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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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닝구(중국어: 长宁区 zhǎng níng qū)는 중국 상하이시 도심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구이다. [1][2][3][4]
개요
창닝구의 면적은 37.19㎢이며 인구는 693,051명(2020년)이다. 동쪽으로 징안구(静安区, 정안구), 서남쪽으로 민항구(闵行区, 민행구), 동남쪽으로 쉬후이구(徐汇区, 서회구), 북쪾으로 푸퉈구(普陀区, 보타구)에 접하고 있다. 상하이의 18개 구 중 다섯번째 규모이다.
교통의 중심지로 상하이훙차오국제기장(上海虹桥国际机场)이 위치하고 있는 훙차오개발구(虹桥开发区)는 상하이(上海) 최초이며 가장 성숙된 업무지구로 최근 신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중국연통(中国联通) 상하이분공사(上海分公司)의 본부와, 상하이동물원, 상하이 중산공원(上海中山公园) 등이 있다. 구인민정부는 위위안로(愚园路, 우원로)에 소재하며 행정구획은 9개 가도, 1개 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창닝구는 내부에 훙차오경제기술개발구(虹桥经济技术开发区)가 존재하는데, 이 개발구는 개혁개방 직후인 1982년에 지정된 상하이시 최초의 대외경제특구이다. 보통 중국이 이러한 개발구를 지정하면 거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개발하지만, 이 훙차오경제기술개발구는 0.652km²라는 매우 조그마한 면적만 지정되어 개발되었다.[5][6]
자연환경
서쪽에는 훙차오 국제공항이 있기 때문에, 구내 서부의 홍챠오 경제개발구는 국제무역센터, 세계무역센터, 만도센터 등이 있는 비즈니스 거리이다. 외래 인구는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
가장 쾌적한 계절인 봄은 3월부터 5월로 따뜻한 기온과 간헐적인 강우가 특징이다. 상하이의 여름은 6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며 평균 최고 기온은 약 32℃이지만, 약 열흘 정도는 최고 35℃를 넘어선다. 이 시기에 뇌우와 태풍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가을은 일반적으로 일평균 15~25℃ 사이 온화한 기온과 쾌적한 습도를 보여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겨울의 평균 온도는 약 5℃로 영하의 추위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으로 간혹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상하이는 온난습윤기후(Cfa) 지역에 속하며 덥고 습한 여름, 시원하고 건조한 겨울, 비교적 온화한 봄과 가을 등 뚜렷한 사계절이 나타난다.[7]
역사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지역에 속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일찍이 초나라 춘신군의 봉토였으며, 그 흔적은 현재 상해를 관통하는 황포강의 옛 명칭인 춘신강(春申江)과 상해에 대한 약칭 중 하나인 신(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삼국 시대 오나라의 항구 도시였으며, 오나라 황제 손권의 형인 손책이 회계 전투에서 이겨 이 곳을 차지하였다. 손권은 이 곳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지나칠 수가 없어, 자신의 별장을 만들어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 별장의 위치가 와이탄 주변에 있다. 서기 4, 5세기 진나라 때 송강(松江)(지금의 소주하ㆍ蘇州河)과 임해 일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고, 대나무로 "호(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독(瀆)"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송강 하류 일대(현재 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지대)를 "호독(扈瀆)"이라고 불렀다. 이때, "호(扈)"를 "호(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해는 오송강(吳松江) 하류에 위치해 "상해포(上海浦)"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 중엽에는 화정현(華亭縣)의 일부였고, 송나라 말에 상해진(上海鎭)이 형성되었으며, 1292년 상하이현(上海縣)이 되었다. 명나라가 흥성하던 1553년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고, 남경지구 쑹장 부 관할이 되었다. 송강부 관할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면방의 중심지였다. 청대에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여 장강 이남의 송강부에 귀속시키고, 상해 세관을 설립했다.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에 중국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상하이는 1843년 중국의 5개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써 개항되었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계속해서 상하이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1842년 8월에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은 굴욕적이고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였고, 1843년 10월에 후먼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인의 주거지와 임대조건에 대하여 합의하여 상하이 시내에 거주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1843년 11월 14일 첫 번째 영국 영사인 조지 밸푸어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11월 17일에 정식으로 상하이의 개항을 선포하였다. 이후 100년 동안 상하이에 조계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1854년 태평천국전쟁 중에 자치행정기구를 설립하면서 공식적으로 청나라 정부의 행정과 사법관할권 밖의 독립된 조계지가 되었다. 그 후에, 상해는 2개의 상하이 조계지와 중국지방정부가 분할 관리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상하이 황푸구, 징안구, 훙커우구, 양푸구는 상해 공동 조계였고, 창닝구는 상하이 공동 조계 밖에 구역이었다. 또 루완구와 쉬후이구는 프랑스의 조계지였다.
자베이구와 난스구는 중국이 관리하던 지역이었으나 조계 때문에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개항 후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로써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시아의 유일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하이는 조계 때문에 전화가 미치지 않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충분한 국제관계를 향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근대 상하이의 번영을 가져왔다.
