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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뎬구의 면적은 431㎢이며 인구는 324만 명(2019년)이다. 동쪽은 [[시청구]] 및 [[차오양구]], 남쪽은 [[펑타이구]], 서쪽은 [[스징산구]], [[먼터우거우구]], 북쪽은 [[창핑구]]와 접하고 있다. [[베이징시]] [[시가지]]의 행정구역으로서는 [[차오양구]]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도심 구역으로 중국 최초의 국가급 독자적 혁신 시범구인 중관춘(中關村)은 국가 독자적 혁신 시범구의 핵심 구역이자 전국 과학기술 혁신 센터를 건설하는 [[베이징시]]의 핵심 구역이다.  
  
 
많은 대학이 위치해 학생이 대부분 거주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예부터 주민 비율은 적다. 또 대학이 밀집하여 베이징 거주의 외국인들에게 「대학구」(University District)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많은 대학이 위치해 학생이 대부분 거주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예부터 주민 비율은 적다. 또 대학이 밀집하여 베이징 거주의 외국인들에게 「대학구」(University District)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2024년 8월 27일 (화) 10:26 판

중국 위치

하이뎬구(중국어: 海淀区 hǎi diàn qū)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 이다. [1][2][3][4]

개요

하이뎬구의 면적은 431㎢이며 인구는 324만 명(2019년)이다. 동쪽은 시청구차오양구, 남쪽은 펑타이구, 서쪽은 스징산구, 먼터우거우구, 북쪽은 창핑구와 접하고 있다. 베이징시 시가지의 행정구역으로서는 차오양구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도심 구역으로 중국 최초의 국가급 독자적 혁신 시범구인 중관춘(中關村)은 국가 독자적 혁신 시범구의 핵심 구역이자 전국 과학기술 혁신 센터를 건설하는 베이징시의 핵심 구역이다.

많은 대학이 위치해 학생이 대부분 거주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예부터 주민 비율은 적다. 또 대학이 밀집하여 베이징 거주의 외국인들에게 「대학구」(University District)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중관춘(中关村)을 필두로 한 IT 산업, 그리고 높은 교육 수준으로 유명하다. 중국 내 대학생 인구의 절반 정도가 하이뎬구에 거주중이며, 대학구이니만큼 연구원의 수도 엄청나게 많다. 하이뎬구에는 칭화대학, 베이징대학, 베이징외국어대학, 중국인민대학 등 211공정, 985공정 명문대가 포진해 있다. 그리고 이화원, 원명원 등의 중국 내 유명 관광지도 많아 외국인의 방문자 수도 상당히 많다.

하이뎬구는 베이징시에서 가장 높은 GDP를 가진 곳으로, 1인당 GDP가 무려 4만달러를 넘어간다. 주택 ㎡당 평균매매가격이 베이징시에서 세 번째로 높은 동네이며 ㎡당 2천만원에 달한다.

역사 문화가 풍부한 하이뎬구는 베이징 서산-융딩허(永定河) 문화벨트, 대운하 문화벨트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 유명한 유적지가 약 700곳이 있으며 그중 '3개의 산 5개의 정원(만수산, 샹산, 위취안산, 이화원, 징이위안, 징밍위안, 창춘위안, 위안밍위안)'이 역사문화관광지로 가장 대표적이다. 국가도서관을 비롯한 각 유형의 도서관, 박물관 300여 곳이 있고 중대형 문예 공연장 100여 곳 및 중국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CCTV) 등 많은 국내 일류의 문화·문예 업체들이 모여 있다. 추이후(翠湖) 도시습지, 펑황링(鳳凰嶺) 자연관광지 등과 징미(베이징-미윈)인수로, 남수북조(南水北調, 남쪽의 물을 끌어다 북쪽에 공급함) 조절지 등 중요한 상수원이 있으며, 도시의 녹화 복개율은 52.36%에 달한다. 구역의 '산, 물, 숲, 밭, 호수' 생태계가 구비되고 환경이 아름다워 살기에 매우 적합하다.[5][6]

자연환경

내몽골 고비 사막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황사의 피해가 심한 편이다. 기후는 추운 스텝 기후(Bsk)에 해당하여 일단 여름에는 엄청 덥고 비가 약간 내리며 겨울에는 춥고 건조하며 바람도 강하다. 냉대기후건조기후 중간에 있다고 봐도 된다.

