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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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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하이에 남아 있는 자딘 게이트, 황푸공원 입구
1928년의 와이탄

조계지(租界地, Foreign Concession)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졌던 조차의 한 형태, 또는 그러한 형태의 조약에 따라 설정・임대되었던 지역을 뜻한다.

조계지는 19세기 후반 영국, 미국, 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난징시, 상하이시 등의 개항 도시에 설치한 외국인 거주지이다.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조약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만주국, 근대화 이전 일본에도 존재했다.

조계에서는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였으며, 한 때 28개소에 이르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폐지되었다.

이 지역은 외국인들이 상업적, 외교적, 군사적 목적으로 점유하였으며, 해당 국가의 영토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해당 지역 내에서는 외국의 법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조계지는 주로 중국, 일본, 조선, 오스만 제국 등에서 발생했으며, 이들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조계지는 아시아의 근대 역사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평가되며, 이들 지역은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적 유산과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상하이, 인천, 요코하마 같은 도시들은 조계지로 인해 현대적 도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곳들로 평가받는다.

개요[편집]

조계지는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을 말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결과로 빚어진 것으로서 중국 ·한국에서는 조계, 일본에서는 거류지라는 이름으로 일컬어 졌다.

아편전쟁 이후 1845년에 영국이 상하이에 둔 것이 최초이다. 이후 톈진 ·한커우 ·광저우 ·샤먼 등 각 개항장에 두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에는 격증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8개국의 조계가 무려 28개나 되었다. 조계 내의 행정권은 외국에 속하고 치외법권도 인정되어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여 해관(海關)의 관리권과 함께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적 침략의 기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조계는 점차 폐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중국에 반환되었다.

한국에 조계가 처음 설정된 것은 1877년 1월 30일 부산항조계조약(釜山港租界條約)에 의해서이며, 이어 청나라를 위시하여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가 각기 수호통상조약 체결과 동시에 인천 ·진남포 ·군산 ·마산 ·성진 등지에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전관조계(專管租界)와 공동조계로 크게 나누는데, 전관조계는 1개국가만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이며, 공동조계는 여러 나라 국민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조계의 설정은 국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경우와 군사적 정치적 목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 설정한 것은 공동조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침략과 식민을 위한 것이었다.

조계지의 형성 배경[편집]

조계지는 대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열강과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아시아와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압박하여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특정 도시 내에 조계지를 설정할 수 있었다. 주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편 전쟁과 난징조약 (1842년)[편집]

조계지의 형성은 1839년에서 1842년 사이 벌어진 아편 전쟁과 직결된다. 중국 청나라와 영국 사이의 전쟁은 청나라의 패배로 끝났으며, 이후 체결된 난징조약은 상하이를 포함한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외국인에게 조계지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상하이는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열강이 조계지를 획득한 대표적인 도시가 된다.

조선의 개항과 강화도조약 (1876년)[편집]

조선은 19세기 중반까지 대외 관계에서 고립주의를 유지했으나, 일본이 군사적 압박을 가하여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부산, 인천, 원산 등이 개항되었고, 각 항구에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위한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조계지는 이후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서구 열강과 제국주의[편집]

조계지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상업적 교두보를 확보하고,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계지를 설정하였다. 이들은 조계지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며 현지 정부의 간섭 없이 무역,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특징[편집]

조차지와의 차이점[편집]

본래 영어 어휘 '컨세션(concession)'은 조차(租借)를 뜻하는 것으로, 조계는 조차지의 특수한 형태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구별되는 성격이 있다.

  • 조계는 중국 내에만 존재한다.
  • 조계는 형식상 중국 영토이다
  • 조계는 보통 도시의 일부분같이 좁은 구역에만 설정한다.
  • 조계는 조약 체결시 영구 임대로 설정하며, 해당 토지의 지주와 중국 정부에게 토지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다.
  • 조계는 치외법권을 인정받지만 그 대상은 외국인에 한하며, 중국인은 중국 정부가 법적으로 관리한다.
  • 조계는 군사용 목적이나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계의 치외법권은 조계 내의 중국인이나 기타 거주자에게도 제멋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조계 안에서 발생한 모든 법적 문제는 해당 조계를 다스리는 국가의 법률대로 처리했다. 그리고 공공연히 군사용 목적이나 군사기지로 조계를 활용하기도 했다.

외국인 거류지와의 차이점[편집]

외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한다는 점에서 외국인 거류지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다르다.

  • 외국인 거류지는 세계 각국에 존재하지만, 조계는 중국 내에만 존재한다.
  • 외국인 거류지는 대부분 현지 국가의 법적 통치를 받지만, 조계는 치외법권을 인정받는다.
  • 외국인 거류지는 현지 국가가 임의로 이동, 변경, 제거가 가능하지만, 조계는 불가능하다.

물론 외국인 거류지도 현지 국가가 힘이 약하고, 거류지에 있는 외국인이 강대국 소속이 많다면 조계 비슷하게 변하는 사례가 있다. 일례로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의 외국인 거주지는 말 그대로 외국인의 거주와 이동을 제한하는 목적으로 인공섬 같은 곳에 설치되었으며, 거류지의 외국인에 대해서도 에도 막부가 통제할 수 있었지만, 쿠로후네 사건 이후 일본이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인 거류지는 제멋대로 치외법권을 남용하면서 한동안 사실상 조계처럼 운영되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열강들과 다시 평등조약을 맺은 후 부터다.

