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커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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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커우시(중국어: 张家口市 zhāng jiā kǒu shì)는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 [1][2][3][4]
개요[편집]
장자커우시의 면적은 36,861.56㎢이며 인구는 4,118,908명(2020년)이다. 장자커우시는 동쪽으로 베이징, 청더시와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 바오딩시, 서쪽으로 산시성 다퉁시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내몽골 자치구와 접한다. 시의 북서쪽 선화현으로 산시성 다퉁시과 연결되는 쉬안다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베이징과 징장 고속도로를 통해 연결된다. 장자커우는 2005년 9월 7일 새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멀리 내몽골과도 연결되었다. 장자커우시의 공항은 중국 산시성 다퉁시 윈저우구에 위치해 있다.
장자커우는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의 주요한 관문 중 하나였다. 1211년 8월, 칭기스칸(成吉思汗)이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45만의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1251년에는 몽케 칸(蒙哥汗)에 의해 남부군총사령관 총령 막남한지사무에 임명된 쿠빌라이 칸(忽必烈汗)이 금련지막부를 설치하고 중국 정벌을 준비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인근 회래현(懷來縣)에서 토목보의 변(土木堡의 變)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장자커우는 교역로에 있어 번성하였다. 초가을에는 차를 운반하는 긴 낙타행렬이 도시를 지나갔다. 러시아 상인 중 일부는 도시에 영구적인 거주지와 창고를 짓기도 했다.
1909년 10월, 경장 철도가 개통하여 베이징(北京)과 철로로 연결되었다. 1920년대에는 김규식, 이태준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장자커우 주변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중일 전쟁 당시에 세워진 일본의 괴뢰 정부인 몽강국(蒙疆國)의 수도였다. 1960년, 중소 분쟁으로 촉발된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군사적 이유로 장자커우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장자커우는 베이징의 북쪽 문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는데 이는 베이징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25개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화베이 평원에서 네이멍구로 향하는 문호에 해당하며, 몽골족과의 물자교류 지점이다. 징바오철도(京包鐵道:베이징∼바오터우) 연변에 있다. 109번, 110번, 112번 등의 국도가 통한다.
장자커우는 중국어로 张家口라고 쓰며 장씨 가족의 문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장자커우는 20세기 중반까지 칼간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몽골어로 (만리장성의) 문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장자커우는 그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베이징의 북쪽 문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허베이성에서 유일하게 보통화가 아닌 진어 사용권이다. 중국의 주요 도시 중 유일하게 만리장성이 시가지를 관통하는 곳으로, 만리장성의 성문인 대경문이 관광지이다.
경내의 줘루(涿鹿, 탁록) 판산(矾山, 반산)은 황제(黄帝)와 치우(蚩尤)의 전쟁인 탁록지전(涿鹿之战)의 전쟁터였다고 전해지며 황제성유지(黄帝城遗址)가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서 염제와 황제간의 싸움인 반천지전(阪泉之战)도 줘루(涿鹿, 탁록) 동남부에서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교육기관에 허베이지질학원(河北地質學院), 허베이건축공정학원(建築工程學院) 등이 있다. 관광지에 다징먼(大境門), 쓰얼산(賜兒山), 칭위안루(淸遠樓), 요(遼)의 벽화묘 등이 있다.[5] [6]
자연환경[편집]
지리적으로는 화베이평원(华北平原)에서 네이멍구고원(内蒙古高原)에 이르는 과도지역으로 북부는 패상고원(坝上高原) 지역이며 남부는 양하분지(洋河盆地)이다. 경내 하천으로 샨뎬하(闪电河, 섬전하), 양하(洋河), 칭수이하(清水河, 청수하) 등이 있다. 기후는 한온대대륙성계풍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7.5℃, 연 강수량은 400㎜ 내외이다.
역사[편집]
고대부터 평야 지대를 바탕으로 관중(산시성)-중원(허난성) 등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운 동네였기 때문에 하북을 근거지로 삼았던 원소는 군웅할거 초창기에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고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 역시 관중-중원과 더불어 이곳에서 나오는 국력을 바탕으로 촉과 오를 압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북방의 수렵, 유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 역시 수도권을 화북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정치 중심지가 점차 황하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지금의 베이징 지방이 '계'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 연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게 다수설의 견해다. 전한대에는 '유주'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그렇게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후한 말에 유비, 관우, 장비가 그 유명한 도원결의를 맺은 곳도 지금의 이 지역이다. 조운의 출생지도 허베이성 쪽인 상산 진정이다. 조운이나 장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허베이 지역을 빼앗겼는데 이때 이곳에 전연, 후연 등의 나라들이 들어섰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한족의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변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북쪽인 점도 있고, 타 민족의 침입이 상당히 잦았다.
