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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는 만오(晩悟)이고. 초명은 평길(平吉)이고, 성명은 [[이강]](李堈)이다.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일제의 청일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에 참석하였다. 1895년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1896년 귀국했다.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교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에서 유학생 시절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1919년 일진회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협(全協), 대동단(大同團)의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기차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 안둥(현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의친왕이 자택에서 사라지자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국내로 송환되었다. 그의 망명실패로 국내 항일 조직이었던 대동단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1927년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00704 의친왕(義親王,1877~1955)]〉, 《두산백과》</ref> | ||
* '''의친왕'''(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아들이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의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1]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 [[김구]]와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있었고,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 중,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B9%9C%EC%99%95 의친왕]〉, 《위키백과》</ref> | * '''의친왕'''(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아들이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의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1]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 [[김구]]와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있었고,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 중,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B9%9C%EC%99%95 의친왕]〉, 《위키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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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동 별서 == | == 서울 성북동 별서 == | ||
− | * 서울 성북동 별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 + | * 서울 성북동 별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대한제국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이 살던 별궁의 정원이다.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에 남은 유일한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이다. 고종 때의 내관 황윤명이 별서(別墅)로 만든 곳으로,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이기도 했으며,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황윤명이 이곳을 별서로 조성하기 전에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에 경승지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전해지며, 자연 계류와 지형, 암석 등이 잘 어우러지고, 공간구성 및 경관연출 등의 측면에서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 서울 성북동 별서는 공간구성은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원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하나로 합류되는 쌍류동천지역으로, 성락원의 산문(山門) 같은 입구가 된다. 이 공간에는 영벽지의 내원 앞을 막아 유연하게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수령(樹齡) 200~300년의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용두가산을 돌아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동쪽 높은 곳에는 가자형 기와집이 있다. 또한 서쪽 아래 암반의 계류에 고요한 소(沼)가 있는데, 물이 흐르는 암반층단에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1992년 12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하지만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된 성락원을 지정해제하고 서울 성북동 별서로 이름을 바꾸어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재지정한 이유는 2008년 지정 당시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점을 이유로 지정했지만, 심삼응이라는 인물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곳에 새로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재지정하였다. | * 서울 성북동 별서는 공간구성은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원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하나로 합류되는 쌍류동천지역으로, 성락원의 산문(山門) 같은 입구가 된다. 이 공간에는 영벽지의 내원 앞을 막아 유연하게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수령(樹齡) 200~300년의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용두가산을 돌아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동쪽 높은 곳에는 가자형 기와집이 있다. 또한 서쪽 아래 암반의 계류에 고요한 소(沼)가 있는데, 물이 흐르는 암반층단에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1992년 12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하지만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된 성락원을 지정해제하고 서울 성북동 별서로 이름을 바꾸어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재지정한 이유는 2008년 지정 당시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점을 이유로 지정했지만, 심삼응이라는 인물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곳에 새로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재지정하였다. |
2024년 10월 16일 (수) 01:51 기준 최신판
의친왕(義親王)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이다. 성명은 이강이다. 의친왕은 대한제국 황족들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개요[편집]
- 의친왕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협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중국 만주 안둥에서 발각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정신을 지켰다.
호는 만오(晩悟)이고. 초명은 평길(平吉)이고, 성명은 이강(李堈)이다.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일제의 청일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에 참석하였다. 1895년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1896년 귀국했다.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교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에서 유학생 시절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1919년 일진회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협(全協), 대동단(大同團)의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기차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 안둥(현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의친왕이 자택에서 사라지자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국내로 송환되었다. 그의 망명실패로 국내 항일 조직이었던 대동단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1927년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1]
- 의친왕(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아들이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의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1]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 김구와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있었고,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 중,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2]
-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이자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독립운동가이다. 어머니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궐 밖으로 쫓겨나 궁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이후인 1900년(광무 4년)에서야 종4품 숙원(淑媛), 1906년(광무 10년)에야 종1품 귀인(貴人)으로 추증받았다. 1891년(고종 28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군되었으며, 1893년(고종 30년) 김제남(金悌男)의 10대손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를 정실 아내로 맞았다. 1894년(고종 31년), 조선국 보빙대사(報聘大使: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1895년(고종 32년)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방문을 각각 추진했지만 유럽 방문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혼란 속에 1896년(고종 33년), 중도 취소되었다. 6.25 전쟁 때는 고종의 자녀들(황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개전 후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북한 공산군에게 함락당했을 때,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때 의친왕이 거주하던 안국동별궁의 본채는 북한 내무성과 여맹에서 사용했고, 의친왕 일가는 뒤채로 쫓겨났다가, 나중에는 별궁 전체를 빼앗겨 의친왕은 효자동 이석의 집으로, 의친왕비는 근처의 빈집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다 전쟁 발발 후 정부가 지원하던 생활비가 완전히 끊기게 되면서 의친왕은 극도로 궁핍해졌고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했다. 이후 1.4 후퇴 무렵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을 하려니 상당한 고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양실조 및 각종 질병에 내내 시달렸다. 휴전 후 안국동별궁으로 돌아왔고, 1955년 8월 16일,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광진구 능동 의왕릉 묘역(현 어린이대공원 일대)에 묻혔다가 서삼릉 묘역으로 옮겨졌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 김씨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시신을 이장해 합장묘로 조성했다.[3]
- 의친왕은 독립운동가이다.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강(堈),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그해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경술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의친왕의 생애[편집]
- 의친왕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궐 밖으로 축출되었지만 청년 시절 의친왕 이강은 적모 명성황후가 적자 순종이 후사가 없자 의친왕의 아들을 순종의 양자로 삼고자 후견인이 되어 궁으로 돌아왔고 총애를 받았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는 1887년 10월 14일 사망했으며 1911년에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우사 김규식, 서광범 등을 동기동창으로 만나며 친분 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그는 1900년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화군에서 의친왕에 책봉되었다.
