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로렌수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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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로렌수당구(중국어: 风顺堂区 fēng shùn táng qū)는 중국 마카오 마카오 반도 남서부에 위치해 있는 당구다. [1][2][3]
개요[편집]
대당구의 면적은 1.0km²이며 인구는 4.93만명(2011)이다.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세 당구와 접한다. 당구 남부에는 페냐 언덕이 위치한다. 마카오 특별행정구 정부청사(옛 마카오 총독부 청사) 소재지이기도 하다.
마카오 역사에서 경제·종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성로렌조 성당은 종교적 상징뿐 아니라 독특한 건축미와 항해 역사와의 연관성으로 마카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돋보이는 남부 지역과 함께, 이 지역은 마카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이곳의 성당은 1558에서 1560년 사이에 예수회에의 해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규모로는 1618년 제1차 중건 되었고 이후 1803, 1846, 1892년에 걸친 중수(重修)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마카오특별행정부(澳门特区政府) 본부와 여러 정부 부문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카오(澳门)에서 가장 유명하며 마카오의 3대 고찰(古刹) 중 최고로 오래되었으며 2005년 마카오역사성구(澳门历史城区)의 일부분으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遗产)에 등재된 마각묘(妈阁庙)가 소재하고 있다.[4] [5][6]
자연환경[편집]
이 지역은 북쪽으로 대당구와 연결된 상업지구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고급 주거 지역과 고대 사찰이 위치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카오는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로 평균 습도는 75% ~ 90% 정도이다. 계절별 날씨는 몬순에 크게 좌우되며,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가 급격하다. 연간 평균 기온은 22.3 °C로, 7월은 가장 더운 달이고, 평균 28.6 °C를 기록한다.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며, 평균 14.5 °C이다. 중국 남부의 해안부에 위치하여, 연간 2,030mm의 많은 강수량을 가진다. 그러나 1월에서 3월까지의 겨울은 대부분 대륙성 몬순의 영향으로 건조하며, 10월에서 12월까지의 가을은 화창하며 따뜻하고 습도가 낮다. 겨울은 비교적 춥지만 화창하고, 4월에서 6월까지 봄에는 무덥고 습한 기운이 여름까지 이어진다. 여름은 가장 덥고 습하며, 때로는 비와 태풍을 동반한다.
역사[편집]
포르투갈 상인이 마카오를 발견하기 전에는 푸젠성의 어민과 광둥성의 농민이 이곳에 첫 번째로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포르투갈인인 조르쥬 알바레스(Jorge Alvares)가 1513년 마카오에 와서 무역을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포르투갈 상인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접목된 지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1557년이다.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무역 활성화와 해적이나 지역 적대세력으로부터의 해안방어를 위해서 포르투갈인의 정착을 허용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로부터 일정 금액의 임대료를 받고 마카오를 임대의 형태로 내어주게 된다.
1557년부터 1640년 사이에는 마카오가 아시아 해상무역의 주요 상업적 연결망이 되면서 포르투갈인, 일본인, 인도인, 유라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유입되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유럽식 건축물과 문화의 특징이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중국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였다. 1640년부터 1750년까지는 네덜란드의 믈라카 점령, 청나라로의 세대교체, 포르투갈의 스페인에 대한 봉기 등으로 인해 마카오의 경기가 침체되었고 인구가 감소했다. 이후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인, 네덜란드인, 미국인 등 광동지역을 통해 유럽과의 무역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항구도시로서 마카오의 중요성은 홍콩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따라서, 1887년 중국-포르투갈 우호통상조약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마카오의 통치권을 확보한 포르투갈이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역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주변 국가에서 금지되었던 도박을 마카오에서 합법화하여 경제부흥을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도박을 합법화하자 외국의 관련 자본이 마카오의 도박산업에 집중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도박은 마카오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1951년 포르투갈은 헌법을 개정하면서 마카오를 본국에 편입하여 해외 주라는 위상을 부여하고 포르투갈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이 마카오를 통치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는 도박뿐만 아니라 관광을 진흥하였으며, 난민의 유입에 따른 저렴한 노동력으로 인해 제조업도 조금씩 성장하였다. 현대적인 아파트, 사무공간, 호텔, 카지노 등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면서 오래된 식민지의 경관을 조금씩 변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농업토지가 점점 줄어들었고, 홍콩의 경제성장에 보다 의존하게 되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한 이후 1975년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였다. 1985년 포르투갈과 중국이 마카오의 주권을 둘러싼 논의를 시작하였고, 1987년 3월 마카오를 1999년 12월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국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홍콩 옆에 위치한 관문으로서 경제적, 사회적, 건축적,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발전이 이루어졌다.[7]
산업[편집]
하환가와 하변신가(下环街, 河边新街) 사이 지역은 마카오 초기 매립 지역 중 하나로, 공업과 상업, 주거가 혼재된 구역. 마카오 전체 산업 시설의 약 11%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남만과 서만 해안 지역은 용음대로(榕荫大道)는 역사적으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던 산책로로, 최근 대규모 매립 및 관광 지구로 개발 중에 있다.
성로렌소 성당(圣老楞佐堂)[편집]
성로렌소 성당은 성로레수당구에 위치하며, 펑신당(风信堂)으로도 불리는 마카오의 유명한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펑신당은 1560년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그중 1618년에는 규모가 큰 보수가 있었고, 1979년에는 성당을 새로 단장하여 이 고풍스러운 성당에 더욱 빛을 더하였다.
돛단배의 항해가 주를 이루던 시절, 원양 항해는 매우 위험했으며,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출항 여부를 결정하곤 했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마다 선원들은 성당에 찾아와 순조로운 바람을 기원하였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성당의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꽃과 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성로렌소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 정문 앞에는 좌우로 두 줄의 돌계단이 대문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기세가 웅장하다. 성당 좌우에는 두 개의 종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시계로 시각을 알리는 용도이며, 다른 하나는 청동종으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울리도록 사용된다.
성당의 지붕은 중국식의 금자瓦(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이는 성로렌소 성당의 자랑스러운 장식으로,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양적인 색채를 풍기며 고풍스럽고 우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제단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성로렌소의 성상이 모셔져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고 엄숙하다. 항해가 잦았던 포르투갈인들에게 성로렌소는 평안을 보장하고 순조로운 바람을 내려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상로렌수 당구〉, 《위키백과》
- ↑ 〈마카오〉, 《위키백과》
- ↑ 〈마카오〉, 《나무위키》
- ↑ 〈두산백과: 성라오렁쭤 당구〉, 《네이버 지식백과》
- ↑ 〈중국행정구획총람: 성로렌수당구〉, 《네이버 지식백과》
- ↑ 〈圣老楞佐堂区〉, 《百度百科》
- ↑ 〈두산백과: 마카오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상로렌수 당구〉, 《위키백과》
- 〈마카오〉, 《위키백과》
- 〈마카오〉, 《나무위키》
- 〈두산백과: 성라오렁쭤 당구〉,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성로렌수당구〉,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마카오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圣老楞佐堂区〉, 《百度百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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