사막 바로 아래 있어서 극단적으로 건조하며 연교차도 매우 크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인구 천만에 준하거나 그 이상급의 메갈로폴리스 중 서울과 함께 연교차가 가장 큰 도시이다. 대륙 동안 기후와 사막 기후가 섞인 형태이기 때문인데 5월부터 최고기온 40도를 찍는 경우가 흔하다. 반대로 겨울은 서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춥다. 여름에도 비가 잘 오지 않을 정도인데다 겨울에는 아예 사막 수준으로 매우 건조해서 실제 최고-최저기온은 서울을 능가할 정도로 연교차가 크지만, 체감 연교차는 서울에 못 미친다. 또한 여름에 열사병 위험이 있으며, 겨울에는 꽤 추운 날씨임에도 대구광역시나 부산광역시에 비견될 정도로 눈이 오지 않는다.

1981년 - 2010년 기준 최한월 1월의 평균 기온은 -3.1℃이다. 최난월 7월 평균 기온은 26.7℃이며, 연 평균 기온은 13.2℃로 숫자만으로는 한국의 남부 내륙지역과 비슷하다. 21세기 들어 가장 심한 한파는 2021년 1월 7일의 -19.7℃이고, 그 다음에는 2016년 1월 23일, 영하 17.4℃였으며 최고기온은 -11.0℃에 불과했다.

폭염은 더 심한데 5월부터 폭염 수준 더위가 찾아오기 시작하고 한여름엔 40도 이상 올라가기도 한다. 2017년 7월 14일 아프리카에서 온 관광객이 베이징의 더위에 탈진한 일도 있었는데, 당시 온도계는 무려 42.5도를 나타냈다. 다만 습기가 별로 없다 보니 견딜 만한 편이다. 1951년 이후 기록된 역대 최저기온은 -27.4도 이며 역대 최고기온은 41.9도 이다.물론 이는 베이징 시내 중심부의 기온이며 외곽 지역인 화이러우구 등은 겨울철 영하 30도까지도 떨어지는 등 기온편차가 심하다. 이는 도심 열섬현상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체감 온도는 비슷하거나 덜하지만 건조기후의 영향으로 단순 최고-최저 기온 수치로는 서울을 능가하는 연교차를 자랑한다.

연간 강우량은 500~560㎜이다. 생장기의 농업용수 수요치는 200~300㎜가 부족하다. 재해성기후로 남부는 가뭄과 황사 등이 많이 발생하는 편이고, 서북쪽 산간 지역은 여름에 흙·모래·돌이 섞인 물사태가 쉽게 발생한다. 겨울에 춥지만 워낙 건조하다보니 눈이 아예 안 오며 차량 통행도 많은 데다 베이징 외곽에 잔뜩 자리한 공장들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황사와 대기오염 때문에 공기가 매우 안 좋다.

2013년 1월에 들어 사상 최악의 스모그가 발생해 베이징을 뒤덮었다. 스모그가 뒤덮었다지만 사진만 보면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미묘하다. 이 대기오염 등이 문제로 지적되자 2008 베이징 올림픽 때에는 아예 올림픽 기간 동안 베이징 근교 공장 올 스톱이라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공장 노동자들은 8월 내내 유급휴가를 받았다. 현재는 정상회담/엑스포 등 국가 중요 행사가 열리면 닫아라 공장을 시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의 국가 주요행사가 베이징에서 개최되면 이후로 3일에서 1주일간은 서울 공기도 덩달아 깨끗해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

기원전 1000년 경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중 하나인 연(燕)의 수도인 계(薊)가 오늘날 베이징(北京)이 있는 곳에 건립되었다. 이후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 한 후 계성은 주(州)가 되었고 삼국 시대에는 공손찬과 원소가 보유하다가 조조의 위나라에게 함락되었다 936년 현재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의 넓은 영토를 거란의 요(遼)에게 대부분 정복되었다. 938년에 요는 지금의 베이징을 정복하여 한족들을 유린한 다음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1125년 여진의 금(金)왕조는 요를 합병하고 1153년 동북의 회령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앙수도라는 뜻의 중도(中都)라고 개칭했다.

