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락스칼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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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락스칼라주(스페인어: Tlaxcala)는 멕시코 중동부에 위치한 주이다. [1][2]
목차
개요
틀락스칼라주의 면적은 4,016km²이며 인구는 1,342,977명 (2020년 기준)이다. 주도는 틀락스칼라이다. 북쪽과 동쪽, 남쪽으로는 푸에블라주, 서쪽으로는 멕시코주, 북서쪽으로는 이달고주와 접한다.
틀락스칼라주는 멕시코 시티의 바로 옆에 위치한다. 이름의 유래는 원주민 민족 중 하나인 틀락스칼텍이다.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작은 주. 원래는 가장 작은 주였으나, 2016년 1월 21일에 멕시코 시티가 32번째 주가 되면서 가장 작은 주는 멕시코 시티에 넘어갔다. 스페인 부왕령 누에바에스파냐 시절에는 이 다섯 배는 되는 크기였으나, 멕시코 독립 이후 좀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스페인과 친하게 지내던 과거사가 기분 나빴던 멕시코 정부에 의해 강제로 분할되었다. 일단 멕시코 연방 내에 편입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으나 멕시코 시티와 너무나 가까워 결국 자치권을 잃고 만다.
역사적으로 다른 멕시코 지역과는 거리감이 꽤 있는데다가 경제 수준도 멕시코 중남부에서는 괜찮고, 치안 역시 헬이나 다름없는 멕시코 치안 상황에서도 나은 편이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지역 경제 사정이 안좋아져서 강도들이 출몰하고 있으므로 주의 해야한다. 대개 136번 국도 연선 및 아르코 노르테 상의 컨테이너 차량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는 편이며 (136번 국도, 아르코 노르테), 자전거 운전자를 대상으로 한 강도사건도 발생했다. 2021년에는 칼풀랄판 인근 136번 국도에서 자전거 운전자가 머리에 실탄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버스 강도의 경우 주로 틀락스칼라 주도 및 푸에블라와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하는 경향을 보이며, 틀락스코 (Tlaxco)에서 푸에블라주 와우치낭고 (Huauchinango)로 가는 길목 등 시에라 노르테 푸에블라로 가는 길에서 발생하기도 한다.[3]
자연환경
멕시코시티 동쪽 아나우악 고원을 차지한다. 기후는 온화하여 여름과 초가을이 우기이다.
역사
아즈텍 제국과의 반목
1519년 아즈텍의 세력 지도. 틀락스칼텍이 완전히 아즈텍에 둘러싸여있다. 원래 틀락스칼텍인들과 테노치티틀란은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두 국가가 발원한 14세기경 중앙아메리카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치치멕 세력과 신흥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틀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같은 나와틀 계열이었던 틀락스칼라와 테노치티틀란은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그런데 테노치티틀란이 너무 커져버려서 틀락스칼텍으로서는 승산이 크게 낮아졌다. 아즈텍은 인신공양 의식을 앞둘 때마다 틀락스칼텍인을 공격, 포로를 잡아 인신공양의 제물로 희생시킨 다음 인육으로 먹었으며 이게 그 유명한 꽃 전쟁이다.
이때 아즈텍은 틀락스칼텍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종교적 이유로 인육을 필요로 했기에 틀락스칼텍을 인육 공급원으로 쓰고자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15세기 당시 테노치티틀란, 즉 아즈텍은 멕시코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에서 틀락스칼텍은 테노치티틀란 바로 코앞임에도 놔두고 있었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듯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 일부러 놔뒀다는 것은 몬테수마 2세의 주장이라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아즈텍은 틀락스칼라의 마을을 포위하거나 무역을 단절시키는 등의 정규전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즉, 평범하게 틀락스칼텍의 저항이 완강했기 때문에 점령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단어가 비슷해 틀라카틀올리란 인육을 넣어 만든 옥수수죽 음식이 틀락스칼텍인으로 만든 요리란 오해를 사는데 해당 요리 자체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인육을 옥수수죽과 섞어 만든 음식으로 딱히 틀라스칼텍인의 인육만으로만 만드는 요리가 아니다. 물론 가장 가까운 틀락스칼텍 주민들이 요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국력에서 완전한 열세인 상황에서 아즈텍 내부의 결속 또한 단단하니 어떻게 반격의 여지가 없어 틀락스칼텍인으로서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었다. 아즈텍 남쪽은 무성한 정글이고 북쪽의 치치멕은 황야지대로 그쪽 지역 부족들은 수렵으로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사실상 중앙아메리카에서 아스텍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전무했다. 이러한 정세는 하늘에서 신이라도 내려오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콩키스타도르와의 동맹
16세기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가 메소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이다. 콩키스타도르는 그 수가 적었지만, 그들은 대항해시대의 첨병으로 아즈텍군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소양을 가진 에르난 코르테스는 1,000명도 되지 않는 군사력으로 인구 수백 만에 수 만의 군대를 가진 아즈텍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대담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한다.
