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판자촌(板子村)은 판자로 사방을 이어 둘러서 벽을 만들어 지은 판잣집이 모여있는 가난한 동네를 말한다.[1] [2]
개요[편집]
대도시에서 판자촌과 같은 무허가 빈민촌이 발생하는데, 이탈리아 등의 유럽국가와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모두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판자촌은 이를 여러 가지 범죄 등의 사회문제의 온상이 되는 슬럼(slum)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로 이농민들이 일시적으로 값싼 주거지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상반되게 주장되어 왔다. 판자촌은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극단적인 경우, 판자촌의 인구가 도시의 인구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2013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약 7분의 1인 10억 명 이상 이 판자촌에 살고 있다. 판자촌의 집들은 종종 널빤지, 양철, 플라스틱판 조각들로 지어진다. 보통 도시 주변부에 조성되는 판자촌은 비공식적이고 도시 계획을 따르지 않아, 제대로 된 위생시설, 전력 또는 통신 체제를 갖추지 못한다. 판자촌은 보다 정리된 거주지에서는 갖추어져 있는 치안, 의료, 소방 시설이 결핍되기 쉽다. 판자촌의 화재는 소방서의 부재 외에 정규 도로의 부재로 소방차의 진입이 어렵고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데다가 집을 지은 재료들이 불이 붙기 쉬운 것들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판자촌은 범죄와 질병의 발생 비율이 높다.
판자촌은 다른 사람의 땅에 허락 없이 집을 세워서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때는 대한민국 법률상 일단은 불법이다. 그러나 토지의 점유권에 관한 여러 가지 판례가 존재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좀 더 넓은 범위의 점유권을 허용하는 프랑스의 경우 이러한 '빈집 점령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지어진 집에 들어가 사는 건 불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허락 없이 집을 지으면 무조건 불법이다. 지어진 집의 경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뿐이지만 집을 짓는 경우에는 아예 땅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자원이나 농토, 상점으로 쓸 수도 있는 땅 위에 허름한 집을 지었다고 생각해 본다. 실은 일제강점기 '하꼬방'(はこばん, 箱版)의 순화어에 해당한다. 일본어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상자 판떼기집 정도가 된다. 일제 당국의 산미증식계획 및 식민지 조선의 산업화는 결과적으로 농촌사회에서 빈민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무작정 상경해서 달동네에 모여들어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외국에서 흔히 슬럼이라고 불리는 빈민촌의 형성과정과 동일하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류의 가건물은 오두막 내지는 가가(假家)라고 불렀다. 이 가가에서 생긴 말이 바로 가게. 장사꾼들이 가가를 짓고 난전을 열던 데서 유래하였다.[3][2]
역사[편집]
한국에서 빈곤 문제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판자촌이다. 판자촌은 빈곤층의 주거지로서 대도시에 늘 존재했던 것이다. 달동네, 해방촌, 산동네 등도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외국에서 슬럼이나 게토와 같은 빈민촌이 사회적 주목을 받고 또 다각도로 연구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판자촌은 무관심 속에 방치된 느낌을 준다. 판자촌의 역사는 조선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가가나 백정골이 그것이다. 가가는 임시 건물로 건축과 철거가 쉽도록 초석이나 기와를 사용하지 않는 집이다. 또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는 토막촌이라는 게 존재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판자촌은 한국전쟁 이후에 형성된다. 피난민과 이농민들이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을 만들었다. 가난한 그들은 도시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하천변이나 산비탈 등에 아무렇게나 집을 짓고 살았다. 그 유형을 보면 판자집이나 천막집, 폐차, 창고, 토막 등 아주 다양한 형태다. 심지어는 동굴이나 방공호도 이들의 주거지가 됐다. 판자촌은 이후 산업화 시대에도 오히려 더 늘어났다.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빈민지역인 판자촌에 대거 유입된 것이다.
