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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는 현대와 전통 문화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로,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키토에는 식민시대의 유산인 가톨릭 교회가 많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요 종교 건축물로는 산 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수도원,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라 콤파냐(La Compaña) 성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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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는 현대와 전통 문화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로,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키토에는 식민시대의 유산인 가톨릭 교회가 많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요 종교 건축물로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대성당,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라 콤파냐(La Compaña) 성당 등이 있다.
  
 
또한 에콰도르의 유명 축구 클럽들이 키토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키토의 주요 클럽들로는 LDU Quito, 데포르티보 키토(Deportivo Quito), 아우카(Aucas), 인데펜디엔테 델 바예(Independiente del Valle)가 있다. 한편, 키토의 스타디움은 해발 고도 2,800m에 자리하고 있어 지역 홈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또한 에콰도르의 유명 축구 클럽들이 키토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키토의 주요 클럽들로는 LDU Quito, 데포르티보 키토(Deportivo Quito), 아우카(Aucas), 인데펜디엔테 델 바예(Independiente del Valle)가 있다. 한편, 키토의 스타디움은 해발 고도 2,800m에 자리하고 있어 지역 홈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2023년 9월 27일 (수) 12:11 판

키토 시기
키토 전경

키토(스페인어: Quito)는 에콰도르의 수도이고 피친차(Pichincha)주의 주도이며 공식 명칭은 산 프란시스코 데 키토(San Francisco de Quito)이다. 키토는 국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으며, 1인당 소득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키토의 주요 산업은 섬유산업, 금속산업 및 농업이고 주요 수출 작물로는 커피, 설탕, 카카오, 쌀, 바나나, 팜유 등이 있다.

개요

역사

키토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흔적은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벨(Robert E. Vell)이 로스 치요스(Los Chillos)와 툼바코(Tumbaco)의 동부 계곡에 위치한 일랄로(Ilaló) 화산의 경사면에서 발굴했다. 기원전 8,000년 수렵 채집인들이 흑요석 유리 도구를 남기기도 했다. 키토에 사람이 정주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400~1,600년 정도부터로 추정된다.

15세기 말 잉카의 황제 와이나 카팍(Huayna Capac)이 이곳에 살던 키투(Quitu)족을 물리치고 키토를 잉카 제국에 편입시키면서, 잉카 제국 북부 지역의 수도로 정했다. 정복자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는 1534년 8월 15일 ‘산티아고 데 키토[Santiago de Quito, 현재의 리오밤바(Riobamba) 근처의 콜타(Colta)]’를 세우고 이후 ‘산 프란시스코 데 키토(San Francisco de Quito)’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세바스티안 데 베날카사르(Sebastián de Banal cázar)가 204명의 정착민과 함께 현재의 위치에 재건했다. 당시 지도자였던 루미니아기(Ruminíagui)는 1535년 1월 10일에 처형되었다. 1563년 키토에 스페인의 아우디엔시아(Audiencia, 행정구역)가 들어섰고, 1717년까지 페루 부왕령의 통치 하에 있었다. 이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령 치하로 통합되었다.

1765년에서 1766년 사이 키토에서 발발한 폭동으로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하기도 했다. 1809년 8월 키토에서 다시 독립 운동이 발발했다. 하지만 이 시기 독립운동은 1810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스페인 식민군대가 지원을 오면서 실패했다. 이후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장군이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지휘 하에서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1822년 5월 24일 피친차(Pichincha)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키토와 그 주변 지역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했다.

1830년 5월 13일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에서 분리된 후 키토(Quito)를 수도로 삼은 에콰도르 공화국이 창설되었다. 베네수엘라 출신 장군 후안 호세 플로레스(Juan José Flores)가 초대 대통령직을 맡았다. 독립 이후 19세기 내내 에콰도르는 혼란기를 겪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는 자유주의 혁명시기였다.

20세기 초 키토는 교통의 혁신을 맞이했다. 1908년 4월 증기기관차가 키토 남쪽에 위치한 침바카예(Chimbacalle) 역까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ía Moreno) 대통령 집권 기간 (1860~1865년) 동안 키토와 과야킬 사이의 안데스 횡단 철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안데스 횡단 철도는 엘로이 알파로(Eloy Alfaro) 집권 기간(1895~1901년)에 완공되었다. 1910년 키토 트램웨이 컴퍼니(Quito Tramway Company)가 미국와 영국 자본에 의해 설립되어 1911년 전기 전차 노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약 34년 동안 키토 트램웨이 컴퍼니는 침바카예(Chimbacalle)역에서 산 디에고(San Diego) 묘지까지, 그리고 침바카예역에서 콜론(Colón) 대로까지 두 개의 노선, 총 8개의 트램을 운영했다.

