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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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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손병희(孫秉熙)는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의 주역인 천도교인이며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이다.

개요

  •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는 천도교(동학)의 지도자요, 제3대 교주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당시의 기미 민족 대표 33인의 일원이다. 본은 밀양(密陽)이고, 충청도 청주목 청원군 생이다. 자(字)는 응구(應九)이며, 타지로 망명하던 중에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이고, 배다른 서얼 매제 최시형(동학 제2대 교주)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1]
  • 손병희는 조선 말기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명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기도 하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2]
  • 손병희는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치료 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3]
  • 손병희의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손응구(孫應九), 그 뒤 손규동(孫奎東)으로 고쳤으며,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교도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 교주, 교종(敎宗)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불렀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 손두흥(孫斗興)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둘째 부인 최씨이며, 방정환(方定煥)은 사위이다. 손병희는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도결(道訣)」·「명리전(明理傳)」·「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무체법경(無體法經)」·「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신통고(神通考)」·「견성해(見性解)」·「삼성과(三性科)」·「삼심관(三心觀)」·「극락설(極樂說)」·「성범설(聖凡說)」·「진심불염(眞心不染)」·「후경(後經)」·「십삼관법(十三觀法)」·「몽중문답가」·「무하사」·「권도문」·「삼전론」 등이 있다.

손병희의 생애

  • 손병희는 충청도 청주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던 아버지 손의조(훗날 개명하여 손두흥)의 첩실 최씨의 소생의 아들(서자)로 태어났다. 1882년 배다른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 때문이었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순도(殉道, 순교)를 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혁명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했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탄압을 피해 손병희 선생은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서도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 신도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져서,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귀국 후에는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 등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성신쌍전, 교정일치'라는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손병희는 3월 1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손병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서울 손병희 묘소

  • 서울 손병희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묘역이다.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손병희는 한말의 천도교 지도자로 천도교 3대 교주를 지냈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묘역이다.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의 봉황각(의창수도원)에서 약 50m 떨어진 언덕에 있다. 묘는 곡장(曲牆; 능·원·묘 등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에는 화강암 호석(護石)으로 띠가 둘러져 있다. 호석 중앙에는 천도교를 상징하는 표시가 새겨져 있으며 묘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묘역 오른편에 의암손병희선생묘(義菴孫秉熙先生墓)라고 적힌 묘비, 왼편에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묘역으로 진입하는 길과 묘역 주변은 노송들로 덮여 있다. 묘역 아래쪽에 있는 봉황각(서울특별시유형문화유산 제2호)은 1912년 손병희가 지은 누각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교육한 수련장이었다. 손병희는 이곳에서 1919년의 3·1운동을 구상하였다 한다.

손병희 생가

  • 손병희 생가(孫秉熙生家)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생가이다. 충청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손병희선생 유허지에 복원한 생가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천도교 3세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가 태어나고, 22세 되던 해까지 살았던 곳이다. 생가는 넓이 38.59㎡, 정면 4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안채와 넓이 19.44㎡의 헛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두 채 모두 ‘一’자형 목조초가집으로, 옛 생가의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넓이 38,648㎡의 손병희선생유허지에는 생가를 비롯하여 유허비와 의암영당·의암기념관·동상 등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사람들이다. 각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던 민족독립운동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각 단체를 묶는 대연합전선이 절실하였다.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는 1919년 3·1운동의 초기 조직단계에서 민족 대연합전선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등 15명이 선정되었다.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 측 대표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날인했다.

동영상

각주

  1. 손병희〉, 《위키백과》
  2. 손병희〉, 《나무위키》
  3. 손병희(孫秉熙,1861.4.8.~1922.5.19)〉,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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