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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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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김대중(金大中)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개요

  •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출생일은 1925년 12월 3일(음력)이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1]
  • 김대중은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직선제 및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제5대 민의원을 거쳐 제6·7·8·13·14대 국회의원(6선 의원)을 지냈으며 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대통령 재임 중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2]
  • 김대중은 헌정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직접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이다. 삼김시대의 일원이다. 본래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던 청년 사업가 출신으로 민주당 신파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대 제3공화국에서 19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낙선을 거듭해왔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2000년 12월에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인이다. 김대중은 1926년 1월 6일(음력 1925년 12월 3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후광(後廣)이다. 목포제1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초등학교), 목포상업학교(지금의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김대중은 평생을 정치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는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내가 걷는 70년대』, 『김대중 옥중서신: 민족의 한을 안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나의 길 나의 사상: 세계사의 대전환과 민족통일의 방략』,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남북연합을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길』, 『옥중서신: 편지로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과 『옥중서신: 편지로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2,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김대중 자서전』 1, 2 등이 있다. 정치가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며 국내외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으며 많은 상훈을 수상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제1회 동학농민혁명 대상(2011), 노벨평화상(2000),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무궁화 대훈장(1998), 국제인권연맹 인권상(1998),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의 메달(1999) 등이 있다.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4]

김대중의 생애

  • 김대중은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 김대중은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김종필 총재)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 김대중은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김대중은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 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대통령 퇴임 후, 김대중도서관을 개관하였고, 2006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8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대중대통령생가터

  • 김대중대통령생가터(金大中大統領生家)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있는 김대중대통령 생가터이다. 목포시에서 38㎞ 거리의 남쪽 끝마을 후광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24년 대통령 김대중이 태어나 1936년 하의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 어린시절을 보내던 초가집이다. 김대중이 목포북초등학교로 전학오면서 총면적 288㎡의 생가는 헐리고 마늘밭으로 변하여 생가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만이 서 있었는데 종친들이 중심이 되어 복원 사업을 시작, 1999년 9월 60여 년 만에 원형대로 완전히 복원하였다. 복원된 생가는 6칸으로 안채와 창고 1동, 화장실 1동 등의 부속채와 헛간 등이다. 생가의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짓고 살던 어은리 마을 주민의 집을 다시 사들여 해체한 다음 기둥 등 주요목재를 이용하여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주변에 덕봉강당,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신도해수욕장, 토지항쟁기념비 등의 관광지가 있다.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金大中─平和賞記念館)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전라남도 목포시의 공립박물관이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를 통해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전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체험적 역사교육의 장을 제공하고자 만들어진 기념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년 시절부터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활동한 지역인 목포에서 6·15남북공동선언 기념일인 2013년 6월 15일 개관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및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관계의 발전, 세계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2000년 12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기념관에서는 민주주의, 인권, 화해와 국민통합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 역사 인식에 관한 다양한 영상물과 사료 및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의 외교, 안보, 경제, 문화 등 분야별 국가발전전략과 이를 위한 시책을 전시한다.

김대중 재판

  • 김대중 재판(金大中裁判)은 1980년 5·17조치와 함께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대중(金大中)이 계엄군법회의를 거쳐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사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된 뒤, 김대중(金大中)은 1979년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고, 1980년 2월 사면 복권됨으로써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全斗煥) 군사정권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5·17조치를 감행하였는데, 김대중은 이때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사기관에 연행되었다. 이어 1980년 7월 31일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된 뒤, 역시 1980년 9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 확정 후 독일·미국·일본·프랑스 등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서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1982년 12월에는 그를 석방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였다.

동영상

각주

  1. 김대중(金大中,1924.1.6.~2009.8.18)〉, 《두산백과》
  2. 김대중〉, 《위키백과》
  3. 김대중〉, 《나무위키》
  4. 김대중 (金大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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