미국 기업이며, 그래픽 카드 시장을 점령한 엔비디아도 미국 기업이다. 하드디스크의 시게이트와 웨스턴디지털도 마찬가지이며, SSD 분야에서는 삼성과 하이닉스의 뒤를 이어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있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 세계 컴퓨터의 절대다수가 윈도우, macOS를 사용하는데 모두 미국에서 나온 것이다.
- 휴대폰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삼성이 갤럭시 시리즈로 세계 시장에서 선전 중이지만, 그 안에 있는 소프트웨어인 안드로이드는 미국 기업인 구글에게서 라이선스를 사서 사용 중이며, 아이폰 하나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애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안드로이드 휴대폰의 CPU를 제작하는 퀄컴도 미국 기업. 이렇듯 휴대폰의 핵심 부품과 소프트웨어들은 다수가 미국 기업에서 만들어졌다.
- 생명공학 분야도 세계 수석이다. 중합효소 연쇄반응을 고안한 생명공학자가 미국인이며, 1-3세대의 유전체 편집또한 미국인이 단독 발명했거나, 공동 발명에 미국인이 있다. 제약 생산마저도 세계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 252개꼴의 제약중 112개가 미국에서 만들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그 유명한 화이자, 모더나의 본사도 미국에 있다.
대한관계
미국과 조선의 관계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34년(순조 34) 아시아지역에 파견되었던 미국의 로버츠 특사가 '조선과도 교역할 가능성이 있다'고 귀국보고를 하면서부터이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1845년(헌종 11) Z.프래트 의원이 '조선에 대한 통상사절파견안'을 제기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후 몇 차례의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은 후 한·미 양국이 공적으로 접촉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신미양요(辛未洋擾)'라는 불행한 사건이다. 1874년(고종 11) 대원군이 실각되고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자, 1880년 미국은 일본을 중재국으로 하여 슈펠트 제독(提督)이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이 ‘중재외교’도 조선측의 거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어온 양국의 수교문제가 난항을 거듭할 무렵, 일본에 주재하던 청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의 외교진로에 관해 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 입수되어 이것이 어전회의에 상정된 뒤부터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양국관계가 호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정부는 종전까지 영국이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해적국가이거나 오랑캐 나라로 생각하였던 미국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1882년(고종 19) 전문(全文) 14관(款)으로 이루어진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3년 5월에는 초대 미국전권공사 H.푸드가 입국해서 비준서(批准書)를 교환하였고, 조선정부에서도 같은 해 6월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관 홍영식(洪英植) 등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후 조선정부의 외교노선이 연미정책(聯美政策)으로 기울어져, 한반도에서 청국·일본·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는 데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의 고립외교정책(비간섭정책) 때문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한국의 정책에 간섭하지 말라'고 미국공사에게 훈령을 보낼 정도였다. 또한 미국은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결과로 차지하게 된 필리핀을 중시하여 1905년에는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과 일본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회담을 열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의 우월권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비밀협약이 성립됨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일본의 한국강점을 방관한 미국은 1905년 11월 한·일 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듬해 3월 다른 외국공관보다 앞서 공관을 철수시킴으로써, 그때까지 23년에 걸쳐 맺어졌던 양국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 사이 양국의 경제교류도 미미하여 1895년의 경우 한국의 총수입액 416만 달러 중 대미수입은 약 7만 달러로 전체수입액의 1.7%에 불과하였고, 같은 해 미국의 총수출액 9억 2,100만 달러 중 대한수출은 총액의 0.013%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에서 취득한 경제적 이권을 보면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뒤에 일본에 양도), 운산금광 채굴권, 서울 수도시설권 등을 획득하였고,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전기를 공급하고 전차를 들여왔으며, 영국과 합작으로 인천에 연초공장을 세운 정도였다. 189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입국한 미국인은 47명으로 집계되어 청국인(1,236명), 일본인(871명), 러시아인(56명)에 이어 4위를 기록하였다. 한국인은 1903년부터 미국에의 노동이민이 시작되어 1905년까지 약 7,000명이 하와이에 이민하여 이후 미국 각지에서 집단을 이루면서 살게 되었다. 민간인으로서 제일 먼저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이,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때 저격당하여 생명이 위태로웠던 민영익(閔泳翊:초대 미국전권대신)을 치료하여준 일은 한·미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그 동안 기피하여온 서교도(西敎徒)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파견한 선교사는 왕실에서 특별히 후원하였다.
