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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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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치
핑야오 고성
핑야오 고성

진중시(중국어: 晉中市 jìn zhōng shì)는 중국 산시성 (산서성) 중부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1][2][3][4]

개요

진중시의 면적은 16,408㎢이며 인구는 3,379,498명(2020년)이다. 동쪽은 타이항산(太行山, 태행산), 서쪽은 펀하(汾河, 분하), 북쪽은 성회 타이위안시(太原市, 태원시)와 접하고 있다. 주요 민족은 한족이다. 이곳 위서현은 석륵고향이다.

도심끼리는 약 15km의 거리가 있지만 타이위안 우수 국제공항을 사이에 두고 연담도시화가 되어 있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타이위안시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지급시가 된 것은 그 유구한 역사와 경쟁력 때문이다. 명-청대 북중국의 최대 상인 집단이던 진상(晋商)의 발상지로, 1824년 진중에는 중국 최초의 금융 기구인 일승창(日升昌)이 세워졌다. 타이위안-창즈간 철도가 지난다. 시 관내에 핑야오 고성이 있어 그곳으로 가려는 많은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도시이다. 핑야오 고대도시는 14세기 한나라의 고대 유적이며,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차오자다위안은 청나라 때 건축물이다. 시내에서 서남쪽 핑야오 방면으로 12km 지점의 상가장원, 30km 지점에 있는 교가대원과 더 남쪽 링스현(灵石县)의 왕가대원 역시 유명한 관광지이다.

시인민정부는 위츠구(榆次区, 유차구)에 소재하며 행정구획은 위츠구(榆次区, 유차구)의 1개 시할구, 제슈시(介休市, 개휴시)의 1개 현급시와 위서현(榆社县, 유사현), 쭤취안현(左权县, 좌권현), 허순현(和顺县, 화순현), 시양현(昔阳县, 석양현), 서우양현(寿阳县, 수양현), 타이구현(太谷县, 태곡현), 치현(祁县, 기현), 핑야오현(平遥县, 평요현), 링스현(灵石县, 영석현)의 9개 현(县)으로 이루어져 있다.[5] [6]

자연환경

타이항산맥의 중앙, 타이위안 분지 동부에 있다. 도시의 80% 이상이 산악 지형이다. 시내는 동고서저의 지형이며, 대부분이 해발 1,000m를 넘는 언덕이고 가장 낮은 곳은 링스현 남서부의 펀허 기슭으로 해발 547m이다.

기후는 대륙성 계절풍 기후이다. 겨울은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습하다. 연평균 기온은 9℃이다. 강우량은 여름에 집중된다.

역사

진중(晋中)은 진상(晋商)의 발상지로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진중(晋中) 상인(商人)의 상호점포(商号店铺)는 전국 및 일본, 서아시아, 러시아몽골에까지 통용되었고 1824년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금융기구인 일승창(日升昌)이 생겨났다.

한대에 병주 상당군 유차현(榆次县)이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상인으로 유명했던 도시로, 명-청대에 진상의 본거지로써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들이 지역 유지로 부상하였다. 대표적인 상인가문으로는 창(常)씨, 차오(乔)씨, 왕(王)씨, 취(渠)씨, 쿵(孔)씨, 차오(曹)씨, 마오(毛)씨, 허(何)씨 등으로 해당 가문들은 교외 지역에 거대한 성채를 세워 거처하였다. 수천 단위로 거주했던 이러한 장원, 대원들은 현재까지도 놀라운 보존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진중시 내부의 관광 명소이다. 핑야오 역시 진상들의 경제력이 만든 도시로, 지금이야 시골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거대한 도시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에 들어 위츠 전구가 설치되었고, 1958년 진중 전구로 개칭되며 현 지명이 나타났다. 1999년 현급시인 위츠시를 폐지하고 지급시로 승격되 현재에 이른다.

관광

핑야오 고대도시(平遥古城)

중국 산시성 (산서성) 진중시 핑야오현에 있는 도시다. 역사로 따지면 무려 2700여년 동안 도시 기능을 해왔던 곳으로, 16세기 중국의 도시와 거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간직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핑야오 고성이라고도 한다. 중국 5A급 여유경구이다.

핑야오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서주 시대 이후다. 주나라 시대에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토성으로 도시 주위를 방어하였다. 한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군현제에 의해 병주 태원군 중도현이 되었고, 고대 도시의 반듯한 도로와 바둑판식 구역으로 나눠졌다. 이후 북위 지배기에 지금의 명칭인 평요현(平遥縣)으로 바뀌게 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발전을 했다.

