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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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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은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혁명가이다.

개요

  • 전봉준은 조선 말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이며,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자(字)는 명좌(明佐), 호는 해몽(海夢)이다. 어릴 적 유독 체구가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고 훗날 많은 이들은 그를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 불렀다. 1885년(철종 6)에 몰락한 양반이었던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異說)이 있으나 현재로선 전북특별자치도 고창(高敞)의 당촌 출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전창혁은 서당을 차리고 훈장으로서 글을 가르쳤는데, 전봉준도 부친의 밑에서 공부하였다. 전봉준은 풍수지리설을 믿는 부친을 따라 출생한 당촌을 떠나 고부, 태인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여러 인물과 교유하였다. 김개남(金開南), 손여옥(孫如玉), 손화중(孫華仲) 등이 전봉준과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전봉준은 이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해 나갔다. 전봉준의 무덤은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녹두야 녹두야 전녹두야, 그 많은 군사 엇다 두고, 쑥대밭에 낮잠 자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라는 가사의 민요 <파랑새>가 전해지고 있다.[1]
  • 전봉준(1855년 1월 10일 ~ 1895년 4월 24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고부접주였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 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2]
  • 전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의 후손이며,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창혁),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綠豆)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젊었을 때의 가정생활은 상당히 곤궁했으며〈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 공초에 따르면 태인에서 살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30대 때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고부 봉기 직전 전봉준의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는 1893년의 김제 금구(金溝)집회 참여이다. 금구집회는 '척왜양창의'를 외친 보은집회와 유사하게 '척양척왜'를 구호로 내세웠으나, 최시형의 교주신원운동의 연장선인 보은집회와는 맥을 달리했다. 애당초 보은이 아닌 금구에 별도로 집결했다는 뜻은, 남접 세력들이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손화중(孫華中) 대접주와 서장옥 접주 등을 중심으로 한 금구집회 세력은 보은집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긍엽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전봉준도 접주로서 금구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은집회가 해산하자 같이 해산하였다.[3]
  •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은 전철로(全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최후의 「전봉준초초문목(全琫準初招問目)」과 『판결선고서원본(判決宣告書原本)』에 따르면 그의 주요 거주지는 태인(泰仁) 산외면(山外面) 동곡(東谷)이라고 전한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이다.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4]

전봉준의 생애

  • 1890년(고종 27) 전봉준은 동학에 입도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고부 일대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2년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에 조병갑(趙秉甲)이 군수로 발령되었는데, 그는 농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학정을 일삼았다. 1893년 11월 조병갑에게 불만을 품은 고부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대표로 하여 소장을 제출하였지만, 조병갑은 이를 무시하였다. 이후 익산군수로 발령된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되자,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고부민란). 이후 전봉준과 농민군은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는데, 당시 농민군의 지도층에서는 민란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전봉준은 민란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자 하였으나, 새롭게 고부군수가 된 박원명(朴源明)의 회유에 농민군의 일단 해산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민란을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횡포를 일삼자, 전봉준과 농민군은 무장(茂長)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에 도착한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을 모으고,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워 봉기(起包)하였다. 이후 김개남도 전봉준에게 합세하였다. 3월 25일 전봉준을 총대장(總大將)으로 한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전주로 향하였다. 이후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벌인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홍계훈(洪啟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전주(全州)로 보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과의 황룡촌(黃龍村)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전주성 함락 후에도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군에게 유리한 전황이 형성되었다. 그 사이 조정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고, 청군은 5월 4일 아산만(牙山灣)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거론하며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열세에 처한 상태에서 홍계훈의 회유와 청과 일본 양국의 군대 철수를 위하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일시 해산하였다. 전주화약에서 농민군은 27개의 폐정개혁안과 집강소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군과 관군 간의 갈등이 일부 해소되었지만, 일본군은 철병하지 않고 오히려 경복궁에 침입하여 내정개혁을 강요하고 청에게 도발하였다. 전봉준은 일본에 항거하기 위하여 1894년 9월 삼례(參禮)에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재봉기를 결단하였다. 남접(南接)을 대표하는 전봉준은 이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 최시형(崔時亨)의 동의를 구하여, 남접과 북접의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이들은 서울로 나아갈 준비를 하며 먼저 공주(公州)를 향해 떠났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그리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한 관군과 일본군은 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에서 충돌하였다. 양측은 공주 일대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이다 잠시 퇴각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금 공주의 충청감영(忠淸監營)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우금치(牛金峙)에서 격돌하였다(우금치 전투). 조선·일본 연합군이 우금치에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신식 무기로 농민군을 공격하여 농민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하여 전봉준은 퇴각을 결정하였고,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 퇴각한 전봉준은 전주로 내려와서 재봉기를 준비하며 동학농민군에게 비협조적인 벼슬아치나 토호들을 징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동학농민군의 전열을 재정비하여 원평(院坪,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원평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봉준은 다시 태인(泰仁)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성황산(城隍山)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패전 이후 태인을 떠나 입암산성(笠岩山城, 전라남도 장성군), 백양사(白羊寺)를 거쳐 순창(淳昌) 피노리(避老里)로 피신하였다. 전봉준은 예전 부하인 김경천(金敬天)이 이곳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여 그를 찾았는데, 김경천은 전봉준이 머물고 있는 곳을 이웃 마을 선비에게 밀고하여 민보군(民保軍)이 전봉준과 그 일행을 덮쳤다. 전봉준은 온몸을 맞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채로 체포되었다. 순창 관아에서는 전봉준과 일행을 전주 감영으로 호송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요청에 따라 서울로 압송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봉준과 일행은 담양(潭陽), 나주(羅州)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영사관 순사청(巡査廳 감옥에 갇혔다. 전봉준과 성두한(成斗漢), 손화중,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景善) 등은 법무아문(法務衙門) 산하에 임시로 만들어진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재판을 받았다. 권설재판소는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4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정읍 전봉준 유적