1215년에 몽골이 1267년에 북쪽에서 상도(上都)를 건설했다. 중국의 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 원(元)왕조의 시조 쿠빌라이 칸은 베이징보다 북쪽에 칸발리크 (汗八里, Khanbaliq)(위대한 칸의 거주지라는 뜻) 혹은 대도(大都)를 건설하여 수도를 삼았고 이 위치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속에 'Cambuluc'로써 잘 나타나 있다.

1368년 원의 멸망 후 도시는 명(明)조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순천(順天)지사 관저가 도시의 주위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1403년 이 곳이 수도인 난징(南京)보다 북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베이징(北京)으로 개명한 뒤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북경은 또한 경사(京師)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단순히 수도라는 뜻이다. 명나라 시기 동안 전통적인 베이징의 구획이 확립되었다. 자금성과 천단 등의 건축물이 1406년에서 1420년대 사이에 건설되었다. (현재의 천안문(중국어 정체자: 天安門)은 1651년에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이다.) 1644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한 뒤 베이징을 유린하였고 베이징은 청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킨 혁명 정부는 베이징은 만주족의 수도라는 주장으로 난징을 수도로 정하고자 하였다. 의 치열한 대화 끝에 베이징은 난징과 같이 수도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1916년 중국은 지방 군벌들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각자 베이징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1928년, 국민당 정부는 북부의 군벌을 소탕하고, 난징을 공식적인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한 뒤, 베이징을 북부의 평화 또는 북부의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뜻의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여 베이징의 상징적인 의미를 떨어뜨렸다. 이후 일본제국이 베이징을 정복하였다.

제2차 중일전쟁 당시인 1937년 7월 29일, 베이징(베이핑)이 일본 제국에게 정복된 기간 동안 도시는 그 이전의 이름인 베이징으로 개명되었고, 일본 제국에 의해 많은 한족들이 강간되었다. 이 곳에 일본에게 점령된 화북의 일부 한인들이 설립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전하게 되고, 한편으로 소련이 만주 지역을 점령하는 등과 같은 영향에 따라 베이징의 이름은 다시 베이핑으로 바뀌었다.

1949년 1월 31일, 공산당 세력은 베이핑으로 무혈입성 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베이징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을 발표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중국어 정체자: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에서 베이핑은 공산 정권의 수도로 확정되었고, 이름도 다시 베이징으로 개명되었다.)

하이뗸구는 1950년에 베이징시 제13구가 되었다가 1952년에 현재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산업

2019년은 신중국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신시대 하이뎬구의 개혁개방 재출발·재창업이 시작된 해이다. 하이뎬구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로 삼아 하이뎬구 위원회와 하이뎬구 정부의 강력한 지도하에 중관춘 과학도시에 초점을 두고 '2개의 발전 신동력 2개의 고품질 발전(문화 및 과학기술 융합발전의 신동력을 발굴하고 신형 도시형태를 구축함으로써 고품질 발전을 추진하고 고품질의 도시를 조성함)' 구역 발전 전략의 심화와 이행을 전면적으로 추진했다. 안정 속에서 나아가고 안정속에서 품질을 향상시키는 발전 상태를 끝임없이 공고히 하였으며, 지역혁신과 비약적 고품질 발전을 향해 튼튼한 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이뎬구의 연간 지역 총생산은 동기대비 7% 성장한 7926억 위안에 달했고, 이는 베이징시의 22.4%를 차지하고 16분기 연속 성장률 7% 이상을 기록해 경제총량과 베이징시에 대한 기여에서 2관왕을 달성했다. 또한 구급 일반 공공예산 수입은 446억 5000만 위안에 달하고, 주민1인당 가처분 소득은 8만 4733 위안을 기록하여 8.4%에 이르는 성장률로 경제 발전 속도를 능가하였다.

