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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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난시(중국어: 淮南市 huái nán shì)는 중국 안후이성 중북부에 위치해 있는 지급시이다. [1][2]
개요[편집]
화이난시의 면적은 5,530㎢이며 인구는 3,033,528명(2020년)이다. 동쪽으로 추저우시(滁州市, 저주시)의 펑양현(凤阳县, 봉양현), 딩위안현(定远县, 정원현), 남쪽으로 허페이시(合肥市, 합비시) 창펑현(长丰县, 장풍현), 서남쪽으로 류안시(六安市, 육안시) 서우현(寿县, 수현), 훠추현(霍邱县, 곽구현), 서쪽 및 서북쪽은 푸양시(阜阳市, 부양시) 잉상현(颍上县, 영상현), 보저우시(亳州市, 박주시) 리신현(利辛县, 이신현), 멍청현(蒙城县, 몽성현)과, 동북쪽은 벙부시(蚌埠市, 방부시) 회원현(属怀远)과 접하고 있다.
시 인민 정부는 톈자안구(田家庵区, 전가암구)에 소재하며 행정구획은 톈자안구(田家庵区, 전가암구), 다퉁구(大通区, 대통구), 셰자지구(谢家集区, 사가집구), 바궁산구(八公山区, 팔공산구), 판지구(潘集区, 반집구)의 5개 시할구(市辖区)와 펑타이현(凤台县, 봉태현)의 1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이 시사하듯 회하(淮河) 남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화이난은 허페이에서 북쪽으로 80km, 벙부시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화이난은 전한 시대에 제후국이던 회남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행정구역 내에는 삼국지 원술의 근거지였던 수춘이 포함되어 있다. 4세기에는 전진과 동진 간의 비수대전이 회남 인근 회수 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묻혀있는 인근 광산 덕에 탄광업 도시로서 발전하여 인구가 240만 명에 이른다.
화이난(淮南, 회남)은 고대 유명했던 비수지전(淝水之战)의 전쟁터였으며 현대에는 화둥지구(华东地区)의 중요한 전력기지로 전력 생산능력은 안후이성(安徽省)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3][4]
자연환경[편집]
화이난시 경계는 구조 단위상 중조 준대지대 화이허 대오 화이난 함복단대(즉, 화북 대지대 예화이 복주대) 동부의 화이난 복향사에 속한다. 동쪽 경계는 단루 단층, 서쪽은 주커우 함몰, 북쪽은 방부 융기, 남쪽은 허페이 함몰과 접해 있으며, 남북으로는 동산 단층과 류푸 단층에 의해 끼워져 있다. 지역 내 구조는 북서서향 구조가 주도적이며, 후기에 강한 개조를 받았으나 전체적인 형태 변화는 크지 않으며, 복합 향사 내의 2차적인 주름 및 단층이 발달해 있다. 지질 진화 역사는 전진 단기, 진단기-삼첩기, 쥐라기-제4기 3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전진단기에는 화이난 지각이 활동 단계에 있었다. 진단기-삼첩기는 격렬한 운동 시기로, 방부, 펑양, 완난, 갈리동, 화서력, 인지 등의 운동을 차례로 겪었다. 이 기간 동안 지각은 여러 차례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며 해륙 교호상 지층을 형성했다. 특히 후기 석탄기와 페름기 시기의 해륙 교호상 퇴적 환경은 석탄 자원의 좋은 생성 조건이 되어 경내에 대량의 석탄 자원을 형성했다. 쥐라기-제4기에는 연산 운동과 히말라야 운동을 거쳐 점차 형성된 지형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화이난시 경계는 화이허를 경계로 두 가지 다른 지형 유형을 형성한다. 화이허 남쪽은 구릉지대로, 장화이 구릉지대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수현의 북부와 중부는 화이허 충적 평야이고, 북서부는 화이허와 피허를 따라 있는 저지대이며, 동남부는 구릉지대이다. 화이허 남안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연속적으로 솟아 있는 낮은 산과 구릉지대로, 산을 둘러싼 경사지는 폭이 약 500-1500미터, 경사도는 약 10도, 해발 40-75미터이다. 경사지 아래에는 홍수 충적 2급 계단이 교차 연결되어 있으며, 폭은 500-2500미터, 해발 30-40미터, 경사도는 약 2도이다. 순경산 북쪽의 2급 계단 아래는 화이허 충적 1급 계단으로, 폭은 2500-3000미터, 해발 25미터 이하, 경사도는 완만하다. 1급 계단 아래는 화이허 고위 만조지대로, 폭은 2000-3000미터, 해발 17-20미터이며, 만조지대 아래는 화이허 연안의 얕은 모래톱이다. 순경산 남쪽 경사지 아래, 동쪽은 가오탕호의 1, 2급 홍수 충적 계단이고, 서쪽은 와부호의 1, 2급 홍수 충적 계단이며, 중간은 구릉지대이다. 화이허 북쪽은 지세가 평탄한 화이베이 평야로, 화이허 북쪽 평야 지역은 하천 사이의 얕은 저지대 평야로, 지세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해발 20-24미터, 고도 차이는 4-5미터이다.