조선의 조계와의 차이점[편집]

조선의 경우에도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열강들이 개항장에 조계를 만들었다. 가령 현재 인천부산차이나타운은 당시 청국 조계지의 흔적이다. 그러나 중국에 존재했던 조계와는 다른 특성이 많다.

  • 명칭이 통일되지 않고 조계, 조차지, 외국인 거류지 등을 혼용했다.
  • 일본의 조계가 매우 많았으며, 나머지 열강의 조계는 숫자, 면적, 위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많이 간섭한 관계로 조계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도 일본인과 관련되었다면 일본 법률로 심판하려고 했으며, 성과도 있었다.

결국 조선의 조계는 시작부터 일본이 주도했으며, 최초의 조선 내 조계도 일본이 주도한 공동조계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권리를 열강들이 신속하게 인정했으므로 일본 외의 타국 조계는 거의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 이후에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조계는 더욱 축소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므로 더 이상 별개의 조계를 둘 필요가 없어 1914년 모든 조계를 폐지한다. 이후에도 차이나타운같은 외국인 거류지는 남았으나 일본 제국의 법률 하에 있는 주거지에 불과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조선의 조계는 중국의 조계처럼 특수하게 인식하지 않고, 그냥 일본군 교두보나 일본 점령지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편집]

파일:중국 조계 역사 변천사.mp4

청나라아편전쟁에서 패전한 후 열강들은 중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조약으로 열린 개항장에 조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계는 앞서 설명했듯이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대표적으로는 '상하이 조계'와 톈진 조계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내부에서 각 열강들의 거점으로 작동했으며, 홍콩이나 마카오같은 조차지와 함께 중국 역사의 치욕 중 하나로 남았다.

이렇게 성장하던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단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이 동맹국으로서 협상국과 대립하자, 중국에 흑심이 가득한 일본이 협상국의 기치 아래 중국 내의 동맹국 조차지와 조계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이 때문에 동맹국에 참여했던 국가들의 조차지와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후에는 아예 소멸하거나 크게 축소되거나, 열강이 운영하는 공동조계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쇠퇴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에는 중국인의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열강중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와 중화민국간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조계는 일종의 정체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천진 러시아 조계(1924년), 구강(九江) 영국 조계(1927년), 천진 벨기에 조계(1931년)처럼 북양정부/국민정부에 반환되는 조계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관계가 파탄하자, 일본 조계 중 일본군이 점령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의 조계는 주변 지역까지 일본에게 떨어지면서 어차피 모두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므로 존재 가치를 상실했으며, 그렇지 않은 나머지 지역의 일본 조계는 중국군이 점령하거나 적어도 치외법권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격리시켰으므로 역시 조계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열강들의 조계는 살아남았으나, 이것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추축국과 추축군으로 확실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과 전쟁에 돌입함으로서 상당수가 붕괴된다. 일단 일본군 점령지 내부의 연합국 소속의 조계는 일본군이 강제로 점령했으며, 중립국 소속의 조계라도 무늬만 조계일 뿐, 일본군이 제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한동안 일본군의 점령지가 계속 늘어나면서 조계의 파괴는 일본군의 손에서 가속화했다. 그나마 같은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의 조계는 온전했고 이탈리아의 권리가 인정되었으나 이탈리아가 항복한 직후 바로 일본군이 쳐들어가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접수했다.

이리하여 태평양 전쟁 기간중에 조계는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형식상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중화민국이 연합국에 참여하자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과의 조약을 개정해 자국 조계를 폐지했으며,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조계도 패전으로 소멸한다. 1947년 이탈리아가 연합국들과 맺은 강화조약으로 천진의 이탈리아 조계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을 마지막으로, 조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홍콩과 마카오는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조차지였으며, 20세기 막바지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반환됨으로서 그 수명을 다한다.

평가[편집]

중국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에게 당한 치욕 그 자체였다.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열강들이 반강제적으로 주요 도시의 노른자위 같은 곳에 조계를 설치했고, 그곳에서 치외법권을 누려왔다. 대부분의 조계는 중국에 대한 경제적인 침탈목적을 가졌으며, 일본 조계같은 경우에는 스파이 활동 및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서의 역할까지 했다. 그래왔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손길이 닫지 않는 그곳이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같은 존재였다.

한국의 조계 설치 사례[편집]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에 의해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했으며 소위 '개항장'이 조성되었다. 이후 인천, 부산, 마산 등지에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조계가 설치된 적이 있다.

그중 인천 개항장이 제일 알려져 있다. 개항장 청국과 일본지계를 에워싼 자유공원과 송학동 일대에 우리나라와 미국·영국·청국·일본·독일 대표 사이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따라 송학동·송월동·만석동 일대에 14만 평 규모로 형성되었다.

  • 각국 조계 : 자유공원
  • 일본 조계 :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 중국 조계 : 인천 차이나타운

참고자료[편집]

  • 조계〉, 《나무위키》
  • 조계〉, 《위키백과》
  • 조계〉,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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