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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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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치
홍콩 위치

박구(중국어: 北区 běi qū)는 중국 홍콩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 구다. [1][2] [3][4]

개요[편집]

박구의 면적은 168km²이며 인구는 315,270명(2016)이다. 북쪽으로 선전허를 경계로 선전시와 접한다. 홍콩에서 중국 본토로 가는 주요 접근로이다. 홍콩의 구 중에서 2번째로 인구 밀도가 낮다. 가우룽의 도심 지역에 해당한다. 판링상수이 신시진이 구내에 위치한다.

홍콩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4개의 주요 국경 관문(문금도, 낙호, 사두각, 연당)이 모두 박구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윈롱구, 남쪽은 다이보구와 인접해 있으며, 지역은 상수(上水), 분령(粉嶺), 사두각(沙頭角), 타곡령(打鼓嶺)으로 크게 나뉜다. 이 외에도 대붕만의 길오(吉澳), 압주(鴨洲) 등 여러 섬을 포함한다.

중국 선전시와 접하고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원래 친중파가 강세를 나타내던 곳이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파가 우세해졌지만 북구에서는 득표율이 민주파, 본토파와 친중파가 비슷했다.

과거 북구는 쌍어시(雙魚市)로 불렸는데, 이는 지역 내 상수 북쪽의 쌍어강(雙魚河)에서 유래했다. 영국이 신계를 임대하면서 북구를 "상분사타(上粉沙打)"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이는 상수, 분령, 사두각, 타곡령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홍콩섬에 위치한 북각(北角)이 "박구"로 불리던 시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신계 북구" 또는 지역 이름인 "상수", "분령"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박구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며, 광활한 자연 환경과 교통의 요충지라는 장점을 동시에 갖춘 지역이다.[5][6]

자연환경[편집]

박구는 신계 지역 중에서도 가장 넓은 구역 중 하나로, 전원적인 풍경과 농촌의 특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홍콩은 중국 남부의 온대 하우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 Cwa)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홍콩의 여름은 따뜻한 남서풍과 가끔씩 오는 소나기와 뇌우 등의 영향으로 대체로 덥고 습하다. 태풍은 여름에 가장 자주 발생하며 때때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킨다. 겨울은 온화하며 초반에는 화창하나 대체로 2월부터 흐려지며, 가끔 발생되는 한랭전선은 북쪽에서 강하고 차가운 바람을 가져온다.

홍콩에서 가장 온화한 계절은 봄과 가을으로, 봄 기간은 날씨가 변덕스러우며, 가을은 일반적으로 맑고 건조하다. 강설은 극히 드물며, 대개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홍콩은 인접한 중국 대륙의 공업 지대에서 계절적인 대기 오염의 영향으로, 겨울에 굉장히 높은 수준의 미세먼지를 기록한다.

최한월인 1월 평균기온은 약 16℃, 평균최고기온 19℃, 평균최저기온 14℃ 정도로 한국 수도권의 10월 초 날씨와 비슷하며, 최난월인 7월 평균기온은 약 29℃, 평균최고기온 32℃, 평균최저기온 27℃ 정도로 일본 오사카와 비슷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2,400㎜인데 5월부터 9월까지 집중되는 편이다.

역대 최고기온만 놓고 보자면 북쪽에 있는 중국 대륙(본토)와 한국, 일본의 도시보다 평균 대략 5℃ 가량 더 낮다. 즉 여름철 평균기온 자체는 한국보다 높지만 연중 최고기온이 35℃를 넘는 해는 생각보다 드문 편이었으나 요즘 지구온난화 때문에 많이 더워지는 추세이다. 단 습도가 매우 높아 체감온도는 대구광역시 이상이다. 애초 7월 평균기온 자체가 30℃에 육박한다. 공식 역대 최고기온이 36.6℃다. 일단 해안도시여서 바다가 열 창고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대외적인 인식과 달리 구름이 많아 흐린 날이 많고 연간 일조량이 적기 때문이다. 이 두 요인이 겹쳐 동절기에도 미미한 일교차가 하절기에는 1°C에도 못 미치는 기염을 토한다고도 하는데 그것보단 크다. 덕분에 이슬점도 밤낮에 따른 변동이 없고, 수증기는 바다에서 꾸준히 공급되므로 습도의 변동 역시 미미하다. 따라서, 5~9월 홍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균 기온이 섭씨 28℃, 습도 80% 이상을 유지한다.

종합해보면 4-11월의 길고 무더운 여름과 12-3월의 짧고 서늘한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5-10월 사이 다섯 달 정도는 태풍이 흔히 내습하며 그 덕에 홍콩의 해안지대는 여기저기 태풍 대피소인 타이푼 셸터(Typhoon Shelter)가 조성되어 있다. 홍콩 국제공항도 지하에 태풍 대피소를 둘 정도로 태풍이 흔하다. 한국에서 부산이나 여수, 제주도 등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태풍에 자주 시달리는 것과 똑같다.[33] 10월 태풍은 한국에선 진짜 드물게 남부 지방으로 오지만 홍콩에선 11월 초까진 태풍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며 가끔 2017년 하토 및 2018년 망쿳 등 슈퍼태풍이 관통해 피해가 커지기도 한다.

