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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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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지(居留地, settlement)는 조약에 의하여 한 나라가 그 영토의 일부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개방한 지역을 말한다.

체약국(締約國) 국민은 이 지역의 토지를 조차(租借)하여 가옥을 소지할 수 있으며, 영구적인 거주(居住)도 가능하다. 이것은 외국인에 대하여 국내의 개방과 주거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 즉 쇄국적인 조건을 지닌 국가에서 설정되는데, 중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조계지(租界地)라는 이름으로 존속하였다. 국제교통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는 현재는 외국인의 거주 ·영업은 완전히 자유이며, 내국법에 따라 다소의 제한은 있으나 내외국인의 법률상 지위는 평등을 원칙으로 한다.

개요[편집]

거류지는 외국인이 특정 국가 내에서 상업, 외교, 거주 등의 목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지정된 구역을 의미한다. 거류지는 대체로 외국인 거류민의 보호와 활동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거류지 내에서는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자치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인들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주로 무역을 위한 항구 도시에서 발생했다.

거류지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함께 설립된 경우가 많았다. 외국인들에게 거주와 상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해당 국가 내에서의 주권을 제약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 중국, 조선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개항과 함께 외국인을 위한 거류지를 설정해야 했으며, 이들은 대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다.

거류지의 형성 배경[편집]

거류지의 형성은 주로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 국가들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의 결과였다. 이러한 조약들은 외국 상인과 외교관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특정 지역을 지정하고, 해당 구역에서는 외국인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했다. 다음은 거류지가 형성된 주요 배경이다.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은 산업 혁명 이후 과잉 생산된 상품의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로 진출했다. 이들은 아시아 국가들에 무역을 강요하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거류지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한 지역이 바로 거류지였다.

개항과 불평등 조약

일본, 조선,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 열강 및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압박에 의해 강제로 개항해야 했다. 개항과 동시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은 외국인들에게 특정 도시에서 상업 및 거주 권리를 보장하였으며, 이를 위해 거류지가 설정되었다. 조선의 경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외국인을 위한 거류지를 개설했고, 일본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이후 여러 항구 도시에 거류지를 마련해야 했다.

자유로운 상업 활동 보장

거류지의 주요 목적은 외국 상인들의 무역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거류지 내에서는 외국 상인들이 현지 법률의 제한을 받지 않고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조세 면제 등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 거주민들은 자국의 보호를 받으며 거류지 내에서의 자치를 인정받았다.

거류지와 조계지의 차이[편집]

거류지와 조계지는 종종 혼동되기도 하나, 두 개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조계지는 외국이 특정 지역을 강제로 자치권을 가지고 점유한 구역으로, 외국의 법이 해당 지역 내에서 직접 적용되었다. 반면, 거류지는 외국인에게 거주와 상업 활동을 허용한 지역으로, 법적으로는 해당 국가의 영토였으나, 외국인에게 자치적 권리가 부여되었을 뿐 법 적용에 있어서는 완전한 자치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즉, 조계지는 외국이 더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한 지역인 반면, 거류지는 상업 활동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 거주지라는 차이가 있다. 거류지는 외교적, 상업적 용도로 사용되었고, 조계지처럼 독립된 법적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주요 거류지 사례[편집]

거류지는 주로 아시아의 개항장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일본, 조선, 중국 등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존재한다.

일본 요코하마 거류지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여러 항구 도시에서 거류지를 마련했다. 요코하마는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거류지로, 1859년 개항과 함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상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이 형성되었다. 요코하마 거류지에서는 외국인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했으며, 이 지역은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류지 내에서는 서양식 건축물과 인프라가 구축되었으며, 일본 내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는 통로로 기능했다. 요코하마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인 도시로 발전했으며, 오늘날에도 서양식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어 당시 거류지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의 부산 거류지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면서 외국 상인들에게 거류지를 허용했다. 부산 거류지는 주로 일본인 상인들이 거주하며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을 담당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부산은 전략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였기 때문에, 일본은 이곳에서 상업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거류지를 확대했다.

부산 거류지에서는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며, 현지 주민들과의 갈등도 발생했다. 일본인들은 거류지 내에서 자치를 인정받았으며, 이를 통해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했다. 부산은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 상하이 거류지

상하이는 아편 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조계지가 설정되었으나, 일부 지역에는 서양 상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상하이 거류지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의 상인들이 거주하며 무역과 금융 활동을 펼쳤다.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으며, 거류지의 활성화로 인해 서양 문화와 제도가 급속히 유입되었다.

거류지의 법적 지위와 행정[편집]

거류지는 외국인 거주민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법적으로는 해당 국가의 영토였기 때문에 거류지 내에서도 해당 국가의 법률이 원칙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외국 상인들과 거주민들이 자국의 법률과 보호를 우선적으로 적용받았다.

거류지 내에서는 외국인들이 자치적으로 행정을 운영했으며, 각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거류지 내의 외국인을 보호하고, 분쟁 해결을 담당했다. 또한 외국 상인들은 조세나 무역 규제에서 면제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현지 상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거류지의 경제적 역할[편집]

거류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류지 내에서는 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펼칠 수 있었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경제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거류지 내 상인들은 주로 무역, 금융, 운송업에 종사했으며, 외국 자본이 유입되면서 거류지 주변 도시의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거류지는 또한 현지 주민들에게 서양식 생활 방식을 소개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거류지 내에서는 서양식 은행, 상점, 학교 등이 들어섰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경제 체제와 문물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특히 일본과 중국의 거류지는 근대 경제 체제의 도입과 맞물려 아시아에서 서구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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