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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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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왕건)

고려 태조는 고려의 제1대(재위: 918년~943년) 왕이다.

개요

  • 고려 태조(高麗 太祖, 877년 2월 4일 ~ 943년 7월 9일)는 후삼국 시대 태봉의 장군이자 고려를 건국한 고려의 초대 국왕 (재위 : 918년 7월 30일(음력 6월 15일, 율리우스력 7월 25일) ~ 943년 7월 9일(음력 5월 29일, 율리우스력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字)는 약천(若天),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고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그는 태자 무를 일찍부터 정윤으로 정하였으나 태자 무의 외가는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하였다. 그는 박술희를 불러 고명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943년 음력 5월 29일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자 왕건은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붕어하였다. 향년 67세였다.[1]
  • 고려 태조는 고려 제1대 왕이다.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2]
  •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한 고려왕조의 창업군주이며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의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초대 국왕이자 해동천자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준수한 용병술과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좌우 신하들과 사방의 세력가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은 성군이며 숙명의 라이벌이자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던 견훤을 제압하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최후의 승자다. 한국사 군주들 중 손에 꼽을 만한 너그러운 임금이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사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 일각에서는 신라 통일의 불완전성을 문제 삼아 고려가 한반도의 첫 통일 왕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려 역시 신라가 놓쳤던 당시 발해의 전 영역을 완전하게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통일한 영역 안에서 나뉘었던 땅을 재통일한 후 북방의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삼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통일의 개념을 '한반도'의 통일로 상정한다면 신라의 통일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공식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존경의 의미로 '성조'(聖祖), '열조'(烈祖)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이외에도 고종 재위 42년에 몽골을 막아달라고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왕건을 '용조'(龍祖)라 칭했으며 공민왕 재위 20년에 성균관의 학도들이 송가를 바쳤는데 여기선 태조를 '황조'(皇祖)라 했다.[3]
  • 고려 태조의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 · 충주 · 청주(靑州) 및 당성(唐城) · 괴양(槐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湌)이 되었다.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4]

고려 태조의 출생과 가계

  • 고려 태조 왕건은 877년 1월 31일 송악(松嶽)의 남쪽 자택에서 송도의 신흥 호족 왕륭(王隆)과 그의 부인 한씨(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그 휘하에 의탁하였고, 태봉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가계는 증조모 진의(정화왕후로 추존)는 고구려 유민인 강호경과 강충의 후손으로 신천의 호족인 강씨(康氏) 가문이었다.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그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 하며 이름은 '왕건'이다. 다만, 전설적인 면이 강하여 사실성은 의심받고 있다.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 성원록, 왕대종족기에는 작제건이란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따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신천 강씨 일족은 왕건의 증조부의 외가 쪽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태조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의하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는 고구려계 신라 사람인 강충(康忠)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康虎景)이 그녀의 증조부이다. 태조 왕건은 집안 가계상 고구려의 먼 후손에 해당한다.

고려 태조의 생애

  •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불교 장려 정책

  • 고려 태조는 고구려-발해 계승론 외에도 불교의 장려를 통해 사상적 통일, 단결을 꾀하려 하였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여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공식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태조 자신이 매일 불당에 방문하여 부처에게 불공을 함으로써 직접 모범을 삼았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신라 출신의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940년 12월에는 충청도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동년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화상으로 그려 벽에 붙였다. 또한 무차대회(無遮大會[17])를 개최, 해마다 이 대회를 열 것을 명하여 매년 무차대회를 열어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 이는 효과를 발휘하여 불교 신앙은 다시 민간으로도 폭넓게 확산되었고 국민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냈다.

거란과의 관계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낙타를 선물해 왔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가 없는 나라라고 하여 사신을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 메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2차로 거란이 사신을 파견했을 때도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중국의 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 중국의 제국들과 외교활동을 하며 거란과 여진족까지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친다. 왕건은 후진에서 온 승려 말라를 통해 후진의 고조에게 같이 거란을 치자는 외교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유교이념 정책

  • 동아시아 선진정치 중심 '유교이념' 정책 실행 기준과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정치문화의 중심요소인 '유교정치이념'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초부터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며, 새로운 성격의 관부인 내의성(內議省)을 설치하였다. 내의성은 왕에게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고,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유교정치이념을 실현하는 기구였다. 왕건의 후삼국통일은 단지 통일신라의 회복에만 그치지 않았다. 왕건은 즉위한지 네 달 만에 황폐해져 방치됐던 평양을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으로 격상시켰다. 남방의 백성들을 사민(徙民)시켜 충실하게 하고, 성을 쌓아, 당제(堂弟) 왕식렴(王式廉)에게 지키게 하였다. 왕건은 서경에 자주 순행했으며,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하려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북변의 진성(鎭城)을 설치하며 개척해 나갔다.

천수

  • 천수(天授)는 고려의 왕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한 뒤에 사용한 연호이다. 918년부터 933년까지 16년 동안 사용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918년 음력 6월에 왕건은 정변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낸 뒤에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그러나 933년(태조 16) 음력 3월 중국의 후당(後唐)에서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고 책력(冊曆)을 보내오자, 천수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제4대 왕인 광종(光宗)이 즉위하면서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는 했지만, 제6대 왕인 성종(成宗) 때부터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천수 연간에 고려는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919년 개성에 궁궐을 짓고 도읍을 옮겼으며, 도성 안에 법왕사(法王寺)와 왕륜사(王輪寺)를 창건했다. 그리고 92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원병을 보내면서 후백제와의 대립을 본격화하였다. 925년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기도 했으나, 926년 후백제의 인질이던 진호(眞虎)가 죽으면서 화친은 파기되었다. 927년 견훤이 신라의 도성을 점령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죽이자, 왕건은 직접 원병을 이끌고 출정해서 공산(公山)에서 견훤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크게 패해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의 장수를 잃었다. 고려는 한동안 수세에 몰렸으나, 929년 고창군(古昌郡)의 증산(甁山)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상황을 역전시킬 계기를 마련했다.

현릉

  • 현릉(顯陵)은 경기 개풍군 중서면 곡평리에 있는 고려 태조와 그 비(妃)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의 묘이다. 943년 6월 송악산 기슭에 장사하였다. 1010년(현종 1) 제2차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의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에 이치하였다가 1016년 정월 다시 현릉으로 복장(復葬)하였다. 이후 1018년, 1217년(고종 4), 1232년, 1270년(원종 11)에 재궁을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에 현릉에 복장하였다. 능 주위는 12지신상(支神像)을 낮게 돋을새김한 호석(護石)으로 봉토(封土)의 기부(基部)를 둘렀으며, 그 밖으로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앞에는 석상(石床)과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望柱石) 1쌍, 석인(石人) 1쌍이 세워져 있고, 네 모퉁이에 2쌍의 석사자(石獅子)가 능을 수호하고 있다. 능역(陵域)의 중앙에는 정자각(丁字閣)이, 그 입구에 홍살문이 있었으나 파손되었다. 그런데 망주석과 장명등 및 12지신상은 고려 초기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태조 (고려)〉, 《위키백과》
  2. 태조(太祖,877~943)〉, 《두산백과》
  3. 태조(고려)〉, 《나무위키》
  4. 태조(太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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