-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대한적십자사 총재, 순종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1월 21일 아버지인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을 당하자 의암 손병희와 3.1만세운동을 기획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모임을 사동궁과 담을 맞댄 태화관에서 주선하였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1월,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황족들은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 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서울 성북동 별서[편집]
- 서울 성북동 별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대한제국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이 살던 별궁의 정원이다.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에 남은 유일한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이다. 고종 때의 내관 황윤명이 별서(別墅)로 만든 곳으로,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이기도 했으며,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황윤명이 이곳을 별서로 조성하기 전에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에 경승지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전해지며, 자연 계류와 지형, 암석 등이 잘 어우러지고, 공간구성 및 경관연출 등의 측면에서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서울 성북동 별서는 공간구성은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원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하나로 합류되는 쌍류동천지역으로, 성락원의 산문(山門) 같은 입구가 된다. 이 공간에는 영벽지의 내원 앞을 막아 유연하게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수령(樹齡) 200~300년의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용두가산을 돌아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동쪽 높은 곳에는 가자형 기와집이 있다. 또한 서쪽 아래 암반의 계류에 고요한 소(沼)가 있는데, 물이 흐르는 암반층단에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1992년 12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하지만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된 성락원을 지정해제하고 서울 성북동 별서로 이름을 바꾸어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재지정한 이유는 2008년 지정 당시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점을 이유로 지정했지만, 심삼응이라는 인물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곳에 새로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재지정하였다.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편집]
-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大韓帝國 義親王 崇慕會)는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묘에서 의친왕의 후손 및 종현, 일반인들이 참관한 가운데 제향을 주관하기 위해 2006년 설립된 단체로 의친왕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초대 대표회장으로 효령대군 19대손 이재용(李宰容)을 선임하여 매년 제향을 지내오다가 2013년 4월에 공식적으로 의친왕 숭모회는 해체되고, 봉행하던 의친왕 제향은 2013년부터 후손들이 지내다가 2022년부터 의친왕가의 제4대 사동궁주 이준 황손을 중심으로 의친왕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의친왕기념사업회와 의친왕 숭모회가 공동주관으로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편집]
- 의친왕기념사업회(義親王記念事業會)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과 독립운동가의 자손들,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의친왕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로,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22년 설립되었다. 의친왕가 종손 이준 황손이 회장으로,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이해경 왕녀가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가 설립한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전 세계에 흩어진 의친왕의 유물을 한데 모으고,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을 함께 전시하는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 전시를 진행했으며 의친왕 관련 사료와 유물을 수집,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의친왕〉, 《위키백과》
- 〈의친왕〉, 《나무위키》
- 〈의친왕비〉, 《나무위키》
- 〈의친왕(義親王,1877~1955)〉, 《두산백과》
- 김광진 기자, 〈한국인보다 한국 잘 아는 영국인, 의친왕을 말하다〉, 《조선일보》, 2024-08-24
- 김유태 기자, 〈"의친왕 재해석…조선독립 향한 꿈·좌절 그려"〉, 《매일경제》, 2024-08-22
- 사동궁터, 〈의친왕 누구인가? 황실 독립운동가 의친왕 이강의 생애〉, 《네이버블로그》, 2023-08-2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