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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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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옥균(金玉均)은 조선 고종 시기의 정치가, 개화사상가이다.

개요

  • 김옥균(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는데, 갑신정변(甲申政變)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조선 후기 정치가이며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1851년(철종 2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세도가(家)였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김병태였으며 어머니는 은진(恩津) 송씨(宋氏)로 당대 문벌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여 작은 서당을 열어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김옥균이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집안에 알려지자 6세 때 5촌 당숙이자 당시 좌찬성을 지내고 있던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1861년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자 강릉에서 학업을 쌓으며 6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이율곡의 학통에 영향을 받았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등이 있다.[1]
  • 김옥균은 조선 말기의 개화 운동가, 정치인,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얼마 안 되는 병력 부족으로 청나라의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김옥균 암살 사건).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 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愚),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가명을 썼는데 갑신정변 실패 직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가명도 사용했다.[2]
  • 김옥균은 1851년(철종 2년)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 세력에 참여하여 1884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동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옥균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출생으로 안동 김씨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6촌 형제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김옥균의 어린 시절을 설명할 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의 양부는 세도가 출신이기는 하나 김상용의 후손이라 정작 세도를 누린 외척들과는 촌수가 까마득하게 먼데다가, 양부 본인도 과거에 끝내 합격을 못해 음서를 통해 외직을 전전해야 했고 자식이 성장해 관직에 나가게 되어서야 출세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교육환경이 좋았던 건 사실이나, 그가 젊을 때부터 출세할 수 있었던건 본인 능력 덕분이다.[3]
  • 김옥균은 조선 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신이자 개화 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이고,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이다.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6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 부강한 근대 국가가 되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 신분 제도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 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 재정의 개혁, 공장 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선진 과학 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 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목축의 발전, 광업·임업·어업·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라의 자주 근대화를 위해서 널리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 제도와 형사 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을 주장하였다. 1910년(순종 4)에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1989년 2월 22일 공주군(현 공주시) 주관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있는 2,473㎡의 생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4]

김옥균의 생애

  • 김옥균은 1866년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북촌 양반가에서 지내다 박영교의 소개로 1869년 박규수(朴珪壽)를 만났다. 김옥균은 그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개화파였던 한의원 유대치(劉大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외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중국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역관 오경석(吳慶錫),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에게 영향을 받으며 그들과 교우가 두터웠다. 1872년(고종 9) 22세 때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해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외척세력이 득세하자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충의계(忠義契)라는 개화파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충의계에는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 명문가의 자재들이 가담하였다. 1881년(고종 18) 김옥균은 고종의 허락을 얻어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직접 시찰하였다. 1882년 다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때 김옥균은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치욕적이라고 비판하였고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하였다.
  • 1883년 6월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고종의 위임장을 얻어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민씨일파의 방해공작과 개화파를 통해 조선을 진출하기보다는 민씨 일파가 더욱 쉽다는 일본 측의 정책변화 때문이었다. 차관도입에 실패한 김옥균은 친청파의 압력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칩거하였다. 당시 김옥균은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와 청나라 세력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청나라와 프랑스 간 전쟁(1884~1885)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충의계 조직만으로는 거사를 성공하기 어렵자 결국 다시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계략에 속아 도움을 받게 된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김옥균선생유허

  • 김옥균선생유허(金玉均先生遺墟)는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의 김옥균 생가지와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의 김옥균 묘이다.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와 묘이다. 생가지는 정안면에서 동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지점인데 터는 없어지고 넓은 밭 가운데 감나무만 서 있다. 그 자리에 1989년 2월 22일 공주군 주관으로 대지 2,473㎡에 생가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묘는 아산시에 있으며 묘역에는 석등·석양(石羊)·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비 등이 세워져 있다.
  • 김옥균은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근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노력이 대원군의 수구파와 대립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되고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양화진(楊花津)에서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김옥균을 존경하던 한 일본인이 효시(梟示)된 머리를 일본 도쿄(東京)의 청산외인묘지(靑山外人墓地)에 묻고 비를 세웠는데, 1914년 9월 11일 의발(衣髮)을 이곳으로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개화파