정부의 대응은 도심에 난립하던 불량 주택을 철거하고 주민들은 도시 외곽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의 광주대단지 사업이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 도심 판자촌을 나온 주민들은 서울시 외곽인 도봉, 미아, 상계, 홍은 수색, 연희, 사당, 봉천, 신림, 시흥, 구로 등지로 흩어져 살았다. 1970년대 이후 판자촌은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도시 빈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수현 세종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가 최근 ‘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냈다. 한때 도시 주거 형태의 한 축을 담당했던 ‘판자촌의 생로병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서울 인구의 약 40%가 살았던 판자촌의 형성과 밀집, 그리고 소멸 과정을 추적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주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며 공공임대 주책 공급 확대와 저소득층에 대한 임대료 보조 등을 제안했다. 지금 도시 빈민들의 주거는 대개 반지하 방이나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촌 등이다. 아예 노숙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지금도 반지하방에서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서민 아파트에서 무관심 속에서 고독사하는 일어나고 있다. ‘강남 판자촌’도 없어지지 않았다. 주거비와 주택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판자촌에 대한 과거 역사와 정책들을 잘 살펴 오늘의 빈민 주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4]
서울 판자촌[편집]
서울특별시의 판자촌은 현재의 남산 갈월동 일대와 명동 뒤편으로 넓게 퍼져 있었고 청계천에도 청계 8~9가까지 이들 판잣집이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몰려들며 이들의 규모는 아현, 미아리, 용산까지 넓어져 산으로 올라가 '달동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도 판잣집 집락촌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 이런 곳에는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동네가 많다. 이렇게 우후죽순 들어서고 규모가 커지던 서울의 판자촌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서울역 맞은편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 도동(현재 동자동)이었다. 양동 및 도동은 악명 높은 사창가이자 판자촌으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이외에 서울 도심부 달동네는 실상 모두 판자촌이었다. 정부에서 아무리 단속해도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로 몰려온 사람들이 무허가 판잣집을 짓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 고도성장기에 이촌향도 현상이 본격화 하면서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주택공급은 인구증가 폭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교외지역에 판자촌, 비닐하우스촌도 계속 늘어났다. 이 때문에 주거개선 사업은 대한민국 정부의 최우선 정책사업 중 하나로 와우아파트, 시범아파트 사업, 소공동 개발, 여의도 개발, 심지어 강남 개발(당시는 영동 개발)까지도 명목은 '주거환경 개선사업'이었다.
서울 도심부 판자촌은 서울 외곽으로 토지를 불하해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며 철거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마을이 당고개역 인근에 있는 당현천마을, 양지마을, 합동마을, 희망촌, 그리고 중계본동 백사마을 등이다. 한 가구당 7~8평 남짓의 땅을 불하해주기로 하고, 무턱대고 대충 토지정리만 해놓은 빈 땅에 서울 판자촌 주민들을 실어날라 텐트 하나 주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당시 증언들을 보면 4가구에게 할당된 30~40평 정도 되는 땅을 백묵으로 선만 긋고 각 가구에게 텐트 하나 주고 알아서 집 짓고 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의 부작용이 제대로 나타난 것이 바로 광주대단지사건이다. 어쨌든 이 정책을 통해 서울 도심 판자촌은 상당 부분 철거되었다. 서울 도처에 불법 판잣집이 드글거리게 된 데에는 정부도 도의적 책임이 있다.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농촌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촌향도 현상이 극심하게 발생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곡가 정책이다.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가에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쌀 가격을 통제하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농촌 한 가구당 수입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나 많은 농촌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상경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울시는 1981년까지 지어진 무허가 건물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기로 결정했다.
1980년대 들어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및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처에서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허가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렇게 되자 음지에서 불법적인 건설 사업이 활성화되었다. 서울 강남3구 및 관악구 외진 곳에 비닐하우스 등을 이용해 무허가 판잣집을 건설하고 철거민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현재 강남3구에 존재하는 판자촌이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노원구 상계동 재개발 사업도 일대의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상계동 올림픽. 노원구 하계동, 공릉동 일대에는 그 뒤에도 이런 무허가 주택들이 난립해 있다가 1990년대 초반에 모두 철거되었다. 한때 여기저기 난립해 있던 강남3구 판자촌은 재개발과 철거를 진행하면서 몇 곳으로 정리되어 갔다. 관공서에서 다른 판자촌으로 이주시켜줬다는 증언도 존재하며, 자발적으로 다른 판자촌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다. 서울 강북지역 판자촌은 이런 저런 개발을 통해 현재는 판자촌 형태에서는 벗어났다. 반면 서울 강남지역 판자촌은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편이다. 서울의 중심이 종로에서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강남 부유층 거주지가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강남3구 외진 곳에 있던 판자촌도 더 이상 개발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온갖 투기꾼들이 판자촌 판잣집 매매에 꼬이기 시작했다. 현재 강남3구에 위치한 판자촌은 더 이상 규모가 늘어나지 못하게 감시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유도하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2]
서울 판자촌이 방치된 이유[편집]
- 서울시에서는 1982년 이전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에 대해서만 그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있다. 이유는 계속 무허가 건물에 대해 소유권을 인정해주면 아무 데에나 적당히 판잣집 짓고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는 행태가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1년까지 확인된 무허가 건물에 대해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까지의 무허가주택 난립에 정부도 도의적 책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남3구 판잣촌은 대체로 1981년 이후에 형성된 곳들이다.
- 강남3구에서 부유층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과거 오지, 버려진 땅에 가까웠던 판자촌들이 갑자기 가치 좋은 땅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되자 온갖 투기꾼과 이권이 개입해 판잣집 투기가 이뤄졌다. 단순히 판자촌 거주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전해 살 수 있도록 보상해주는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판잣집의 형태도 진화했다. 과거에는 나무 판자 등을 모아 만든 말 그대로 '판잣집'이었지만, 비닐하우스의 보급으로 인해 비닐하우스로 집을 짓고 사는 형태로 발전했고, 최근에는 단열재가 들어간 조립식 패널 등을 이용해 리모델링되는 경우도 있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