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달동네(月亮村)는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가리키며,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비슷한 명칭으로는 판자촌이 있다. [1][2]
개요[편집]
달동네는 땅값이 싸기 때문에, 산을 깎아 만들어 사람이나 차가 다니기 힘든 비탈에 세워진다. 한국의 경우 1960~70년대 산업화 시절 난개발로 인해 평지에 있는 동네들은 산업화로 많은 건물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땅값이 비싸져 빈부 격차가 점차 커지고, 돈 있는 사람들 외에는 못 살고, 돈 없는 서민들은 땅값 싼 산동네 비탈길에 집짓고 살다 보니까 이런 동네가 형성된 것이다. 주로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교통 접근성이 취약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땅값이 싸진다. 달동네라는 이름은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는데, 광복 이후 조국을 찾아 귀국한 동포들과 남북 분단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산비탈 등 외진 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 불량주택은 1961년 8만 4440동에서 1970년 18만 7500동까지 크게 늘어났으며, 삼양동, 신림동, 봉천동, 사당동 등이 달동네가 위치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1980년대 벌집·닭장·비닐하우스 등도 도시로 이주한 빈민들이 살던 집과 마을이다. 이 가운데 달동네는 빈민촌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달동네가 형성된 근현대사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광복 후 동포 귀환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민 유입이다. 도시로 급격히 유입된 피란민들은 도심의 산비탈을 개간하여 판잣집을 지었다. 둘째, 산업화 시기에 도시로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이 판자촌으로 몰리면서 달동네가 확대되었다. 셋째, 도심의 판자촌 철거에 따라 변두리에 새로운 달동네가 생긴 경우이다. 불량 주택을 없앤다는 정부의 조치가 오히려 달동네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전쟁은 거주공간의 급속한 변동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피란민들은 인왕산, 안산, 남산을 비롯한 도심부 인근의 산을 개간하여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인천에 몰려든 피란민들도 동구의 만석동과 수도국산 일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 외 인천의 피란민들은 남구 학익동 등지에 삶터를 마련하였다. 한국전쟁 때 임시수도가 된 부산은 인구가 폭증하였다. 특히 1·4 후퇴 이후 부산에 들어온 수십만 명의 피란민들은 중앙동, 동광동, 보수동 등 원도심권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 피란민들은 초량동, 영선동, 아미동, 청학동, 우암동 등의 고지대에 정착하여 살았다.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 현상은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을 야기했고, 달동네가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집도 없이 무작정 상경한 농민들은 안정된 주거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지인의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거나 월세방을 얻었다. 이조차 안 되면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하였으니 가난한 이주민들에게 달동네에서의 생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3][4]
특징[편집]
아파트나 신축 빌라를 분양받아서 자가를 보유한 주민보다 전/월세에 세들어 살고 있는 주민들의 비율이 높다. 주민들의 직업 구성도 저임금 근로자가 대다수이며, 무직자가 상당히 많다. 노후된 건물, 여기저기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도 구분도 없이 분리수거도 제대로 안 돼 있고, 방치된 쓰레기들, 불법주차 때문에 동네 미관도 상당히 좋지 않으며, 불량배들이나 조폭들의 아지트로도 딱 좋은 장소다. 대중적으로는 '못 살고 가난하고 영세한 동네'와 거진 동급으로 쓰인다. 실제로도 낡은 주택이나 구불구불하고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골목에 가로등도 몇 개 없는지라 저녁만 되면 금세 어둠침침해져서 치안에도 문제가 있는 등 아무리 봐도 잘 사는 동네는 아니다. 물론 달동네의 정의가 빈민촌이 아니라 '산동네 중 빈민촌'이기 때문에 평지에 있는 빈민촌(대표적으로 서울 강남구 비닐하우스촌 등)은 달동네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전국에 산과 언덕이 많이 있는 관계로 오히려 평지에 빈민촌이 형성되는 경우는 드물며, 부산 사상구나 사하구 신평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고는 있더라도 지금은 대부분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되어 빈민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아직까지 남아 있는 빈민촌의 대부분은 달동네이다.