  •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鳥巢)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집이다. 1981년 11월 2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878년(고종 15)에 세워진 초가 3칸의 돌담집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의 옛집이다. 남향으로 동쪽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 순서로 되어 있다. 부엌은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고, 큰방과 윗방은 장지문을 통하며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끝방 앞쪽은 담을 둘러 땔감을 두었다. 두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고, 대문 동쪽에 화장실이 있다. 집둘레의 돌담은 돌 사이에 회를 넣어 굳히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전봉준단소

  • 전봉준단소(全琫準壇所)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전봉준의 제단과 허묘(虛墓)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선생고택지에서 약 500m 떨어진 소나무 숲에 있다.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제단(祭壇)과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1994년부터 연차적으로 정비하여 유해가 없는 허묘(虛墓)를 조성하고, '전봉준장군운명시비'도 세웠다. 동학혁명 지도자인 전봉준은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어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비석에는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고 새겨져 있다.

교조신원운동

  •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은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 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864년 최제우(崔濟愚)가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左道亂正)' 죄로 사로잡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邪敎)로 몰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노력으로 동학은 경상·충청·전라의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넓혔고, 교조(敎祖)인 최제우의 신원(伸寃, 억울함이나 원한을 품)과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1871년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동학은 정부에 더 가혹하게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 호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전봉준(全琫準), 서인주(徐仁周) 등 남접(南接)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어 교조의 신원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중단 등을 요구하고, 이를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 1892∼1893년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러한 사건을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고 하며, 일부 학자들은 '척왜양'을 내세운 정치운동을 따로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으로 구분해 나타내기도 한다. 이 운동은 삼남 지방에서 잇따라 대규모 집회를 열어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농민의 불만과 정치적 요구,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92년 10월 공주 집회에서 시작되어 1893년 4월 삼남 집회의 해산까지 진행된 교조신원운동은 겉으로는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요구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지만, 삼례 집회와 괘서 투쟁, 삼남 집회 등을 거치며 반봉건·반외세의 투쟁 의지를 결집시키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의 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온건한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 구분되는 전봉준, 서인주, 손화중 등 남접의 강경파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곧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농민전쟁을 예비했던 사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고창 무장기포지

  • 고창 무장기포지(高敞 茂長起包址)는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한 장소이다. 2022년 5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로, 1894년 3월 20일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농민운동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 발표했던 장소이다.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에 항의하고자, 1894년(고종 31) 1월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은 이 지역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고부민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조병갑은 전라감영으로 달아났다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朴源明)이 사태를 잘 수습하여 고부민란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안핵사(按覈史)로 임명된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키고, 죄 없는 농민들을 함부로 체포하는 등 농민들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를 지켜본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재봉기를 준비하였고,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은 무장현(茂長縣)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골(堂山)에 모인 농민군들 앞에서 포고문 발표하고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고창 무장기포지는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로, 전봉준이 이곳에서 포고문을 발표한 이후 고부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농민 봉기가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고창군은 이 일대를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고, 2022년 5월 2일에는 고창 무장포기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봉준에 대한 평가

  • 전제정권과 탐관오리의 부패를 여러 번 상소하여 개정하려 노력하였고 민권을 제창한 사상가이자 민중과 함께하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가였다.
  • 전봉준은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이었으나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는 태도를 보였다.

동영상

각주

  1. 전봉준(全琫準,1855~1895.4.24.)〉, 《두산백과》
  2. 전봉준〉, 《위키백과》
  3. 전봉준〉, 《나무위키》
  4. 전봉준(全琫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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