화이난시 경계는 아열대와 온난대의 전이 지대에 위치한다. 주요 기후 특성은 봄에는 온도가 변덕스럽고, 여름에는 비가 집중되며, 가을에는 하늘이 높고 상쾌하며, 겨울에는 건조하고 춥다. 계절풍이 뚜렷하고 사계절이 분명하다. 시 경계 내 연간 일조 시간은 2239.2시간, 연평균 기온은 15.3℃, 연강수량은 937.2mm, 연간 무상 기간은 223.7일이다. 일조량이 충분하고 열량이 풍부하며 강수량이 적당하고 무상 기간이 길어 벼, 밀, 유채, 콩 등 다양한 곡물 작물과 경제 작물의 재배와 성장에 적합하여 공업 및 농업 생산의 지속적인 발전에 유리하다. 계절풍 기후로 인해 비와 열이 같은 시기에 집중되어 광, 열, 수자원의 이용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연도 간 강수량 차이가 크고, 연중 강수 분포도 고르지 않으며, 봄과 가을의 기온이 불안정하여 다양한 불리한 기후 요인이 공업 및 농업 생산과 도시 및 농촌 주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큰 재해를 초래하기도 한다.[5]
역사[편집]
회하 ~ 양쯔강 사이의 지역을 의미한다. 고대 양주의 구강군에 해당하였으며 농사가 잘되는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이후 전한의 제후국인 회남국이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의 반란을 거쳐 구강(주장)군으로 개편되었다. 400여년이 흘러 후한 말기의 군웅 원술이 회남이라는 지명을 부활시켜 회남왕을 칭했고 비록 그는 조조에게 멸망하였으나 회남군은 이후 송나라(북송) 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회남(淮南)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3년에 항우 측에서 유방에게 귀부한 영포(英布)를 회남왕에 봉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회남국의 수도는 현재의 루안에 위치해있었는데, 영포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196년) 이후 유방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삼았고 수춘이 새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유장은 기원전 174년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촉으로 유배를 떠나던 중 객사하였다.
기원전 172년, 유장의 네 아들을 측은하게 여긴 한문제는 그들을 복권시켜 제후로 삼았고 장성하자 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164년) 한편, 회남왕의 작위는 기원전 168년에 부활하여 성양공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원전 164년에 유장의 장남 유안(劉安)이 회남왕이 되자 성양으로 돌아갔다. 유안은 도교에 심취해 있었고 신선이 되고자 선식을 개발하였는데, 왕여안(王厲安)이라는 도인과 함께 만든 음식이 바로 두부이다. 화이난에서는 지금도 두부 축제가 열린다.
도교를 바탕으로 박식한 지식을 쌓은 유안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하였는데 그 일부는 현존한다. 기원전 154년,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유안도 그에 가담하고자 하였으나 승상이 미리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무산되었다. 기원전 122년, 유안은 반란을 꾀하다가 들통나 자살하였고 회남국은 한세기 전의 지명인 구강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안이 아버지 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자녀가 없는 한무제의 죽음에 대비하여 거병을 준비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유안의 지식에 감탄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것과 그의 사후 무제가 유안의 반란을 고발하였던 오피를 사사한 것을 보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다.
3번의 반란 (영포-유장-유안)에 연루된 회남국은 해체되었지만 후한 말기에 꿀물황제 원술이 중나라랍시고 칭제건원했을 때 구강군을 회남윤으로 고치면서 회남 지명은 관용적 지명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잠깐 부활하였다. 이후 회남은 조조의 위나라 땅이 되어 합비와 함께 오나라와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위나라 말기에 (수춘삼반) 화이난 지방은 251년에 왕릉, 255년에 관구검, 257년에 제갈탄 등이 위나라의 권신 가문인 사마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원술의 중나라도 결국 몇년 못간 비정통 왕조이므로 반란으로 간주하면, 한~삼국시대에만 반란이 7번 일어난 것이다.
결국 사마염의 서진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30여년 만에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하였고 화이허가 남천한 동진과 북방 유목계 왕조들과의 경계가 되며 화이난 지방은 재차 남북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383년, 북조에 의한 통일이 200년 미뤄지게 되는 비수대전이 회남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후 남조, 수, 당을 거치면서도 유지되던 회남군은 당 말기의 방진 중 하나인 회남 절도사가 설치되었고 904년에 그 절도사이던 양행밀이 5대 10국 중 하나인 오나라를 세웠다. 오는 937년에 남당으로 교체되었고 5대 중 마지막인 후주의 세종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후 송나라(북송)의 시기인 1071년에 회남군은 동서로 나뉘어 없어졌다.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와 남송의 평화 협정(소흥 화의)에 따라 화이허가 재차 남북 왕조의 국경이 되며 회남은 다시 전선이 되었다.
그 후 화이허를 따라 남북으로 나뉜 상태로 현재까지 유지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이곳의 풍부한 석탄 자원 때문에 화이난 석탄 특별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산업[편집]
화이난은 안후이성에서 제일가는 에너지 산업지대이다. 산하 현인 펑타이 현(凤台县)에는 아시아에서 제일 거대한 단일탄광이 존재하며, 중국 전역에서도 상당히 높은 발전량을 보이는 발전소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화이난이 마비되면 안후이성 전역의 전기가 나갈 정도다.
석탄산업도 발달한 상태라 중국에서 화이난이 생산하는 석탄 생산량은 상위권에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화이난에 매장된 석탄은 약 444억 톤이라고 한다.
교통[편집]
공항은 없고, 철도의 경우 일반 철도인 푸화이철도(阜淮铁路) 및 화이난철도(淮南铁路) 및 준고속철도인 허펑여객운전선(合蚌客运专线), 고속철도인 샹항고속철도(商杭高速铁路)가 지나간다.
공항은 없지만 허페이 신차오 국제공항이 가깝기 때문에 해당 공항과 연결되는 교통편이 마련되어있다.
수상교통으로는 안후이성의 8개 주요 항구 중 하나이며 화이허 강에서 가장 큰 석탄 운송 항구가 있는 화이난항(淮南港)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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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화이난시〉, 《위키백과》
- 〈화이난시〉, 《나무위키》
- 〈두산백과: 화이난〉,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국행정구획총람: 화이난시〉, 《네이버 지식백과》
- 〈淮南市〉, 《百度百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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