시골처럼 매체상에서 곧잘 미화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TV 광고에서 달동네 풍경이 나오면 어딘지 모르게 푸근해지거나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이 그 예. 그러나 현실은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현지인들도 기회가 있다면 하루빨리 다른 동네로 집을 사서 이사를 가고 싶어 한다. 달동네와 유사한 단어로는 쪽방촌, 판자촌, 빈민가가 있다. 그러나 쪽방촌, 판자촌, 빈민가, 달동네는 의미가 약간씩 다르다. 먼저 빈민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의미적 범위가 가장 크다. 빈민가 안에는 쪽방촌, 판자촌, 달동네가 모두 포함된다. 쪽방촌, 판자촌,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빈민이기 때문이다. 판자촌은 제대로 된 건축자재가 아닌 비닐하우스용 자재, 합판, 두꺼운 천 등으로 만든 집들이 모여 있는 판잣집이 모여 있는 빈민가를 일컫는다. 빈민가에서 제일 열악하고 급조된 형태에 가깝다.
쪽방촌은 집 면적과 관련 있다. 한 평 조금 넘는 조그만 방이 모여있는 곳을 주로 쪽방촌이라고 한다. 고시원도 일종의 쪽방촌이라 볼 수 있다. 달동네는 산기슭을 따라 생성된 빈민가다. 달동네는 마을이 위치한 지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동네는 쪽방촌일 수도 있고, 판자촌일 수도 있으나, 쪽방촌이 아닐 수도 있으며, 판자촌이 아닐 수도 있다. 달동네라 해서 반드시 판자집이 바글거리는 것은 아니다. 아래 예시로 나온 서울의 달동네 대부분은 판자촌과는 거리가 먼 단독주택 및 저층 빌라, 원룸 건물이 모여 있는 동네다.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이라면 송파구 화훼마을 및 강남구 구룡마을이 있다. 또한 달동네에 있는 집이 무조건 고시원 방 한 칸 급으로 좁은 것은 아니다. 넓은 집은 나름대로 마당도 있고, 아무리 좁은 집이라도 5~8평 정도는 된다. 또한 쪽방촌은 집 면적과 관련된 개념이기 때문에 도심 같은 곳에 존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고 뉴스에도 종종 보도되는 쪽방촌은 종로3가역 근처에 있다.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에서 재개발, 재건축을 내세워서 달동네를 철거하지 않는 이상 자연적으로 소멸되지는 않는다. 막상 정부에서 재개발을 하겠다고 하면 세입자들은 푼돈만 보상받고 길바닥에 나앉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재개발을 반대해서 상당히 지연되거나 아예 계획이 취소되기도 한다.[5]
분류[편집]
달동네는 자연발생적 달동네와 인위적 달동네로 나눌 수 있다. 발생적 달동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땅값이 싼 곳에 영세민들이 집 짓고 살던 곳인데, 과거 서울의 길음동, 월곡동 같은 지역들이 그러하다. 반면에 인위적 달동네는 정부 차원에서 도심지에서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사는 거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형성된 곳인데, 주로 국가 소유 국유지가 평지보다는 산지에 있어서 그 곳으로 이주시키다 보니 달동네가 되었다. 서울의 미아동, 봉천동, 신림동 등이 대표적이다. 두 종류의 달동네 차이는 이렇게 보면 된다. 자연적으로 생긴 곳은 제멋대로 땅을 차지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에 집 크기가 제각각이다. 그러니 간혹 달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위치는 틀림없는 불량 주택 밀집 지역이지만 50평 이상의 평수가 큰 주택이 종종 등장한다. 반면에 인위적 강제 이주지역은 행정기관이 한 집당 10평 정도의 규격화된 대지분할을 했기에 집 크기가 규칙적이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재개발이 되어서 이 차이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특성상 후자의 지역이 먼저 재개발되었다. 전자의 지역은 대형 평형 주택소유주들의 동의가 어렵기 때문. 참고로 한국의 달동네 재개발사업 구조는 큰 평수 소유주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감정가가 실거래가에 한참 못 미치지만 이를 배정받는 아파트의 프리미엄으로 보충하는 구조인데, 대지지분이 7평이던 70평이던 아파트 1채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아동, 신림동 산동네 국유지에 강제 이주 시키다가 아예 더 큰 스케일로 이주시킨 곳이 바로 '광주대단지'다.