14세기, 명나라 시대에는 도시가 크게 발전하여 도시를 둘러싼 6.4km에 이르는 광대한 성벽을 축성하게 된다. 이 때 한나라 시대의 도시계획을 이어받아 시가지 정리도 같이 하게되고, 19세기까지 상업과 금융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특히 청나라 때는 중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일승창도 본점이 핑야오에 있었을 정도로 19세기 중국의 대표 금융도시의 위상을 지녔다. 그러나 청나라가 몰락하고, 훗날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도시 전체가 쇠락해 미처 현대화하지 못하였고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같은 전통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핑야오 성 안은 지금도 잘 정돈된 주택들과 도로들을 볼 수 있다. 시내에는 명나라, 청나라 시대 전통 도시 가옥들이 즐비해있다. 중국 주거양식의 전형이라는 사합원도 매우 많이 보존되어 있다. 핑야오의 가장 큰 매력은 핑야오의 시민들이 지금도 전통 방식대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시안성과 함께 가장 성이 잘 보존된 도시다. 중국 성곽 건축 연구에 있어서도 도저히 빼놓을 수가 없는 도시. 많은 사극도 이곳을 배경으로 찍는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1370년 홍무제시기에 기존의 성벽을 보수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수차례 개보수가 진행되었다. 장대한 규모에 비해 의외로 전투는 역사적으로 딱 2번밖에 안일어났는데 북송시기와 중일전쟁 때 2번이다. 중일 전쟁때 일본군이 성벽에 포탄을 쏴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전투는 동쪽 성벽이 뚫리면서 중국군이 철수해 다행히 도시가 크게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후 문화대혁명 때에도 용케 살아남아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굉장히 정교한 옹성이 인상적이다. 유료로 성곽을 올라갈 수 있으며 일주하면 6.4km 정도 된다고 한다. 평균너비가 3.5m 에 이르러 옛날에는 자전거를 대여해줘서 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불가능하며 일부 지역은 출입금지 되어있다. 높이는 12m 에 이르며 성벽 밖에 해자의 흔적도 남아있는데 해자 깊이는 4m 에 이른다고 한다.[7]

교통

진중시는 산시성 (산서성)의 중요한 교통 허브로, 철도, 고속도로, 공항 등 다양한 교통망이 잘 발달해 있다.

  • 철도 - 진중시는 타이위안-중위 고속철도를 통해 주요 도시들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대도시로의 이동이 용이하다.
  • 고속도로 - 진중시는 산시성 (산서성) 내외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잘 구축되어 있으며, 타이위안, 핑야오 등 주요 도시와의 연결이 수월하다.
  • 공항 - 진중시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타이위안 우스 국제공항(太原武宿国际机场)으로, 국내외 항공편이 운영된다.

교육 및 문화

진중시는 역사적으로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과거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는 학문적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유교 학자들과 학문적 인재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오늘날에도 진중시는 다양한 교육 기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산시대학교와 같은 주요 대학교들이 인근에 위치해 있다.

산업

진중시는 산시성 내에서 중요한 산업도시로, 석탄, 금속, 농업이 경제의 핵심을 이룬다. 농업에서는 곡물, 옥수수, 밀, 그리고 과일 재배가 활발하며, 산업 분야에서는 석탄과 금속 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경제구조 다변화를 통해 서비스 산업관광업도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다.

출신인물

석륵

후조(後趙)의 창건자인 석륵(石勒)은 (274년 ~ 333년, 재위: 319년 ~ 333년)은 오호십육국 시대의 주요 인물로, 흉노(匈奴)의 하위 부족인 갈족(羯族) 출신이다. 석륵은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독립하여 후조를 건국하였으며,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다.

석륵은 산시성 상당군 출신으로, 갈족 소부락의 수령 주갈주(周曷硃)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성(姓)이 없이 이름만 배(㔨)라고 불리며 살았는데,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발생하면서 부족이 흩어졌고, 석륵은 떠돌다가 서진(西晉)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잡혀 산동 지역으로 팔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 하지만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해방된 후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汲桑)과 함께 도적 무리에 가담하고, 용병으로 활약했다. 급상은 석륵에게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석륵은 독립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게 된다.

307년, 석륵은 한(漢)의 유연(劉淵)에게 항복하고 그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이후 유연의 뒤를 이은 유총(劉聰) 아래에서 하북과 하남 지역을 장악하고,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311년, 석륵은 낙양(洛陽) 공략에 참가하여 10만 명을 격파하고 낙양을 함락시켰다. 그 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이어가다가 동료 장군 왕미(王彌)를 속여 죽이고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

석륵은 글씨를 읽지 못했으나 뛰어난 식견을 지니고 인재를 아끼는 성격이었다. 309년 하북을 공격할 때 유능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을 결성하고, 그중 장빈(張賓)은 석륵의 참모로 활약했다. 312년에는 수춘을 공격하던 중 장마로 위기에 처했으나, 장빈의 조언에 따라 기주(冀州)에 거점을 두고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318년 한(漢)의 황제 유총이 죽고 반란이 일어나자, 석륵은 조공(趙公)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석륵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후조를 건국했다.[8]

지도

동영상

각주

  1. 진중시〉, 《위키백과》
  2. 진중시〉, 《나무위키》
  3. 산시성(산서성)〉, 《위키백과》
  4. 산시성(산서성)〉, 《나무위키》
  5. 두산백과: 진중〉, 《네이버 지식백과》
  6. 중국행정구획총람: 진중시〉, 《네이버 지식백과》
  7. 핑야오 고대도시〉, 《나무위키》
  8. 석륵〉,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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