따라서 1885년 이후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이 선교의 부대사업으로 시작한 교육·의료·학술 부문의 모든 시설은 한국이 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들에 의해 전래된 개신교는 이보다 1세기 앞서 전래된 가톨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때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는 1886년 이후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경신학교·숭실학당(崇實學堂:평양)·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연희전문 등으로, 이들은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사립학교로서 한국 근대교육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1886년에 설립된 관립 육영공원(育英公院)도 미국에서 초빙된 H.B.헐버트 등 3명의 교사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1911년 추방당할 때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선교·육영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입국 직후부터 의료활동을 편 알렌은 1885년 고종에게 건의하여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 병원은 후에 선교단에 인계되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였고, 여의사 스크랜턴, 하워드, 매길 등은 종로와 정동에 부인병원을 설립하여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소개하였다. 이들의 의료활동에 따라 한국의 의료제도도 종래의 한의학 중심에서 부분적이나마 서양의학으로 변혁되어 1894년에는 내부(內部:내무부)에 서양의학을 위한 위생국이 설치되어 전염병 예방, 세균검사 등 근대적 위생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밖에 전기·전차·축음기·활동사진 등 한국인을 놀라게 한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들여온 것도 미국인이었다.
1884년 유길준(兪吉濬)이 첫 미국 유학생이 된 이래, 미국은 한국의 면학도에게 유학의 메카가 되어왔고, 많은 유학생들은 선각자로서 조국광복과 조국의 근대화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말기에 정치·경제면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였으나, 문화면에서는 근대문화 도입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한국독립과 미국
1919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기초조건으로 발표한 14개조 중의 '민족자결' 조항은 우리 국민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믿게 하였고, 이것은 3·1운동이라는 민족항쟁을 폭발시킨 정신적 거점이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을 규탄하였고, 미국 의회에서도 같은 해 6월 30일 한국문제가 제기되어 3년간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에 관한 여러 보고서·성명 등이 의회의 속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10월에는 상원에서 "미국의회 상원은 한국민이 원하는 정부수립을 위한 큰 뜻에 동감을 표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12월에는 1905년의 주한미국공사관 철수와 미국이 한·일 합방조약을 정당화한 과오 등 "미국 외교사상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데 대해 반성할 기회를 가지자"는 제안이 의회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공식태도는 오히려 냉담하여 재미교포나 임시정부요인 등 애국지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이에 반하여 미국의 신문·잡지 등은 일본의 야만행동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 1919년 3월부터 1920년 9월 초까지 한국에 동정적인 기사가 약 9,000건에 이르렀으나 친일적인 기사는 50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전쟁 말기인 1944년 5월 주중(駐中) 미국 공군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통해서 광복군의 훈련을 도운 정도이다. 이밖에 민간에서는 미국의 유명인사 19명으로 조직된 ‘한국친구회’, 한국에 남아 있던 미국선교사들이 활약하여 의회·언론·교회 등을 상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많은 책자를 내어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는 등 홍보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원조하였다.
한국인에게 미국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외교 및 자금조달의 거점이었다. 1908년 재차 미국에 건너간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 등 많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중에서도 1905년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1910년에는 교민자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일인들이 재미 한국인의 지위를 일본정부에 소속시키려는 음모가 있자 국민회는 1913년 미(美)국무장관에게 '재미 한국인을 일인과 같이 취급하지 말고 한국인에 관한 문제는 한국인단체를 상대로 할 것'을 공문으로 요구하여 승인을 받았으며, 사회법인체로 인가를 얻었다. 이와 같은 국민회의 공인(公認)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법률상의 보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여 국민회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많은 기금을 모으고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기구로는 1919년 대한민국 통신부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가 필라델피아와 워싱턴에 설치되어 임시정부와 횡적인 연락을 가졌다. 그후 1943년 카이로에서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蔣介石]가 극동문제 처리를 위한 회담을 열었으며, 여기에서 한국독립을 보장하는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였으며, 그해 7월 포츠담선언에 의해 완전한 독립이 아닌 북위 38 °선을 경계로 이북을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통치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미국과 한국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남한분할점령책을 발표함에 따라 9월 8일 J.R.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 간의 미군에 의한 남한의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존 리드 하지 중장(John Reed Hodge)의 미군 시정방침 발표와 아널드 소장의 미군정장관 취임에 이어, 19일 '재조선(在朝鮮)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발족하여 남한의 통치에 들어가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던 임시정부의 부인(否認),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對共政策) 등으로 우익정치 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특히 우익진영의 지도자이던 이승만과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정치적 견해차로 반목이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金奎植)의 중간우파(中間右派)와 여운형(呂運亨)에 의한 좌·우 합작으로 난국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의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넘기기로 정책을 전환하여 1947년 10월 유엔에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 미국대표로 무초(1949년 大使 승격)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 세기 만에 양국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군사비를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하였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1949년 6월 500여 명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미군을 전면 철수하여, 이것이 1950년 6·25전쟁을 유발(誘發)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한·미 관계가 정치·군사·경제면에서 보다 긴밀하게 전개된 것은 6·25전쟁 이후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즉각 군대를 출동시키고 무기를 급송하는 등 결연히 한국에 대한 방어의지를 보이고 38선의 획정을 백지화하여 유엔군을 북진시켰다. 또한 미국은 전시 중의 군사·경제원조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경제원조를 강화하여 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성향 때문에 부산 피난시절부터 대통령 트루먼과 마찰을 빚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한국의 휴전협정 반대 입장 때문에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여,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군사·경제원조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끌어 타결지었다.