산업 발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정보 서비스업, 과학기술 서비스업, 금융업과 교육업 및 공업 등 5대 업계가 지역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77%에 달했고, 경제 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90%를 초과하였다. 경제에 대한 투자 소비의 보조 역할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사회 고정자산 투자는 896억 4000만 위안에 이르고, 그중 건축, 설치 공사 투자는 318억 위안을 달성하였다. 시장 총 소비는 동기대비 10.5% 늘어난 7075억 4000만 위안에 달해 소비시장에서 지속적 증가세를 보였다. 과학기술 혁신 공급은 새로운 단계로 격상됐고 하이뎬구의 연구개발 투입 강도는 전국의 4.6배에 달한다. 만명당 발명특허 보유량은 전국 평균 수준의 30배에 해당한다. 새로운 경제 발전에서 융합 태세가 두드러지고, 인공지능은 실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고 글로벌 유명 인공지능 기업 270개가 입주하여 베이징시의 60%를 차지한다. 인공지능 현장 응용과 산업 간의 융합 등 여러 분야에서 전국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이뎬구에는 중국과학원을 비롯한 과학연구기관 99개, 국가공정연구센터 31개, 국가 중점 실험실 107개, 중국과학원 및 중국공정원 원사 605명이 모여 있어 전국의 36%를 차지한다. 하이뎬구에서 천인계획(千人計劃) 하이쥐공정(海聚工程) 가오쥐공정(高聚工程)에 참여한 인원수는 베이징시에서 가장 많다. 업계 선도 기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국가급 첨단기술기업은 1만 1000개를 돌파, 첨단 기술기업의 총수입은 10% 이상 늘어난 2조 3000억 위안에 달했다. 시장 주체의 활력은 부단히 방출되고 산업 선도 기업, 유니콘 기업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중소기업을 하류로, 성장형 기업을 중류로, 선도 기업을 상류로 하는 건강하고 안정적인 피라미드형 시장 주체 구조가 형성됐다. 캠브리콘, 바이트댄스 등 유니콘 기업 40개를 보유하여 실리콘 밸리를 뒤따르고 있으며 첨단 분야를 주도로 하고, 다분야에서 열매를 맺는 분포 형태가 형성됐다.

최첨단 산업 공간 자원이용 1+3정책 체계를 구축하고, 혁신발전 16조 실시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15조와 스마트 커넥티드카 15조 등 2대의 산업정책을 발표하였다. 베이징시에서 가장 먼저 시범 등록 기업에 무료 숙소를 비롯한 인큐베이터 서비스를 제공하고, 클러스터 등록 플랫폼은 이미 중관춘 하이뎬단지 창업 서비스센터와 중관춘 창업거리에서 시범 운영에 들어섰다. 정부 투자 프로젝트 심사 서비스와 실시 절차의 최적화를 통해 프로젝트의 건설 비용을 낮췄다. 신기술 보조 행정 서비스 업그레이드를 강화하였고,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기술을 활용하여 가장 먼저 부동산 등기 1개의 창구 접수, 원스톱 서비스, 능률적 처리'라는 하이뎬구 모델을 창출했다. 또한, 서비스 패키지 제도의 이행을 심화하여 중점 기업 서비스를 강화했고, 등급별 및 유형별 서비스, 보편적 특혜 서비스와 중점 서비스를 아우르는 기업 빅서비스 업무체계를 구축하였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하이뎬구〉, 《위키백과》
  2. 하이뎬구〉, 《나무위키》
  3. 베이징시〉, 《위키백과》
  4. 베이징시〉, 《나무위키》
  5. 하이뎬구 소개〉, 《베이징시 인민정부》
  6. 두산백과: 하이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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