5대 10국 시대의 마지막에 이 지역을 연운 16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게 뺏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통일 왕조인 글로벌호구 북송이 몇 번이고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송의 떨어지는 군사력으로는 거란(요)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요나라가 쓰러지지 않아 그래서 여진족(금)과 연합해 거란을 뭉개고 이 지역을 탈환했으나 곧바로 금에게 뒷통수를 털리고 이번엔 화북 전체를 먹혀 버린다.
그리고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마침내 이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명나라와 청나라 역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는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인 즈리성(直隸省)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된 뒤에도 북양정부의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예성으로 불리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 정부가 무너지고 1928년 6월 국민정부가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의 군벌은 직예군벌로 불렸다. 1914년에 기존 순천부가 경조지방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에 순천부 관할이었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허(寧河)의 4개 현을 넘겨받았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몽골 지역에 차하얼 특별행정구와 러허 특별행정구가 설치되면서 이들 특별행정구에 북부 지역을 내주어 면적이 축소되었다. 1928년에는 경조지방이 폐지되어 중심 시가지만 베이핑시로 남으면서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현들을 넘겨받았다.
1933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았고 하북 사건을 구실로 1935년 6월 10일 하매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거듭나면서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항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점령지로 8년을 점령당했고 신멸작전이 벌어져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이 학살로 당시 세를 불리며 거대해지던 팔로군의 기세가 꺾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다시 베이징에 두었지만 다시 즈리성으로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말기 허베이성 정부는 베이핑시에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바오딩시에 허베이성 인민정부를 설치하면서 바오딩시로 성도가 옮겨졌다. 이후 베이징시 주변 상당 지역이 베이징시에 편입되고 차하얼성과 러허성이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폐지되면서 그 남부 지역을 다시 편입했으며 1958년에는 톈진시를 재편입하여 톈진시로 성정부를 이전하였다. 톈진시가 1967년에 다시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바오딩시를 성도로 삼았으나 당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성도 기능을 할 수 없어 이듬해에 스자좡으로 다시 허베이성 성정부를 이전하여 현재까지 스자좡을 성도로 삼고 있다.
장자커우시는 1929년 차하얼성의 설치와 더불어 1952년까지 차하얼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 중일전쟁 때에는 몽골연합자치정부가 설치되었다.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후인 1952년 허베이성에 편입되었다.
1939년에 장자커우시(市)로 승격되었고 1955년에 쉬안화와 합병하였다.
장자커우시 시인민정부는 차오시구(桥西区, 교서구)에 소재하며 행정구획은 차오시구(桥西区, 교서구), 차오둥구(桥东区, 교동구), 쉬안화구(宣化区, 선화구), 샤화위안구(下花园区, 하화원구)의 4개 시할구(市辖区)와 쉬안화현(宣化县, 선화현), 장베이현(张北县, 장북현), 캉바오현(康保县, 강보현), 구위안현(沽源县, 고원현), 샹이현(尚义县, 상의현), 위현(蔚县, 울현), 양위안현(阳原县, 양원현), 화이안현(怀安县, 회안현), 완취안현(万全县, 만전현), 화이라이현(怀来县, 회래현), 줘루현(涿鹿县, 탁록현), 츠청현(赤城县, 적성현), 충리현(崇礼县, 숭례현)의 13개 현(县)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업[편집]
예로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였다. 부근에 석탄, 철광 매장량이 풍부하며, 공업으로는 채광업, 철강, 기계, 화학, 방직, 가죽가공, 제지 등이 발달하였다.
관광[편집]
아직 스키장 시설은 부족하지만, 동계올림픽 덕분에 단기간 내 확충될 예정이며, 따로 정비된 관광지는 별로 없지만 인근에 만리장성이 있어 관광지 개발 가능성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만리장성이 둘로 갈라지는 곳 (이른바 연운16주 일대) 사이의 여러 성채와 보루들이 있다. 그중 계명역 고성과 토목의 변으로 유명한 토목보, 선화고성 (宣化古城) 등이 유명하다.
교통[편집]
동계올림픽을 대비하여 베이징과 장자커우를 잇는 징장고속철도(京张城际铁路)가 2019년 12월 30일에 개통되었다. 재래선인 징바오 철도(京包铁路)도 있지만 재래선인 만큼 속도가 느리기에 고속철도의 건설은 거의 필수였다.
공항은 민군 복합공항인 장자커우 닝위안 공항(张家口宁远机场)이 존재하며 중국 내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는 국내선 전용 공항이다. 군대는 중부전구 다퉁기지 19여단이 사용중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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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장자커우시〉, 《위키백과》
- 〈장자커우시〉, 《나무위키》
- 〈허베이성〉, 《위키백과》
- 〈허베이성〉, 《나무위키》
- 〈두산백과: 장자커우〉,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장자커우시〉,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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