1960년대의 케네디 대통령 때는 한국의 군사정변과 박정희정권 출범 과정에서 미국이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존슨, 닉슨, 포드 대통령 시대에는 비교적 소강상태를 이루었으나, 특히 1970년대 후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철수 문제, 인권문제, 박동선사건(朴東宣事件) 등으로 긴장관계가 또 한번 지속되었다. 한편,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를 도왔고, F16기(機) 등 최신예기를 한국에 배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매년 한·미합동의 팀스피리트 작전 등을 통해 양국군의 실전 능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1971년 이후에는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국교개설 이래 한국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방미하고, 미국에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린든 존슨·포드·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빌 클린턴·조지 부시 대통령이 방한, 양국간의 당면문제를 협의하였다.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 이후 강화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1961년 초까지 한국경제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현재까지도 무역·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 146억 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1960년대까지 제공한 무상원조 47억 달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무상원조시대의 한국경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惰性)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고 차관(借款)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대미수출 의존도는 1961년의 16.6%로부터 1968년에는 51.7%로 그 상승곡선의 정점에 달하여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다각적인 수출정책에 따라 1976년 32.3%, 1989년 12%, 1994년 21.4%로 낮아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면화·옥수수·밀·원피(原皮)·원목·종이·철강 스크랩과 같은 1차 원자재를 대종으로 하고 열전자관 등 전자부품과 그 밖의 중화학제품을 수출하고, 한국의 섬유류·전자제품·철강제품·신발류·기계류·합판·합성수지 등을 수입한다. 그동안의 심한 대미무역흑자현상은 통상마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후 미국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대한수출 증가에 주력하였으며, 1994년 대한수출이 215억 7900만 달러, 수입이 205억 5360만 달러로 무역역조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한편 재미교민은 142만 532명, 체류자는 11만 3045명(1993)이다.
현대의 한미 관계
미국은 한미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과 군사적, 경제적 파트너이며 한때 한국의 최대 교역국가였다. 최근 한국의 중국 및 유럽과의 교역량 확대로 교역량의 순위는 바뀌었으나 여전히 교역량은 많다. 1990년대까지 심한 대한 무역적자로 인한 통상마찰이 있었으며, 미국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의 증가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 무역수지가 역전되어 한국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IMF 구제금융을 받은 1997년까지 최대 120억 달러에 육박하는 흑자를 보았으나, 1998년부터 다시 적자 상태에 놓여 있다.
미국은 이미 냉전 종식 이후 남북한 관계의 해빙에 따라 1991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발표하면서 한국 내 전술핵을 철수하고 탈냉전에 따른 미군병력의 축소를 단행하고 있었지만,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군사동맹관계를 바탕으로 굳건하게 이어져왔다. 최근 한국의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 정부의 정책이 대북한인식, 북한핵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군사적 측면에서의 협력 확대와 더불어 경제적 측면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2007년 4월 2일 타결되었다.
동영상
참고자료
- 〈미국〉, 《나무위키》
- 〈미국〉, 《위키백과》
- 〈미국〉, 《두산백과》
- 〈미국/경제〉, 《나무위키》
- 〈미국/주〉, 《나무위키》
- 〈성조기〉, 《나무위키》
- 〈미국/국호〉, 《나무위키》
- 〈미국/외교〉, 《나무위키》
- 〈북미관계〉, 《나무위키》
- 〈미국의 경제〉, 《위키백과》
- 〈미국의 대외 관계〉, 《위키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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