베라크루스와 푸에비아 지역을 지날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텍스코코 호수에 도달할 뻔했던 스페인 군대를 주춤하게 한 것이 바로 틀락스칼텍인들이었다. 틀락스칼텍인 군대는 기습을 주로 활용했고 흑요석 검과 천갑옷을 사용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콩키스타도르들이 마주하지 못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틀락스칼텍인의 군대는 아즈텍의 다른 군대와는 달리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고 한다. 당시 틀락스칼텍인들은 패배하면 스페인인들도 테노치티틀란인들처럼 자신들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철갑옷과 철검으로 무장하고 총과 대포를 쏴대는 콩키스타도르들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갔지만, 이들은 강자에게 산 채로 붙잡혀서 산 제물로 바쳐져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전투 중에 비명횡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는 척하면서 진영을 염탐하게 하는 기만전술을 펼치기도 하고, 정체 모를 스페인군의 무기에 대한 공포와 피해를 줄이려고 야간습격을 기도하거나,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등 아무리 죽어나가도 포기하는 법 없이 저항했다. 이들의 용맹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말 위에서 내지른 기병창을 손으로 붙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다른 전사가 흑요석 검으로 후려쳐 중상을 입은 기수는 며칠 후에 사망했다.
모른 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악에 받혀 죽으려고 달려드는 틀락스칼텍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코르테스는 거짓 화친에, 야음을 틈탄 매복기습까지 실패한 뒤에야 고개를 숙인 틀락스칼텍의 사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틀락스칼텍을 이루는 세 개 부족 중 두 부족의 족장은 이 강력한 이방인들과의 동맹에 찬성했지만, 가장 세력이 큰 나와틀 부족의 지도자 젊은 치코텐카틀은 반대했다.
하지만 코르테스와의 동맹을 찬성하는 족장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다수결 합의제에 따라 틀락스칼라 부족연맹체는 공식적으로 코르테스의 혈맹이 되었다.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원정을 갈 때 틀락스칼텍 전사 8천명을 동맹군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슬픔의 밤 사태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코르테스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돕던 극소수의 부족들 중 하나였다. 오툼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코르테스는 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노획한 아즈텍 총사령관의 깃발을 선물하면서 영원한 동맹을 약속했다.
이후에 이어진 아즈텍 정복 전쟁에서 스페인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지형정보를 주는 건 물론이고 각종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될 때는 최대 20만 명의 병력를 지원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젊은 치코텐카틀을 부족원들이 붙잡아 코르테스에게 압송하기도 했다. 이때 치코텐카틀은 반기를 들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
아즈텍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으로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로부터 보상과 자유를 보장받았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압송된 뒤에도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의 '파트너'로서 스페인 왕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탈 권리[, 총기를 휴대할 권리, 귀족 신분을 유지할 권리(기존 통치구조를 유지할 권리) 등을 인정받았으며, 스페인 왕가로부터 문장과 권리를 하사받기도 한다. 스페인은 이 약속은 지켜 틀락스칼텍의 특권들은 스페인이 멕시코 독립전쟁에 의해 물러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다. 아즈텍 주변 치치멕이나 다른 마야계 부족들은 거의 전부가 코르테스와 협력했고 그 공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틀락스칼텍의 특혜에는 못미쳤으며, 심지어 가장 먼저 코르테스 일당과 동맹을 맺고 병력을 제공한 베라크루스 일대의 토토낙인들도 이 정도 대우는 받지 못했다.
스페인이 멕시코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때는 군사 지원을 했으며, 오히려 다른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데에 가담하고, 심지어 스페인의 지원 하에 치치멕이 지배하던 구역으로 이민 가서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 테노치티틀란 함락 때 살아남아 투항한 아즈텍인들도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철천지 원수들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 식민정부와 협상을 해서 개척지 영구 보유 및 세금과 부역 완전 면제라는 특권을 얻어냈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 정복 당시 모든 잉카인들을 멸족 직전까지 몰아갔지만(잉카 제국 문서 참고) 여기선 상당히 유화적이었다.