태풍이 자주 내습해서 홍콩의 태풍 경보 시스템은 일본과 함께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이다. 5단계로 나누어져 1호는 유의, 3호는 경계, 8호는 위험, 9호와 10호는 초위험경보이다. 8호경보가 발령되면 식당 등 상점도 문을 닫으며 직장은 쉬거나 재택근무, 학교는 휴교로 돌린다. 홍콩 버스, 홍콩 트램 등 지상 교통수단이 경보 발령 2시간후에 운영을 종료하는 대신 MTR는 계속 운행한다. 홍콩 국제공항은 항공기 이착륙이 무조건 금지되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대부분 태풍의 위력이 8호경보의 수준에서 그치지만 풍속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면 9호경보가 발령된다. 이때 MTR지상구간에서 운행하고 있는 열차들도 다음 역에 도착하는 즉시 운행을 중단하고 경우에 따라 발이 묶인 승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역대합실이나 열차를 개방한다. 10호경보는 보기 드문 편이었으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점점 잦아지고 있다. 홍콩 반환 이후에 총 5번을 발령했는데 각각 1999년 태풍 요크, 2012년 태풍 빈센트, 2017년 태풍 하토, 2018년 태풍 망쿳, 2023년 태풍 사올라이다.

역사[편집]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기 전인 1830년대 처음 홍콩에 온 영국인은 홍콩이 척박한 땅이었다고 했지만, 이미 홍콩에는 중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 사당, 사원. 밭, 집이 있었고 사업을 하거나 그 외 일상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었다. 원나라 시기에 홍콩은 농부, 어부, 해적, 송나라의 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명나라 때는 광동과 푸젠(福建) 사람들이 구룡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839년 시작된 제1차 중영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1842년 난징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했다. 중영전쟁은 '아편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의 아편 밀무역으로 청에 급속히 확산된 아편 중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청나라는 아편 금지령을 내렸지만, 영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아편 밀무역을 시도하면서 은의 대량 유출과 아편 중독 현상이 심각해졌다. 청나라가 아편 밀무역을 제지하면서 이에 반발한 영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1857년 수출 부진을 빌미로 영국이 제2차 중영전쟁을 일으켰다. 난징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성과가 부진하자 다시 무력을 쓴 것이다. 청나라가 또다시 패배하면서 1860년에는 1차 베이징조약에 따라 구룡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1898년에는 영국이 2차 베이징조약을 통해 99년 동안 신계 지역을 조차하였다. 50여 년에 걸쳐 홍콩섬, 구룡, 신계 등 지금의 홍콩을 구성하는 세 지역이 모두 영국의 관할권이 된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홍콩을 점령하면서 1945년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홍콩은 156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홍콩은 항구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제적 번성은 정치적 무관심을 낳기도 했지만,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7년 5월부터 12월까지 발생한 시위, 파업, 암살, 폭파 등을 통칭하는 67폭동은 영국 식민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쟁의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식민정부 비판까지 나아갔다. 50여 명 이상이 사망한 대규모 폭동은 홍콩의 공산주의자들이 연루되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한 그들만의 폭동이었다. 홍콩의 학생단체는 폭력의 중단을 호소하고, 식민정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홍콩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대기근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거주공간의 부족, 열악한 노동환경, 극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홍콩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67폭동이 임금과 노동시간 분쟁에서 시작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폭동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중요한 정책적 전환을 꾀했다. 노사관계 개선, 소속감의 강화, 정부와 거주민 사이의 의사소통 강화, 교육의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67폭동은 식민정부가 홍콩의 기층민 커뮤니티를 위한 사회적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한 계기가 되었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정부의 사회복지 비용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1997년 조차한 신계를 중국에 반환해야 했던 영국은 1980년대부터 중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과정에서 영국은 중국과 함께 조차지인 신계뿐만 아니라 영구 할양지인 홍콩섬과 구룡 모두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1982년에 홍콩 정부는 홍콩을 18구로 나누기로 결정했고 주룽청과 훙칸과 같은 이웃 지역은 현재의 가우룽싱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4년 12월 19일에 발표된 중영공동선언(홍콩반환협정)은 1997년 7월 1일 중국에 홍콩을 반환한다고 밝혔다. 당시의 협정을 통해 홍콩은 외교와 국방 문제를 제외한 전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자율성과 독립적인 사법권을 약속받았다. 이와 같은 약속이 반환 이후 50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질 것이라는 조항도 명시되어 있었다.

1970년대 홍콩은 새로운 행정구역 체계를 도입하였고, 박구는 원래 다이보구 에 속해 있다가 1980년에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역으로 설정되었다. 2021년에는 접경 지역에 신도시를 짓는다고 발표했다.[7]

산업[편집]

중국과의 접경지 무역이 벌어지는 곳이다. 덕분에 판링역이나 셩수이역 일대에서는 중국인들이 북구 관내 쇼핑몰 등에서 물건을 대거 사가서 중국에서 파는 보따리상 밀무역이 벌어지고 있다.

교통[편집]

홍콩 지하철 동철선이 이쪽을 종점으로 삼고 있다. 동철선의 판링역, 셩수이역이 이 구에 있고, 로우역과 록마차우역은 중국 선전시로 들어가기 위한 국경 검문역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박구 (홍콩)〉, 《위키백과》
  2. 북구(홍콩)〉, 《나무위키》
  3. 홍콩〉, 《위키백과》
  4. 홍콩〉, 《나무위키》
  5. 중국행정구획총람: 베이구〉, 《네이버 지식백과》
  6. 北区〉, 《百度百科》
  7. 두산백과: 홍콩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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