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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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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고을(縣城)이란 조선 시대에, 주(州)ㆍ 부(府)ㆍ 군(郡)ㆍ 현(縣) 등을 두루 이르던 말이다.[1]

개요[편집]

고을은 마을, 도시, 촌락지리와 관련된 분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보통 한 읍치가 있는 지역을 고을이라고 불렀다. 통치성과 자립성이 주어진 지역에만 사용하는 용어로 쓰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인구와 경제, 문화적 규모가 큰 고을들을 '대 고을'이라 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330여 군데의 고을이 존재하였으며,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등의 시기를 거치며 폐지되거나 새롭게 생긴 고을들 또한 존재하였다.[2]

역사[편집]

오늘날에는 고을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볼 수도 없고, 고을과 마을이 혼동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을은 마을보다 큰 단위로 토착 사회와 중앙권력이 만나는 향촌사회의 중심지 또는 그 관할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군(郡)에 비교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으로 불린 지방행정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생활공간이 도(都)·읍(邑)·촌(村), 즉 한양(지금의 서울)·고을·마을이라는 3층 구조로 짜였다. 이러한 구조는 중앙집권적 전제 왕조체제의 통치기반인 군현제도에 의하여 확고하게 다져졌다. 군현제도에서 고을에 부여한 구실은 서울과 각 지방의 향촌을 연결하여, 왕의 통치권이 방방곡곡 가가호호에 미치도록 하는 데 있었다.

고을은 백성들이 생업을 꾸려나가고 모든 부대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을 대행하는 수령의 관치 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고을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인 점, 그리고 지형이 허락하는 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달고, 야간 통행을 금지하고 검문을 하는 등, 성 안팎의 통행을 제한한 점, 그리고 그 안에는 주로 관청 건물들만이 들어 있는 점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성 안은 마치 요새화 된 지방정부종합청사를 방불케 하였다. 성 안의 가장 좋은 자리는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의 숙소 및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둔 객사가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로 수령의 집무처인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있었다. 성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나머지 구역에는 향리의 주택과 극히 제한된 관인 시전(官認市廛), 그리고 간혹 향촌에 본거지를 둔 양반의 별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 밖의 공간은 있는 그대로의 녹지와 자투리·채마밭, 그리고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었다. 그러므로 성 안의 상주인구는 상하관료 및 그들의 집무와 생활을 돕는 노비들 정도였고, 나머지 인구는 성 밖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을은 지역 교통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전국의 도로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짜였다. 도로가 협소,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각 고을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고 커가면서, 대개 백 리 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 도로 망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지역 교통 요충지로 고을은 또한 지역 경제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농산물은 저장과 수 송이 어렵고, 다른 물화는 장돌뱅이들한테 전매권이 주어져 있다. 같은 고을 간의 횡적 연결이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각 고을은 자연히 그 지역의 교환 경제의 거점이 되었다.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유통 마당이다. 대개 위치는 다른 고장과 읍성이 이어지는 길목인 성문 바로 바깥 빈터에 형성되거나 지정되었다. 원래 장시는 떠돌아다니는 장사아치와 머물러 사는 근처 주민들이 때맞추어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로서 별다른 고정시설이 없는 빈터였다. 그러나 차차 객주·여객·도가·주막이 자리잡으면서 좌가(座賈)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되고, 상설점포인 시전이 생겨났다. 이처럼 통치·교통·경제의 중심지인 각 고을은 바깥 세상의 소식을 신속,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어, 그 일대에 있어서 정보교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3]

너른 고을 광주[편집]

경기도 광주시를 이야기하면 전라도 광주광역시와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한자 표기에서부터 알 수 있다. 광주광역시가 빛고을(光州)이라면, 광주시는 넓은 고을(廣州)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광주시는 광주군이었을 당시 성남시와 하남시를 모두 포용하고 있었으므로, 넓은 고을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 할 수 있었다. 유서 깊은 백제의 도읍지이자 조선 최고의 백자 도요지였던 광주. 천 년 세월이 담긴 광주의 대지는 어떤이라도 맞이해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 경기도 하면 어딘가 풍요로운 고장이란 느낌이 든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런 느낌이 강한 곳이 광주이다. 단순한 수확물의 질이나 양의 문제를 떠나, 문화와 정신이 풍요로운 곳이란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게다.

광주의 맑음은 백자로 대표된다. 왕실에 바치는 자기를 생산하던 광주 조선백자 도요지에 가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무명 도공의 비를 보며 도자기에 일생을 바친 조상에게 묵념한 후, 백자를 직접 보기 위해 경기도자 박물관이나 분원백자자료관으로 가보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광주 일대에서 형성된 자기 문화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백담도 요나 무농도요에 가면 백자부터 분청사기까지의 각종 도기를 만들어보거나 구입할 수 있으며, 현대식으로 재창조된 여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한편, 도공에게 평안을 안겨주기 위함인지, 광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다. 남한산성 내에 조성된 장경사•망월사•개원사, 세종대왕이 눈병을 치료한 약수가 있는 백련암, 조선시대 불상을 이해하는 중요 자료인 석조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극락사, 언덕에 둘러싸여 팔당호 인근의 번잡함에서 피할 수 있는 명성암 등이 광주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 왔다.[4]

관련 기사[편집]

삼보 사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의 고장 합천군은 신비함에 있어 따라올 곳이 없다. 역동적 역사와 자연의 오묘함이 공존하는 땅이다. 합천(陜川) 은 조선시대 이후에 호칭된 지명으로 '좁은 내'라는 뜻이다. 계곡이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1914년 3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에 편입돼 합천은 '좁은 땅' 이미지를 벗어젖혔다. 세 개 고을이 합쳐진 땅 '합천'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 달빛 내륙철도가 연결되면 합천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복 받은 땅으로 변하게 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합천을 대표하는 보물이자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세계 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은 1236년부터 1251년에 만들어진 16년간의 대역사다.

우리는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교과서를 통해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이 전부다. 세계 최강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전란 중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나라를 지킨다고 설명하면 끝인가. 제3차 대장경 사업은 1236년 시작해 1251년까지 16년간 이뤄진다. 몽골의 침략을 불심(佛心)으로 이겨보겠다는 소박함의 발로로 그 지난한 작업을 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하다. 불심이 대단하다고 이해한다 해도 세계 최강 몽골군이 몰려오는데 태연히 대장경판에 매달리는 고려 사람들의 한가함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5]

해인사  
합천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고을〉, 《네이버 국어사전》
  2. 고을〉, 《나무위키》
  3. 고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백의 고장, 너른 고을 광주, 경기도 광주시〉, 《트래블투데이》
  5. 나윤수 기자, 〈세개 고을 합쳐진 복 받은 땅···역사·자연의 오묘함 공존〉, 《무등일보》, 2022-11-10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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