문화적으로 참견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식인풍습 만큼은 바로 잡았다. 하느님의 피와 살을 직접 영접하는 영성체 행사를 통해 교정했고,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전도도 지속적으로 했지만, 그래도 16세기의 중앙아메리카의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멕시코인 중에서 원주민식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틀락스칼텍인 조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주민 문화가 스페인의 정복으로 뿌리뽑힌 지금에는 라이벌이자 숙적인 아즈텍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틀락스칼텍인을 연구하는 몹시 미묘한 일도 일어난다. 특히 틀락스칼텍인들과 아즈텍은 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이다.
다만 동맹이라고 해서 없던 면역력이 생기는 건 아니라서 스페인인이 들고 온 전염병에 의한 피해를 가장 크게 봤다. 한때는 몇만의 병력을 제공하던 틀락스칼라의 틀락스칼텍인들이 500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민 등으로 인구가 많이 빠져나갔던 것도 컸고 혼혈이 잘 이루어지다 보니 그만큼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멕시코 독립 이후
전성기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막을 내린다. 멕시코 연방은 끝까지 친스페인파였던 틀락스칼텍을 연방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틀락스칼텍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방이 멕시코 연방에 합류한 시점에서 결국 자치권을 넘겨주고 멕시코 연방 틀락스칼라 주가 된다.
근현대 멕시코 연방은 아즈텍 제국으로부터 바로 계승된 것도 아니고 아즈텍만큼 잔혹한 국가는 아니어서, 편입되고 나서도 유혈 정치보복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인프라는 덜 신경 써서 그런지 멕시코 중부지역 중 취약한 편에 속한다.[18] 아무래도 아즈텍 제국을 추앙하고 틀락스칼텍을 깎아내리는 멕시코의 상황이 틀락스칼라 주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보인다.[4]
산업
주요 생산 곡물은 보리·옥수수 등이며, 투우소·젖소 등도 사육한다. 또 세라피 등의 수공예품과 모직물 생산 등이 중심 산업이다.
교통
- 아타고속 (Atah)가 지역 교통을 책임지고 있다. 틀락스칼라를 허브로 하여 근교 지역으로 운행하고 있다. 가장 멀리 가는 곳이 멕시코 시티 동부여객터미널과 베라크루스주의 포사 리카이다. 그러나 서비스가 매우 나쁘고, 활발히 운행하고 있는 노선 또한 틀락스칼라 각지에서 멕시코 시티로 가는 노선들일 뿐, 케레타로, 몬테레이 등 북부 지방으로 가는 노선은 없다. 홈페이지 실제로 이용객들도 독점 행태를 욕하며, ADO 또한 독점이다보니 프리메라 플루스를 위시한 플레차 아마리야 그룹, 옴니부스 데 메히코 같은 북부 지방 버스 회사가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 ADO도 동부 지역으로 운행하고 있으나 커버리지가 매우 좁다.
- 틀락스칼라에서 갈 수 있는 곳이 근교 지역밖에 없는 데다 동남부 지역 일대에서의 ADO 계열의 독점이 매우 심하다 보니 케레타로나 과달라하라 등지로 가기 매우 곤란하다. 모두 푸에블라에 가서 이용해야 하나, 매진되었을 경우 멕시코 아르코 노르테 고속도로를 놔두고 멕시코 시티로 가서 버스를 이용해야해서 시간적 손실이 매우 크다.
틀락스칼라
멕시코 틀락스칼라주의 주도이며 정식 이름은 틀락스칼라데히코텐카틀(Tlaxcala de Xicohténcatl)이다. 멕시코 시티 동남쪽 100km 지점, 해발고도 2,300m의 고원 지대에 위치한다. 기후는 온화하여 여름과 초가을이 우기(雨期)이다. 멕시코에서는 가장 오랜 도시의 하나로 에스파냐인이 정복하기 전에 틀락스칼라 왕국이 있었다.
그들은 아스테카 연합군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코르테스가 이끄는 에스파냐군에 가담하여 에스파냐인의 멕시코 정복을 도왔다. 에스파냐인에 대한 충성의 포상(褒賞)으로 많은 특권이 주어졌는데, 이 지방에 비교적 부유한 농가가 많은 것도 에스파냐에 의한 약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옥수수·콩 등을 집산하고 섬유공업이 이루어진다. 1521년 세워진 멕시코 최고(最古)의 산프란시스코 교회가 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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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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