서울에서 인위적 달동네는 도심부개발사업이 진행되던 1960~70년대 도심 판자촌을 다 밀어버리며 시 외곽 국유지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생겨났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노원구 백사마을, 성북구 정릉골 등이 있다. 이런 곳의 대표적인 특징은 집 평수가 거의 7~10평 남짓이며, 집 크기가 규칙적이고 집들이 마당 없이 벽을 경계로 붙어있다시피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강제 이주시킨 후 땅에 백묵으로 선만 그어놓고 알아서 집을 짓고 살라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특징이다. 단, 시간이 흐르면서 공가도 생기고 다른 집을 매입하기도 하고 조금 있는 빈 자리에 집을 확장하기도 하면서 이런 특징이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잘 찾아보면 이런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 아직 남아 있다. 또한 마을 곳곳에 공용화장실 및 그 흔적이 있다. 상하수도 시설을 깔아놓고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이주시켜놓으면 거기에서 사람들이 알아서 어떻게 할 거라고 일단 옮겨놓고 방치해버렸기 때문에 좁은 실내 면적 문제와 더불어 하수 처리 문제로 인해 공용화장실이 군데군데 설치된 것이다.
자연발생적 달동네는 다시 형성 과정에서 또다시 자연발생적 달동네가 된 경우와 슬럼화되어 달동네가 된 경우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자연발생적 달동네는 1980년대까지 당시 기준으로 중산층들도 사는 멀쩡한 동네였다가 슬럼화가 진행되며 가난한 달동네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첫 번째는 서울에서 자연발생적 달동네는 대체로 늦어도 한국전쟁 직후부터 토막촌, 판자촌으로 시작해 거주민들이 집을 개보수하며 판자집 형태에서 벗어난 경우다. 두 번째는 과거에는 멀쩡한 동네였는데 슬럼화가 진행되며 달동네로 전락한 경우다. 서울의 경우 도시 내부에 언덕과 산이 상당히 많아서 많은 동네가 비탈을 따라 건물을 올릴 수밖에 없다. 1990년대부터 중산층들이 대거 아파트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단독주택, 빌라, 연립주택 등에 빈민들이 새로히 유입돼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언덕과 비탈이 많다는 지리적 특성과 슬럼화가 맞물리면서 과거에는 멀쩡한 동네였으나 현재 달동네 소리 듣는 동네들이 이때부터 꽤 생겨난 것이다. '비탈을 따라 높은 곳까지 형성된 마을+슬럼화=달동네'라는 공식이 적용된 것이라 보면 된다. 대구광역시 남구도 대략 이런 양상인데, 앞산 인근에는 집들이 큼직큼직 하지만, 80년대부터 슬럼화되어 지금과 같은 달동네가 많아졌다.
자연발생적 달동네에서 기원에 따라 자연발생적 달동네인 곳과 슬럼화로 인해 달동네로 전락한 곳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좁고 낮고 건물에 슬레이트 지붕 및 시멘트 기와 지붕이 올라가 있는 집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위적 달동네와 자연발생적 달동네는 외관상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존재하는지를 찾아보면 구분할 수 있지만, 자연발생적 달동네의 하위 분류인 기원에 따른 자연발생적 달동네와 슬럼화로 인한 달동네를 동네 외관만 보고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달동네들은 외관이 거의 똑같다. 그저 이후 땅주인이 원래 있던 집을 허물고 빌라 혹은 원룸을 올렸느냐, 아니면 예전 형태 그대로 단독주택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 정도의 차이다.
서울의 경우, 자연발생적 달동네에서 기원에 따른 분류는 서울의 발전 과정을 참고해 몇몇 지역에 대해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심인 종로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달동네들은 슬럼화로 인해 달동네가 된 경우라 볼 수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도심부개발사업 및 도심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도심에서 가까운 달동네들은 싹 다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마포구, 서대문구, 종로구, 중구에 존재하는 달동네들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혐오시설(미군기지 등) 주변에 있는 달동네는 기원 자체가 자연발생적인 곳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용산구 한남동이 여기에 해당한다.[5]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