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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서부 내몽골 지역, 특히 하투(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골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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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서부 내몽골 지역, 특히 하투(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골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주나라]]시기 중부와 서부 내몽골 (하투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골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기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 - 295)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현재 허베이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장성을 하투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 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기원전 221) 몽념(蒙恬)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전국시가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쌓았던 장성을 연장하여 서쪽으로 린조(临洮), 동쪽으로는 랴오둥(辽东)까지 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을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기원전 206)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서한]]시기 한무제가 위청(衛靑)을 보내 하투 지역을 흉노로부터 다시 찾았으며 기원전 127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골 동부지역은 선비가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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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시기 중부와 서부 내몽골 (하투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골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기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 - 295)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현재 허베이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장성을 하투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 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기원전 221) 몽념(蒙恬)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전국시가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쌓았던 장성을 연장하여 서쪽으로 린조(临洮), 동쪽으로는 랴오둥(辽东)까지 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을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기원전 206)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동한]] 시기(25년-220년)에 흉노가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렬 되었다. 남흉노는 동한에 굴복하여 하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진 시대에 하투의 흉노의 대추장 유연(劉淵)이 한()왕조(후에 조(趙)로 개칭. 뒤의 석(石)씨가 세운 조와 구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구분함)를 이 지역에 열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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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초기 국력이 약하여 흉노를 직접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화친과 변경무역을 하는 방법으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가 흉노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자주 서한 경내로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한무제 시기 서한은 국력이 강성해 지면서 흉노와 3 차례 전쟁을 일으켜 서한 군은 흉노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몰아 내고 127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이곳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한무제는 2차례에 거쳐서 내몽골 경내에 장성을 수축하였다. 기원전 68년 이후 흉노내부가 분열되면서 세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동한]] 시기(25년-220년)에 흉노가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 되었다. 남흉노는 동한에 굴복하여 하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한, 동한 시기 내몽골 동부에는 우환(乌桓)과 선비가 있었다. 우환(乌桓)은 원래 흉노에 귀순하였으나 서한이 흉노를 패배시킨후 서한에 귀순하였다. 서한 말기, 서한과의 관계가 악화 되면서 다시 흉노에 귀순하였다가 동한 광무제 시기 동한에 귀순하였다. 동한 말기, 선비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동한 경내로 자주 침입 하였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투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동안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투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동안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2020년 8월 14일 (금) 11:31 판

내몽골자치구(内蒙古自治区, nèi méng gǔ zì zhì qū)는 중국북부에 위치하였으며 동북쪽은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허베이성과 접하였으며 남쪽은 산시성(山西省), 산시성(陕西省), 닝샤후이족자치구와 접하였고 서남쪽은 간쑤성과 북쪽은 러시아, 몽골과 접하여 있다.

개요

  • 행정 단위: 성(省)
  • 성정부소재지: 후허하오터시 츠러촨가 1 (呼和浩特市敕勒川大街1号)
  • 면적: 118만 3000 km²
  • 인구: 25,396,000 명(2019년)
  • 공산당 서기: 쓰타이펑(石泰峰, shí tài fēng)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nmg.gov.cn/

지도

지리

내몽골자치구는 중국북부에 위치하였으며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었다. 동북쪽은 헤룽장성,지린성, 라오닝성, 허베이성과 접하였으며 남쪽은 산시성(山西省), 산시성(陕西省), 닝샤후이족자치구와 접하였고 서남쪽은 간쑤성과 북쪽은 러시아, 몽골과 접하여 있다.

내몽골자치구는 지세가 비교적 높으며 평균 해발이 1000m로 고원지구 이다. 고원면적이 자치구 전체 면적의 53.4%, 그외에 산지 20.9%, 구릉 16.4%, 평원8.5%, 하천, 호수, 저수지등 수면이 0.8%이다.