1912년 중화민국 성립 전후에는 청나라의 구세력이 아직 철저히 제거되지 않았고, 새로운 세력조차 미숙한 상태였다. 군벌이 난립해 중앙에서 지방까지 군인이 정권을 잡았고, 덕분에 정부와 사회는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상하이의 조계는 평화로웠고, 경제와 인구 등 각 방면에서 오히려 빠른 발전을 보였다. 1912년부터 1936년까지를 상하이 조계지가 번영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중화민국 초년에 조계 외에 자베이와 난스 지역은 장쑤성에 포함되었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조계지 이외의 지역을 상하이 특별시를 세우고, 중화민국과 행정원을 직속 관할로 귀속시켰다. 동시에 장쑤성의 상하이현(上海縣)과 보산현(寶山縣)의 17개 도시를 편입했다. 1930년 7월 상하이시로 개칭했다.
20세기 초, 상하이에는 중국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사건이 계속 발생한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 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7월과 1925년 1월 중국 2대와 4대 대표대회가 개최된다. 1925년 5월 30일, 일본계 방적공장의 공장주가 파업노동자를 총살했고, 이에 상하이 학생과 시민들은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인 난징루(南京路)에 모여서 항의를 했다. 이에 대한 영국경찰의 발포로 오삼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적인 반영(反英)운동을 야기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자베이에서 4·12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혁명군이 노동자 규찰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분열되었다. 그 후에도 중국공산당(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리에 성립)의 중앙기관은 공동 조계 중립구역인 윈난로에 숨어 있다가 1933년 강서 해방구가 안정된 후에 그곳으로 옮겨왔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이 중국동북에서 일으킨 만주사변 후에, 상하이에서 일본 승려가 중국 노동자에게 구타당한 것을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상하이 자베이 구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의 격렬한 군사 충돌이 한 달 남짓 계속되었고, 국민정부가 잠시 뤄양으로 옮겨가기까지 했다. 1937년 8월 13일, 일본 제국군은 상하이를 다시 침공하여 상하이를 수비하던 국민혁명군과 전투를 치렀다.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끝내 일본군에 패하고, 일본군이 무력으로 상하이 조계 외의 지역을 점령한다. 이 기간에 상하이 공동 조계의 북쪽 절반, 즉 지금의 훙커우 구와 양푸 구는 일본군의 방어지역과 일본 세력의 범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상하이 조계를 공격했고, 상하이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후에 일본은 조계를 그를 돕던 왕징웨이 정권에 반환했고, 미국과 영국도 조계지를 포기했다. 1942년부터 조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100년 간 지속되던 조계시대는 끝이 났다.
1945년 상하이는 중화민국이 탈환하여 관할하게 되었고 1949년 5월까지 상하이는 국민정부가 통치하였다. 그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국부군과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사이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1949년 5월 27일, 인민해방군이 국부군을 패배시킨 후 상하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 기간에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 외국기관, 그와 관련된 많은 인원과 재산이 상하이를 떠났다. 1949년, 상하이는 직할시가 되었고, 후에 중국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창닝구의 과거 명칭은 화팅(华亭)으로, 청나라 선통제 때 파화(法华)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어 중화민국이 상하이를 직할시로 승격시킬 때 창닝구의 명칭은 파화구(法华区)였다. 현재 명칭인 창닝구라는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에 붙은 명칭으로, 창닝구를 관통하는 도로인 창닝루(长宁路)에서 따왔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의 1년간은 파차오구(法曹区)로 불리었던 적도 있다.
교육
- 상하이교통대학 파화교구(上海交通大学 法华校区)
- 동화대학 창닝교구(东华大学 长宁校区)
- 화둥정법대학 창닝교구(华东政法大学长宁校区)
- 상하이의약직업대학(上海医药职工大学)
- 상하이시창닝구여가대학(上海市长宁区业余大学)
관광
- 쑹칭링묘(宋庆龄墓)
- 상하이동물원(上海动物园)
- 훙차오예술센터(虹桥艺术中心)
- 류하이쑤미술관(刘海粟美术馆)
교통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과 함께 중국 상하이를 대표하는 2개 공항 중 하나로 상하이공항집단이라는 국유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원래는 상하이의 관문 국제공항이었으나, 워낙 협소하고 시설이 낙후해 한계가 있었다. 이에 서울권의 영종도 신공항, 즉 인천국제공항처럼 푸둥지구 동쪽 끄트머리 바닷가에 신공항을 만들기로 하고 1999년 개항하는데 이것이 현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이다. 이후 훙차오 공항은 국내선 전용이 됐다가 도심에서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일부 국제선[1] 노선 역시 홍차오에도 다니고 있다.
즉 푸둥/훙차오의 관계는 대만의 타오위안국제공항/쑹산 국제공항와 비슷하다. 그러나 푸둥-홍차오 거리는 인천-김포보다도 멀리 떨어져있다.[8]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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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징안구〉, 《위키백과》
- 〈징안구〉, 《나무위키》
- 〈상하이시〉, 《위키백과》
- 〈상하이시〉, 《나무위키》
- 〈두산백과: 징안〉,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징안구〉,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상하이 기후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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