1930년대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도심에 거주하던 상류층은 키토의 북쪽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북쪽 지역 거주지는 전원도시의 형태를 띄었다. 상류층이 도심 외곽으로 이주하면서 도심은 점차 국내 이주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교외화의 과정에서 20세기 중반경 도시 공간은 이미 사회적으로 계층화되었다. 1941년 7월 페루-에콰도르 전쟁으로 철도는 병력을 전쟁터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1960년 8월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이 운영을 개시했다. 1978년 9월 식민시기 건설된 키토에서 수도원, 교회 및 역사 지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키토 시정은 역사 지구의 건축 및 사회 구조 계획을 수행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키토는 에콰도르 동부 아마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석유 붐으로 인해 급진적인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1980년대 도시 북쪽 지역에서 주요 관광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남쪽과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1987년 3월 리히터 규모 7의 강진이 키토에서 80㎞ 떨어진 곳에서 발행하면서 키토의 여러 건물이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95년 12월 키토 시정은 도시에서 최초의 트롤리버스(Trolebus) 노선을 개통했다.

20세기 말 에콰도르의 정치·경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하면서, 1997년 압달라 부카람(Abdalá Bucaram)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키토에서 진행된 끝에 대통령이 퇴진했다. 1999년 에콰도르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고 2000년대 전국적인 원주민 운동(CONAIE)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후드(Mahuad) 정권이 다시 무너졌다.

2001년 키토 대도시권 인구는 약 200만에 육박했다. 2002년부터 키토는 역사 지구의 도시 재생을 진행하고 있다. 2002년과 2004년 사이 키토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메트로버스Q(MetrobuQ) 버스 노선이 건설되었으며 도로도 확장되었다. 2005년 7월 텔레페리코Q(TeleféricoQ)라는 이름의 관광 케이블카 라인이 개통하였다. 2005년 또 다시 대규모 시위를 통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시오 구티에레스(Lucio Guiérrez)가 퇴진했다. 한편 2009년 총선에서 대중교통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했고, 아우구스토 바레라(Augusto Barrera) 키토 시장은 키토의 지하철 건설을 제안했다. 이후 2016년 1월 지하철 건설 2단계가 시작되었다.

2012년 키토 광역시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신공항 건설이 시작되었고, 2013년 마리솔 수크레(Marisol Sucre) 신 국제공항이 운영을 시작했다. 신공항은 키토 중심에서 약 4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

키토는 과이야밤바(Guayllabamba) 강 유역의 에콰도르 북부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키토는 안데스산맥의 활화산인 피친차(Pichincha)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계곡, 해발 2,850m에 위치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고지대에 있는 수도이다. 과이야밤바강 계곡은 화산 옆에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눈 덮인 화산으로 맑은 날에는 도시에서 전경을 볼 수 있다. 키토는 적도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로 고도는 2,820m에 이른다.

키토는 활화산 지역과 가까이 위치한 수도이다. 키토에서 가장 가까운 화산은 도시의 서쪽에서 가까운 피친차(Pichincha)이다. 피친차 화산에는 해발 4,700m의 루쿠(Ruku) 피친차와 해발 4,794m의 과과(Guagua) 피친차 등의 봉우리가 있다. 피친차 화산의 가장 큰 분화는 1660년 발생했던 화산 활동으로 생겼고, 19세기에도 세 차례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화산 폭발은 1999년 10월 5일로 기록되고 있다.

동쪽의 중앙 산맥(Royal Cordillera)에 위치하고 있는 화산으로는 코토팍시(Cotopaxi), 신촐라구아(Sincholagua), 안티사나(Antisana), 카얌베(Cauambe) 등이 있다. 과이야밤바 계곡 서쪽변의 서부 산맥에는 이이니사(Illiniza), 아타카소(Atacazo), 푸룰라우아(Pululahua) 화산 등이 있다.