역사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서부 내몽골 지역, 특히 하투(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골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주나라시기 중부와 서부 내몽골 (하투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골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기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 - 295)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현재 허베이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장성을 하투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 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기원전 221) 몽념(蒙恬)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전국시가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쌓았던 장성을 연장하여 서쪽으로 린조(临洮), 동쪽으로는 랴오둥(辽东)까지 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을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기원전 206)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서한초기 국력이 약하여 흉노를 직접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화친과 변경무역을 하는 방법으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가 흉노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자주 서한 경내로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한무제 시기 서한은 국력이 강성해 지면서 흉노와 3 차례 전쟁을 일으켜 서한 군은 흉노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몰아 내고 127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이곳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한무제는 2차례에 거쳐서 내몽골 경내에 장성을 수축하였다. 기원전 68년 이후 흉노내부가 분열되면서 세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동한 시기(25년-220년)에 흉노가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 되었다. 남흉노는 동한에 굴복하여 하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한, 동한 시기 내몽골 동부에는 우환(乌桓)과 선비가 있었다. 우환(乌桓)은 원래 흉노에 귀순하였으나 서한이 흉노를 패배시킨후 서한에 귀순하였다. 서한 말기, 서한과의 관계가 악화 되면서 다시 흉노에 귀순하였다가 동한 광무제 시기 동한에 귀순하였다. 동한 말기, 선비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동한 경내로 자주 침입 하였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투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동안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합했다. 1227년에는 서하를, 1234년에는 금을 점령했다. 그의 후손들은 1279년에 중국을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1368년 한족이 명을 세우면서 다시 몽골 고원으로 되돌아왔고, 명은 현재 자리에 만리장성을 세웠다. 만리장성은 내몽골의 남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17세기에는 만주족이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1644년 명을 정복한 후 청을 세운다. 만주족의 청조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 등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통치한다. 일반 몽골인들은 자신의 맹 바깥으로 여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알탄 칸(1507-1582) 때부터 거주하기 시작하던 한족 농민들이 19세기 후반부터 대량으로 유입된다. 만주족의 중국화와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청 정부는 한족 농민들로 하여금 몽골과 만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게 되고, 이 정책은 이후의 정부들에 의해서도 계승된다. 이 지역에 건설된 철도는 한족의 이주를 촉진하였다. 토지는 몽골의 왕자들이 매각하거나, 한족 농민들에게 임대되거나 혹은 아예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아 한족 농민들에게 주는 방법으로 제공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중화민국 시기 동안 외몽골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수 있었지만, 내몽골은 중국의 한 지역으로 재편된다. 러허 성, 차하얼 성, 쑤이위안 성 등이 신설되었고, 훌룬부이르는 헤이룽장 성 안에 머물게 했다. 중화민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지도는 아직도 이 행정구역을 따르고 있다.

만주는 1931년부터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훌룬부이르나 지림 맹은 만주국의 판도에 들어있었다. 1933년부터는 러허 성도 만주국에 속하게 된다. 이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7년에는 중화민국과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몽골의 유력자였던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는 1936년 5월 12일에 만주국에 편입되지 않은 쑤이위안 성과 차하르 성에 몽골군정부(후에 몽강연합자치정부로 개칭, 이하 몽강국)를 수립했다. 이 나라는 만주국과 일본만 승인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내몽골은 일본의 괴뢰정부가 되었다. 수도는 허베이 성의 장베이에 설치되었고, 그 통치력은 서쪽으로 호흐호트까지 미쳤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을 공격한 작전인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몽강국은 소련과 외몽골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만주를 침략하게 되고 1947년에는 소련의 국가 정책에 따라 내몽골 자치구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오직 훌룬부이르 지역만 차지하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를 확립함에 따라 내몽골 자치구는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몽골족 인구는 이 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의 길쭉한 모양의 내몽골 자치구가 생기게 되었다. 1969년 문화혁명 당시 내몽골 자치구의 많은 부분이 이웃하고 있는 성들에게 분할편입된 적이 있었으나 1979년에 복귀된다.

행정 구역

내몽골자치구 행정구역

내몽골자치구은 9개의 지급시[1]와 3개 맹(盟)으로 구성되었다.

인구

2019년까지 내몽골자치구 인구는 25,396,000 명이다. 2010년도 인구 조사에 의하면 한족이 79.54%, 몽골족이 17.11%이며 그 다음으로 만주족, 후이족, 다우르족, 에벤키족 등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각주

  1. 지급시〉,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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