  • 개화파(開化派)는 강화도조약 이후 개화를 지지한 정치 세력이다. 개화당(開化黨)이라고도 한다. 조선에서 개화(開化)라는 말은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를 줄여 만들어진 말이다. "개물성무"는 만물의 뜻을 통하여 천하의 일을 완수한다는 의미로 《역경》 〈계사상전〉 제11장이 출전이다. 조선에서는 왕의 경연에서 종종 다루어져 왔다. "화민성속"은 군왕이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풍속을 가꾼다는 의미로 《예기》의 〈학기〉가 출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에는 백성을 덕화로서 다스리려 하나 인륜을 저버리는 사례가 있음을 개탄하는 내용에서 인용된 바 있다. 그러나 개항 시기 조선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문명화의 의미로 사용되던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줄임말인 개화의 의미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영어 Civilization에 해당하는 번역어인 문명개화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체택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되던 용례에 따라 문명개화를 번역어로 채택하면서 서양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문명화를 뜻하는 개화는 개화사상을 지지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세력에서도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치도규칙

  • 치도규칙(治道規則)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 김옥균이 도로 정비에 대하여 쓴 글이다. 2013년 8월 27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가 김옥균이 1882년(고종 19) 집필한 국내 최초의 도로 정비 관련 저술로, 저자의 글을 베껴 쓴 필사본(筆寫本)이다. 《치도규칙》이라는 제목에서 '치도(治道; 길을 닦음)'란 '도로 정비'를 의미한다. 크기는 가로 18.8cm, 세로 29.6cm이다. 내용은 〈치도약론〉과 〈치도약칙〉, 그리고 '발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량은 총 9장(치도약론 4장, 치도약칙 4장, 발문 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한문으로 쓰여 있는데, 한자 글자 수는 총 3,050자이다.
  • 치도약론(治道略論)은 서론으로, 이 글에서 김옥균은 도로 정비의 필요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또한 도로 정비 관련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당시 일본 파견 수신사였던 개화파 박영효 및 그와 함께 일본에 다녀온 수신부사 김만식의 권유로 집필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김옥균 또한 이들과 함께 같은 시기(1882년)에 일본을 방문한 바 있다. 치도약칙(治道略則)은 본론으로, 도로, 위생, 미관 등에 관한 국가 차원의 개선책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도로 정비 등과 관련된 내용을 13개의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다루었는데, 치도국(治道局) 설치, 고위관직 배치, 치도 기술자 양성과 기계 구비, 오물처리 방법과 공중변소 설치, 도로 정비 감독과 순검(한말의 경찰관직) 배치, 인력거(人力車)와 마력거(馬力車) 운행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발문은 당시 주일청국공사를 맡았던 중국인 여서창(黎庶昌, 1837~1896)이 썼다. 여서창은 김옥균의 글을 읽은 뒤 발문을 통해 치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자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 1883년 초 한성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한성에 치도국을 설치하면서 한성의 도로 정비 사업을 위하여 이 책에 기술된 김옥균의 구상들을 일시적으로 시행한 바 있다. 책의 내용은 1883년 1월 13일 자와 15일 자 일본의 일간신문 《지지신포 時事新報》와 1884년 윤 5월 1일 자(제26호)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에 실리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의 도로 정비 인식과 한국의 도로 정비 관련 역사를 알려주는 귀한 자료로, 국내 소장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김옥균의 사상

  • 김옥균은 박규수, 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開化)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자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 비판하였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처음에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히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쿠데타를 기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김옥균 암살사건

  •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이다. 갑신정변으로 일대 타격을 받은 민씨척족정권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의 주모자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그들의 체포 및 송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범죄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만국 공법상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1885년 말 망명 중인 김옥균이 일본의 구자유당계(舊自由黨系) 불평정객 및 낭인들과 결탁해 한국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조선 정부는 그의 송환을 다시 요구하는 한편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 지운영(池運永)을 일본에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다.
  • 조선 정부의 암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일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분규가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1886년 8월 김옥균을 태평양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으로 강제 추방하였다. 이곳에서 약 2년간의 유배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김옥균은 그 뒤 북해도(北海道)로 옮겨져 억류되었다가, 18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지 귀환(內地歸還)의 허가를 받아 동경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동경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이일직(李逸稙)의 계략에 빠져 홍종우와 함께 상해로 건너갔다가 미국 조계(租界)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암살 당한 것이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

  • 김옥균은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 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 그는 민씨 일파의 외교 정책에 대한 폐쇄적인 위정척사 주장도 반대하면서도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고 한다. 실제로 처음에 그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세도정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변혁을 시도했으나,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생가터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 김옥균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나 명나라 혹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외세의 개입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 당시에는 일본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사전 준비가 치밀하지 않았던 점과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때까지 조선에서 수구파(守舊派)의 후견세력인 청나라 등의 영향력이 조선사회 내에 막강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김옥균(金玉均,1851~1894)〉, 《두산백과》
  2. 김옥균〉, 《위키백과》
  3. 김옥균〉, 《나무위키》
  4. 김옥균〉,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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