키토 남부는 아열대 고원 기후이고, 북부는 따뜻한 여름의 지중해성기후를 특징으로 한다. 적도의 고도와 위치로 인해 키토는 상당 기간 시원한 기후를 보인다. 평균 오후 최고 기온은 21.4℃이며, 평균 야간 최저 기온은 9.8℃이다. 연간 평균 기온은 15.6℃이다.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는 6월부터 8월 사이이며, 우기는 9월부터 5월 사이이다. 연간 평균 강수량은 1,000㎜ 정도이다.

도시구조

시역은 크게 중앙부, 남부, 북부 등의 3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중앙부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기에 형성된 도시로 격자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남부 지역은 주로 산업단지로 주변의 노동자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다. 북부 지역은 신시가지로 금융지구, 고층빌딩과 쇼핑센터, 상류층 거주지 등이 입지해있다.

행정적으로 키토는 시장과 15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키토 광역시 시장은 키토 광역시 최고 행정 및 정치 책임자이다. 시장은 5년 임기로 선출되며 재선이 가능하다. 키토시는 32개의 구(urban parish)로 구성된다. 각 구는 행정적 구분이며, ‘카빌도(cabildo)’라고 불린다. 32개의 구는 5개의 시 구역(zonas municipales)으로 통합 구분되기도 한다. 한편, 로마가톨릭교회는 키토를 총 17개 구역, 167개의 교구로 나누어 관리한다.

인구

조지타운의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235,017명이며 가이아나에서 인구가 10만 명이 넘는 도시는 조지타운이 유일하다. 1833년 노예제도 폐지 이후 농촌의 흑인 노동을 대체하기 위해서 이주했던 인도의 계약노동자들의 2세대와 3세대 중 다수가 1850년대 조지타운으로 이주하면서 조지타운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오늘날 도시 인구의 구성은 약 44%가 동인도계이고, 30%가 아프리카계이며, 약 17%가 혼혈이다. 유럽인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구의 나머지 9%를 구성한다.

경제

키토는 국가 GDP 기여도가 가장 큰 도시이자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입니다. 키토는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세금 징수율을 가지고 있으며 2009년 연간 전국 57%를 초과하며 현재 에콰도르 중앙 은행이 실시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국가 의 가장 중요한 경제 지역입니다 .

키토의 주요 주요 산업에는 섬유, 금속, 농업이 포함되며, 수출용 주요 작물은 커피, 설탕, 카카오, 쌀, 바나나 및 팜유입니다. [36]

국내 최대 규모이자 라틴 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회사 중 하나인 Petroecuador는 키토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37] [ 확인 필요 ]

많은 국내 및 국제 금융 기관, 석유 기업 및 국제 기업의 본부 및 지역 사무소도 키토에 위치하여 세계적 수준의 비즈니스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시 네트워크에 대한 도시의 통합을 측정하는 "GaWC에 따른 세계" 글로벌 도시 보고서에서 키토는 지역이나 주를 세계 경제와 연결하는 데 중요한 대도시인 베타 도시로 선정 되었습니다

사회

키토는 일반적으로 치안 상황이 불안하지만 지역에 따라 상대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다. 키토에서도 치안 상황이 비교적 나은 곳은 북부 지역이다.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치안이 더 불안정하다.

문화

키토는 현대와 전통 문화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로,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키토에는 식민시대의 유산인 가톨릭 교회가 많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요 종교 건축물로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대성당,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라 콤파냐(La Compaña) 성당 등이 있다.

또한 에콰도르의 유명 축구 클럽들이 키토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키토의 주요 클럽들로는 LDU Quito, 데포르티보 키토(Deportivo Quito), 아우카(Aucas), 인데펜디엔테 델 바예(Independiente del Valle)가 있다. 한편, 키토의 스타디움은 해발 고도 2,800m에 자리하고 있어 지역 홈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도시를 대표하는 주요 음식으로는 감자가 들어있는 토르티야(tortilla)의 일종인 야핑카초(Llapingacho), 만두의 일종인 엠파나다(empanada), 빻은 옥수수를 옥수수 잎에 싸서 찐 우미타(humita), 빻은 옥수수와 고기 및 야채 속을 넣은 반죽을 바나나 잎에 싸서 찐 타말레 등이 있다. 엠파나다의 경우, 속에 치즈를 넣으면 엠파나다 데 비엔토(Empanada de Viento), 바나나를 넣으면 엠파나다 베르데(Empanada Verde), 옥수수 속을 넣으면 엠파나다 데 모로초(Empanada de Morocho)라고 부른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 Quito〉, 《Wikipedia》
  • 키토〉, 《두피디아》
  • 키토〉, 《위키백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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