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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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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安重根)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이다.

개요[편집]

  • 안중근은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旅順)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1]
  •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정치 사상가이다. 태명은 안응칠(安應七)이었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음역어 도마, 사도 토마에서 따옴), 일명은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고려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하여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적군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2]
  •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字)이기도 하다.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한다.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성 토마스를 종도 성 도마로 음차했기 때문. 현재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마라고 호칭한다. 한자로는 多默이라고 표기한다.[3]
  • 안중근은 대한제국기 때, 러시아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항일비밀결사인 단지회를 조직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병 ·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안중근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안중근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f>〈안중근(安重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안중근의 생애[편집]

  •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 안중근은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 안중근은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1909년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안중근의사기념관[편집]

  • 안중근의사기념관(安重根義士記念館)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南大門路) 5가 471번지에 있는 기념관이다.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1970년에 세워져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운영하던 舊 기념관은 철거되고, 2010년 10월 26일 새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새 기념관은 대지 5,772㎡ 연 면적 3,759㎡(약 1,200평)에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로 전시실 12개를 비롯, 강당(260석), 자료실, 휴게실 등 이 배치되고 총공사비 180억 원 중 146억 원은 국고 부담이며, 나머지는 각계각층의 국민성금으로 충당하였다.
  •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갇힌 이후 1910년 3월 26일까지 옥중에서 쓴 유묵(遺墨)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유묵은 힘찬 서체도 뛰어나지만 글에 담긴 의미와 교훈도 되새길 만하다. 약 200여 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40여 점만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안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실이 있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애국순례, 서예 백일장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주변에는 남산도서관과,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백범광장이 인접해 있고, 5분 거리에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뤼순 형무소[편집]

  • 뤼순 형무소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있는 일제 시대의 형무소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되었던 곳이다.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총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 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곳은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수감되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고, 그 후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안중근(安重根,1879.9.2.~1910.3.26)〉, 《두산백과》
  2. 안중근〉, 《위키백과》
  3. 안중근〉,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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